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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蒲元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삼국시대 촉한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전삼국문(全三國文) 62권에 따르면 포원은 승상이었던 제갈량의 서조연(元為丞相亮西曹掾)이었다고 한다.

뛰어난 제철 기술로 명성이 높았다고 하며, 목우유마의 제작을 맡았으며 전설적인 신도 등 촉나라의 무기를 만든 인물이다. 태평어람에 인용된 도홍경의 도검록에는 전사과정에서 어그러져 칭원(稱元)이라고 기록되었다. 태평어람에 인용된 도검록에는 유비의 지시로 칼을 만들고 예문류취(藝文類聚), 태평어람에 인용된 <포원전(蒲元傳)>에서는 제갈량에 관련된 내용으로 나온다. 세설신어[1]에서도 제갈량과 관련해 신도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유비의 명으로 칼 5만 자루를 만들었는데, 모두 이어진 고리가 칼날까지 있어 칼자루에 이르기까지 72번을 단련해 새겼고 모두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포원은 원래 기발한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사곡구에서 제갈량을 위해 3천 자루의 칼을 주조했다고 한다.[2] 스스로 말하길 한수는 물이 무디고 약해 담금질에 쓸 수 없지만 촉강[3]은 물이 시원하고 세차니 이를 대금의 원기(혹은 천기 금기의 정수)라고 했고 다른 사람에게 명해 성도에서 장강의 물을 가져오게 했다. 그 물로 담금질하려다가 사천성 경내에 흐르는 부수가 섞여서 쓸 수가 없다고 했는데, 물을 가져온 사람이 섞이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포원은 칼로 물을 그으면서 여덟 되가 섞였다고 말했으며, 그제서야 물을 가져온 사람이 부수의 나루터에서 물을 엎었기에 부수 여덟 되를 보충했다고 실토했다.

또 한 번은 대나무 통에 쇳가루를 가득 채워 넣은 다음에 칼을 들어 그것을 자르니 칼이 닿자마자 대나무 통이 부서져 흩어졌는데, 그 칼을 신도(神刀)라 불렀고 갑옷과 투구를 가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려면 구릉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에 군량 운반이 어려웠는데, 《북당서초(北堂書鈔)》68권《연편(掾篇)》에 인용된《포원별전(蒲元別傳)》에는 제갈량이 군량 수송에 유용한 목우유마를 설계했으며, 포원 등을 통솔해 이를 제작하도록 했다. 그가 제작한 소형의 목우는 한 사람의 일 년치 양식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뛰어난 활약을 했는데도 삼국지연의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2차 창작물들에서도 그의 업적은 대부분 황월영이 차지했다. 삼국지연의/피해자 중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사람.


2. 창작물에서[편집]


소설 난세의 별에서는 명검을 만들어 사인과 흥정하면서 장인의 자부심 때문에 거만하게 굴다가 사인으로부터 다양한 담금질에 대해 듣게 되며, 사인이 서원팔교위인 것을 알고 죄를 청했다가 사인의 제안으로 담금질 기술을 배우는 대신 그를 따르기로 한다.

아! 내가 마속이다 에서는 현대에 등산매니아였다가 마속에 빙의한 주인공의 부탁으로 카라비너를 비롯한 현대 등반 장비를 만들거나, 장안을 수복한 뒤에 마균을 발탁해 천거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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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설신어와 명대의 문인 하양준의 하씨어림(양한때부터 명나라때까지의 사전과 필기잡서(筆記雜書) 중에 기록된 문인,관료들의 언행과 일화를 적은 책으로 세설신어와 겹치지 않는 출처를 인용했다고 한다.)를 합친 책. 세설신어보에선 포원의 일화가 '어림'출전으로 나와 있다.[2] 혹은 원래는 칼 만드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가 돌연히 사곡구에 틀어박혀 3천 자루의 칼을 주조해 제갈량에게 헌상했는데 금을 녹여 주형으로 한 것으로 보통의 방식과는 완전히 차이가 났다고 한다.[3] 촉중의 금강은 비단을 강물에 씻으면 그 색이 매우 선명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