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고종대왕 일대기/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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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시아
2.6. 유구[1]
2.7. 기타 아시아
3. 유럽
4. 동토
4.1. 러시아 제국 → 러시아 공화국
5. 중동
6. 아프리카
7. 오세아니아
8. 아메리카
8.2. 기타 아메리카
9. 주요 사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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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고종대왕 일대기바뀌게 된 역사를 요약한 문서.


2. 아시아[편집]



2.1. 조선 → 대한제국[편집]


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참고.


2.2. 중원[편집]


중원(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참고.


2.3. 일본[편집]


일본(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조.


2.4. 몽골[편집]


독립의 기쁨도 잠시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무대가 됐고 대한제국의 일부로 편입됐다. 원 역사에서는 청의 멸망인 신해혁명 이후에 독립을 제대로 시도했지만, 바뀐 흐름으로 조·청전쟁 이후 몽골친왕 생게린첸이 몽골팔기를 이끌고 내·외몽골 초원 전역과 중원 사이의 길목을 봉쇄함에 따라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빠르게 독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 바뀐 것은 원 역사에서는 외몽골만이 독립에 성공한 데에 비해 여기서는 내·외몽골 전체가 독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친조선적인 부족이 아직 많은 내몽골과 친러시아적인 부족이 많아진 외몽골의 대립으로 원 역사에서는 없었던 몽골 내전을 겪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 게다가 몽골 내부의 칸이 정해지지 못한 터라 칸위를 둔 경쟁이 예견되어 있다.[2] 현재 친조선파인 내몽골의 부족들이 대한제국 칭제건원식[3]에 참석해서 주인공에게 러시아 쪽 외몽골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선봉에 서는 것을 약조받은 터라, 몽골 내전은 확정에 가깝다. 그리고 러시아의 사주로 외몽골 부족들이 내몽골에 선제공격을 감행하며 몽골 내전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이 청에서 10만 이상의 군을 징집해서 지원하는지라 몽골군은 보조전력에 가깝다고.

그리고 셍게린첸은 대한제국 황제 이형과 만나 그를 대칸이자 정당한 초원의 지배자로 섬기는 대신 몽골 초원의 군수통제권, 외교 허가권을 넘기고 자신들이 거둔 조세의 10%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외의 모든 권한에서 자치를 인정받는다. 군수와 외교야 종속을 청한 순간부터 내어줄 것이 예정되었지만, 종교·교육·정치·문화 등 나머지 모든 것에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했으니 청국에 종속되었던 시절보다 나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정교를 강요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러시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 몽골의 민심은 빠르게 대한제국을 향해 기울었으며 이로서 승기도 내몽골이 잡은 상태다. 이 조약은 셍게링첸의 예상보다도 훨씬 나은 조건이었고, 대한제국 유림들이 보기에도 몽골 오랑캐에게 해주기엔 너무나 호조건에 표면적으로 대등하며 조청관계보다도 나은지라 불만을 가진 유림들이 상소문까지 올렸을 정도였다. 이형은 비웃으며 무시했지만.

다만 강남 쌀값 사태로 대한제국이 몽골 내전에 집중할 수 없는데다 러시아 또한 이러한 사정을 알고는 대한제국이 제안한 휴전을 거부하고 내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여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이 때문에 범아시아 조약기구 가맹국들 중 유일하게 강남 대기근을 구제하는 활동에서 제외되고, 장강을 건너온 난민들 중 가족들의 생계 보장을 조건으로 징집된 의용군 20만 명을 지원 받아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미 러시아 기병사단을 비롯한 외몽고 군을 수세로 몰고 가서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있다고, 이형은 러시아에게 위구르 방면 진출을 인정할 테니 물러가라고 요청하지만 러시아 차르가 또(…) 상황을 오판하고는 버티기에 들어가는 바람에 외몽골을 완전히 뒤엎어야 할 지도 모른다. 값비싼 광물이 풍부한 외몽골 지역의 특성을 주인공이 알고 있다면 내전이 진정되고 난 뒤, 의용군을 노동력으로 전환하여 대대적인 광업 붐이 일어날 듯.

그러나 이미 자민족 내의 구심점을 잃고[4] 대한제국의 일원화되어가는 만주 지역과는 다르게 여전히 몽골 독립에 대한 미련이 강했기에 이형이 러시아 상대로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자 불만을 품은 족장들이 러시아를 몰아냈으니 조선과도 연을 끊자며 반역할 의지를 드러낸다. 그들 주장으로는 애당초 그들도 몽골의 전사들 덕을 보았으니 거래가 끝난 거 아니냐고 주장하지만…애당초 자신들이 서태후 명으로 조선을 침공한 일이나, 압도적 소수의 러시아 군에게 쫓겨다니던 일은 생각도 안나던 모양. 셍게링첸은 이딴 소리나 나올 줄 알았다면 나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거절했지만 그의 권위도 약해진 지라 상당히 불길한 상태. 그러나 누구든 알다시피 현재 몽골 군사력은 대한제국이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정리될 수준이다. 결국 러시아 측과 적당히 입을 맞춘 대한제국과 셍게링첸 본인의 암묵적 동의 하에 불만을 품은 부족들을 선봉으로 세워 총알받이로 보내버리고 그 결과 셍게링첸 측의 부족들은 별 피해 없이 대한제국군의 지원 하에 빠져나오지만 선봉에 선 부족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전멸당하거나 산산조각나 마적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행히 베를린에서 열린 종전 협상에서 외몽골까지 대한제국령으로 인정받으면서 몽골친왕 셍게린첸이 동군연합 통치 방식에 따라 대칸인 이형 대신 모든 몽골 지역을 대리통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간이 흘러 만국박람회 이전에 셍게링첸은 수명을 다했고, 젊은 부족장들이 뒤를 잇는다. 한반도의 조정에서는 젊은 부족장들이 어린 시절에는 대한을 역으로 토사구팽할 만용을 보였다 총알받이로 버려진 역도들의 동지란 사실을 알기에 고삐를 놓지 않고 계속 주시하는 중. 일단 대한 외에는 굳이 몽골을 탐낼 수 있을만한 세력도 아시아에서 사라져가는데다 큰 차별을 한다는 말도 없으니 반역의 가능성은 낮다.

2.5. 대만[편집]


중국의 휘하였다가 전주이씨 왕조를 받아들였다. 원역사에서는 타이완섬은 당시 청 제국과 일본 제국이 충돌하는 지역으로서, 청제국이 계속 지배하다가, 결국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식민지로 통치하게 된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서태후의 삽질로 인해 이홍장이 중화제국을 세우고, 그가 타이완을 열강에 할양함에 따라 영, 불, 미, 화[5] 4개 열강이 공동관리하다가 일정 기한 후, 독립정부를 구성하게 될 예정. 4개 열강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곳이라고는 하나, 영국이 사실상 4개 열강 중 제일 큰 영향력을 끼쳐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다. 영국은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보며, 중화제국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6] 대만을 철저히 중국 대륙에서 분리시키려는 정책을 하나 둘 추진했다.[7] 그와 동시에 대만군을 창군하고 행정 조직을 완비하는 등의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일 또한 진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치체제가 난관이었는데, 공화정은 미국만이 채택하고 있고, 동양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 왕정으로 가려고 하니 누굴 왕으로 추대하냐가 문제였는데,[8] 결국 극동에서의 떠오르는 태양으로 부각한 대한제국에서 왕을 모셔오기로 결정.[9] 그 결과, 주인공의 친형인 흥친왕[10]을 대만의 왕으로 옹립해 대만 왕국으로 건국하였다.

1871년 봄이 되면서 영국 상인들과 친영파 상인들이 쟁여놓은 쌀마저 떨어지는 바람에 대만에도 기근이 들었지만, 다행히 잉여 수확량이 많았던 일본에서 보내주는 구휼미 덕분에 급한 고비는 넘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하응이 대만의 국왕 이희조차 모르게 쟁여놓은 금괴로 세력 기반 마련을 위해 주식회사 포모사로부터 대만의 토지를 사들였다가 얼마 없는 대만의 자영농들을 수탈하는 그림이 나와버리면서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11]

그렇지만, 대만의 국왕으로서 자리를 잡으려는 이희[12]가 이에 크게 반발하여 서로 대립하였고 대한제국에 중국 번왕 책봉식 참가를 희망하는 국서를 보내고, 국서를 받은 고종이 토마스 공사를 통해 대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고는 황후와 박규수 총리에게 이 문제를 처리할 권한을 맡겼다. 이에 황후는 이하응의 사람들을 추려내 소금을 사는걸 핑계로 조선에 오게하여 은근슬쩍 비리를 흘리게 하였고 이 소식은 곧 일파만파 퍼졌다. 대만의 민심이 이반하여 대한제국에게 등을 돌릴 것을 우려한 유림들이 대한일보의 최익현이 상소글을 신문에 올린걸 시작으로 집단으로 흥선군에 대한 탄핵을 주청하면서 흥선군을 실각시킨다.

그리고 흥선군이 수탈한 토지들은 실질적으로 왕실에 귀속되었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이희는 땅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에게 세금을 면하는 조건으로 귀속된 농지들을 소작하게 하면서 민심을 끌어올린다. 또한, 자신이 왕재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대만의 국왕으로서 정착하려는 의지가 강한 그가 대한제국에 의지하여 대한제국처럼 유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내정 정비를 추진하면서 대한제국과 대만과의 관계가 밀접해질 듯하다.

이후 회맹마다 이희가 동녕왕으로 직접 참가하며 형제들과 꿍꿍이가 있는 듯한 타 번왕들을 견제한다. 대한 패권의 확고한 지지층인 듯. 덩치는 작지만 황제의 형이라는 위상으로 그럭저럭 존중받는다.[13]


2.6. 유구[14][편집]


일본 치하 속국으로 있다가 독립왕국이 되었다. 실역사에서 유구, 즉 오키나와는 사쓰마 번의 지배를 받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일본으로 합병되어 오키나와 지방으로 현존하는 곳이나, 여기서는 일본 내전인 무진전쟁이 역사와 달리 막부 측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며 삿초 동맹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삿초동맹 잔류파들이 몸을 피할 곳으로 오키나와를 공격, 왕성인 슈리성을 장악하며 오키나와 공화국을 설립한다. 원 역사에서 대정봉환 이후 몰락한 도쿠가와 막부의 잔당들이 홋카이도로 도망쳐 에조 공화국을 만들었던 역사를 완전히 정 반대로 비틀어 버린 셈. 이 사이에 혼돈을 틈타 도망친 유구국왕 상태[15]는 목포에 도착해 대한제국 수도로 향해 황제인 주인공을 만나 도움을 요청, 잔류파의 병력이 300명 뿐이라는 정보를 받은 이형은 보병 1개중대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상륙문제는 석탄운반선에 태워 상선으로 위장한 다음 일본이 불평등조약상 열강의 배는 검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강행상륙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삿초 패잔병들은 단번에 박살났으며 살아남은 잔류파들은 유구 왕국을 침탈한 해적으로서 유구 왕국에 그 처분이 넘겨졌고, 유구 왕국은 잔류파들을 가차없이 해적으로 사형, 긴 세월 자신들을 억눌러왔던 사츠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기에 이른다. 일본에 완전히 흡수되던 원역사에 비하면 구원 그 자체.

