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스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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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콜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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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 · 2006-07


폴 스콜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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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퍼드 시티 FC 구단주
Salford City Football Club

파일:Scholes_Manager.jpg

이름
폴 스콜스
Paul Scholes
본명
폴 애런 스콜스
Paul Aaron Scholes
출생
1974년 11월 16일 (49세)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솔퍼드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신체
168cm / 체중 70kg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1], 공격수[2]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등번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18번, 22번
잉글랜드 대표팀 - 8번
소속
선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1~1994 /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4~2013)
지도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14 / 코치)
솔퍼드 시티 FC (2015 / 임시 감독)
올덤 애슬레틱 AFC (2019)
솔퍼드 시티 FC (2020 / 임시 감독)
경영
솔퍼드 시티 FC (2014~ / 구단주)[3]
국가대표
66경기 14골 (잉글랜드 / 1997~2004)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클럽 기록
6. 논란 및 사건 사고
6.1. 한국 비하 발언
6.2. 왓츠앱 사임 통보 사건
6.3. 아들의 폭행 논란
7. 여담
8. 스콜스에 대한 말, 말, 말



1. 개요[편집]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커리어 전부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보낸 원클럽맨으로, 맨유의 1998-99 시즌 트레블UCL 2회 우승, PL 11회 우승에 기여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데뷔한 이래 2013년까지 맨유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트레블을 이루는 등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린 맨유의 레전드.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등과 함께 '퍼거슨의 아이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출신으로, 1993년 7월에 프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4년에 1군으로 콜업되어 9월 21일 리그컵 포트 베일 FC 전에서 프로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3일 뒤, 입스위치 타운 전에서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데뷔골도 넣었다. 이후 12월 10일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3-2 승리를 이끌었고, 1월 3일 코벤트리 시티 전에서는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첫 골을 기록했다. 그렇게 94-95 시즌에는 로테이션 자원으로서 맨유에 자리잡아가는 시즌이 되었다.

1994-95 시즌: 22경기(선발 8경기) 5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7
6
11
5
2
챔피언스 리그
2
0
2
0
0
FA컵
2
1
1
0
0
EFL컵
1
1
0
0
0
합계
22
8
14
5
2

1995-96 시즌을 앞두고 마크 휴즈첼시로 이적하면서 자연스레 출전 기회를 많이 잡게 되었다. 그렇게 스콜스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주로 출전하여 준주전급 자원으로 성장, 시즌 31경기 14골[4]을 기록해 팀의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게 이 시즌의 더블을 시작으로 맨유의 수많은 우승 행진의 뒤에는 바로 스콜스가 있었다.

1995-96 시즌: 30경기(선발 18경기) 14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6
16
10
10
1
UEFA컵
2
1
1
1
0
FA컵
1
0
1
1
0
EFL컵
1
1
0
2
0
합계
30
18
12
14
1

1996-97 시즌을 앞두고 등번호를 18번으로 변경했다. 시즌 성적은 33경기 6골인데, 직전 시즌에 비해서는 퍼포먼스가 약간 떨어진 데다 팀내 입지 또한 직전 시즌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결국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이 시즌 맨유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996-97 시즌: 33경기(선발 21경기) 6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4
16
8
3
0
챔피언스 리그
4
0
4
0
0
FA컵
2
2
0
2
0
EFL컵
2
2
0
1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33
21
12
6
0

1997-98 시즌에는 초반에 로이 킨이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경기력에서 한 층 올라선 모습을 보여주며 주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시즌 성적은 42경기 10골. 다만 이 시즌은 아스날이 더블을 달성했기 때문에 맨유는 무관에 머물렀다.

