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직할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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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 한사군[편집]


평양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무려 기원전 281년 무렵부터 단군조선의 수도로서 자리잡기 시작했고 약 170년 정도 고조선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위만조선 시대에는 '왕검성'으로 불렸다.[1] 우거왕전한진나라와의 교류를 막고 중간의 막대한 이익을 얻게되자 한무제는 사신을 보내 좋게 끝내려 했으나 외교는 결렬되고 섭하가 돌아가던 중 마중나온 비왕 장을 죽이면서[2] 위만조선과 전한의 갈등은 고조되고 끝내 기원전 109년에는 이 위만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왕검성 전투가 발발한다. 꽤나 팽팽했던 전투[3]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내분으로 자멸하고, 이를 놓치지 않은 한의 공세로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결론난다. 한은 위만조선에 4개의 군인 한사군을 설치했다. 그 중 하나인 평양에는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을 세웠다. 낙랑군은 중국 본토가 서진의 몰락으로 혼란에 빠진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보낸 고구려군의 공격에 무너져 내리고 그대로 고구려가 영역화하였다.

2. 삼국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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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궁전이었던 안학궁 복원 상상도. 장수왕대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안학궁/대성산성)으로 옮겼다. 427년(장수왕 15)에 천도한 후 668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241년간 고구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도였다. 건국 수도인 졸본성, 2대 왕부터 수도였기에 사실상 제대로 된 첫 수도라 할 수 있는 국내성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해 보일 수 있으나, 평양이 고구려사에서 가지는 존재감은 졸본성보다 훨씬 강하고 국내성과 대등한 수준이다.[4]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고 최대 영토를 확보한 5세기, 삼국통일전쟁이나 수, 당과의 전쟁이 일어난 7세기 등 한국사에서 굵직하게 다뤄지는 일들이 고구려에 일어나던 시기에 수도의 역할을 했기 때문. 장수왕이 천도를 안 했으면 한반도 내에 고구려의 수도는 없을 뻔했다

대동강과 넓게 펼쳐진 평야가 있고, 대륙 문물을 접하기 쉬운 지리적 특성 덕에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전부터 개발된 지역들 가운데 하나로 요동 지역을 포함해서 본다고 해도 한국 역사상 거의 최초의 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고구려들은 내내 평양을 주시하였다. 대무신왕 때부터 여러 번 공략한 끝에 미천왕 때 낙랑을 정복했고, 결국 장수왕 15년(427)에 이 지역으로 천도(遷都)했다. 정확히는 이 당시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은 안학궁대성산성[5]이 위치했던 현 대성구역 일대였다. 이 당시 궁전이었던 안학궁은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안에 수정성도 있었다고 하니 꽤 화려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뒷날 평원왕 때(북한 교과서 기준 586년) 우리가 흔히 평양성으로 알고 있는 장안성(長安城)[6]으로 천도했다. 이 평양성 자리는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때를 거쳐서 현재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도합이 1200년은 된다.

평양성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이전의 도성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들과 궁전성(城) 안에 함께 존재하는 한국식 도성의 시초라는 것이다. 또한 평양성의 도시 설계는 당시 신라일본의 도시 설계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역사스페셜 北문화유산 8부작 중 1부 고구려 평양성 편에 따르면, 도로가 잘 정비된 계획도시였으며 고구려 때 운하가 있었고 이것은 조선 때까지도 존재했다. 이 당시 도로들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평양에서도 도로로 쓰이고 있다.[7] 또한 의외로 많은 양의 낙타가 있었으며, 온달 설화를 보면 당시치고는 상업 수준이 꽤나 정교하게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만큼 고구려의 유적들이 꽤 많다. 안학궁과 대성산성, 고구려 목교, 평양성(부속 건묵물들로는 대동문, 보통문, 부벽루, 연광정, 을밀대, 칠성문), 고구려 시대 무덤들 등 을 비롯한 수많은 고대 유물들이 만들어졌다. 그에 맞춰서 오랜 역사의 도시답게 많은 설화들도 함께 내려오고 있으며, 북한에서 이러한 것들을 묶어서 발간한 책도 있다. 물론 고구려의 유적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고조선, 낙랑과 그 이후의 고려, 조선 때의 유적들도 많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일 뒤 평양을 개발하는 것이 경주처럼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유적이 나올지 벌써부터 설렌다.