한편 헛바람이 든 대한제국의 일부가 유구를 식민지화하자는 생각을 품었으나, 이형의 코웃음 한방에 무산. 유구 왕국은 완전히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속하게 되었다. 사실상 일본판 홍콩이 된 셈인데 무역항으로 굴려먹는 홍콩과 달리 어떻게 굴러갈 지는 미지수다. 영국에서는 고종을 계속해서 시험한다고 가지는게 어떻겠냐고 떠보지만, 고종은 바다 쪽은 당분간 건드리지도 않을 생각이라 거부. 오히려 고종이 보호국으로 삼는게 어떻겠냐고 되묻자 영국도 조그마한 땅덩이에 외교력을 낭비하는게 아니냐며 거부. 결국 대한제국과 영국의 밀약에 의해 한일 공동 보호국으로 성립, 대한제국과 일본이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기로 했다.[16] 영국에서는 괜히 동아시아 전체를 상대하는 것 보다 대한제국과 (대한제국에게 종속된) 일본만 상대하면 된다는 것에 만족하며 허락한 상황. 대신 이 허락을 얻기 위한 회담에서의 영국의 태도 때문에 고종이 회담이 끝나고 고량주를 홧술로 들이키게 된다.

이후 공기화되나 싶었지만 영국이 조장한 강남 대기근 사태로 인해 자기 세력권으로 사태가 확산되는 걸 원치 않았던 이형에 의해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대 중화제국 창구 역할을 하면서 난민들을 일본으로 수용하거나 각종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중화제국이 청과 대한제국에게서 직접 구호를 받으면 중원의 백성들 모두가 천명이 그들에게 옮겨갔다 믿을 테고, 그렇게 되면 한족의 천명 탈환을 기치로 들고 일어난 중화제국의 사상적 존립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거부할 게 뻔했을 것이므로. 그래서 사실상 대한제국의 영향권이나 다름없는 유구를 내세워 구호활동에 나선 것이다. 게다가 유구와 중화제국 둘다 일단 영국의 영향권 하이기 때문에 반발이 적었던 것도 한 몫 했다.

대한제국 중심의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무술 문화에서도 유구의 공수도가 채택된다. 이외에도 범아시아 조약기구 연합해군 훈련을 유구 일대에서 시행하는 등, 사실상 조약기구의 일부로 취급받고 있다. 유구 국왕 상태는 단오축제에서 일본 함대를 경계하며 유구 군도를 요새화해 일본 함대를 막을 방도를 구상하고 그 일환으로 최지용 보총을 대량구매한다.

범아주 조약기구가 공고해진 후에도 당당한 투표권 보유국가로 나름 잘해가는 모양. 제법 큰 항구를 건축했는지 각국 배들이 들렸다 간다고 한다. 결말에서는 나름 강한 자치권을 얻었는지, 어느정도 독립적인 위치에 올라선 것으로 묘사된다. 한편 대마도가 류큐처럼 중립지대 섬나라가 되는 것을 지지하나, 이형이 의욕을 보이지 않자 손을 뗐다.[17]


2.7. 기타 아시아[편집]


동남아시아의 경우 나폴레옹 3세의 아시아 진출 정책으로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여 코친차이나를 확보한 상태였다. 그러다 나폴레옹 4세의 아프리카 진출 정책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적자인 코친차이나를 대한제국에 매각하기로 결정했으며, 여러 사정으로 인해 현재 프랑스가 대한제국을 대신하여 대리통치를 하는 중이다. 더불어 응우옌 왕조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후 영불전쟁 중에 동남아시아가 완전히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편입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중앙아시아의 경우 이후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부하라 칸국히바 칸국 그리고 코칸트 칸국이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에 들어갔다.

남아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친러정책을 실시하게 되고, 이에 영국이 개입하게 된다.


3. 유럽[편집]


주인공의 활약으로 인한 작중에서의 조선의 급성장으로 인해 제일 먼저 프랑스가 이득을 크게 보았고[18], 영국, 미국이 그 뒤를 이어 이득을 남겼다. 러시아는 열강 중에서 외교참패로 인해 막심한 손해를 보았다. 또 주인공의 행동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인해 북독일 연방과 그를 이끄는 프로이센 역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예정. 그리고 영국은 자신들의 무지와 오만으로 그동안 획득한 이권을 송두리째 상실하게 될 예정이다. 보불전쟁이 원 역사 이상으로 확대될 것이 예견되었기에 벨 에포크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것이 중론. 원래 역사보다 1차 세계대전이 빨리 발발할 기미가 보이고 있고 드디어 개전하였다.

이제 실제 참호전을 타파해 보려고 별의별 짓을 하다 실패하고 인명손실을 거듭한 끝에 탱크가 등장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탱크 같은 걸 개발하려면 수십 년 정도는 기술이 부족한 현 세계에선 참호전의 타파는 정말이지 답이 없는 문제가 된다. 비록 아직 맥심이 나오기 전이라 미트라예즈나 개틀링 포가 지원화기랍시고 참호에 설치된 토치카에 앉아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골때리는 건 기관총은 또 저 시기면 언제 나와도 기술적으로 이상하지 않다. 온갖 인간의 창의력과 혁신과 그걸 실현할 현실적 자원이 전쟁 수행이라는 방향으로 총동원되는 전시이며, 안정적이고 편리한 기관총에 대한 수요가 있고 그걸 받쳐줄 근본적인 기술력이 있는 만큼 맥심 같은 진보된 기관총이 등장하는 건 시간 문제다. 이 시대 사람들이 무슨 창의력을 발휘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탱크라도 만들 게 아닌 이상 좀 더 많은 피가 흐르고 소모전으로 열강들 모두가 피폐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가장 먼저 참호전 교리를 완성한 프랑스군, 그들과 싸우며 이골이 난 프로이센군이 참호전에 가장 잘 적응한 걸로 보이는데, 조선에서 고종의 고문으로서 근무하여 참호전 교리의 강력함을 제일 처음 인식하고 받아들인 루이 베르그송 중장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인명을 중시하는 그의 성향에 따라 개인의 방호력과 근접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막대한 프랑스의 재정을 바탕으로 정예 보병인 척탄병들에게 흉갑과 산탄총을 무장시킨 장갑척탄병들을 앞세워 참호전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있다. 적들의 연사화기가 잘해봐야 개틀링 수준인 참호선을 돌파할 때는 대부분의 총탄에 저항력을 가지면서 방탄복도 없는 적들을 상대로 근접전투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과시하는 산탄총으로 무장한 이들을 선두에 세운 돌격전술로 적들의 참호선을 최소한의 피해로 돌파하고, 이와 반대로 방어전에서는 다중의 방어선을 연결하는 지하 땅굴들을 파두고 적들을 유인한 뒤, 방어선을 점령한 적군에게 땅굴을 통해 이들을 투입하여 기습하는 등 큰 성과를 내고 있는데, 기관총탱크, 원뿔형 탄두[19], 무연화약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이 장갑척탄병들이 전장을 지배할 것으로 보이고, 훗날 작중 세계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 육군의 정예부대 단대호 앞에 장갑척탄병이란 수식어가 붙을 듯하다.

한편, 프로이센군은 파리그라드에 40만 장병들의 피를 쓰라린 수업료로 지불한 뒤,[20]프랑스군이 선보인 참호 전술을 스펀지마냥 흡수하고 재생산해 프랑스군에게 라인란트에선 10만 명의 사상자를, 고작 민병 따위 밖에 없던 하노버에선 수천 명의 장갑 척탄병을 갈아먹었고, 베를린에는 루이가 파리에서 선보였던 미래의 전장[21] 이상의 방어선을 만들어 프랑스군을 맞이(...)할 준비를 해놨다고 한다. 대 몰트케가 처음 본 파리 방어선을 고작 40만의 병력으로 함락시키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만큼, 그가 있었더라면 공세측으로서 참호 돌파에서도 루이 이상의 전술을 고안해 낼 수 있었을 듯 하지만...어찌되었든 프로이센은 주력을 잃고 당분간은 수세로 전념할 터라 이 부분에서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듯하다.

3년 간의 전쟁으로 양측 모두 3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대부분이 몸이 불구가 되는 중상자였다. 보불전쟁때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 비율에 비웃던 유럽 시민사회도 3년 간의 전쟁에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에 경악하였고 결국 영국을 제외한[22] 참전국 모두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긴 채 제1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고, 베를린에서 종전협의가 이루어진 후 최종협정은 베이징에서 하기로 결정된 상황이다. 그러나 세간의 평에 따르면 '단지 10년간의 휴전에 불과할 협정'인데다가 그 누구도 원하던 목적을 이루지 못한 터라 재전의 불씨는 언제든지 재점화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중에서 가장 재점화 가능성이 높은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가장 중요한 건 몰트케가 패장이 된 바람에 원 역사에서 승장이었던 그가 애독한 덕분에 공전의 히트를 친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유럽에서 유명세를 탈 기회가 없어지면서 '전쟁학'의 이론적 체계를 잡을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23] 그 때문에 유럽인들은 '전쟁학'을 몸으로 부딪쳐 가며(...) 배우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베를린 종전 협상장은 개판 5분 전의 상황이다. 당사국 모두의 내부에 있는 사회주의 세력들의 준동을 제압하는 데는 일치단결하고 있으나[24], 가장 중요한 영토 협상에서 난항을 보이고 있기 때문. 진영 간 대립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각 진영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려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전투구의 장이 따로 없다.

