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기 무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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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각국의 상황
3. 문제점
3.1. 방어화력의 허실
3.2. 전투기의 발전
3.4. 복병의 등장
3.5. 전략 폭격의 한계
5. 결론
6.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과학적 근거로, 전투기가 총을 쏘기도 전에 전투기를 폭격기가 박살내 버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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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세베르스키[1]


"최전선에 있는 적을 섬멸하는 것, 전선에 걸쳐 있는 물자 및 유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 모여있는 전차 대열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과연 어떤 병기가 적의 본토 깊숙히 침투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꺾어버릴 수 있겠는가?

폭격기다. 오직 폭격기 뿐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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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던, 거리에 있는 이들이 자신을 폭격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폭격기는 언제나 방어를 뚫고 들어올 것입니다(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 공간의 면적을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매우 쉬울 것입니다. 이 섬이나 대륙에서 비행장 범위에 닿는 대도시를 하나 골라보십시오. 그 시가지와 교외를 지키려면 하늘을 여러 개의 방위 구역으로 쪼개야 합니다. 폭격기는 최소한 하늘 높이 20,000피트에, 아마 그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수십 수백 세제곱마일의 구역을 짜는 것은 수학적 계산의 문제입니다.

구름과 안개가 낀 100 세제곱마일을 떠올리십시오. 그곳을 가끔 통과하는 항공기들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항공기를 투입해야 할지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유럽의 어떤 전문가들도 이게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방어는 공격입니다. 이는 자신을 지키려면 여자와 어린이들을 적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죽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다음 전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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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볼드윈, 1932년 영국 의회 연설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던 볼드윈은 이 연설에서 미래 전쟁에서 벌어질 폭격에 대한 공포를 내비쳤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전간기(戰間期) 동안 각국 공군 전략의 대세였으며, 결국 수뇌부의 착각으로 결론난 이론. 폭격기 만능주의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전투기무용론(戦闘機無用論)'이라 부른다.

대충 요약하면 "폭격기들이 어디로 갔는지 적은 찾지 못하고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제때 요격기가 요격고도로 올라오지 못하며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대형 폭격기에 방어 기총을 다수 탑재하고 떼로 몰려다니면 전투기도 못 건드린다. 고로 호위기 따위 필요없어! 폭격기가 대편대를 이루면 적진돌파도 문제없다!"

이러한 주장은 항공전력을 운용하는 주요 국가에 퍼져있었다. 이탈리아줄리오 두헤를 비롯해서 미국의 윌리엄 미첼 준장, 영국의 트렌차트 등 당시 공군력을 건설하던 주요 국가들의 선구자들 대부분이 이런 사상을 갖고 있었다. <제공권>을 저술한 줄리오 두헤가 가장 유명하지만, 트렌차트도 1차대전 때부터 영국공군 건설 과정과 운영에서 이런 사고를 보여줬으며 미첼 준장은 이 문제로 해군 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군에서 추방되기도 했다.[3] 하여튼 이런 덕분에 미사일 만능주의와 함께 미 공군의 양대 과오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각종 폭격기의 발전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어서 완전한 과오로 평가받지는 않는다.


2. 각국의 상황[편집]


영국은 이 이론에 입각하여 독일을 언제든지 칠 수 있는 위치에 대규모 폭격기 부대를 배치했고, 2차대전 중에 아브로 랭커스터를 비롯하여 성공적인 4발 중폭격기를 개발해냈다. 이 과정에서 전투기쪽이 소홀해진 문제점도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적국인 독일이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전투기로 적 폭격기를 막아내야 할 필요성은 항상 존재하였기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같은 양질의 전투기도 준비해서 전쟁 초반의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폭격기 중시의 영향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어서 볼튼 폴 디파이언트 같이 조종석 후방에 4연장 기관총탑을 달아서 폭격기 요격은 가능하지만 전방으로의 사격이 불가능해서 호위기와의 전투는 불가능한 말 그대로 괴팍하고 무식한 전투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폭격기를 호위해갈 장거리 항속능력을 가진 단발 단좌 전투기 개발이 늦어져서 2차대전중에는 실전투입을 못하는 사태도 나왔다.