그런데 이렇게 충분히 역사적 가치가 높은 평양을 북한 당국은 평양을 포함한 대동강 유역이 인류 최초 5대 문명 발상지들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며 그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학계는 평양이 고조선의 중심지가 된 것은 BC 4세기 후반에 고조선이 연나라에 요동지방을 털리고 난 뒤의 일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들끼리 그러면 좋은데, 이것이 또 혐한초딩들에게는 좋은 떡밥이 되어 한국인은 뭐든 지들이 최초라고 주장한다 설의 강력한 뒷받침이 되고 있다. 거기에 기사의 해당 기사의 댓글에서도 보이는 잘못된 사상을 가진 네티즌들까지 합세하면서 괴랄함은 배가 되고 있다.


3. 남북국시대[편집]


고구려가 멸망할 때 많은 주민들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전쟁으로 인한 인구 이탈이 꽤 심각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지 않은데, 일단 고구려 시절처럼 대도시로서의 모습은 거의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발해 두 나라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고, 정확히 어느 나라가 차지했는지 명확하게 밝히는 기록은 현재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두 세력 모두 평양이 포함된 인근 지역을 접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있기는 하다.

일단 발해의 경우 정약용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점유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유득공발해고(渤海考)에서는 발해가 평양을 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를 그릴 때는 대강 대동강쯤을 신라와의 경계선으로 해서 대동강 이북 평양성 지역을 발해 영역으로 색칠하는 경향이 있는데, 1차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가 미약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냥 다른 데다가 선 긋는 것도 고고학적 근거가 없으니 적당히 긋는 거라고 봐야 할 듯.

통일신라의 경우 대략 황해도 지역+평안남도 남부 지역을 관할하던 통일신라 후기 한정 특수 행정구역인 패강진(浿江鎭)이 평양까지 포함하는 행정구역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신라는 남북국시대 내내 같은 경계선을 유지했던 게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임진강부터 시작해 조금씩 북진하는 모습을 보였고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패강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통일신라 초중기 어느 시점의 행정구역 체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지의 원사료가 기록되었던 시점엔 최소한 평양 근처 남쪽 중화군까지는 영역화했지만 딱 평양 그 땅까지 찍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패강진이 평양을 포함한다는 설에 의하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기에는 직접통치영역이 대동강을 넘었다는 것이다. 한편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평양이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쓰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평양은 통일신라와 발해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나라가 차지했건간에 몰락한 옛 도읍 터인 유적도시이자 잘해봐야 최전방 군사 기지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평양이 존재 자체가 잊혀진 상태는 아니어서 736년에는 평양주의 지세를 살펴본 기록이나, 769년의 쥐떼 출몰 기록 등 언급은 계속 된다.

삼국사기와 달리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평양이 '신라에 편입됐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 후삼국시대 시점엔 이미 황폐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한국사 교과서나 서적 등을 보면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과 평안남도 전역이 발해 영토로 그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평양과 평안남도의 경우 발해가 이들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기가 힘든 부분이 많다. 발해 유적, 유물이 하나도 발굴되지 않은 점도 그렇고 사서에도 발해가 평안도 지역으로 뻗었다는 근거가 거의 전무하다. 정약용도 아방강역고에서 발해가 아닌 신라가 평양을 접수했다고 하기도 했고 그나마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가 평양을 점령했다고 했지만... 무엇보다도 평양 지역의 호족 금용이 궁예의 태봉에 바로 항복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태봉은 신라에서 떨어져 나온 국가이기 때문에 금용이 발해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야 없지만 발해계일 확률보다 신라계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후삼국시대 직전 9세기 말에는 통일신라가 평양 영역을 느슨하게나마 접수했다는 견해도 상당한 편이다. 또한 이미 선왕 이후에는 신라측 사서에 신라가 북변의 발해가 아닌 말갈 부락과 통교했다는 기록도 있어 발해가 9세기 중후반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 상실한 것 아니냐는 추정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남북국시대 지도만 보고 평양이 발해 영역이라고 착각하는 실수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후삼국시대[편집]