그 와중에 미국 전권대사로 베를린에 온 러더퍼드 헤이스 오하이오 주지사의 주선으로 대한제국 전권대사로 파견된 박규수 총리가 러시아 제국 전권대사 알렉산드르 대공과 캄차카 조약을 체결했는데, 알렉산드르 대공과 그의 수하로 들어간 미하일 체르나예프와 나눈 대화를 통해 러시아 제국이 오-헝(신성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발칸 방면으로의 진출과 러시아령 폴란드 수복을 획책하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10년도 채 안 돼 전쟁이 재발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설상가상으로 독일발 서유럽 금융공황이 터지면서 자국 안정화와 식민지 사수가 급해진 협상국의 양대 거두인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회군함에 따라 오-헝(신성로마) 제국은 거저먹기식으로 '대독일 신성로마제국' 완성,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축인 프로이센은 공화정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에 의해 호엔촐레른 왕가의 귀환으로 왕정복고, 러시아 제국은 후방에서 모은 병력들로 폴란드를 재점령하면서 종전 협정의 주도권을 동맹국이 가져가고, 그 결과 동맹국들이 원하는 대부분이 관철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금융공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영국 보수당 정권은 차기 총선에서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나마 관리에 성공한 프랑스는 정치권에 대한 군부의 입김, 여기에 더해 여론적 측면에서는 민족주의가 더 강해져 전체주의나 국국주의로 변질될 것으로 보이며, 미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형의 지지를 받은 카네기가 동부의 산업시설을 서부나 대한제국으로 빼내는 작업에 시동을 걸면서 동부와 서부의 경제력 격차가 역전되는 한편, 캄차카 조약 중개와 태평양 패권에 대한 미국 우위를 대한제국에 인정받는 덕분에 공화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미 관계가 더 끈끈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오-헝(신성로마) 제국은 어찌됐든 끝끝내 '대독일 신성로마제국'을 완성했고, 이들과 동맹 관계인 러시아 제국도 폴란드를 재점령하고 발칸 소국들을 독립시킴으로써 지중해와 북해 양쪽을 통해 바다로 진출하는 길이 열렸다.

때문에 기존의 그레이트 게임이 영-프와 오-러 간으로 규모가 확장된 그랜드 그레이트 게임이 한층 더 격화될 것으로 보이고, 결과적으로는 대한제국과 미국 서부에 유리하게 국제정치가 흘러갈 듯하다.

그런데, 오-헝 제국과 대영제국이 스톡홀름 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 영국: 대공황으로 나라살림이 엉망이 되어 적극적인 대륙 정세 개입이 어려워졌으며, 헨리 8세 이래의 전통대로 유럽 대륙의 단일 패권세력이 출현하는 것을 경계
  • 오-헝 제국: 내부 수습과 더불어 발칸 발면에 10만 병력을 주둔시킨 채 끝없는 서진과 해양 진출 야망을 드러내고 있는 러시아 제국과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프랑스 제국의 샌드위치 신세가 되는 것을 경계

이처럼 오-영 양국이 각자에게 못 미더운 동맹인 프랑스와 러시아에 대한 견제에 나서자, 이에 분개한 프랑스는 대한제국에 대한 인도차이나 매각 의사 타진을 추진하는 등 아프리카 정복을 서두르려 한다.

그리고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발발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복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의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에 대한 러시아와 영국의 대결을 계기로 페르시아의 자주권과 발칸반도의 신생국들내의 영토와 종교 및 민족대립 문제 그리고 아프리카의 미개척지에 대한 분할 문제를 논의하고자 코펜하겐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열강들 간 교섭회의가 열린다.[25] 교섭의 결과로 아프리카는 남위 5도를 기준으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지배하는 형태로 분할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으로 결국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을 하며 미국의 지원 하에 러시아와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3.1. 프랑스 제국[편집]


프랑스 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고.


3.2. 대영제국[편집]


대영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고.


3.3. 북독일 연방(프로이센 왕국) → 프로이센 공화국 → 독일연방공화국프로이센 왕국[편집]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해 중국, 러시아와 더불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

작중에서 원 역사에서 프랑스가 차관을 대주었던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부설을 위해 자금과 기술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입장을 표명하면서 등장한다. 하지만 독일은 당장의 독일 통일문제와 프랑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공수표에 지나지 않을 게 뻔하다. 작중 대놓고 '프랑스가 러시아와 조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러시아의 모든 신경이 극동에 쏠린 틈을 타 중부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라고 언급된다. 문제는 보불전쟁 도중, 나폴레옹 3세가 전투 중에 사살되는 일이 발생해버렸다.[26] 자칫하면 국가 단위의 캐삭빵으로 확대될 수도 있는 상황. 실제로도 황제의 돌격&전사 소식에 참모부까지 멘탈이 나가버려 대 몰트케가 아니었다면 기세[27]에서 밀려서 패할 뻔했다. 다행히, 몰트케의 일갈[28] 덕분에 정신을 차린 북독일 연방군이 간신히 이겼지만 20만 병력 중 반이 전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복수를 위해 코뮌이건 왕당파건 공화파건 할 것 없이 '황제 폐하 만세'와 '프랑스 제국 만세'를 외치며 새 황제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해 북독일 연방과의 모든 외교를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선언, 알자스 로렌의 독일계 주민들마저 프로이센을 잡아 죽이자 라는 구호 아래에 대규모로 집결해서 대프로이센 게릴라 항전에 참가하면서 그야말로 막장으로 치달았다. 결국, '후퇴해서 현재를 보존하는 대신 미래를 잃던가, 전진하여 현재와 미래 전부 지옥에 던져넣던가' 양자 택일에 몰린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제시한 최단시간 내에 파리를 점령, 의회와 황제를 붙잡아 협상카드로 삼는 승전 코스를 선택하지만, 하필 '조선의 승리를 가져온 원동력으로 알려진' 루이 베르그송 소장이 파리 수비대를 맡으면서 요새도시 파리 외곽에 당대 수준으로 효용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3중 참호선을 박아넣은 상태이기에 단기전이 불가능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애초에 장기전으론 프로이센에게 승산이 없다는게 중론이다 보니 캐삭빵의 패배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된 상황. 그거면 다행인데, 비스마르크가 복지정책을 펼칠 여지조차 남지 않은 터라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협상조차 불가능한 상황. 즉, 잘못하면 원 역사의 러시아 혁명 대신, 독일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까지 생기고야 말았다. 그리고 40만이나 되는 북독일 연방군이 파리 공방전에서 모두 녹아내리고 지휘부까지 사로잡히면서 전쟁을 주도한 프로이센은 망했어요 확정. 그나마 이 천하의 파리그라드를 뚫기 직전까지는 갔는데 이는 명실상부 대 몰트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정규군은 아니지만 무려 16만이 지키고 있던 참호 도시를 겨우 3배 차이인 40만으로는 함락 직전은 커녕 1차 방어선도 뚫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도 프로이센이 망했다고 하면서도 처음 보는 3중 참호진을 불리한 상황에서도 뚫기 직전까지 간 몰트케의 능력은 인정했을 정도. 필사적으로 전력을 갈아넣은 몰트케의 사령부는 호위하는 병사 한 명 없이 피로 물든 파리를 돌아보면서 외로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심지어 몰트케조차 왼손바닥에 검지 손가락이 들락날락 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생겼다고 하니 전투가 얼마나 참혹하게 진행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이형과 나폴레옹 3세를 아주 씹어버릴 듯 이를 갈고 있는 것은 덤.

그러나 프랑스가 루이 소장의 전공을 시기한 군부 상층부의 삽질로 시간을 낭비한 덕에 국가의 명줄 보전을 위한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해 프랑스에서 간신히 돌아온 참모들과 병력들을 수습하고 마지막 예비병력들을 긁어모아 군을 재정비하고, 루이에게 뼈아픈 수업료를 내고 배운 대로 독-불 국경지대인 라인란트에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이제 라인란트 방어선이 얼마나 제 구실을 해주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갈릴 상황. 다행히, 인명을 중시하는 루이의 성향 덕분에 6개월 동안 프랑스군을 막아냈고, 그 사이에 오스트리아에게 고개를 숙여 합스부르크 주도의 독일 연방이 만들어지는 조건으로 그들의 지원을 이끌어낸다. 여기에 더해 동 프로이센에 러시아군이 주둔하는 것까지 받아들인 듯. 이로써 원 역사와 달리 말석이나마 열강 대열에 합류하는 건 포기해야 할 판국이다.

결국, 라인란트 방어선은 기존에 배치한 병력에 추가 증원한 병력, 오스트리아의 지원군까지 퍼부었음에도 산탄총과 흉갑으로 무장한 장갑 척탄병들을 앞세워 진격한 프랑스군에게 돌파당했고, 하노버까지 점령당한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요청에 따라 서진한 러시아군이 북독일 일대에 주둔하는 것까지 받아들이는데, 후방 지역인 동프로이센에서는 프랑스의 사주를 받은 폴란드인들의 봉기가 일어날 조짐까지 보이는 등 치욕의 역사를 갈아치우는 중.

그러나 이에 더해 10만의 예비전력 밖에 안 남은 덩치와는 별개로 프로이센 참모본부의 역량은 건재하여 이미 베를린을 파리를 능가하는 요새로 마개조한 지 오래였기에 루이가 베를린 공략을 뒤로 미루고 주변 정리부터 시작하게 만들었다. 적들의 우수한 전술을 빠르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솜씨는 루이와 조제프조차 인정할 정도. 하지만 라인란트 방어군과 하노버에서 패전하고 예비병력 10여만 군사밖에 안 남은 프로이센은 이제 베를린 방어조차 버거운지라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기에 이들의 진언은 무시되기 일쑤라고 한다. 참호전에 질리게 단련된 프로이센군이 '라인 공방전과 하노버 공방전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민병대 따위로 수천이나마 프랑스의 정예 척탄병들을 하느님과 면담시켜 준 게 참호 덕분이었다!'라며 공격할 거면 산개 대형으로 공격하라고 강권했지만, 아직도 낭만주의에 심취한 두 나라 군대의 지도부는 이를 비웃으며 평소 하던 대로 전열을 갖춰 공격하게 시켰고, 그 결과 50여만의 병력 중 21만을 잃는 대참패를 맛보았다.

