평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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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한 정부의 행정구역 상 평양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1] , 량강도의 일부[2] , 대한민국 정부의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포함하는 지역. 관서(關西) 또는 한국의 패강 서쪽에 있는 지방이라 패서(浿西)라고도 불리운다. 관서는 철령관(鐵嶺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서북(西北)[3] , 서토(西土) 등으로도 불렸다.
현대 한국인은 장화홍련전, 벽창호, 봉이 김선달, 평양냉면,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의 시, 백석의 시, 북한 정권을 피해 자리잡은 수많은 교회, 황해도와 더불어 '만신'이라고 불리는 무당 같은 역사적인 문화적 요소를 평안도에서 유래함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어도 그 존재는 알고 있다. 분단 후 북한의 사투리[4] , 음식 같은 사항도 평안도 위주로 알려져 함경도 출신이 많은 탈북민을 보고 남한에서 혼란이 다양하게 많았을 정도다. 전통적으로 경제와 상업이 발전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상업의 중심지라는 평가를 받는 상황이 많았다. 여러 다양한 국가들과 지역들과의 교역에 핵심적인 지역 중 하나로 불렸다. 임상옥이 이 지역 출신으로 크게 이름을 알렸다.
남북 평안도를 다 합친 넓이는 43,400㎢, 인구는 1,20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특히 가장 큰 도시인 평양은 북부 지방 제1의 도시이자 팔도 중 2번째로 넓다.
관서팔경이라는 장소가 있는데 강계시의 인풍루(仁風樓), 의주군의 통군정(統軍亭), 선천군의 동림폭(東林瀑, 폭포), 안주시의 백상루(百祥樓), 평양부의 연광정(練光亭), 성천군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시의 세검정(洗劒亭), 영변군의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말한다.
2. 역사[편집]
기원전에는 고조선 땅이었다가 낙랑군, 다시 고구려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안동도호부가 됐다. 고구려 땅을 대부분 찾은 후에 발해가 차지했다. 그러나 남북국시대에는 두 나라 모두 중심지가 평안도 쪽과는 거리가 멀었고,[5] 황량한 변경, 국경지대에 가까웠다. 후삼국시대 초 평안남도의 남부를 궁예가 편입하였고, 왕건이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며 평안남도 대부분을 수복하는 등 점차 되찾아나가 북계(北界)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 간섭기에 북계가 최탄의 난으로 원나라에 넘어갔으나 결국 반환받았다. 조선 성립 당시 중강진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여진족 땅이었는데 세종대왕 때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조선 영토로 만들었다.
위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에 평안도를 3개의 도로 나뉘어 통치한 시기가 있음을 알수있다.[6]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 1월 5일 병인 2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평안도를 3도로 나누고 각기 절도사를 임명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극배(李克培)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경(卿)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삼고, 김견수(金堅壽)를 평안서도 절도사(平安西道節度使)로 삼고, 황사윤(黃斯允)을 평안동도 절도사(平安東都節度使)로 삼으니, 이 동봉(同封)한 사목(事目)을 살펴서 시행함이 옳겠다.
본도(本道)를 이제 나누어 3도(三道)로 하고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는 것은, 본도의 도리(道理)가 막혀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절도사로는 먼 데를 제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함길도(咸吉道)도 또한 이 예(例)와 같이 이미 나누어 남도(南道)·북도(北道)로 하였는데, 지난번에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율원군(栗元君) 이종(李徖)이 도(道)를 나눈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고 계달(啓達)하기를, ‘북도(北道)에 원거(元居)하는 군인의 수효가 남도(南道)의 갑절이 되니, 청컨대 남도군(南道軍)의 방수(防戍)를 북도(北道)에서 나눈 자로써 내지(內地)를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내가 ‘남·북도의 군마(軍馬)를 가지고 자타(自他)를 계교하지 말고, 전에 방수(防戍)하던 예(例)를 따라 성식(聲息)이 있으면, 2도(二道)의 절도사가 마땅히 합의하여 변란에 대처하라.’고 이미 유서(諭書)를 내렸으니, 경 등도 또한 이 뜻을 알고, 3도가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항상 상산 사세(常山蛇勢) 와 같이 그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하고, 그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하며, 그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응하는 것이 옳다.