미국은 초반에는 미국 본토 방어의 주도권을 가지고 해군과 육군 항공대가 대립하여 위에 설명했듯이 폭격기 무적론자인 빌리 미첼 준장이 봉변을 당하는 등의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미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중폭격기가 필요했기에 폭격기 무적론에 입각하여 설계된 폭격기가 2차대전에서 하늘의 요새라 불린 B-17이고 그 이외에 B-24 등의 4발 중폭격기가 있으며, 나중에는 B-29까지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 중(重)폭격기를 중심으로 한 융단폭격과 각종 폭격기 관련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측면도 있다. 덤으로 쑥재배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미국도 폭격기 무적론의 피해를 입어서 전투기 개발이 힘들어지면서 전투기를 요격기 이름을 붙이고 개발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전쟁 초반의 전투기들은 P-40이나 P-39 에어라코브라처럼 뭔가 문제가 있는 기종들이 최신예 기종이었다. 결국 전쟁 중반에서야 P-47 썬더볼트P-38을 만들어내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고 중폭격기를 호위할 호위기로 P-51 머스탱이 등장하면서야 간신히 폭격기 무적론의 해악에서 벗어났다.

미합중국 해군의 경우에는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함재기를 사용해서 넓은 태평양에서 전투하는 관계로 뇌격기급강하폭격기를 호위하거나 자국 함선들을 공중엄호해줄 목적으로 전투기가 반드시 필요했고 항속거리도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하기에 폭격기 무적론의 영향을 안받았다.

독일도 영국을 침공할 때, 폭격기가 스스로 방어를 할 수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보이지만, 독일군한테 공군이란 "지상군의 작전을 근접 지원하는 공중 포대"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는 Ju-87의 능력에 대단히 만족해하면서, 중(重)폭격기는 개발하지 않고 쌍발 중(中)폭격기에도 급강하 폭격 능력을 강요한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있다. 대신 폭격기가 빠르면 전투기가 못따라오리라 보고 고속 폭격기를 계속 개발하려 했으나, 폭격기가 빨라질 수 있다면 당연히 전투기도 더욱 빨라지니 결국은 꽝. 게다가 장거리 중폭격기가 없었으니 전략 폭격도 못했고, 이 점이 독소전쟁에서 소련의 물량에 짜부러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장 소련 땅 깊숙히 자리를 옮긴 생산 공장을 쳐야하는데, 끽해야 쌍발 폭격기로 그 넓은 땅덩어리를 날아다닐 수가 있나...

그나마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이해하여 독일 내 전략 폭격의 신봉자로 불렸던 발터 베버 장군이 일명 '우랄폭격기'라는 4발 장거리 폭격기 개발을 추진했지만, 한정된 인원과 예산으로 빠르게 공군을 확충하면서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 사업에 우선순위가 밀리고 말았다. 결국 베버 장군의 죽음과 함께 우랄폭격기 계획은 완전 묻히게 된다. 그 후에는 오히려 근접항공지원과 급강하폭격을 더 강조하는 경향으로 독일 폭격기의 발전방향이 바뀌면서 결과적으로 봐서는 크게 생각도 없었고 그나마도 실천을 못했기 때문에 폭격기 무적론의 영향을 덜 받은 편이다.