1997-98 시즌: 42경기(선발 37경기) 10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8
3
8
5
챔피언스 리그
7
6
1
2
0
FA컵
2
2
0
0
1
EFL컵
1
0
1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2
37
5
10
6

1998-99 시즌에는 로이 킨과 함께 주전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우승을 차지, PL과 FA컵마저 제패하며 잉글랜드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다. 특히 뉴캐슬과의 FA컵 결승전에서 1골을 기록하며 우승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다만,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경고 누적으로 출전이 불가했고,[5] 같은 이유로 로이 킨과 함께 경기에 결장해 결승 무대를 밟지 못하고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데 만족해야했다. 시즌 성적은 51경기 11골.

1998-99 시즌: 51경기(선발 38경기) 11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4
7
6
7
챔피언스 리그
10
8
2
4
0
FA컵
6
3
3
1
2
EFL컵
1
0
1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1
합계
51
38
13
11
10

1999-00 시즌 스콜스는 4월 초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총 45경기 12골을 기록했다.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1999-00 시즌: 44경기(선발 41경기) 12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7
4
9
5
챔피언스 리그
11
11
0
3
2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슈퍼컵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0
합계
44
41
4
12
7

2000-01 시즌에도 주전으로 활약했다. 44경기 12골을 기록했고, 3시즌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00-01 시즌: 45경기(선발 41경기) 12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2
28
4
6
5
챔피언스 리그
12
12
0
6
1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5
41
4
12
6

2001-02 시즌에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 입단하면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4-4-1-1 포메이션을 가동했고, 스콜스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때때로 중앙 미드필더로도 출전하며 2선과 3선을 오가며 좋은 활약을 이어갔다. 시즌 성적은 51경기 9골. 다만 팀은 무관에 그쳤다.

2001-02 시즌: 51경기(선발 46경기) 9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5
30
5
8
5
챔피언스 리그
13
13
0
1
0
FA컵
2
2
0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51
46
5
9
5

2002-03 시즌에 스콜스는 계속해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뛰면서 뉴캐슬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해 6-2 대승을 이끌어내는 등, 리그에서 33경기 14골을 넣고 시즌 52경기 20골을 기록하며 공격 포인트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 활약으로 PFA 올해의 팀 선정은 물론, 2003년 발롱도르 후보 5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팀도 아스날과 3월 초까지 벌려져 있던 승점 8점차를 따라 잡으며 다시 리그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다.

2002-03 시즌: 52경기(선발 46경기) 20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31
2
14
3
챔피언스 리그
9
8
1
1
2
FA컵
3
2
3
1
0
EFL컵
6
4
2
3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1
0
1
1
합계
52
46
8
20
6

2003-04 시즌에는 FA컵 준결승 아스날 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결승 진출을 이끌었고, 팀의 FA컵 우승에 이바지했다. 시즌 성적은 40경기 14골, 리그 한정 28경기 9골.

2003-04 시즌: 40경기(선발 36경기) 14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4
4
9
3
챔피언스 리그
5
5
0
1
0
FA컵
6
6
0
4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0
36
4
14
3

2004-05 시즌에는 시즌 49경기 12골을 기록하며 주전 자리를 계속 확고히 지켰으나, FA컵 결승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옌스 레만에 의해 실축하며 우승 실패와 무관에 일조하고 말았다. 이 실축이 양팀에서 나온 유일한 실축이었다.

2004-05 시즌: 49경기(선발 42경기) 12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29
4
9
3
챔피언스 리그
6
6
0
0
0
FA컵
6
5
1
3
3
EFL컵
2
1
1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0
1
0
1
합계
49
42
7
12
7

2005-06 시즌에는 후반기에 시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한동안 출전이 어려웠으며 은퇴 가능성까지 예상되었으나, 이를 이겨내고 시즌 마지막까지 소화하는 저력을 보였다. 시즌 27경기 3골.

2005-06 시즌: 27경기(선발 25경기) 3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0
18
2
2
2
챔피언스 리그
5
5
0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1
합계
27
25
2
3
3

2006-07 시즌에는 10월 22일에 리버풀 전에서 맨유 소속으로는 역대 4번째로 500번째 경기를 치른 선수가 되었다. 리그 30경기 6골, 시즌 45경기 7골을 기록하는 등 직전 시즌 부상으로 인한 아쉬움을 딛고 다시 월드크래스 미드필더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4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거머쥐었으며, 02-03 시즌에 이어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었다.