평양(平壤)·안주(安州)·정주(定州)·숙천(肅川)·성천(成川)·가산(嘉山)·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中和)·상원(祥原)·덕천(德川)·개천(价川)·영유(永柔)·증산(甑山)·함종(咸從)·삼화(三和)·용강(龍崗)·강서(江西)·삼등(三登)·은산(殷山)·양덕(陽德)·맹산(孟山)·순안(順安)을 중도(中道)로 소속시키고,
영변(寧邊)·운산(雲山)·강계(江界)·위원(渭原)·벽동(碧潼)·박천(博川)·희천(熙川)·영원(寧遠)을 동도(東道)로 소속시키며,
의주(義州)·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곽산(郭山)·구성(龜城)·삭주(朔州)·창성(昌城)·태천(泰川)을 서도(西道)로 소속시키게 하라.
하였다.
평안도라는 명칭의 어원인 평양과 안주는 둘 다 현재 평안남도에 속한다. 원래는 대동강, 청천강이 상류가 북쪽으로 뻗었기에 평안좌도, 우도로 구별했으며, 이 경우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영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좌도에 속하게 된다. 평안남북도는 1896년 이후의 구분이다. 선조 21년, 평양에서 최정보란 자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하여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의금부에서 "친족살해가 일어난 평양을 전례에 따라 격하해야 하지만, 솔직히 평안도에서 평양을 대체할 도시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이조에서 "2번이나 평양을 격하하면 일개 현감이 도저히 평양같은 대도시를 다스릴 수 없게될 것이다"라고 평양 격하를 반대하면서 평양의 지위가 유지되었다.[7] 만약 평양을 격하했다면, 조선시대 다른 도처럼 평안도도 한 번 이름이 바뀔 뻔했다.
비교적 인구가 적은 이북 지역에 속해 있지만, 이북 인구가 평안도의 평야 지대에 집중된 영향으로, 평야 지역에 한해서는 삼남 지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북 지역에 한해 인구밀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또한 면적이 42,000㎢에 달해, 18세기에는 경상도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8] 이는 큰 강이 많아 식수와 농수를 얻기에 편리하고, 비옥한 평야 지대와 해안가를 갖추어 식량 생산 능력이 이북 지방에서 높기 때문이다.
다만 단점도 없는게 아닌지라 남부 지방과 달리 이앙법을 하기에 기후 조건이 열악했고 대동강 하류는 연강수량이 800mm까지 내려갈 정도로 적어 밭농사를 하기도 하는 흠이 있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토질이 나쁘지 않고 강으로부터 농업용수를 구해 적절하게 농사를 지을 수는 있었던지라 조선의 제일가는 곡창지대라 부르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자급자족은 가능한 동네였다. 택리지에서는 "대동강 하류의 하중도인 벽지도도 논농사를 한다"고 묘사했다. 사실 평양 정도가 강원도 철원군과 비슷한 기후라, 평안북도 산간 지대를 제외하면 심하게 추운 것도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의 용천군이나 청천강 하류 안주시의 삼천리벌은 아예 곡창지대로 일컬어질 정도다. # 심지어 추운 곳에서 농사를 짓기 힘든 조선시대에 조차 택리지가 나온 산중 고을은 땅이 메마르나, 바닷가 주변은 기름진 것이 충청도 수준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
농업은 평안남도, 평안북도 따질 것 없이 호남 지방에 비해서는 명백히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평안도가 경기도, 삼남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이유가 이곳이 조선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요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교통과 상업 역시 크게 발전했고 이 지역에 거점을 둔 의주의 만상과 평양의 유상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 집단이었다.
변방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한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성을 지닌 동네인데, 요동 지역의 고조선이 연나라에 패퇴하며 평양 일대에 정도했기 때문이다. 한민족 역사상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후기 중심지였고 한사군이 들어서 400여 년간 중원 왕조의 직할 통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미천왕 대에 예맥계에 의해 재수복되어 장수왕 대부터 고구려의 후기 중심지로 기능하였고, 이후 신라(통일신라)가 패강진 중심으로 개척하여 평안도 방향으로 북진정책을 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서경이 설치되어 사실상 고려의 제2 수도권 위치에 있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평양이라는 도시 자체는 단군과 기자의 땅이자 옛 고구려, 고려의 중심지로서 상당히 중시했으나 도 차원에서는 남부에 비해 경시되었는데, 이는 명문가의 부재, 유교적 질서의 약세, 그리고 이민족과의 접경 문제 등의 이유 때문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직 중 평안 감사, 즉 평안도 관찰사 자리는 상당한 요직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까지 있을 정도였는데 이는 씨족 기반의 명문세가가 많은 하삼도나 경기 지방에 비해 평안도가 눈치가 덜 보여 해먹기 좋기 때문이였다.
