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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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시대의 치안 기관
1.1. 역사
1.2. 관제
1.3. 역할
1.4. 기타
1.4.1. 관련 속담
1.5. 같이보기
2. 포도설탕물에 절인 것


1. 조선 시대의 치안 기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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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 건물.
포졸의 사진.
조선 말기의 화가 김준근이 그린 기산풍속도첩의 '포청에서적툐맛고'.
포도청에서 죄인을 심문하려고 주리틀기를 하는 모습이다.
조선 시대 치안을 담당했던 기관. 치안 담당 기관의 명칭이 포도청(捕盜廳: 도둑 잡는 관청)인 조선 시대경찰청(警察廳: 언제나 깨어 살피는 관청)인 현대의 관점차이를 볼 수 있다. 줄여서 포청이라고 한다. 포도대장은 종2품으로, 현재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현재의 서울수도권 일대만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경찰청보다는 서울특별시경찰청 / 경기도남부경찰청 / 경기도북부경찰청 / 인천광역시경찰청에 더 가깝다. 좀 더 비슷한 사례는 일본경시청이라고 할 수 있다.

1.1. 역사[편집]


1469년(성종 즉위년)에 박중선을 포도주장(捕盜主將)으로 삼아 전라도에 보낸 기록이 있다. 훗날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킨 무신 박원종의 아버지이다. 이후 각지에 일어나는 도둑들을 잡기 위해 포도장을 임명하여 각지에 보낸 기록이 성종조에만 29번 나타난다.

초기의 포도대장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임시직 형식이었다. 그리고 성종 5년에는 이양생이 포도장으로 권력을 남용하므로 포도장의 상설화가 폐지되었다가, 같은 해 3월 포도장을 다시 신설한다. 이후 1481년(성종 12년)에 좌변(左邊)·우변(右邊)으로 나누어, 서울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는 좌변[1]이 맡고,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는 우변이 맡았다.

중종 35년인 1540년, 중종실록에 포도청(捕盜廳)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1894년(고종 31년) 좌 / 우 포도청을 통폐합해 경무청(警務廳)을 신설하면서 없어졌다.


1.2. 관제[편집]


≪속대전≫에서는 좌·우포청에 각각 대장(종2품[2]) 1인, 종사관(종6품[3]) 3인과 부장 4인, 무료 부장 26인, 가설 부장 12인, 서원 4인씩을 두었다.


1.3. 역할[편집]


딱 현재의 경찰공무원을 지휘 통솔하는 경찰청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범죄자를 체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단 행정안전부에 속한 현대의 경찰청과는 달리 포도청은 현대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조 휘하의 무관 관부였고 수도경기도 지방만 포도청이 관장했다.

그러므로 엄밀히는 국가경찰이 아닌 국가 헌병대나 수도방위사령부의 군사경찰에 해당한다. 근대 이전에 군대경찰이 크게 구분되지 않고 군부가 치안을 직접 맡는 경우는 흔했으므로 특별한 일은 아니다. 각 지방의 치안은 지방의 수령이 자체적으로 맡았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사극에서 서울 / 경기도 외 지역의 순라군들을 포졸이라 부르는 것은 오류.

1.4. 기타[편집]


영조 때의 포도대장 장붕익은 검계를 소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웬만한 느와르 영화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먼저 공격했던 쪽은 검계였다. 대담하게도, 밤에 검계 몇 명이서 담을 넘고 들어와 포도대장 그러니까 장붕익의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포도대장도 무관직이었기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는지, 장붕익이 맞서 싸우자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다.

장붕익은 이때 상당히 열받았는지 검계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기 시작한다. 당시 검계들은 몸에 난 칼자국으로 서로를 구별했는데, 포도청에선 이를 이용해 몸에 칼자국이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조지는 방법을 쓴 것이다. 결국 검계는 완전히 소탕되었고, 더 많은 피로 물들 뻔했던 한양은 잠잠해지게 된다. 공권력이 멀쩡한 국가에서, 그것도 완벽한 중앙 집권화가 되어있는 조선같은 나라에서, 조정이 잡으려고 작정하면 살아남을 조직폭력배 따윈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 그러나 이때도 검계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서,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 다시 등장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폭이 포도대장을 대놓고 공격한 것도 상당히 대담한 일이었지만, 19세기 말에는 뜬금없이 의금부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다. 1884년의 일로, 좌포청에서 오백손이라는 이름의 도둑 혐의자를 체포했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이 의금부 나장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한 의금부 나졸들이 포도청으로 쳐들어와서 청사를 부수고 죄수를 구출해간 사건이다.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 8월 25일자 기사). 현대에도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끼리의 마찰은 종종 있는 편인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90년대 후반에 경찰 내의 요직인 경찰청 정보국장을 검찰에서 구속수사 한 바가 있다. 2010년대 후반과 2022년에도 종종 언급된다.

쌍방울 레이더스-현대 유니콘스-SK 와이번스에서 뛴 포수 박경완의 별명이 포도대장이었다. 뛰는 주자들을 다 잡는다는 의미였다.

1.4.1. 관련 속담[편집]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속담에서 말하는 포도청이 바로 이 포도청이다. 이 속담의 사전적 의미는 '굶주리면 먹고 살기 위해 범죄도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비슷한 뜻의 사자성어로는 구복원수(口腹寃讐)가 있다. 이쪽은 살아가기 위해 아니꼽거나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조선시대 먹을 것이 없는 양민들이 일부러 범죄를 저질러서 옥살이을 하면서도 밥을 먹고 싶다는 뜻으로 매우 배고플 때 하는 속담으로 알려져 있고, 최근에도 생계형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어느 시대나 생계형 범죄는 흔하다는 소리같이 들린다.

그런데 조선 시대 감옥은 기본적으로 현대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미결수들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징역의 개념이 없었다. 당시 형벌은 오형이라 하여 태형, 장형, 도형, 유배, 사형으로 총 5가지에 불과했다. 이 중 태형과 장형은 매질이었으며 도형이 그나마 매질 후 구금 및 노역시키는 형벌이라 징역과 비슷했다.

식사도 원칙적으로 관에서 대주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든지 해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근대에는 소송이 밀리지 않게 빨리빨리 처결해서 장기간 옥에 머무르는 죄수가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는 유배간 죄인도 마찬가지. 자세한 것은 조선의 형사소송 참조.


1.5. 같이보기[편집]



2. 포도설탕물에 절인 것[편집]


파일:external/www.seriouseats.com/20120220-193789-finished-pickled-grapes.jpg
의 일종. 흔히 포도효소라고 부르는데, 효소 항목에서 보듯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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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사 위치는 현 단성골드주얼리센터 일대이다.[2] 지금의 차관급, 현재도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치안총감경찰청장해양경찰청장 2명이다.[3] 지금의 경감~경정 정도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