이탈리아는 시초는 좋았다. 줄리오 두헤가 인생 말엽에 가서는 이탈리아 정부의 지지를 받았고, 그의 이론에서 주장한 것은 전략폭격에 가까웠다. 두헤는 폭격기는 아군 전투기의 엄호가 필수적이라 하였으며, 속도나 과무장 등을 통해 요격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무리라고 그의 저서 제공권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시점의 전략폭격은 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적국의 민간인 상대로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터라 나름 사정 봐 가며 폭격을 하게 된 후대의 흐름과는 다소 어긋난다는 큰 약점을 가지고 있으나 나름대로 폭격기를 중시하지만 폭격기의 약점 및 전투기의 필요성등 다른 것도 생각을 해봤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폭격기 발전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나 그의 이른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문제, 공업생산력 및 관련 기술력이 떨어졌던 관계로 당초 높은 이상과는 달리 기대 이하의 폭격기만 개발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도 실천하지 못해서 피해를 덜 입은 셈이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라서 전투기 무용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해군의 경우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특히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고 그 결과 G3M과 같은 기종들을 배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겐다 미노루와 시바타 타케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겐다는 전투기가 필요없다는 입장이었고 타케오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과정에서 나름 최신예 폭격기라던 G3M조차 중국군의 요격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플라잉 타이거즈가 본격적으로 출격하기 시작하면서 항공기 손실이 늘어나자 폭격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한대로 A5M를 끌고와서 호위임무를 맡기게 된다. 일본 제국 육군의 경우 이러한 전훈을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여서 폭격기의 비중은 줄이고 신형 전투기들을 성능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배치했다.

반면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 앞서 말한 중일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겐다 미노루도 전투기가 무용하다는 입장을 철회하는 등 호위전투기의 필요성 자체는 인식하였다. 그래서 A5M의 항속거리가 장거리 호위임무를 담당하기에는 짧다는 것 때문에 장거리 호위전투기로 사용할 쌍발전투기의 개발을 의뢰하였지만 결국 해당 쌍발전투기는 J1N 겟코라는 야간전투기가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시대착오적인 사상과 맞물려 항속거리는 길었지만 약점이 많은 A6M 제로센으로 장거리 공격대를 호위하면서 중일전쟁으로 숙련된 항공대가 과달카날 등지의 남태평양 항공 소모전에서 괴멸적 타격을 입는 와중에도 공격 일변도 사상의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육군이 1943년 9월 이후로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를 도입하며 비교적 성공적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과는 달리 전투기 중시로 방향을 전환하는것은 1945년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4] 게다가 후속기의 개발 자체도 매우 지지부진해서 육군이 Ki-61 히엔을 의욕적으로 도입하고 약 3,000여기를 생산, Ki-84를 1944년에 양산하기 시작해서 신뢰성은 문제가 많았지만 3,400대 이상을 생산한 반면 해군은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다 합쳐도 1,900기 남짓이며 그나마도 그중 1천기가 초기불량도 고치지 못하고 양산명령이 떨어진 N1K-J 시덴, 그나마 전투기와 요격기로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개량형 시덴 카이와 J2M 라이덴은 각각 400여기 남짓이 고작, 제로센의 후계기로 기대를 모았던 A7M 렛푸는 시대착오적인 ROC와 맞물리며 양산조차 되지 못한다. 반면 단순 계산으로도 같은 엔진을 쓰는 라이덴을 두 대 만들 수 있는 종이비행기 G4M 1식육공은 2,200여기나 생산되었다. 1식육공과 비슷한 급의 쌍발 폭격기인 4식 중폭 Ki-67 히류의 제식화가 1944년, 생산대수 600여기인 것을 보면 일해군이 일육군과 비교해 얼마나 폭격기무적론에 젖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그 공업기반이 구미에 비해 열악했습니다. 이 열세는 고출력 엔진의 개발이나 그 양산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고성능 엔진은 일본의 항공전력에 극도로 중요한 자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요한 자원을 해군은,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훈을 일부러 무시하고 전투기가 아닌, 쌍발 폭격기 등의 공격 전력에 충당한 것입니다...(중략)...원칙을 중시해 공격 전력을 중시한 해군입니다만, 통상 공격으로 항모 등 주력함을 침몰시킨 사례는, 1944년 이후 1건 정도밖에 없습니다. 또한 1944년 후반 이후 공격의 주체는 특공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군은 그 항공 병력비의 변경을 1945년까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항공전력의 큰 특징인 공격능력의 유지를 도모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중략)...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 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리하여 해군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 그 주적은 전함이었습니다만, 미드웨이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결국 함대결전만을 상정하고 전력을 정비해온 일본 제국 해군은 일본 제국 육군이 전훈을 착실하게 반영하는 와중에조차 후진적인 공격 일변도 사상과 폭격기 무적론을 붙들고 있었던 셈이 된다.