대동강의 서쪽인 패서 13주가 궁예에게 투항하자 평양성주 금용(黔用)이라는 자가 같이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금용이 신라 소속 호족인지, 발해 변방인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 원래부터 독립적이던 토착민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기 어렵다. 일단 금용이 투항하기 전에 궁예가 평정했다는 '패서' 13주는 다른 기록에 여러 번 나오는 패서라는 지명의 범위를 감안할 때 통일신라의 영역 안쪽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거기에 딸려온 금용도 신라계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궁예 열전에 의하면 901년 기준으로 평양 옛 고구려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일단 남북국시대에 평양지역이 신라 땅이든 발해 땅이든 호족 금용 개인의 영지 같은 곳이었든 간에 그다지 잘 관리되던 상태는 전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고려[편집]



고려 건국 이후 고려 태조는 황폐화 되었던 평양을 재건하고 서경으로 개칭했다. 다만, 호칭을 정한 정확한 연대는 파악되지 않고 천수(天授) 4년(921)에 처음으로 서경이라는 명칭이 파악되는 상황. 건국 초기 군사적 목적으로 재건되었던 서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호족세력의 견제와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재건되었다.

이에 따라 천수 5년(922) 서경에 '서경유수관'이라는 독립적인 행정기구와 관제를 갖는, 개경과 행정 및 정치적으로 분리된 조직을 설치하여 서경에 힘을 싣게 된다. 이와 같은 서경에 대한 독립적인 기구와 관제를 설치한 것은 고려 분사제도의 시초로 파악된다. 천수 15년(932)에는 신료들과 평양 천도에 관해 논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분사제도는 성종 14년(995)에 이루어진 전국적인 관제개편으로 서경 행정기구의 외형적인 개편이 이루어졌으나 서경과 개경을 분리하여 운영한다는 내적인 면에는 변화가 없었다. 현종 대에 황성(皇城)이 지어지고 문종 대에 서경을 중심으로 경기4도(京畿四道)가 설치됐다.[8] 숙종 대에는 분사제도를 심화해 상서성의 5부를 따로 설치한다. 이후 예종(1105 ∼ 1122)대 까지 분사제도가 강화되어 개경과 그 체계가 같게 되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 경(京)이라는 단위에 독립적인 행정기구와 관제가 주어지는 것은 서경 뿐만이 아니었는데, 동경(현 경주)[9]과 남경(현 서울)에도 이러한 것들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서경에 비해 그 대우는 낮았으며, 이에 대한 사실은 후술할 인종(仁宗) 대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반역의 땅이니 서경의 기구와 관제를 동경의 것과 같게하라'는 대신들의 건의에서 파악된다. 또한 동경, 남경엔 황성 및 분사기관, 경기의 설치는 보이지 않는다. 광종의 도(都) 설치 때 동경이 빠지고 개경과 서경만 각각 황도(皇都), 서도(西都)로 바뀐 것을 봐도 같은 경끼리도 급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10]

예종 대 이루어진 서경의 전성기는 인종 13년(1135)에 발생한 묘청의 난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묘청의 난을 제압한 즉시 서경의 치안과 기초적인 행정업무에 필요한 기구 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구들을 전부 폐지한다. 서경 행정 기구의 대대적인 폐지 이후 중앙 개경 세력은 자신들과 행정, 정치적으로 분리된 세력의 존재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다만, 그 독립성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하고, 박탈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여 '서경은 근본이 되는 땅이고, 태조께서 일찍이 그 제도를 정한 바 있으니 예전대로 하자'는 쪽과 '서경은 반역의 땅이니 모든 제도를 강등해 동경과 같게하자'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