항간에 '홍경래의 난' 같은 단어를 보고 정치 선전이 동원되고 유럽처럼 민족감정이 뒤섞인 현대적인 지역감정과 결부시키거나 현대 북한과 결부시키는 생각이 많다. 그러나 이 지역감정은 신분 의식이 있는 사람이 '상놈'인 평안도 주민을 차별하는 형태였다. 반드시 평안도라는 그 지역이기에 차별한 것이 아니라 문벌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다 보니 평안도 출신도 걸려든 것이다. 문벌을 안 따지면 이곳 사람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으로 대접받았다. 그 배경을 따져본다면 현대에 이를 결부시키는 것은 나향욱처럼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한다는 것,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니 차별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작 노비는 신분이 꽤 높은 사람을 따라가니, 평안도도 노비가 많지는 않았다. 신분이 높지도 않고 아주 낮지도 않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한국 사회의 숭실대학교 같은 이 지역의 영향을 받은 기관이나 인사는 통일을 한국에서 가장 강하게 원하는 축에 속한다.
조선 시대에 서북 지방 사람들은 다른 도의 양반들에게 차별을 받았다. 이것은 명문가가 원 간섭기, 여말선초의 혼란으로 자취를 삼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즉, 양반들은 양반이 아닌 사람 자체를 정치적으로 차별했고, 이건 굳이 지역을 가린 것이 아닌데 여긴 제대로 된 양반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 핵심 개국공신 중 하나이자 첫 영의정인 조준이 소수의 살아남은 명문가였기에 평양 출신이 될 수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서북 지방의 경우는 이전 묘청의 난의 경험도 있었고 허나 또 아이러니 한 것도 신진사대부들 중에서 묘청의 난을 말 그대로 반란으로 규정한 것도 핵심 공신이었던 조준이었다. 근데 조준은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사대부들이 알았고 평양부원군으로 불렸다. 지금은 그의 고향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방력 강화 등의 목적으로 사민 정책으로 삼남 지방 사람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기는 했지만, 그곳에 갈 필요가 없는 명문가는 굳이 이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한말에 평안도는 과거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양반 비율은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적었다. 평안남도와 평안북도가 밑에서 1, 2위를 차지했다. 이는 유학을 국시로 삼는 조선 입장에서는 더더욱 질시를 삼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임란 시기에 큰 의병이 없었다고 하여 더더욱 강한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북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과거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학문도 발전해서, 서울 다음으로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9] 그러나 문벌이 낮다는 차별로 인해 이 지역 출신의 과거 급제자들은 당상관[10] 이상의 높은 관직이나 홍문관 등 요직에는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실제 조선시대 이름난 정승이나 관료들 가운데 이북 지역 출신을 찾기 힘든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관직 등용에서의 차별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은 벼슬길보다는 경제 활동에 전념해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특히 의주의 임상옥이 거상으로 유명했다. 또 이들은 경제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으려고 관리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이들을 수탈하는 수령도 많았으며, 특히 평안감사가 정승 부럽지 않은 관직으로 유명했다.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한번 제대로 긁어 모으면, 평생 놀고 먹어도 남을 만큼 재물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북 지방의 차별과 더불어 지방 향리들의 수탈도 가혹했고,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홍경래의 난 항목에 올라온 격문[11] 을 참고하면 조선 후기 조정과 권세를 누리던 사람 사이에는 평안도에 대한 괄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지역감정 항목을 참조. 홍경래의 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에서의 정치적 배제, 경제적 수탈로 조선 조정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러한 적개심을 두려워하는 사료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북쪽의 두 도(평안도, 함경도), 특히 평안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들이 매우 적고 따라서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들을 왕정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는 그들을 조심히 다루면서도 엄중히 감시하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노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반란이 일어나는 날에는 진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 <조선교회사>
사실 평안도는 예로부터 북방 민족과의 투쟁이 잦은 지역이었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큼 함경도와 더불어 용맹한 지역성을 가진 지역으로 자주 인식되었다. 정도전은 평안도를 숲 속에서 나오는 사나운 호랑이라는 뜻으로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평가했다.[12][13]
다마 이중환의 택리지에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다"고 쓰여져 있어, 진실하다는 평을 들은 경상도와 더불어 호평이 적혀 있다. 오히려 자신의 고향 충청도를 낮춘 것으로 보면, 정치적 지지를 중심으로 평가를 내렸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시대는 근현대처럼 조직적 정치선전이 없어, 일반인끼리도 증오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구한말에도 여학교와 평등사상을 반대할 정도로 상당히 수구적이라는 평가도 있는 평안도 출신이 아닌 성리학자 유인석 같은 경우도 평안도나 인근 황해도에서 사람을 모으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종이 대한제국 시기에 평양으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풍경궁을 짓기도 했다.