3. 문제점[편집]



3.1. 방어화력의 허실[편집]


일단 폭격기는 전투기보다 크고 많은 중량을 감당할 수 있으니 기관총이나 기관포를 가득 싣고 전담사수를 배치하면 전투기가 쫒아오더라도 화력으로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것은 허상에 불과하였다.

진행방향이 기본적으로 목표물이 있는 곳 방향으로 어느 정도는 고정된 상태로 비행하면서 유사시에도 방향전환이나 고도의 상승, 하강등의 여러가지 방면에서 민첩성이 떨어지는 폭격기에 달린 기총좌와 기본적으로 기체 자체의 비행이 민첩한 전투/요격기는 그 유연성에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폭격기라는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목표에 민첩한 전투기나 요격기가 기동을 하면서 공격하는 꼴이 되므로 폭격기가 크게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폭격기 기총좌가 전투기를 상대할 수 있더라도 상대속도에 따른 조준(예측사)과 명중률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생각치 못했다. 이는 폭격기의 기관총좌가 조준을 위해 총신을 움직이고 총탑을 회전시키는 시간 걸리고 힘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투기 조종사는 빠르고 민첩한 기체의 특성을 살려서 목표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기총도 같은 방향을 보기 때문에 기본적인 조준이 완료되니 양자의 조준속도가 큰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 덩치의 차이가 엄청나다! 전투기가 폭격기를 조준하는 것은 쉽지만, 폭격기가 전투기를 조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생각해 보면 쉽다.

전투기가 공격해올 경우 전투기는 자신이 가진 화력을 100% 발휘하지만 폭격기는 항상 해당 방향을 사격할 수 있는 방어총좌만 대응사격이 가능하므로 화력에서도 밀리는 엿같은 경우가 발생한다. 그리고 전투 중 방어총좌가 파괴되거나 손상되면 해당 방어총좌가 담당하던 방향은 말 그대로 폭격기가 방어화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각이 돼버리므로 설령 전투기 1대와 방어총좌가 양패구상을 하더라도 다음 전투기가 폭격기의 해당부위를 노리게 되니 폭격기가 격추당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폭격기는 전투기만 상대하는 상대적으로 편한 싸움만 하지 못한다. 당시에도 대공포대공 미사일 등이 발전하면서 폭격기를 사각에서 격추할 수 있었다. 게임의 예지만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 시절 저그의 최종병기로 군림했던 폭격기 유닛 가디언브루드 워에서 테란의 대공 전술이 발전하면서 가필패로까지 굴러떨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명약관화다.


3.2. 전투기의 발전[편집]


폭격기 편대군의 강력한 방어 기관총좌는 전투기가 근접하면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요격하는 전투기들의 화력은 2차 대전 기간 내내 크게 상승하였다. 전투기의 기본 무장이 소총탄 수준의 기관총에서 20mm급 기관포, 더 심하게는 30mm 이상의 대구경 기관포로 차츰 강화되어 Me 262에는 파생형인 Me 262 A-1a/U4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폭격기에만 대응이 가능하지만 50mm 기관포까지 달렸다. 이 거대한 물건은 쌍발 야간전투기에 장착되기도 했다. 제아무리 야간전투기들이 주간에는 샌드백 신세라지만 4발 중폭격기 상대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폭격기의 기총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한도가 크다. 기본적으로 20mm급 기관포를 넘어가는 구경의 경우에는 포탄의 탄속이 느리거나 연사속도가 느려서 전투기 잡는데는 오히려 일반 기관총보다 불리한 문제점이 있었고 이걸 해결한답시고 포탄의 탄속과 연사속도를 모조리 늘리는 등의 강화를 하면 중량이 크게 증가하고 폭격기의 입장에서도 장시간 연사를 감당할 수 없을 수준으로 반동이 심하다던지 해서 사실상 탑재 못하는 사태가 난다.