이 논의는 약 2년동안 논의되어 인종 16년(1138)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 방향으로 서경의 관제를 개편하게 된다. 이로써 서경이 지니고 있던 독립적인 지위는 사라지게 된다. 이 때 개편된 관제는 수도와 동등한 형태와 지위를 가졌던 분사제도에서 완전히 중앙에 예속되어 중앙의 인사권, 행정권 등에 대한 간섭을 받는 토관제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형태를 보인 것으로 추측된다.[11]

개편은 명종대에도 이어졌다. 이는 무신정변(1234)에 반발한 서경 문신들이 일으킨 난인 조위총의 난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개편은 이전의 분사제와 토관제를 절충한 개편과 달리 완전히 중앙에 예속시키는 토관제로의 완전한 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

서경이라는 형식만 유지한 체 토관제로 유지되던 서경은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 삼화교위(三和校尉)이연령(李延齡) 의 난으로 서경의 유수가 죽고, 난의 주동세력들은 서경 부근의 땅을 몽골에 바쳤다. 이후 서경은 몽골이 동녕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게 된다.

이후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를 몽골에게서 돌려받아, 서경의 행정체제를 격상하여 서경유수관을 설치하였으나 이미 서경은 크게 쇠퇴하고 난 후였다. 공민왕 대에는 막대한 쇠퇴의 영향으로 경(京)이라는 행정적 지위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공민왕 18년(1369) 만호부, 이후 평양부로 개편하게 된다.

서경엔 장락궁이라는 개경 본궐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진 궁궐이 있었다. 장락궁은 태조 진전이 특별히 설치되어있었으며 황성이 세워져 있었다.

고려사 병지 주현군조에는 서경에 배치된 주진군 수를 알 수 있다. 서경은 혼자서 압도적인 주진군 수를 자랑했는데, 장교와 군사의 수를 합쳐 총 11,556명이 서경을 지키고 있었다.[12]

6. 조선 ~ 대한제국[편집]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평양부로서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북부 지방의 최대 거점도시 역할을 했다.

역시 조선시대에도 수도(한양)에 이은 제 2의 도시 지위를 유지했으며, 수도와의 지역감정도 이어갔다. 1,000년 동안 콩라인

다만 같은 2위 도시라도 고려조와 조선조의 평양의 입지는 분명 판이하게 다르다. 고려는 평양을 서경이라 칭하며 제 2의 수도로서 대우해주었고 개경과 더불어 분사까지 설치했기에 개성을 견제할 수 있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시대 평양인들의 인식은 서경별곡에 잘 드러난다. 하지만 조선은 평양을 제 2의 도시로는 취급해도 제 2의 수도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삼경제와 같은 부수도 따위를 운영하지 않았고 오로지 한양에만 몰빵한 나라였다. 굳이 따지자면 제 2 수도 취급을 해주는 도시가 있다 쳐도 조선초에는 전조의 수도 개성 정도였고 정조시기에는 수원이었다. 따라서 같은 2위 도시라도 평양의 입지는 고려보다 조선대에서 더 약화한 것. 그리고 인구 2위인 것이 무색하게도, 위상은 위에 상술했듯 원간섭기 이후 고려 말기에는 개경>남경>서경이었으니 3위 도시였고 조선 초기, 즉 15세기까지는 한양>개성>평양으로 개성의 위상이 더 높았다. 심지어 조선 성종대까지도 개성을 제 2의 수도라 여긴 듯한 기록이 있으니... 그리고 인구 측면은 몰라도 위상 측면에서는 풍패지향, 즉 왕실의 본관인 전주가 평양보다 더 대접받았고 정조 시기엔 수원이 평양보다 더 위상이 높았다. 물론 인구야 평양이 훨씬 많았지만.