다만 신분이 낮은 사람끼리는 지역에 상관없이 잘 어울렸다. 당장 홍경래의 난에 동조한 사람 중에는 충청도 출신 채수영도 있었고, 제주도에서는 이 난에 동조한 민란이 있었다. 남쪽의 동학 농민 운동에도 호응하기도 했다. 가루지기 같은 작품에서도 변강쇠와 옹녀가 각각 전라도, 평안도출신이다. 3.1운동 당시에는 조정에 차별받았다는 인식에 '우리 임금'은 아니라는 인식은 있지만[14] 그래도 고종의 승하가 슬프다고 하였다. 어떤 경우는 '성을 향해서 며칠을 두고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지요.'라는 증언도 있다. 다음은 3.1운동에 대해 증언하는 한국의 평안도 출신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이 평양에서 겪은 일을 언급하는 증언이다.
그게 있어도 기회가 있어야 되는데 그 기회가 고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에요. 고종이 죽어도 그냥 순조롭게 죽은 게 아니라 항간에 약사(藥死) 시켰다는 소문[15]
이 나돌자 국민들이 격분을 했지요. 물론 백성들은 그까짓 임금 했지만 그래도 제 나라의 심볼이랄 수 있는 임금이 죽었으니 민심이 한 곳에 모일 수 있었지요. 그 시기가 잘 선택된 것 같아요. 내가 직접 겪은 건데 그때 17살 때 평양고보에 다녔지요. 나 자신이 태어난 곳은 외진 촌[16] 이었지만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또 집안도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여서 내 나름대로는 의식이 깨었다 할 수 있었는데 관립학교에 들어가 보니 딴 세상이란 말이예요. 내 생각과는 너무 달라. 쉬는 시간에 토론을 해보면 일제에 반대하는 의식은 있어도 이 형편에 별수 있겠느냐, 독립 가망은 없으니 처분에 따라 문화 활동이나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식이예요. 저는 모두 관립학교 교육을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3.1운동이 일어난 후 하루아침에 달라졌어요. 말은 그리해도 속에는 민족의식이 잠자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놀랬어요. 고종이 돌아간 날도 학교에 가보니 상급생이 “수업에 들어가지 말라. 고종임금이 죽었는데 추도하는 의미로 수업을 받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한 일인데. 자연히 수업이 안됐어요. 그러자 선생들이 놀라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학생 대표가 “고종이 세상을 떠났으니 추도를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때 교장이 다나까(田中)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수단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첫말에 “그러자, 나도 같이 하겠다”면서 자기도 내내 근신했어요.
그 밖에 장준하, 김준엽의 친구였던 최기일 교수의 자서전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본인이 살던 평안북도 삭주군을 비롯해서 평안도 지방에는 양반이 굉장히 드물었다고 한다. 다만 상인 출신으로 돈을 벌어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이 많아 평안도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들이 주류계급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하였다. 본인이 본격적으로 양반 출신들을 접하기 시작한 건 해방 이후 월남해서 이승만의 비서를 역임할 때였는데,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윤치영이 이런 양반들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해방 뒤에 월남해 국군에 입대한 인사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의 파벌 싸움에서 경상도 파벌 인사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여성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실속없고 일은 안 한 채로 금가락지 끼고 꾸민채로 '수심가'라는 지역 전통 민요를 부른다"는 편견이 언급된다. 별건곤이라는 잡지는 "'대체로 이곳 여자는 활발하고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일을 안 한다'는 식의 그런 관념은 평양, 강계 같은 색향의 여자뿐이며, 농사를 잘 한다"고 주장했다. # 조선 후기에는 경제력이 발달하여 풍류를 즐기는 시도가 많이 일어나 기생이나 예쁜 여자가 많다며 평양이나 강계는 '색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런 관념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평양에는 '권번'이라는 기생학교에서 배출된 연예인 역할을 하는 기생을 보러 일본 등지에서 관광을 오기도 했다.