그리고 20mm급 기관포라도 많이 장착하는 순간 기관포 자체의 중량 + 탄약의 중량 덕분에 폭장량이 줄고 항속거리가 줄어들며 속도도 떨어져서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된다. 실제로 B-17 편대에 대한 독일 전투기의 공격이 강해지자 아직 항속거리가 장거리인 호위기가 없던 상태라 B-17의 기총을 증설하고 기총탄약도 많이 적재한 대신 폭탄은 탑재하지 않고 동료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를 담당하게 한 파생형 YB-40이 나왔는데 막상 같이 출격시키니까 폭격기 편대를 따라잡지도 못하고 폭격기 편대가 있는 상공까지 올라가지도 못하며 항속거리까지 짧은데다가 막상 전투에 돌입해도 독일 전투기를 잘 막아내기는 커녕 자기 몸 지키기도 힘든 망작이 나와서 폐기된 사례까지 나왔다.

폭격기의 방어력도 한계점이 컸다. 애초에 항공기란 것이 장갑으로 총탄을 튕기는 것이 아니고 골조의 튼튼함과 내구성의 향상으로 몇 발 맞아도 임무 수행에 지장이 없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20mm 기관포탄급만 해도 보통 1-2발이 한계였고 30mm급 기관포탄은 1발도 제대로 버틸까 말까 한데다가 폭격기의 급소 위치에 맞으면 1발의 피탄으로도 추락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폭격기의 방어력을 더 늘리자니 중량 증가로 엔진출력부터 올려야 하고 구조를 바꾸니 사실상 새 폭격기를 설계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난이도를 가지는데다가 항속거리 저하와 폭장량 저하등의 단점이 커지면서 비용도 많이 들어가는데 막상 방어력은 별로 안늘어난다.

결국 폭격기는 단독으로는 전투기의 공격을 버틸 수가 없었고, 편대 자체를 흩어 놓는 전술이 개발되면서 폭격기의 피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4발 폭격기는 승무원의 수도 더 많고 제조 비용도 전투기의 4배 이상이라 손실에 따른 피해는 더 컸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은 아예 대구경 로켓탄을 쏘거나, 로켓탄 탄막을 뿌려 방어 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폭격기를 박살내거나 폭격기보다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떨궈 편대군 자체를 와해시키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편대군이 와해되면 그 다음에는 즐거운 사냥시간이다.

한국전쟁 이후 제트 전투기의 시대가 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한국전쟁 때쯤 되면 더이상 폭격기의 기관총으로는 총탑 선회속도와 반응성에서 목표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전투기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3.3. 삼일천하[편집]


항공기술 발달이 잠시동안이지만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면서 전간기 초반 폭격기의 스피드가 단순히 엔진 숫자 증가로 전투기를 넘어선 시기가 있었다. 이러면 다수의 기관총좌를 가진 폭격기가 고속폭격후 이탈하는게 가능해지므로 폭격기 무적론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1930년대 들어서면 다시 전투기가 빨라지지만 독일공군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고속폭격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1943년에 의도치 않게 제트정찰기높으신 분의 명령으로 폭격기로 써서 한때 전투기보다 더 빠른 폭격기를 보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그래도 그 당시 기술로는 폭격의 명중률이 낮은 편인데 전투기 피한다고 초고속으로 날면서 투하하는 폭탄은 목표물에 명중하지 않는 게 기본이었고 폭격기의 손해는 적지만 폭격의 성과도 없다시피 했다 식의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훗날 미군은 전투기보다 빠른 폭격기를 결국 만들어낸다. 물론 이후 YF-12 같은 물건이 나오긴 했지만. 그러나 이미 전투기 기총보다 100만배는 무서운 미사일이 실용화되었다. 당시 미사일 성능이 좋지는 않았지만 폭격기 상대로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3.4. 복병의 등장[편집]