조선 조정의 차별 때문인지 당시 평양 사람들은 벼슬길에 진출하기보다 상업에 열중했다. 그래서 당대 평양은 개성과 함께 조선에서 손 꼽히는 상업도시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상업 발달을 토대로 과거 시험에도 많이 응시하여 조선 왕조에서 143명으로 6번째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하였다.[13] 그러나 평안도 인사는 관직 진출에 암묵적인 제한이 있었으며 이 차별이 극대화돼서인지 결국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1588년, 평양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사건이 발생하자 평양의 강등 및 평안도의 이름 변경을 가지고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다른 도시들의 경우처럼 강등시켜야 하지만[14] 평양이 워낙 크다보니 이전 사례를 찾아와 상고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조가 내놓은 첫 대답은 뜬금없게도 '평양은 중국에도 유명한 만큼, 중국에서 사신들이 와서 보면 창피하니 놔두자'라는 답이었다. 그러자 선조는 이전 사례를 열거해서 다시 답을 해오라고 리젝 명을 했고, 이조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묘청의 난조위총의 난의 사례를 들어 평양은 강등하기엔 너무 큰 도시라는 견해를 내놓아 바뀌지 않았다.#1 #2 #3

조선시대에 강계, 함흥, 해주, 진주를 포함해서 기생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고우영 일지매에서도 일지매가 평양에 간다고 하자, 월희가 "평양은 색향인데 다른 여자를 만나면 어쩌나" 하면서 걱정했을 정도.

평양에 주재하며 평안도를 관할하는 평안감사는 조선시대 3대 지방관으로 나주목사[15], 과천현감[16]과 더불어 가장 선망하는 부임지였으며 특히 평안감사는 기백(箕伯)으로까지 불렸다. 이는 기자의 영지를 다스린다는 뜻. 기자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었고 이 곳에 기자의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도 이 평안 감사의 위세에서 기인한다. 다만 이를 '평양 감사'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평안 감사가 평양에 주재하고 평양부를 관리하는 평양 부윤 직책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17]이다.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중국의 역대 천자국들이 부수도를 두었던 것을 따라해서 1902년 즈음부터 평양을 제 2의 수도인 서경(西京)으로 육성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며, 풍경궁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유산이지만 얼마 안 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피탈이 되면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18]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구한말의 외교관 이하영은 자신의 회고에서 고종이 중국정벌과 평양으로의 천도 계획이 있었다고 했다.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신동아 2006년 11월호.


7. 일제강점기 ~ 북한[편집]


일제강점기 때에도 평양은 여전히 기호지방과의 지역감정을 이어갔다. 오늘날 남한에서는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유명하지만, 남북 분단 이전까지만 해도 기호지방과 평안도와의 지역감정이 가장 유명했고, 역사 또한 10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와 훨씬 더 근본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스포츠 경기가 바로 경성부(서울)의 경성축구단과 평양부의 평양축구단이 겨루는 경평대항축구전이었다.

특이점을 더 꼽자면, 일제강점기 당시 개신교세가 한국 전체에서 유난히 강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19][20] 당대 평안도 주민들은 조선 조정의 차별 때문에 조정에 대한 반감이 심했고 평양은 당대에 조선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상업도시였기 때문에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1907년에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21]에서 시작된 대부흥으로 인해 평양평안도 지역은 개신교의 세가 더더욱 빠르게 성장했었다. 1907년에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평양 대 부흥 사건은 현재 한국의 개신교 단체에서 한국의 개신교 역사에 대해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고 이야기가 나오는 중요한 사건이다. 1936년 신문 기사에 따르면, 비신자들도 일요일을 습관적으로 주일이라고 부르고, 일요일에는 새벽부터 교회에서 치는 종 소리 때문에 늦잠 자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훗날 이 개신교세를 주체세로 바꿔버린 김일성의 부모도 개신교도였다. 심지어 그 주체사상도 개신교에서 예수를 빼고 그 자리에 김일성을 집어넣어 짜맞춘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와 있을 정도.