나라 안의 젊은이들을 대부분 상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지라 베를린같은 주요도시를 방비할 병력도 모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7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는 놀라운 동원력을 선보였지만 후반에 동원한 30만은 민병대 위주란 서술도 있고, 그것들조차 라인란트 방어선과 하노버 등지에서 거의 상실하고 이젠 10만 병력 정도가 제대로 된 편성군대의 전부라고. 애당초 단순 인구수와 생산력으로는 대국 프랑스에게 한참 밀리기도 하니... 이형은 독일 일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판국으로는 설령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번성한다해도 이미 쇠락한 프로이센 연방의 힘으로 확산될수나 있을지 의문.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죽은 남편(앨버트 공)의 넋을 위로하는 방법으로 프로이센을 도와주기로 결정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숙인 작센 공작(앨버트 공의 형 에른스트 2세)이 죽은 앨버트 공을 팔아가며 도와달라고 꼬드겼기 때문인데...그러나 현재 대영제국의 육군 역량이나 위치 등이 프랑스, 오-러 연합 어느 쪽에도 전쟁 수행에 심대한 지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실낱 같은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패전에 이어 오스트리아에게 복속된다는 사실에 국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자유주의자들과 적과의 동침을 택한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프로이센 공화국이 성립, 빌헬름 1세를 위시한 기존 권력층들은 오스트리아로 도피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의 독립을 밀어주기로 한다. 물론 상당수의 제후국들은 오스트리아를 따르고 있고 이 때문에라도 주 격전장이 독일이 될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예측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장으로서 혹사당하지만 프로이센 공화국은 존속하게 된다. 그렇지만 원래 역사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닌데 프로이센의 영토만 보존[29]되었지 혁명으로인한 내정의 혼탁함과 전란으로 인명 상실과 함께 신생 신성로마제국에게 포위당한 상태이면서 내부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미텔유로파 공화국을 선포하나 영프연합군에게 곧바로 갈리는 걸로 공산주의 세력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초토화된 국토를 가지고 영국에게 약속했던 국채, 사실상의 승전국인 프랑스가 노릴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데...[30] 박규수 총리와의 협상을 마친 알렉산드르 대공을 찾아온 미하일 체르나예프 중장의 보고에 의하면 독일 연방 공화국이 파산을 선언했다고 한다.

그 여파로 서유럽 금융공황이 터지면서 공화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급격히 악화되고, 협상국의 주력인 영국과 프랑스가 본국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대독일주의가 압도적인 여론이 되어 입헌군주정을 조건으로 왕정이 복고됨과 동시에 '대독일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종전 협정에서 홀슈타인을 덴마크에게 반환하면서 국력이 더 쪼그라든다.

그나마 프로이센 왕국에 희망이 있다면 금융공황의 여파로 국민들이 공화정에 크게 실망한 결과, 입헌군주제 수용 조건이나마 호엔촐레른 왕가가 귀환하면서 비스마르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공화정을 주도한 독일 민주당의 지지율 저하가 예측되는 만큼 비스마르크가 칼을 갈고 자본가들과 융커, 군부 등을 규합하고 왕실의 지지까지 등에 업어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된다면 그의 정치적 수완에 대 몰트케 재기용 등으로 국력을 재기할 기회가 프로이센 왕국에 주어지는 것.

그렇지만, 스톡홀름 조약 결과 프로이센 왕국의 부채를 오-헝 제국이 대납하기로 하면서 오-헝 제국에 종속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프로이센의 흥망이 갈릴 듯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암살위협을 무릅쓰고 프로이센 주요 도시들을 시찰하며 보복이 없음을 약속하면서 안정을 시킨 프리드리히 3세가 지난일로 낙심해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에게 양위를 받아 국왕이 되었고, 프랑크푸르트의 제후 회의에서 영국과의 공조 강화[31]과 러시아의 오스만 침공에 개입하여 십자군 전쟁으로 판을 짤 것을 제안한다. 이와 더불어 몰트케 지휘하의 의용군을 십자군으로 만들어 참전시키자고 주장한다.

헌데....이 의용군은 단순한 의용군이 아니었다. 병력 대부분이 장교단과 부사관 위주로 구성된, 말 그대로 정예 중의 정예 엘리트 집단이었다는 것. 전간기를 아는 이들이라면 이게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한스 폰 젝트가 지휘하던 독일 육군에서 모티프를 따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의용군이 그리스군을 지휘하면서 오스만의 침공을 물리치고 반격을 가하면서 보불전쟁의 실패로 실추된 위상을 다시 되찾는다. 물론 발칸에서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의 대립이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후 러시아와 영국이 페르시아로 그레이트 게임을 확장시키자 영국과 네덜란드와 함께 관세동맹을 맺고 프랑스 금융자본을 유치하려 하는 등 신성로마제국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프랑스에게 머리를 숙이며 대한제국과 접촉하여 기술을 조건으로 아시아 진출을 하려한다.[32] 당연히 독일의 기술을 원하는 이형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만국박람회를 핑계로 독일과 협력한다.

물론 프랑스의 노골적인 방해는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관계가 개선되는 중이며, 강릉에 맥주공장이 건설되면서 집성촌이 형성되게 된다.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면서 경제의 숨통은 트였지만, 북독일 지역 자체가 대독일이란 거대한 제국에서 외면당하는 신세라서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프리드리히 3세가 질병과 노화로 일선에서 버티지 못하고 병상에 눕자 아들인 태자 빌헬름 2세가[33] 나라를 이끌었는데, 프리드리히가 태자를 못미더워해 양위해주지 않음에도 오랜 병상생활 중인 아버지 대신 사실상의 실권을 손에 쥔 빌헬름 2세가 이탈리아와 협조해 신성로마제국과 개전한다.

우수한 전술과 기습 공격으로 연전연승하나 보헤미안까지 점령한 시점에서 경제적 군사적 여력이 떨어져 수세를 취한 상황. 러시아 부근에 파견했던 극좌의용병들이 귀국해 다시 징집되면서 점점 군부에서 기세를 높이면서 체제가 위험해진 상황이다. 인적자원이 충분한 프랑스나 거국적 위기에 좌우 나누지 않고 똘똘 뭉친 이탈리아와는 달리 프로이센은 여유도 상황도 없었던 것. 그러나 아직 실상을 보고만 받았지 체감하지 못한 빌헬름 2세는 이 와중에 영국에서 전한 대 아시아 상대의 연합 제안을 과하게 확대해석해 불가능한 십자군을 구상함으로써 오히려 영국의 불안을 산다. 프로이센 비롯한 북독일이 두번째 세계대전에서 우세한 국력을 유지한 원천 중 하나는 당연히 아시아의 단골들이다. 이걸 잘 아는 영국은 어이를 상실해버린 상황.

여담으로 집성촌이 생기기 전까지 대한제국에서 프로이센은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았다. 거리가 멀었던 상태에서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교류를 방해했기 때문이며, 그나마 사관학교 생도들이나 정부 관료내지 신진 지식인 정도가 전쟁론을 통해 아는 정도지만 그나마도 특유의 군국주의와 대략적인 위치정도다. 게다가 범아시아 조약기구에 대한 이론인 일주일제론을 낸 전창혁도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각 유럽과 동토의 황제라 칭했기에 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강릉에 프로이센인들이 건설한 집성촌이 생기고,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이 이루어진 서해안이나 남해안이 아닌 동해안에 형성되었기에 더욱 시선을 끌었던 것. 때문에 공사를 하는중 아직 유럽에 가보지 못한 신지식인들에게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받아야했다.[34] 이걸로도 모자라서 독일인에게 생명과도 같은 맥주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맥주공장 설립허가도 받았기에 더 시선이 끌렸다. 이형은 독일산 진짜배기 맥주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허가를 내렸다는게 개그포인트.[35]


3.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편집]


주인공의 등장으로 인한 프랑스 다음 가는 수혜국

북독일 연방이 파리 침공에 실패하고, 프랑스가 역으로 침공할 위기에 빠지자, 프로이센과의 국경선에 부대를 진주시키고 간을 보는 중이다. 조금만 프로이센의 대응이 못미쳐도 참전할 예정으로 보인다. 프로이센도 그 꿍꿍이 속을 아는지라 일부 부대를 국경선에 진주시켰으나, 프랑스 군의 위험도가 더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할 수밖에 없다고.

결국 프랑스가 더 위험하다 여긴 프로이센에게서 우위를 인정받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도의 독일 통일을 달성한 후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할 듯하다. 이형의 예측에 의하면 프랑스를 몰아내는 순간 한 때 나폴레옹에 의해 무너졌던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게 될 거라고. 프랑스가 프로이센 침공을 시작하자 라인란트 방어선으로 병력을 지원하여 추가되는 북독일 연방군과 함께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지만, 흉갑과 산탄총으로 무장한 '장갑 척탄병'들을 앞세운 프랑스군의 돌격 전술에 겨우 10만에 불과한 피해만 입히며 방어선을 돌파 당하고는 하노버까지 내주는 등 졸전을 면치 못한다. 이후, 힘이 부치는 걸 실감하고는 동프로이센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에게 북독일 일대로 서진할 것을 요청하여 그들과 함께 프랑스군과 대치하며 지리한 시간을 보내지만, 민족주의자들의 여론을 두 나라 지도부가 못 이긴 탓인지 프랑스군을 물리치겠다고 러시아군과 함께 5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전열을 편성해 참호선 곳곳에 개틀링 토치카를 지은 프랑스군을 향해 진군시킨다. 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참호전을 이미 겪을 대로 겪은 프로이센 참모본부가 '분대 단위 산개 대형으로 돌격하라!'라는 만류와 조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오-러 연합군의 대가는 당연히 대참패. 12만 명이 사상자, 9만 명이 포로가 되는 우주대관광을 맛본다.