폭격기무적론이 탄생하던 시기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레이더였다. 레이더가 중심이 된 조기경보체제와 이를 이용한 전투기/대공포/대피유도 및 피해복구반으로 구성되는 유기적인 방공망의 탄생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폭격기무적론의 주창자들은 설령 전투기가 폭격기를 압도하는 속력을 갖게 되더라도 폭격기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설사 어찌 파악하더라도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서 그 고도까지 올라가려고 하면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데 그 사이 폭격기는 폭탄을 던지고 가버릴 수 있으므로 도시는 무방비 상태로 폭격에 노출될 것이라 믿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부터 레이더의 조기경보와 전화망 보고체계, 우수한 장거리 무선 통신으로 적 폭격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추적하여 전투기들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면서 가장 중요한 가정 하나가 깨져 버렸다. 독일군 또한 영국의 야간폭격과 미군의 주간폭격에 맞서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경보체제의 덕을 많이 보았다. 그리고 영국은 체프와 전파방해를 선물했다

이에 반해 레이더를 갖추지 못한 일본B-29 방어를 외곽 섬의 관측소나 바다에 떠있는 선박의 목측에 의존하여 방공 효율이 지극히 낮았다. 그리하여 결국 미국은 전간기 항공전 이론에 그대로 들어맞는 폭격기로 항복을 받아낸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여기에도 웃지못할 비화가 있는데, 사실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제일 먼저 가장 성능이 좋은 안테나를 발명했었다. 이름하여 야기-우다 안테나. 이 안테나는 무려 1926년에 개발했지만 일본군은 적 앞에 전파를 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이 안테나를 안 썼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안테나의 성능에 좌지우지하는 레이더가 없으니만 못하게 된 것. 여담으로 미국, 영국, 심지어 독일마저 이 야기-우다 안테나로 레이더 만들어 잘만 써먹었다... 게다가 적들이 이 안테나를 쓴다는 것을 일본군이 알아챈 게 1942년. 역시나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물론 전파도 탐지가 되므로 적 세력 직전에서 전파를 쏴대는 짓을 하면 역탐지의 우려나 적어도 적함이 왔다고 광고하는 상황이 생겨 문제가 생기긴 한다. 특히 수뢰전대 따위로 야간 뇌격전이나 야간 근접전을 노리던 일본군 해군에는 확실히 우려할만한 상황이었던 셈. 하지만 적어도 무조건 위치가 파악된다고 봐야 하는 육상기지나 상대적으로 원거리 포격력과 높은 피탐지율을 가지는 전함 같은 대형함선에는 충분히 달 가치가, 아니 무조건 달아야 했다. 그리고 전파 역탐지 문제가 가시화될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레이더를 잠시 안 쓰면 된다는 아주 편리한 해결책이 있었다. 야간전에서 탐조등으로 대놓고 함대위치를 노출시키며 닥돌하던 놈들이 정작 이상한 이유로 더 필요한 장비는 버렸던 셈. 게다가 더 어이없는 사실은 저런 논리로 사실상 레이더 개발을 올스톱 시켜버렸다는 것이다. 레이더 탐지기술 또한 레이더 기술의 부산물인데 레이더 역탐지 문제로 레이더 기술을 버렸으니 역설적으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완벽한 맹인 함대가 탄생했다.(…)


3.5. 전략 폭격의 한계[편집]


설령 아주 강력하며 당대의 기준을 벗어난 수준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폭격기가 등장해서 그걸 대량으로 양산해서 폭격편대를 만들어서 전략 폭격을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략 폭격은 분명 강력하고 성과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폭격기 무적론자들이 예상한 수준의 강력한 충격과 공포를 가져오지 못했다. 가면 갈수록 폭격에 대해 상대방이 대응하는 수준이 늘어나므로 효과가 줄어드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2차대전 이후에는 폭격에 대항하는 법도 크게 발전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은 전장 자체가 폭격기가 활약할 만한 장소가 없을 정도로 산업시설들이 분산되어 있었으며, 병력에 폭격을 하려고 해도 베트콩이 정글에 숨어버리면 폭격할 장소를 찾기 마땅찮아 먼저 고엽제부터 뿌려야 했다.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 군이 디코이를 통해 화력을 크게 낭비시키게 된다.