장준하의 아내였던 김희숙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본인의 외가가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제일 가던 지주집안이었고, 특이하게도 여성인 외할머니가 집안의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강세였던 지역인만큼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선교사들이 세운 여학교들이 많아 여성들이 이남 지역보다 이러한 미션스쿨에 진학해서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편이기도 했다. 이러한 미션스쿨 여학교들 중 본래 이북 지역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남으로 내려온 학교들 중에는 숭의여학교와 보성여학교가 있다. 서울 이화학당에도 상대적으로 평안도 출신 재학생들이 많았다.
다만 조선에서 그나마 기독교가 강세였던 곳이지, 선천군 같이 가장 기독교가 강세였던 지역도 주민 50% 정도가 신도였다고 한다. 남한의 어느 곳보다 신도의 비율이 높지만 종교가 없거나 천도교를 믿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지역을 접수할 당시에도 가장 강력한 대항 세력이기는 하여 김일성은 친척 강량욱 목사 같은 사람을 서열 3위까지 올려놓고 종교 탄압을 하게 하는 등 이들을 크게 경계했다. 분단 초기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같은 시위도 일어났으나, 공산당은 자신들이 스카웃한 열성파나 노동자를 피해의식으로 선동하여 '예수장이(예수쟁이)'라며 교회 장로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했다. #
전근대까지 현대 북한과는 정반대의 경제 질서, 사회 질서를 가지던 곳이었다.[17] 지역감정과 관련된 주장이 널리 퍼져 있고 북한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이것을 현대 북한과 연관시키려는 주장도 있다. 상업이 발달하고 신분 질서가 약하던 곳이었는데, 북한 정권은 상업을 억제시키고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신분 제도를 만들어냈다. 그 차별이란 것도 따져보면 평양에 풍경궁을 두어 아예 고종이 제2의 수도로 육성하려고 시도했을 만큼 무작정 차별받는 곳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평전은 평양이 2번째로 큰 도시였기에 딱히 지역간 적대감정 없이[18] 진행된 것이다. 현재로 따지면 서울과 부산과의 관계와 비슷하다. 민족정기를 불어넣기 위해 축구를 하자면 대표 도시인 서울과 평양이 겨루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적대적 지역감정이 있는 엘 클라시코 같은 경우와 다르다. 평양 출신 선수 증언, 서울 출신 선수 증언 엘 클라시코 같았다면 지도층에 대한 반항을 막고자 80년대 3S 정책마냥 일제가 이를 부추겼겠지만 오히려 일제가 이 경기를 금지시켰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일부 축구팀은 지역 연고자만 받는 경우도 있지만 경평전에서 서울·평양 축구단은 서울 사람이 평양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
조선일보에서는 '평안도의 상인 정신이 대한민국을 설계했다'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 족보가 없으니 근대인이며, 함석헌 같은 민주화운동가도 상놈 출신임이 자랑스러웠다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협력하는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조만식은 애향심이 강해 평양에 남아 북한 정권에 대항하다 숨졌을 정도지만 독립운동 당시 "고향을 묻지 말고 국권 회복을 위해 인화 단결하자"라는 주장을 하였다. 독립 운동 당시 지역에 따른 파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평안도 출신 안창호와 경기도 출신 여운형이 같은 편에 서는 등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었다. 이 파벌도 따지고 보면 신분 차별에 가까운데, 이들과 대립했던 이승만과 달리 여운형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안창호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전후 이곳 출신의 실향민이 대거 월남하여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탈북민은 함경도계가 많지만 북한 땅의 토속 문화에 대한 것은 평안도 문화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겠'을 '갔'으로 말하고, 'ㅈ' 발음을 잘 못하며 '네다'로 알려진 평안도 사투리, 간이 세지 않은 음식 등이 대표적이다. 숭실대학교는 평양의 숭실학당을 모체로 하여 설립된 학교다.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이 평안도 실향민이라 같은 실향민 집안인 문재인을 도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기독교 관련 인사도 많이 내려와 실향민이 세운 교회도 현재까지 남아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사상계 같은 잡지의 편집을 주도하여 지역성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기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장기려, 유일한, 황순원 등이 유명하다. 지금도 현미 같은 연예인, 김응용 같은 스포츠계의 인사도 남아 있다.