이 때문에 현대인들이 평양과 평안도 지역을 개신교랑 연관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종교별 인구 분포를 살펴보면 엄연히 잘못된 말이다. 해방 당시 북한은 종교 신자 인구로 치자면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 수를 합쳐도 불교 신자에 비해 수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이 3종교 모두를 합친 인구는 천도교 신자의 인구의 절반도 채 안되었다. 결국 이북 지역은 개신교의 산지가 아닌 천도교의 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기타 지방에 비해 강세였고 종교인들 내부에서 성지 취급되는지는 몰라도 기독교 일색의 지역이었던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건 없고 북한 정권의 탄생과 함께 주체사상의 핵심지역이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가 패망, 8.15 광복 직후 한국 북부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북분단이 발생하면서 북한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6.25 전쟁 중인 1950년 평양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이 승리하여 10월 19일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북한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6.25 전쟁에 개입하였고, 국군과 UN군은 12월 4일 철수했다.[22] 이로써 12월 6일 다시 북한 치하에 들어갔고 현재까지 북한 치하에 남아있다.

그 이후 원래의 입지조건 + 북한의 수도라는 점 때문에 원산시와 함께 도시 전체가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만다. 김일성 스스로 "평양에 성한 집이 초가집 2채밖에 없었다"고 할 수준. 네가 전쟁 일으켜서잖아 이 과정에서 중근세부터 내려오던 유구한 도시 경관은 소멸되고, 영명사풍경궁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서 깊은 유적들도 파괴되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의 평양은 몇몇 명승고적을 제외하고는 새로 만들어진 도시다. 이후 황폐화된 평양은 사회주의 이념에 맞도록 새로 계획되어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아울러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폐쇄 체제인 북한의 선전용 쇼윈도 도시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지금은 전쟁을 대비하여 도시자체가 요새화되었으며 그중에서 저고도 대공망은 상당한 수준이다. 낡아 빠진 대공포를 주로 사용하지만 대신 이를 벌충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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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세계에서 저고도 대공망이 가장 조밀하게 구성한 지역이다.

물론 모스크바 대공망처럼 세계 최강수준은 아닌 것이 고고도 대공망은 6포대의 S-200이 전부이다. 때문에 한국군은 대량의 매버릭벙커 버스터, 팝아이 지대지 미사일을 대량으로 운용하고 있다. 덕분에 북한군은 빈약한 공군전력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MiG-29 40대 전량을 평양근처에 대기해 놓고 있으며 대량의 GPS교란 장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한반도판 바그다드인 셈이다. 그외 최근 북한의 군사퍼레이드에서 S-300으로 추정되는 신형방공무기가 튀어나와 군당국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고고도 공격에 취약하기에 폭격기를 사용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때문에 과 주일 미공군기지에서 B-52가 항시 대기중이다. 옛소련의 공화국이나 중국의 라이센스인 HQ-9라고 추정. 물론 바그다드의 사례에서도 알겠지만 한국과 미국에서 작정하고 를 던저대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이다.