이후, 병력을 수습하고 전선을 뒤로 물리지만, 이탈리아와의 전선에서는 우위를 점하며 베네치아를 포위하고 이탈리아를 유린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아예 자기네 입맛에 맞는 추기경을 대립교황으로 세워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시도하려고 들 준비를 시작했는데 문제는 전령병에게 이 소식을 전달 받은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 본국을 두들겨패주러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나 오스트리아 본국으로의 침공에 대한 방어에는 어찌어찌 성공했는지, 루이 중장의 프랑스 본군은 뮌헨을 포위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카롤루스 대제의 낡은 황관을 꺼내들고 유럽의 천명이나 마찬가지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관을 대놓고 천명.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언한다. 루이 중장의 발언으로는 설령 이제 와서 프랑스가 물러난다 해도 오스트리아와 독일민족은 신성 로마 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결국 루이의 생각처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의 제안을 무시하고 기어이 신성 로마 제국을 재건한다. 러시아는 후방에서 맹렬히 번지는 폴란드 독립군을 막느라 동맹 내에서 병력을 상당수 빼고 이로 인해 오러동맹의 유일한 맹주로 떠오른 오스트리아의 질서가 독일연방 사이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 하루아침에 독일민족의 선봉에서 말단으로 추락했단 사실에 격노한 프로이센 국민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선동에 프로이센 독립을 외치며 들고일어나 왕가와 정부를 축출하자 그들의 망명을 받아주고 새로 건국된 프로이센 공화국을 공격해 단 보름만에 승기를 점한다. 그러나 베를린은 축출당한 전 정부의 손으로 요새도시화 되었으며 프랑스군이 공화국을 돕기로 하면서 전쟁은 수렁에 빠진다.

이와는 별개로 80만 대군으로 루이의 프랑스군과 싸워 20만이나 깨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후방에서 새로 징집한 30만 병력을 다시 배치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민족의 통제가 오스트리아의 손에 들어왔음이 보이는 동원력. 그러나 혈전 끝에 프로이센 공화국의 정복에는 실패, 독일 통일이라는 대업은 일단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나 소설 부록의 지도를 보면 오스트리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덴마크 서쪽과 연결되어 북해를 볼수있게 되었고, 프로이센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에서 단절시켜버린 형태에서 프로이센을 포위된 형국으로 만들고 독일연방을 오스트리아와 같은 색인 회색으로 만들면서 북부 이탈리아도 오스트리아와 면한 일부지역을 회색으로 만든 것을 보면 완벽하지 않지만 영국과의 협상을 거절하고 60년 조금넘긴 상태에서 제국은 부활되었으며 원래 역사와 비교하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으니 앞으로 두고봐야 되나 현재까지는 전체적으로 좋은 상황이라 할수있다.

프로이센 공화국의 영향으로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수만명의 시위대가 참정권 확대와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으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탄압이 아닌 타협으로 온건히 대처하면서 거의 정리되었다. 애당초 강경파는 거진 프로이센 공화국으로 몰려났고 새로 일어난 독일권 시위대는 대부분 의견통일도 안된 상태라서 카이저가 개혁을 약속하며 한발 물러서주자 다들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다만 프랑스의 맹공 때문에 뒤로 미뤄두었던 독일 제후국들과의 권한 조율이 남은 지라 여전히 골치 아픈 일이 산적한 상태. 그나마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동군연합 통치에 이골이 난 합스부르크 가문[36] 출신의 군주인 데다 제국 내 황제-제후 간 권한 조율 문제는 같은 민족인 독일계 제후국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상이고, 본인 또한 실제 역사에서도 인정 받았을 정도로 성실했기 때문에 잘 해결될 듯하다.

그러나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는 프로이센을 포위하고도 프랑스와 영국 등의 개입으로 놓친 것은 대독일주의자들과 신성로마제국 추종자들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미련의 불씨인지라 전간기의 원흉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파산으로 유발된 런던발 금융 위기로 협상국들이 휘청거리는 사이 북독일을 끌어안는데 성공, 프로이센까지 포함하는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을 거저먹기식으로 완성한다.[37] 여기에 러시아 제국과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인지 유럽대륙 횡단철도 공동 부설계획을 공표한 건 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60여 년만에 부활한 데다 지난 전쟁의 주 전장이었기 때문에 4개의 그룹이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데...

(1) 유럽 대륙에 분포된 게르만 민족들을 모두 아울러야 한다는 대중과 지식인 중심의 범게르만주의자 계열.

(2) 가톨릭 신앙의 기치를 내세워 발칸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몰아내야 한다는 남독일 제후들 중심의 보수주의자 계열.

(3) 제국 전체보다는 합스부르크의 중심인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귀족 및 일부 헝가리 귀족 중심의 오스트리아 우선주의자 계열.

(4)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의 주 전장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바람에 더 이상의 전쟁보다는 내부 재건에 힘써야 한다는 북독일 제후들 중심의 평화주의자 계열.

이상의 그룹들이 그들이다.

그 결과, 카롤루스 대제의 황관을 다시 머리에 쓰고 제국을 부활시킨 것에 만족한 듯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제는 내부 문제 해결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드러내면서 평화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오-헝 제국의 재상이자 외무장관인 귤라 안드라시가 스톡홀름에서 영국의 디즈레일리 수상과 회담을 추진한 결과, 양국의 이해관계가 거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스톡홀름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 프랑스 견제에 나선다. 그러나 사실상 백만단위의 사상자에 기가질린 프랑스도 신성로마제국도 당장 전쟁을 할 여력은 없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내부단속에 집중할 의지와 중앙집권화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와 관세동맹까지 맺으며 이탈리아에게 오스트리아의 위협을 막기위해 군사적 지원을 하겠노라 공표하자 다시 확장주의자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 그러자 프란츠 황제는 프랑크푸르트 제후회의에서 제후들의 사병을 소모시킬 요량으로 그들에게 자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기회를 보던 프로이센 왕국에서 영국과의 공조 강화와 러시아의 오스만침공의 개입 주장을 듣게된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반튀르크 전쟁을 지지하면서 프로이센의 의용병을 파견시키고 영국에게 그리스를 주축으로 한 튀르크 분할제의를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영국의 눈치를 보면서 오스만의 침공을 받은 그리스를 지지하는 것 외에는 상황을 주시만 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페르시아를 차지하면서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또 다시 전운이 감돌자 이를 중재하려고 나섰다. 오스트리아는 영국, 러시아, 그리고 바로 옆나라 프랑스와 비교해서 식민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식민지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자신들의 몫을 남길 겸 영국과 러시아를 말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독일과 적이 되면 프랑스에 대한 견제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영국과 애당초 황태자의 야심 때문에 이 사단이 나버린 러시아는 떨떠름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암스테르담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 코펜하겐에서 열린 교섭회의를 통하여 아프리카카메론을 확보하게 된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20여년간 고의적으로 북독일 지역을 산업화에서 외면했다. 로마제국의 중심인 오스트리아 지역 발전이 급선무라고는 했지만 북독일의 역량을 추락시키겠단 계산이 뻔한지라 반발하는 북독일 지방이 다시 프로이센을 선두로 뭉치게 만들고 만다.

결국 이탈리아와 북독일 연방과 개전, 그리고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두번째 세계대전을 벌이게 된다. 북독일 연방의 발전된 전술과 맹공에 밀려 보헤미안을 빼앗기고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손실하는 등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패배하지만 대한제국이 우세를 점한 러시아에서 발을 물리고, 이탈리아를 충분히 밀어내자 정예군을 북독일 국경으로 소집하면서 반격준비를 시작, 정병의 수도 여론도 통합하지 못한 프로이센을 대거 밀어붙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신성로마제국의 근간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파트너인 헝가리가 점차 제국에게 휘둘리면서도 제국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현황에 불만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벌이는 등 정세는 매우 불안하다.


3.5. 기타 유럽[편집]


네덜란드는 작중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나, 타이완의 공동통치국으로 지명되어, 극동에 다시금 영향력을 투사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만 비중은 없는 실정이다. 원래 이 시기쯤 되면 동남아 일부를 제외하면 대외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뭘 해보려 해도 할 능력도 별로 없다. 다만, 1873년 대공황으로 인해 벨기에가 붕괴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온 국력을 쏟고 있다. 게다가 본토, 그것도 수도가 위협을 받게 될 영국이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집어삼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무대로 언급될 가능성이 있다.[38]
그렇지만, 프랑스군을 이끌고 온 루이가 프랑스 대표로 협상에 나오자 그가 프랑스가 자랑하는 전쟁영웅, 그것도 이제 겨우 40대에 접어든 육군 원수인 것에 솔즈베리 후작 등 영-란 측의 문관 출신 협상 대표들이 협상이 틀어지면 프랑스와 전쟁을 치러야 할 거라는 두려움에 떤 결과, 프랑스에게 왈롱을 넘기고 룩셈부르크와 플랑드르를 병탄한다. 독일: 룩셈부르크 지못미 ㅠㅠ
이후 영국과 포르투갈과 함께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복을 비판하는 여론전을 벌인다. 그러다 러시아가 페르시아로 진출을 하자 네덜란드계 미국인 자본가들과 함께 러시아 견제에 나선다.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150만 대군의 침공과, 런던이 점령당하자 해군육전대를 바로 빼버린 영국에 의해 본토방위에 실패하고 황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망명한다.

프랑스와 교황령 합병 승인을 협상하는 뉴스가 나온 걸 보아 이를 조건으로 보불전쟁이 확전될 경우 베네치아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반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프랑스 쪽에 가담할 것으로 보인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아들이 스페인의 국왕 아마데오 2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신성 동맹을 맺는다. 베네치아와 베네토 지방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선을 형성할 듯.
하지만 이류열강에 불과한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군을 이기는 건 어려웠는지 쥐트티롤과 베네치아 방면에서 참패하고는 10만 명의 병사가 베네치아에서 포위당한다. 이걸 구하기 위해 루이 장군의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의 오러연합군과 베를린을 넘기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밀라노와 롬바르디아까지 함락당한 상황. 그러나 노장 가리발디가 지휘하는 붉은 셔츠단의 분투로 인해 밀라노를 수복하는데 성공, 오스트리아가 밀어줘서 분리독립하려는 베네치아를 공격하지만 프랑스와 달리 참호전 경험이 없고 장갑 척탄병을 구성할 돈도 없는지라 몰트케와 같이 정공법으로 나서 엄청난 병력소모를 강요당하고 있다. 오죽하면 메이스나 장검 등 중세시대에나 쓸 무기까지 휘둘러지고 있다고.
결국 가까스로 베네치아 공화국 독립운동을 격멸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쥐트티롤과 달마티아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해버렸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불만이 매우 쌓인 상태이며 이는 미래의 불씨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결국, 서유럽 금융공황의 직격탄을 맞은 영국에 의해 대출을 회수당하면서 여파에 휩싸인 결과, 통일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도 통일의 영웅인 가리발디가 노구를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성난 여론을 진정시키고, 통일의 주체였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다른 지역들을 제압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공직 독점권 등의 독주를 어느 정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 사태에 대해 각 지방이 자체적으로 대응하는 식으로 최악의 사태는 면하지만 사실상 사태의 수습을 각 지방에 떠넘기는 꼴이 된 바람에 원 역사에서의 이탈리아보다 더 중앙집권화가 늦춰질 듯하다.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과 함께 관세동맹을 체결하며 신성로마제국의 대외확장을 견제하려 하는 중이고 식민지 확보를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선공하며 프로이센에게 호응을 요청해 세계대전의 불씨를 당기지만 명성이 아깝지 않게 계속 패퇴하다 못해 자국 영토 지키기도 버거운 모양.