북한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중심 지역이다. 1952년 평양 지진 기록이 있으며, 규모 6.3으로 보면 된다. 만약 평양에 2016년 경주 지진이나 2017년 포항 지진과 같은 지표면에서 진도 7의 지진 진앙지가 지하 9km에 일어날 경우, 포항보다 100배 더 심한 피해를 주며 가옥, 건물 등이 붕괴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평양은 아수라장이 되고 황해도는 진도 5.5~6급의 지진을, 백령도는 2003년 당시 상황과 거의 유사한 규모로 나갈 수도 있다.
3. 언어와 관련된 혼란[편집]
정리하자면 평안도 사투리는 북한 표준어가 아니며, 북한 표준어와 차이가 큰 말투다. 북한 표준어는 언어학적으로 서울 방언에 기반하였으나 북한에서는 정치적 동기로 강하게 '평양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1964년 1월 김일성이 문화어라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표준어 규범을 제정하는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평양말'이라는 것이 평안도 사투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본래 이 고장은 대중적으로 '평안도 사투리'라고 알려진, 학술적으로는 서북 방언이라고 부르는 방언을 사용하던 지역이었다.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정확한 예시는 백석의 시의 일부 어휘나, 황순원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문장까지 확인하고 싶으면 황순원의 소설이 정확하다. 극적인 이미지로는 '오데로 갔나'라는 노래의 가사나, 드라마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말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윗 문단에서 보듯 워낙 이곳 출신 피난민이 많아서인지 '네다'거리는 말투가 아예 북한 말투의 전형이라는 인식까지 생기게 되었다. 좀 더 언급하자면 이곳 사람들은 과장된 이미지로 '덩거당에 던깃불이 번떡번떡'이라고 말한다는 유머가 있다든지, '기니까', '~하라우', '알간 모르간' 같은 말투를 쓴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런데,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문화어라는 표준 어문 규범을 도입하는데, 김일성의 명령으로 이것은 '평양말'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사실 문화어는 언어학적으로 서울 방언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두음 법칙을 교정시키고 사투리를 문학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투리를 탄압했기에 북한 사람들은 다른 지역 말투를 잘 모르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함경도 출신이 대부분인 탈북민이 한국에 정착하고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평양말이 정말 서울 말투에 가까운 문화어였던 것인 줄 알게 된 것이다. 성조가 있는 사투리를 쓰니 옛 평안도 말투도 다소 서울말과 비슷하게 들릴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 남북 교류 과정에서도 북한의 학자들은 김일성의 명령을 어길 수 없기에 문화어를 두고 평양 말투라고 주장하였고, 남측에서도 면전에서 이런 정치적 주장을 반박할 수 없기에 평안도 출신 실향민의 말투와의 모순[19] 등 이상한 점이 있어도 언급을 잘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평양말, 더 나아가 평안도 사투리가 서울말과 아주 비슷하더라는 주장, 북한 말투는 서울말과 차이가 심한 것 아니냐하는 양립이 불가능한 주장이 도는 혼란이 있었다.
이 전말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곽충구 교수 등 소수의 북한 방언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문화어와 평안 방언과의 차이와 서울 방언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이연아 씨 같은 방송계 등에서 종사하던 일부 탈북민이 사실은 최근에도 평양에서 문화어와 좀 다른 말투가 쓰인다는 것을 증언하게 된 것에서 비롯하였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북한에서 언급하는 진정한 '평양말'의 의미가 평안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북한의 문헌도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4. 평안도 지역을 본관으로 한 성씨[편집]
5. 통일 후 전망[편집]
일단 평안도는 대(對)중국 무역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과 남한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간기착지로써 쓸모가 있는데다가, 인프라 건설비를 지원받기에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경의선 연선 지역(평양시~안주시~정주시~신의주시) 및 남포시, 구성시, 강계시 지역은 물론 크게 발전하겠지만, 나머지 산간 지역은...
국방 면에서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완충지대로 두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서 대놓고 침략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군인을 수십만씩 배치해서 긴장 관계를 조성하면서까지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으려고 자처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수도권과 경상도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선거에서도 무시 못할 지역으로 예상된다[21] . 더구나 현재 북한의 막장 같은 상황에서도 인구가 3번째로 많고 1,200만 명에 달하기 때문에 남북통일 뒤에는 경상도와 인구 면에서 맞먹을 확률이 높다.
자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강도의 대부분[22] 은 평안북도에 흡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