[1] 다만 다수설이 왕검성의 위치를 평양이나 그 부근으로 비정하기야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와는 달리 고조선은 '수도 왕검성이 평양이다'라고 확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다.[2] 이유는 한무제에게 처벌을 받을까봐[3] 한의 국력은 넘사벽이었지만, 위만조선이 자기 앞마당에서 탈탈 털릴 호구까진 아니었으며, 기본적으로 공격군이 방어군에 비해 불리하다.[4] 다만 국내성이 평양성보다 입지가 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국내성은 424년간 수도였던 반면 평양성은 그 절반을 조금 넘기는 241년간 수도였다. 또한 평양성이 고구려 영역이 된 시점은 미천왕이 낙랑군을 축출한 313년인데 이 시기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의 기간은 355년이고 이는 고구려 사직 704년의 절반에 불과하다. 즉 고구려사 전반기 절반 동안은 평양성은 고구려의 영토조차 아니었던 것. 다만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이고 이전의 수도보다 마지막 수도의 임팩트가 크기에 평양이 국내성보다 임팩트가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만 봐도 492년간이나 수도였던 위례성보다 겨우 122년간이지만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의 이미지가 더욱 강한 것처럼. 그렇지만 아무도 사비성이 위례성보다 백제사에서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다.[5] 전시(戰時)에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6] 당연히 중국의 시안(西安)이 아니다.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인들이나 해괴한 주장을 하는 환빠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는데, 성(城)을 뜻하는 고유어인 '잣'과 내부를 뜻하는 고유어인 '안'을 음차한 표기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7] 물론 당시에 만들어진 도로는 현재의 포장도로 밑에 묻혀서 유적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다.[8] 경기는 수도 주위에 있는 군현을 수도에 예속되게 한 것으로 현종 대에 처음 개경에 설치하고 문종 대에 서경에도 동등하게 하였다.[9] 이쪽은 1000년간 신라의 수도로서, 신라멸망 후에도 그 인구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무시 못했을 것이다.[10] 다만 그렇다고 해도 서경의 지위가 개경에 버금갈 수준으로는 올라가도(버금간다는 것은 그 다음 간다라는 뜻이지 동급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완전히 같은 급으로는 끝내 오르지 못한다.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것도 그렇고 당장 고려왕릉 중 단 1기도 평양에 있지 않고 모조리 개성/강화 일대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왕이 머무는 기간도 개경이 9달, 서경은 고작 3달이기도 했고 그마저도 인종대 이전부터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다. 서경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정통성을 내세운 제 2의 수도였을 뿐이지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과 동급이었다는 것은 과장이다. 고려 왕조 입장에서도 당연히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고려 왕씨 황실의 정통성이 고구려 계승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도 하였고...[11] 다만 그렇다고 해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차이가 벌어진 것이지 서경이 남경, 동경과 동급이 된 것은 아니다. 동경은 단 한 번도 서경의 위상을 따라잡은 적이 없고 남경 역시 고려 말기 공민왕대까지는 한 번도 서경을 따라잡아 보지 못했다. 다만 원간섭기가 끝나고 공민왕 이후의 마지막 30여년 정도는 남경이 서경보다 확실히 위상이 우위였다. 공민왕은 탈몽골한 직후인 1356년 남경을 다시 부수도로 삼기 시작했으며 우왕과 공양왕 시기에는 아예 5개월씩 수도를 남경으로 일시 천도까지 했으니.[12] 남경은 1,526명, 동경은 2,562명이었다.[13] 1위는 283명의 평안도 정주시.[14] 조선시대에 반역이나 직계살인 같은 패륜적인 참사가 발생하면 그 고을의 현감은 파직하고 고을을 강등시키곤 했다. 만약 해당 고을이 '도(道)'의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대표 도시라면 아예 도의 이름까지 몇년간 바꿔버리기도 했다. 조선 역사 내내 수시로 이름이 바뀌어져 온 충청도가 대표적.[15] 조선시대 나주의 지역은 남평읍, 금천면, 산포면, 다도면, 봉황면, 빛가람동을 제외하면 지금과 같다.[16] 조선시대 과천의 지역은 현재의 경기도 과천시, 안양시(석수동, 박달동 제외), 군포시(대야동 제외), 서울특별시 관악구(남현동), 동작구(노량진동, 본동, 흑석동, 동작동, 사당동), 서초구 대부분(내곡동, 염곡동, 신원동 제외 전부)이다. 지금의 과천시는 다 떨어져 나가고 읍치의 소재지, 즉 중심지의 영역만 남은 지역이다.[17] 평양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관찰사들이 도 내부의 부 한 곳의 부윤 내지 부사 직책을 겸직했다.[18] 양쯔강의 지류[19] 실제로 초기 한국어 성경 중에는 서북 방언으로 번역된 것도 있다.[20] 한편 당시 대구광역시가 좌익세력이 매우 득세해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는데, 뒷날 두 도시는 정반대 성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아이러니.[21] 순우리말로 널다리골교회라고도 불린다.[22] 평양 철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너무 빠른 후퇴였다. 당시 중공군은 거듭되는 전투로 피로에 지쳐 있었고 UN군이 평양-원산선에서 방어할 것이라고 여기고 공격을 숙천(평양 북방 90km) 일대에서 멈춘 상태였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빠져나간 것을 알고 나서야 급속 진격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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