유럽의 혼란을 틈타 결성된 독립군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매서운 기세로[39] 러시아령의 점령군을 밀어붙인 끝에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작가가 올린 1872년 세계지도를 보면 프로이센령 폴란드는 획득하지 못하고 러시아령 폴란드만 회복한 듯하지만 독립에 성공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점령국인 러시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지만 본토에서 너무 멀고 철도 등의 교통도 미비하기에 손조차 못 대는 상황. 하지만, 대한제국과 캄차카 조약을 체결한 러시아 제국이 후방에서 발칸 발면으로의 확장과 더불어 러시아령 폴란드 수복[40]을 위해 대규모 침공을 준비하고 있기에 불안한 상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독일발 서유럽 금융공황의 여파로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내부 안정화를 위해 본국으로 철군하자 그 틈을 탄 러시아군이 환호성을 지르며 재침공을 개시, 한 달도 안 돼 바르샤바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한다. 그러나 루이를 포함한 프랑스군이 언젠가 돌아와 복수하겠노라 이를 갈고 있는 상황이기에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아 다시금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때맞춰서 러시아가 둘로 갈라져 내전이 시작되면서 독립을 쟁취낸다.

크리스티안 9세가 섭정의회에서 찬조연설했다는 내용과 함께 프랑스 측으로 참전할 듯한 기사가 나온다. 이후,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홀슈타인 지방으로 병력을 집결시킨다. 원래라면 국력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다시금 북유럽에서 세력을 키울 수도 있다. 종전 회의에서 언급된 바로는 큰 활약은 아니어도 프랑스, 영국의 신성동맹과 함께 싸웠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이 덴마크와 프로이센의 협약을 무효화하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가 독일발 금융공황의 여파로 프로이센이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이들의 힘을 빼야 할 필요성이 생긴 영-프의 의견 일치로 종전 협정을 통해 홀슈타인 지역을 반환받는다.

보불전쟁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스위스와 스웨덴처럼 중립을 선포. 1873년 대공황을 버티지 못하고 굶주리던 국민들에 의해 레오폴드 2세[41]를 비롯한 벨기에 왕가가 주살, 왕정 성립 42년만에 멸망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 3개 주(룩셈부르크, 왈롱, 플랑드르)로 분열[42]되어 각각 자신과 인종적 연고가 있는 국가[43]에 편입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수준. 프랑스는 왈롱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고, 영국은 수도권 방위를 위해 우방국인 네덜란드가 벨기에 전체를 집어삼키길 간절히 희망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 중이다. 다만, 협상과정에서 영국이 프랑스의 왈롱 합병을 전면승낙하면서 원만하게 타결된다.[44]

현재 영국 왕세자의 처남인 요르요스 1세가 즉위하여 글뤽스부르크 왕조가 지배 중인 그리스는 영국으로부터 즉위 선물로 이오니아 제도를 양도받기도 하는 등 영국과 관계가 좋다. 여기에 지난 전쟁으로 테살리아 지역을 획득했고 러시아의 성전에 개입하고자 하는 영국과 독일의 계획에 따라 콘스탄티노플까지 탈환하여 원역사에서는 실패한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의 의용군 5천에 감복한 국왕이 의회에 호소하고 의원 8할이상이 찬성하면서 참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경제공황의 여파에서 회복하지 못한데다가 군부에서 회의적인 입장[45]을 보이며 1달동안 오스만 제국 영내에 진입하지 못하다가 프랑스의 물자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의 반격을 맞이한다. 신성로마제국은 그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간신히 쥐어짠 약 4만의 병력은 결국 10만의 오스만 제국군에게 무너지며 국경 방어선이 무너진다. 그리스군 지휘관들은 전쟁을 부추기만 하고 영국의 눈치만 보면서 어떤 지원도 하지 않는 독일에 불만을 토로하며 요르요스 1세가 독일 의용군에게 지휘권을 준것에 분노한다. 그러나 이미 정규연대가 무너진 상태에서 유일하게 전장에서 활약한 것이 독일 의용군 뿐인지라 이를 받아들인다. 다행히 독일 의용군의 주도하에 군제 개혁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동시에 참호전을 전개하면서 오스만 제국군의 침공을 박살낸다. 이후 반격에 나서면서 런던에 열린 종전협정에서 트리키아와 마케도니아를 할양받으며 잃어버렸던 고토 일부를 확보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천명하면서, 자국 출신 추기경을 대립교황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곧 가톨릭교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400년대 마지막 대립교황이 나온 이후로, 가톨릭교회가 전면적으로 쪼개진 적은 없었는데[46] 개변된 역사에 의해 가톨릭이 '로마 교황청'과 '독일 교황청'으로 분열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어떻게 서술할 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무리 종교의 중요성이 중세만 못하다고 해도 가톨릭교회의 대분열은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톨릭교희의 분열 사유가 '오스트리아 황제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한' 세속정치적 이유에서 있었으니, 다른 가톨릭권인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에서 독일 교황청을 인정하며 대립교황에게 순명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이중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아예 오스트리아에 맞서 1차 세계대전을 벌이기까지 했으니, 적국의 '대립교황'을 따를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대립교황을 따르는 권역은 독일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가톨릭 우세 지역이었던 오스트리아 및 바이에른과 같은 남독일 지역,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헝가리 지역에 한할 가능성이 높다.[47] 그리하여 '독일 교황청'은 북독일의 개신교와 더불어 '대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민족 종교'의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한편, 작중 시점보다 한참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가톨릭교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톨릭의 파워가 약해진다는 뜻도 되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더라도 독일 교황청 측에서는 '가짜 교황의 결정을 따를 이유가 없다'라고 거부할 가능성도 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개신교 근본주의와는 다른, 어느 정도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종교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 해당 사건 때문인데 폭종 세계의 가톨릭은 보수성이 지속되어 혁신이 더뎌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4. 동토[편집]



4.1. 러시아 제국 → 러시아 공화국[편집]


러시아 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고.


5. 중동[편집]


영국의 영향력이 강력한 곳이지만 열강이 약화되고 대한제국의 성장을 본 페르시아가 부국강병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남하하는 러시아에 굴복하게 되고, 이에 반발한 영국이 개입하면서 또다른 그레이트 게임의 장이 된다.


5.1. 오스만 제국[편집]


크림전쟁에서 프랑스에 빚을 진 데다, 발칸 반도로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프랑스 쪽에 가담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영국까지 프랑스 쪽에 가담한다면 프로이센 진영과의 라이벌 플래그 확정. 한편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세르비아 포함 발칸 반도의 국가들은 독립을 위해 오-러 동맹 측에 붙을 기색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크림 전쟁에서의 무기력한 모습과 결점을 조금도 개선하지 않은 지라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동맹군이 되고 있다.[48] 거기에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이슬람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태도[49]와 점령지에서의 폭정, 그리고 이슬람교 강요 등으로 프랑스군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결국 프랑스군은 오스만 제국군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현지 기독교인 등으로 구성된 의용군을 소집, 훈련시키고 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따로 놀기 시작한다. 그러나 원래라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편 들었다가 멸망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기적적으로 줄을 잘 서서 원래보다는 조금 더 버틸 가능성도 있다. 결국 세르비아 군에게 대패하고 사실상 발칸에서 퇴출 직전에 몰려있다. 프랑스와 영국 또한 손절한 상태.
결국, 독일발 서유럽 금융공황의 여파로 오스만 제국마저 파산을 선언하고, 승기가 동맹국에 기울면서 발칸 반도의 소국들을 독립시키고, 테살리아를 그리스에 할양하는 식으로 영토를 상실한다. 발칸 방면에 남은 영토는 상실한 지역들을 제외한 루멜리아 정도가 확정적일 듯.[50] 결국에는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향해서 성전을 선포하며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재건하겠다며 이스탄불을 향해 쳐들어온다. 안그래도 경제공항의 여파로 장교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 상황인데다가 러시아군들이 모르핀과 보드카에 취해서 돌격하니...
그래도 일단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요새들에서 러시아군을 저지하고 프랑스에게 받은 물자로 반격을 시도하며 발칸소국들의 참전을 막고자 자신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그리스에 대한 보복전을 실시한다. 영국이 개입하기 전에 그리스의 항복을 받은 후 테살로니키 일대와 배상금을 챙겨서 철군할 계획하에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진격한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지휘권을 받은 독일의용군[51]이 그리스군의 군제 개혁 작업과 동시에 참호전을 전개하면서 아테네로부터 10km 앞에서 진격을 멈춘다. 이후 함대와 무기들을 총 동원하여 최후의 공세를 시도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게다가 그리스 침공 소식을 접한 영국이 마침내 정치혼란을 수습하고는 그리스 침공을 비난하며 해군을 동원에 크레타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위시로 한 발칸의 신생국들이 들고 일어나고 그리스군이 반격을 시도하는 등 수세에 밀린다. 결국 수도가 러시아군에게 포위가 되었고, 그나마 프랑스가 개입하여 오스만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며 영국함대와 대치를 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런던에 열린 종전협정으로 수도는 지켰낸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상당한 영토와 16억 4천만 루블에 이르는 막대한 배상금[52]을 주어야 했고 그리스에게도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할양해야 했다. 더불어 중재를 한 영국에게 키프로스의 실효지배권을, 그리고 지원을 해 준 프랑스에게 리비아를 넘기는 등 다른 열강들에게도 영토를 빼앗긴다. 이후에는 러시아 흑해함대의 압박을 받고 황실 자산을 총동원하여 배상금을 내는 등 고생을 하는 중이다.


