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맥그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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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맥그래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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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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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아일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LEGENDS_131_McGrath.jpg

이름
폴 맥그래스
Paul McGrath

출생
1959년 12월 4일 (64세) /
영국 잉글랜드 그린포드
국적
아일랜드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신체
183cm
직업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소속
선수
세인트 패트릭스 애슬레틱 FC (1981~198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2~1989)
아스톤 빌라 FC (1989-1996)
더비 카운티 FC (1996~1997)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97 / 임대)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97~1998)
국가대표
파일: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83경기 8골 (아일랜드 / 1985~1997)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여담



1. 소개[편집]


아일랜드의 축구선수로, 과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톤 빌라, 더비 카운티,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활동했다. 포지션은 센터백이었고 수비형 미드필더도 간혹 보기도 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과 아스톤 빌라 시절이 전성기였고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1992-93 시즌 PFA 올해의 선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도 아일랜드 축구의 최대 전성기 시절인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4 FIFA 월드컵 미국, UEFA 유로 1988에 주전으로 출장하였다.


2. 클럽 경력[편집]



2.1. 초기[편집]


의사인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베티 맥그래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임신 직후 사라지면서 홀로 남겨진 베티는 힘겹게 그를 낳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흑인과의 사이[1]에서 아이를 낳은 사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했고, 이리저리 다니며 아이를 위탁할 가정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결국 베티는 홀로 아들을 키우기로 결심한 뒤 지극정성으로 폴을 양육했다.

1981년, 세인트 패트릭스 애슬레틱에 입단하여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입단 후 두각을 드러내며 검은 진주라는 별칭을 얻었다.

2.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편집]


1982년, 맥그래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두 시즌동안은 서브 멤버로 활약하다가 1984-85 시즌부터 고든 맥퀸을 밀어내고 훗날 대표팀에서도 한솥밥을 먹게 될 케빈 모란과 호흡을 맞추며 수비진을 지탱했다. 한동안 주전으로 활약한 맥그래스는 1986년 알렉스 퍼거슨경이 부임한 이후에도 입지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러나 이후 무릎 부상 및 스티브 브루스. 말 도나기 등 영입생들의 가세로 자리를 잃으면서 1988-89 시즌을 끝으로 맨유에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2.3. 아스톤 빌라[편집]


1980년대 후반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강팀으로 이름을 떨치던 SSC 나폴리로 이적이 유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1989년 8월 아스톤 빌라와 계약을 채결했다.

빌라에서 맥그래스는 자신의 커리어를 통틀어서 가장 눈부신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1990년 론 엣킨슨의 부임으로 시작된 빌라의 부흥기 일원으로 당당히 활약했다. 또한 두 차례 리그 준우승(1989-90, 1992-93)에 기여했으며, 두번째 준우승 시즌에는 활약을 인정받아 PFA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과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2.4. 이후[편집]


1996년 맥그래스는 빌라를 떠난 뒤 더비 카운티를 거쳐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1997년 11월 9일, 입스위치 타운과의 경기를 끝으로 마지막 경기를 치렀으며, 시즌 말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기여한 맥그래스는 본선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며 8강 진출에 기여했다. 그러나 팀은 개최국 이탈리아를 만나 0:1로 패했다. 그리고 믹 맥카시가 은퇴하면서 잠시 대표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라운드 1차전에서 또 다시 이탈리아를 만난 맥그래스는 로베르토 바조의 슛을 안면으로 막는 투혼을 발휘하며 1:0 승리로 복수에 성공했다.


4. 여담[편집]


  • 앞서 말했던 그의 어머니, 베티 맥그래스 여사는 2020년 9월 초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녀의 사후 아들 맥그래스는 어머니의 헌신에 깊은 존경을 느꼈고, 훌륭한 어머니였다고 소회했다. 반면 자신을 버린 아버지는 평생 만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 선수 시절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는데, 한번은 술에 취한 채로 경기를 뛰었다고 포포투 인터뷰에서 밝혔다.
  • 2011년, 캐럴 킹이 부른 Goin Back 이라는 곡을 리메이크로 불렀다. 수익은 두 곳의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 2013년 6월 29일, 카운티 오팔리의 한 호텔에서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보석금을 내고 7월 17일 툴라모어 지방 법원에 출두했다.

[1] 지금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여전하지만, 그가 태어난 당시에는 더욱 심했다. 당장 저 건너편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흑인들이 흑인 민권 운동을 위해 싸워온 시기가 1950~60년대이다. 미국도 심했지만 유럽이라고 다를건 없었고, 오히려 더 심했다. 가뜩이나 그녀의 아버지는 인종차별에 더욱 둔감한 세대였다. 그러니 자신의 소중한 딸이 흑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까무러칠게 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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