하지만 걸프전에서는 이라크 육군 대부분이 폭격에 날아가서 제대로된 대응을 하지 못한 점, 베트남 전쟁에서는 호치민 라인 이상의 폭격이 금지되어서 애초에 전략폭격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세르비아 군 역시 폭격에 버틴다고 선전을 했지만 결국 군과 민병대가 폭격에 다 날아가서 공군만으로 끝난 전쟁이었다.

4. 대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위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결론[편집]


이론 자체의 헛점은 기술 개발에 따라 폭격기가 대형화, 고속화되는데 발맞춰 전투기 역시 고속화, 고화력화 될 것임을 간과한데다가, 레이더와 같은 장거리 탐지 수단의 개발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데에 있다.

복엽기의 전성기 시절에 탄생한 폭격기 무적론은 20여년만에 급속도로 발전한 항공기술의 속도를 간과하였고, 그래봤자 별로 바뀔게 있겠어?라는 생각이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말해 기술발전은 한쪽에서만 일어나지 않으며, 신기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폭격기 무적론이 상당부분 허상이 끼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에 따라 대규모 폭격기 군을 조직했던 영국과 미국이 적국을 전략 폭격으로 두들겨 패면서 국가 역량을 저하 시켜나가서 결국 승전국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폭격기가 아무리 비싸고 승조원이 많아도 그게 떨어뜨리는 폭탄이 공장이나 주거지 밀집지역에 제대로 떨어지면 전투기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데미지를 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도쿄대공습이나 드레스덴 폭격은 단일 작전만으로 적의 대도시 하나를 지워버리는 효과를 보았는데 이 정도 데미지를 육군으로 주려면 일단 주기위해 접근하는 단계에서부터 막대한 인력과 장비 보급 소요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1억 총옥쇄하겠다고 버틴 일본군을 육상으로 상륙하는건 미군에게 악몽과 다름없는 작전이었겠지만, 이 의지를 분쇄한건 폭격기에서 투하한 핵폭탄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전간기 기대했던것처럼 폭격기가 무적은 아니었을 뿐 전략폭격의 위력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현대에 와서는 폭격기를 제대로 운용하는 국가가 미국, 러시아, 중국 정도로 한정되고있다. 이는 전투기가 더욱 고기동, 고화력화 된데다가 어느 정도 폭장까지 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다. 위 세 국가가 폭격기를 운용할 수 있는 이유도 전투기로 웬만한 적국의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어서이다.


6. 창작물에서[편집]


클래시 오브 클랜해골 비행선은 폭격기로서의 특징을 완벽하게 갖고 있다. 매우 느리고, 공대공전력이 매우 빈약하며, 육상에 가하는 폭격은 막강하다.

창작매체에서 폭격기 무적론의 궁극점은 역시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거대 비행요새 기간트.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서도 보여줬듯이 1차 세계대전의 공중전에 크나큰 로망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이 무적론이 1차 세계대전의 전훈으로 탄생한 만큼 이 작품에서 나오는 기간트도 동시대의 다른 항공기에 무적에 가까운 공중전 수행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항공기보다도 빠르고 하여튼 좀 많이 무적이다. 근데 주인공 보정을 받은 한 소년에게 발렸다 (...)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제로아워알렉시스 알렉산더는 오로라 알파 폭격기 4대만 뽑으면 사실상 이긴거나 다름없다...그러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 등장하는 HsB-02도 폭격기 무적론의 산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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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조종사이자 항공기 제조업자.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인이 되었다. 폭격기 만능론을 펼쳤던 사람중 하나로서, 전략폭격의 유용성을 예견한 사람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세베르스키 항공제작소'를 운용했는데 훗날 이 회사는 리퍼블릭사가 된다.[2] 르메이 장군 본인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 훈련을 받아본 뒤 폭격이란 개념에 완전히 뿅 갔다 당시 프롭 전투기가 지니는 근본적인 역할의 한계를 실감하고 폭격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거기에 그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이 당시 미군이 발주한 폭격기가 바로 B-17이었다.[3] 그래도 나중에 미군은 B-25 폭격기에 "미첼"의 이름을 붙여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4] 대동아전쟁 전훈 연구조사자료, 1945년 9월 발표. # [5]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 의 저자 유라 후지오가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