5.2. 페르시아 왕국[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가 19세기 말을 다루는 작품이니 자연스럽게 이 무렵엔 카자르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샤한샤[53]인 나시르 앗딘 샤가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에게 내줬던 이권들을 모두 회수하고, 대한제국처럼 의회를 세우고, 부국강병을 추진하려고 한다. 이는 영국의 상황이 날로 악화되는 실정이라 그런 거겠지만,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고삐가 잠시 느슨해진거지 완전히 놓은 건 아니다는 점을 간과 한데다, 영국을 적대하면서도 의회제 도입을 언급하며 사실상 러시아조차 적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4] 이 때문에 이 소식을 아프리카에서 전해들은 루이 베르그송은 "아까운 인물이야. 조만간 죽겠군."이라는 부정적인 평을 내렸다.[55]

그리고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대공이 대한제국과의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남하하여 페르시아의 샤한샤와 접견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알렉산드르의 협박에 굴복하여 러시아 제국에 편입이 된다. 다만 주권 침탈까지 당하지는 않았고, 여러 핵심 이권들을 러시아에 빼앗긴 형태로 말이다. 이때문에 러시아와 열강이 다시 전쟁을 개시하면서 친러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후 페르시아는 3개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러시아의 꼭두각시 나스르 알딘 샤의 정통 왕정세력, 영국의 꼭두각시 무자파르 알딘 샤의 입헌 군주제 세력, 프랑스가 양성한 의용군단과 페르시아 민족주의자들이 합세한 이란 공화국으로. 페르시아의 지상과 바다는 이 3개의 세력의 전쟁으로 혼돈의 도가니다.

이는 결국 정리되지만... 페르시아 정부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지고 반쯤 죽은 위성국이 되고 말았다.


6. 아프리카[편집]


1873년 당시 아프리카 대륙은 프랑스령인 알제리와 세네갈 기니를 빼면 영국과 보어 인들이 다스리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포르투갈이 지배 중인 기니비사우와 앙골라, 모잠비크, 오스만 제국이 쥐고 있는 리비아와 이집트 정도를 제외하면 열강 입장에선 빈 땅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거기다 리비아를 쥔 오스만 제국은 쇠락을 거듭하고 있고, 이집트 또한 그러한 오스만 제국에 주기적인 세금만 바칠 뿐인 준독립국 상태인데다 수에즈 운하 주식의 반절을 프랑스가 쥐고 있다.

이에 따라 프랑스가 모질게 맘 먹고 총구를 돌리면 아프리카를 거의 다 프랑스의 발 아래에 둘 수 있었고, 나폴레옹 4세는 루이 베르그송을 사령관으로 삼아 아프리카 정복전쟁을 실시한다. 정복의 처음 시작은 모로코를 프랑스와 스페인의 공동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조제프 조프르를 파견하여 동맹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정복도 지원한다. 제1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 때 중재의 대가로 프랑스가 리비아를 확보하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외확정으로 인해 대독일 신성로마제국의 식민지 확보를 촉발시키며, 페르시아에서 벌어진 러시아와 영국의 갈등을 계기로 프랑스의 아프리카 정복을 잠정 중단된다. 이후 코펜하겐 협정에서 남위 5도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가지는 분할에 합의했다. 그와 별개로 독일은 카메룬 일대를 가져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집트도 영국의 손에 들어간다.

2019년 5월 10일에 지도가 갱신되어 1890년 세계지도가 공개되었다. 1876년도 지도에서는 해안가에 서양 세력이 상륙하였을 뿐 흰 공간이 대부분이었던 아프리카가 단 14년만에 완전히 세력분할되었으며, 지형이고 강줄기고 없이 동/서/남/중앙으로 구분해 자 대고 죽 그은 국경선이 제국주의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북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는 프랑스, 이집트와 남아프리카는 영국, 서아프리카는 에스파냐(스페인), 에티오피아와 동아프리카는 이탈리아, 카메론은 신성 로마 제국이 차지한다. 신성 로마 제국을 제외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에스파냐의 공통적인 목적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 저지다.

유럽에서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을 하면서 아프리카에서도 영국령과 프랑스령 식민지를 중심으로 식민지 쟁탈전은 계속 진행중이다. 사실상 아프리카는 영국 VS 프랑스 전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아프리카인들은 나무로 된 창과 방패를 들고 서로 싸울 정도.


6.1. 에티오피아[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는 것으로 첫 등장했다. 이게 다다


7. 오세아니아[편집]



7.1. 하와이 왕국[편집]


원 역사에서처럼 미국에 합병될 예정이었다. 미국은 대한제국과의 친교를 위해 하와이 왕국 병합에 승인해달라고 요청했고, 대한제국은 이를 수긍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이하응 쇼크로 인해 높아진 대한제국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하와이 왕국을 미국과 대한제국의 공동 보호국으로 삼고 태평양 무역의 중개항이 될 예정이다. 고래가 사이좋게 지내니 새우가 호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이 사고를 터트리고, 하와이에서 이 사실을 알고도 대한제국과 미국에게 숨기려고 하는 대형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큰 편. 호주연합왕국이 성립하면서 하와이는 미국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물밑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현실대로 미국의 50번째 주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에필로그에서 슬슬 아시아를 밟아야겠다 판단한 미국이 합병한다.


7.2. 호주[편집]


황제의 2남 이강의 부인인 빅토리아 멜리타를 여왕으로 추대했다. 대영제국이 본국의 혼란 속에서 인도 망명정부를 세우고 나서 붕떠버린 호주 식민지 의회는 왕당파와 독립파의 협의아래 대한제국황실의 일원인 빅토리아 멜리타를 여왕으로 추대했다. 멜리타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대관식조차 불응했지만 워낙 골골대서 외부활동할 일이 없는 이강의 고집에 못이긴 멜리타가 수긍하면서 대관식이후 호주연합왕국이 성립되었다. 다만 멜리타는 끝끝내 호주로 가지않아 의회는 국회처럼 활동하고 총리는 사실상 대통령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은 왕국이지만 사실상 공화국이 된 것이다.

이후로 이강의 자녀가 국왕직을 계승했는지, 혹은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영국이 두동강이 나고 호주가 아시아계 이민자를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결정한 점을 미루어보아 아마 외전 시점에서도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영향권이나 참관국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8. 아메리카[편집]



8.1. 미국[편집]


미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서 참고.


8.2. 기타 아메리카[편집]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멕시코, 남미 일대) 나라들은 별다른 언급이 없다. 파나마 정도가 파나마 운하로 인해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우선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중남미 일대의 독립운동과 공화정 수립(중미합중국이나 남미 등지), 산마르틴이나 볼리바르 등의 독립운동가 등장은 세계관 내에서 그대로 진행된 것 같다. 또한 현실처럼 당대 기준으로 경제력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유럽과 더불어 주요 수출지대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 경제력이 좀 있는 지역인 듯하다.

고종이 김가진의 진언을 받아들여 영국 등지의 지원을 받은 후 중원의 난민들을 남미로 이민을 보내고 그 지역에 풍부한 구아노를 수입하여 비료로 공급한 적이 있었다. 고종이 속으로 '이거 노예무역이잖아'라고 한탄했지만 김가진은 그런거 신경 안썼다.

그 이외에는 아직은 먼데다가 현대까지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한국-중남미[56]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중남미가 본격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처럼 조연에 그치거나 커다란 역할은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중장기적으로 후안 페론같은 표퓰리스트의 등장 또한 남미 곳곳의 쿠데타가 조기에 이뤄진다면 변수 정도는 될 수 있다. 아마조니아 등이 또다른 변수가 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거리상으로는 큰 영항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이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본딴 워싱턴 협력기구를 제창하면서 남미 포함해 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들을 강제적으로 가맹시켰다. 제창 시점에 아직 영국의 영역이던 캐나다나 프랑스의 쿠바 등은 가입하지 않았겠지만 그 외는 피하지 못했을 듯 하다. 미국은 초기의 범아주 조약기구와는 달리 이미 완연한 힘의 우세를 자랑했기에 자신들이 아메리카의 황제국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이에 반발하는 남미를 정리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쓰게 된다.

20세기에 들어 캐나다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결국 캐나다는 영국의 손에서 떨어져 미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으니 이들도 워싱턴 협력기구에 가입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9. 주요 사건[편집]



[1] 오키나와, 류큐라고도 불리며 실역사에서 오키나와 제도를 다스리던 왕국의 이름.[2] 친조선파의 우두머리가 셍게린첸이니, 친조선파 부족들이 승리하게 될 경우 셍게린첸이 몽골 칸위에 앉게 될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3] 의회에서 대초원의 카간의 권위를 통해 황제위에 앉겠다고 선언하였다.[4] 만주족의 구심점이면 당연히 청 황실이지만 서태후의 환상적인 어그로로 이미 박살났고, 만주 내의 군벌들 역시 향후 세력을 확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미 대한제국에서 징병된 청년들이 만주 국경을 지키는 지라 청년층이 대한제국을 적으로 볼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5] 화는 화란, 즉 네덜란드를 의미한다.[6] 중화제국이 대만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대만을 지배하는 영국인들 사이에 가득했다.[7] 대만내에 대만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한족과의 민족적으로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려 본국에서 박사들까지 초빙. 또한 한자의 전면 금지를 선언하고 라틴문자를 국가의 공식 문자로 지정하였으며, 대만에서 쓰이는 민남어만을 국어로, 나머지 중국 대륙의 언어를 전면 금지하였다. 더해 적극적인 통혼정책을 추진, 하나의 대만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역사 또한 대만 자체의 역사를 본국의 초빙된 박사들을 중심으로 조사시키는 중.[8] 수반들 중 하나를 책봉하기에는 막강한 지위를 가진 이가 없었고, 영국에서 귀족을 모셔오자니 인종이 달라서 힘들었다. 게다가 영국도 영국 왕족이나 귀족이 대만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다른 열강들과 싸워야 하는지라 찬성할 수 없었다.[9] 유럽에서는 독일의 왕가의 일원이 그리스의 왕가가 되기도 하는 등 흔한 일이었기에 영국에서 이 방식을 추천하였다. 물론 동아시아에선 씨알도 안 먹힐 방식이지만 당시 대만은 영국의 보호령이나 다름없어서 가능했다.[10] 흥선군이 주인공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정작 이형은 내용물이 딴놈이라 어린 시절 기억이 없으니 역사에 비중 같은 건 하등 없었던 이 녀석 이름을 듣고 '그런 녀석도 있었나?'라는 반응을 보였지만.[11] 이하응이 구입한 토지가 포모사에서 헐값에 대만 자영농들에게서 긁어모은 것들이기 때문. 이 때문에 대만의 왕으로서 자리를 잡으려 노력하던 이희에게 큰 타격이 된다.[12] 즉위하고 긴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정략혼을 계속해서 아내만 20명이었을 정도로 현지에 기반을 쌓으려 노력했다. 그동안 어차피 자기는 국정에 기여한 경험이 없으니 부친이 실세인 것도 참았었지만...[13] 반초동맹 에피소드에 나오는 이야기로는 국력으로는 대한제국이 1인자, 그 밑의 2인자 자리를 두고 초나라와 일본이 한참 다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초나라와 일본은 이형의 고의적인 구도 배치와, 일본 내부의 반 개혁 기조 탓에 실질적으로 2인자급의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그러나 권위로만 따지자면 범아주 조약기구의 초기 가입국이자 황제의 첫 책봉국 국왕인 대만의 이희가 단연 확고한 2인자인 것이다. 심지어 안 좋게 은퇴하기는 했지만 황제의 친부인 이하응이 섭정으로 천명대전에도 참전했었으니 권위와 이력으로는 최고라고 할 만 하다.[14] 오키나와, 류큐라고도 불리며 실역사에서 오키나와 제도를 다스리던 왕국의 이름.[15] 한국어로 번안된 이름. 처음에는 쇼타이로 나오는데 이는 유구국왕의 이름인 상태(尙泰)를 일본식으로 읽은 거다.[16] 하지만 일본이 국방, 외교, 경제적으로 대한제국에 종속된 상황이기에 사실상 대한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17] 류큐는 본섬인 오키나와에 나름 평탄한 땅이 있어서 제주도만한 면적에 100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할 정도로 그럭저럭 독립국으로 존속할 기반이 있지만 대마도는 전체 인구가 3만 명도 안될 정도고, 류큐처럼 서태평양 한복판의 교역거점이 될만한 곳도 아니다. 오히려 대한해협 한가운데 있어서 패권국가 입장에서는 반드시 자국 영향권 내에 두어야 할 군사적 요충지에 가깝다. 그래서 주인공 이형이 여길 독립시켜줘도 뒷일이 감당이 안된다고 판단했다.[18] 직접적인 건 극동 방면에서의 영향력 강화. 간접적인 건 나비효과로 인해 원 역사와 달리 보불전쟁에서의 승기를 잡은 것. 특히 보나파르트 왕조는 원 역사와는 달리 국민적 지지를 입으며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19] 적어도 구슬형 탄환보다는 이 쪽의 관통력이 높다.[20] 몰트케가 참호의 위력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라, 나폴레옹 3세의 전사로 항복이란 선택지가 사라진 프랑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파리를 빠르게 점령해야 했기에 어쩔수 없이 병력을 갈아 넣은 것이다.[21] 작중 대 몰트케[22] 사실 본토가 피해를 입은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자국 영토의 피해가 없는 등 다른 곳에 비해 피해가 덜한 영국도 2년만에 10만의 병력이 사상자를 냈다. 당시 영국의 육군 병력이 10~20만 명이라 생각하면 거의 육군 전력 절반을 상실한 상황.[23]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대한제국은 이형이 김가진을 통해서 번역을 명함에 따라 이론적 체계를 편하게 책으로 배울 기틀이 잡혔다.[24] 이를 두고 작중 서술에서는 '빈 체제의 재현'이라고 했다. 다만 그때와는 달리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로 대체되었을 뿐이다.[25] 매우 중요한 회의이기에 후작급 이상의 인사들이 참여했고, 영국은 에드워드 왕세자가 참가했다.[26] 이는 어쩔 수 없었던게, 나폴레옹 3세가 직접 기병과 함께 돌격한 걸 알게 되자 참모부는 기겁하면서 사격을 중단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기병대가 너무 위협적이라서 사격 중단 시 포화망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리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공격을 지시한다. 즉, '제발 눈 먼 총에는 맞지 말아라.'하고 빌어야 했을 상황이었다.[27] 원 역사에서도 총검술과 총검돌격을 죽어라 훈련시킨 프랑스군인데, '경애하는 황제 폐하', 그것도 환갑이 넘은 그의 장렬한 전사에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장군들마저 눈이 뒤집혔을 정도의 분노가 합쳐졌으니...[28] "겨우 난쟁이 하나 죽은 걸로 뭔 호들갑이냐!"라고 참모들을 다그치며 나폴레옹 3세의 전사가 뜻하는 바를 축소하려 애썼다.[29] 여기에 더해 프랑스 제국이 점령했던 라인란트와 하노버 등이 프로이센 공화국에 양도되었다.[30] 참고로 이형의 예측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실리주의자들이 통치하는 프로이센은 곧바로 "디폴트"를 선언해서 유럽경제를 폭망시킬 것이라고 한다.[31] 영국왕실과 인척관계인 글뤽스부르크 왕조그리스 왕국에 지원하여 그리스가 이스탄불을 점령하게 할 계획이다. 이것이 성공할 경우 그리스의 메갈리 이데아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신성로마제국에 이어 비잔틴 제국도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본격 하츠 오브 아이언(!?)[32] 프로이센의 현 상황은 돈은 없지만 기술은 지니고 있는 채로 취업 전선에 던져진 일류 가정교사라 보면 된다.[33] 나치를 등판시키고 나라를 휘청이게 한 악명높은 인물로 당대 유럽의 대표적인 열성 황화론자다.[34] 일주일제 논리때문에 황제를 칭하면 러시아,프랑스의 보복이 두렵지 않냐거나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묻는 이도 있고 문보다 무를 숭상하는건 그만큼 전란이 끊이지 않냐는등 공사관리인이 골치아파 할 정도로 질문을 부어댔다.[35] 그냥 두서없이 허락하려다가 몇번 튕기는척 하고는 허가를 내줬다.[36] 합스부르크 가문은 혼인을 통한 영지 병합 외에도 각 속령에 폭넓은 자치를 부여하는 방식의 동군연합 체제를 통해 세를 불렸다. 종교정책 또한 카알 5세펠리페 2세, 페르디난트 2세 같은 일부 열성 기톨릭 신자 군주들을 제외하면 관용이 주된 방침이었고.[37] 다만 알자스-로렌은 여전히 프랑스가 점유 중이고, 라인란트는 비무장지대화됐고, 홀슈타인은 신성동맹 측의 요구로 인해 덴마크에 반환된다.[38] 게다가 마침 프랑스에서도 벨기에의 왈롱을 집어삼키려고 하기 때문.[39] 이 작품에서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 바로 폴란드란 설명이 있다.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조금만 지원해줘도 바로 최상의 결과를 가져왔으니 제일 믿을 수 있는 아군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40] 러시아를 제외한 이들의 시각에는 재점령이 맞을 것이다. 대홍수 전까지만 해도 전성기 때의 폴란드는 윙드 후사르로 동유럽 평원을 호령하며 모스크바까지 쳐들어가 당시 러시아의 차르였던 바실리 4세를 수도 중 한 곳이었던 바르샤바까지 압송해 와서 제그문트 3세 앞에 무릎 꿇렸던 강대국이었으니까.[41] 콩고의 학살자인 그 자 맞다. 원 역사에서는 창자가 막혀 고통 속에 갔지만 여기서는 그냥 훅갔다. 대신 콩고의 비극 또한 없게 되었다.[42] 말이 3개 주지, 루이의 추측에 따르면 '완전히 사분오열되어 갈갈히 찢긴 상태에서 주변국들이 그나마 정통성 있다고 취급해주는 주가 3개뿐일 거다.'라고.[43] 독일계가 강세인 룩셈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계가 강세인 왈롱은 프랑스, 네덜란드계가 강세인 플랑드르는 네덜란드.[44] 협상 테이블에 영-란 양국에서는 문관들이 나왔는데, 프랑스에서는 전권을 부여받은 게 하필 프랑스가 자랑하는 전쟁영웅인 40대 초입의 육군 원수(루이 베르그송)였기 때문에 영-란 측에서 '협상 파토 시 전쟁이다!'라는 근거 없는 압박감을 받았기 때문.[45] 의용병등 독일의 지원으로 국토방위는 가능하나 침공전이 어렵다고 판단.[46] 이 소설이 다루는 시기에, 교황무류성을 선포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하여 독립해나간 복고 가톨릭교회가 실제로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규모는 미미하고, 소설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47] 북독일 지역은 개신교가 강세이기 때문에, 애초에 가톨릭을 거부하면서 나간 개신교도들이 대립교황을 따를 일은 없을 듯.[48] 프랑스군 도움 없이 민병대 수준의 슬라브계 독립군과 교전했는데 패배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수준.[49] 당장 적이 눈 앞에 닥쳐와도 기도할 시간이라면서 자리 깔 정도다.[50] 루멜리아 자체가 발칸 반도의 오스만 영토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미 그리스가 떼어진 마당에 종전협정으로 테살리아를 그리스에 또 떼어주고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불가리아 같은 발칸 소국들까지 줄줄이 독립하면 남는 건 알바니아에서 트라키아까지 ㅡ자로 쭉 이어진 좁은 회랑 밖에 없다. 원 역사의 1885년 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절대 면적은 좁은 데 반해 국경선은 북쪽에 ㅡ자로 1천 킬로미터 가까이 될 만큼 길게 뻗어있으니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51] 사실, 이 부대는 부대원 거의 대부분이 참모진과 장교단, 부사관단으로 구성된 최정예 엘리트 부대였다. 스타로 비유하면 저글링 수백 마리 나돌아다니는 판에 울트라리스크 두세 부대를 보낸 격.[52] 물론 발칸전쟁에 참여한 발칸 신생국에게 지급할 배상금을 합한 액수다.[53] 페르시아어왕중왕(=황제을 뜻하는 말이다.[54] 루이왈 '러시아와 영국 양쪽 모두에게 중지를 치켜든 격'이라고...[55] 실제로 작중 페르시아가 롤모델로 삼은 대한제국조차 러시아와 영국 양쪽 모두를 적으로 돌린 적은 없다. 주인공도 상황을 봐서 러시아 손을 잡는 수도 염두에 두면서 한쪽이 적이면 다른 쪽은 분명히 아군이 되도록 전제했다.[56] 현실 역사에서 뜬끔포로 대한제국이 파나마 독립을 승인한 적은 있었는데... 아무래도 현재까지 중남미는 경제적인 측면과 축구나 한류 같은 면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국민간의 접점이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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