2006-07 시즌: 45경기(선발 42경기) 7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0
29
1
6
1
챔피언스 리그
11
10
1
1
3
FA컵
4
3
1
0
0
합계
45
42
3
7
4

2007-08 시즌에는 10월 23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디나모 키예프 전에서 무릎 부상을 입으면서 거의 3달을 날렸고, 1월 27일 FA컵 32강 토트넘 홋스퍼 전에서 복귀를 가졌다. 복귀 후에는 다시 주전 자원으로서 활약했고, 특히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홈경기에서 대포알같은 오른발 중거리 슈팅으로 결승골을 득점하면서 맨유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하지만 스콜스 자신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 경기 때에 메시에게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6]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전반전에 클로드 마케렐레에게 거친 파울을 범하다 오히려 스콜스 본인이 얼굴에 출혈이 심하게 났고, 결국 87분에 교체되었다. 그래도 맨유는 승부차기 끝에 극적으로 우승을 달성했으며, 더블을 달성했다. 리그 24경기 1골, 시즌 34경기 2골을 기록했다.

2007-08 시즌: 34경기(선발 30경기) 2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4
22
2
1
4
챔피언스 리그
7
7
0
1
1
FA컵
3
1
2
0
0
합계
34
30
4
2
5

2008-09 시즌에는 팀 내 입지가 낮아졌다. 주전이라하기에는 애매한 출전 시간을 기록했으며, 활약상 또한 그동안 보여준 것에 비해서는 애매한 모습. 그런 와중에 4월 22일 포츠머스 전에서 맨유 소속으로 600번째 경기를 치렀다. 또한 팀의 18번째 리그 우승에 일조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지난시즌에 이어 다시 결승까지 올라 2연패를 노렸지만, 바르셀로나에게 0-2로 완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7] 스콜스는 후반 30분 교체로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활약은 없었고, 오히려 투입 5분 만에 불필요한 파울로 경고를 받기도 했다. 성적은 리그 21경기 2골, 시즌 35경기 3골.

2008-09 시즌: 35경기(선발 23경기) 3골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1
14
7
2
2
챔피언스 리그
6
3
3
0
0
FA컵
2
1
1
1
0
EFL컵
3
2
1
0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클럽 월드컵
1
1
0
0
0
슈퍼컵
1
1
0
0
0
합계
35
23
12
3
2

2009-10 시즌에는 직전 시즌의 아쉬움을 딛고, 나이가 무색하게 상당히 좋은 활약을 펼쳤다.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AC 밀란 원정에서는 득점을 기록하면서 맨유 역사상 AC 밀란 원정 첫 득점을 달성했으며,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산 시로에서 인터 밀란과 AC 밀란을 상대로 모두 득점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또한 3월 6일 울버햄튼 원더러스 전에서는 득점을 올리면서, 프리미어리그에서 100골을 기록한 역대 19번째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에 1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다만 이 시즌 맨유는 리그컵 우승에 만족해야했다. 성적은 리그 28경기 3골, 시즌 38경기 7골.

2009-10 시즌: 38경기(선발 32경기) 7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4
4
3
3
챔피언스 리그
7
7
0
3
1
EFL컵
2
1
1
1
0
커뮤니티 실드
1
0
1
0
0
합계
38
32
6
7
4

2010-11 시즌에는 시즌 출발이 좋았다. FA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첼시를 상대로 3-1 승리 및 우승에 기여했으며,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개막전 경기에서 어시스트 2개를 기록한 것이다. 또한 며칠 뒤 풀럼 원정에서는 맨유 소속으로 150번째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PL 8월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로는 눈에 띄는 활약상은 그다지 없었으며, 준주전급 자원으로 팀에 기여했다. 그러나 FA컵 준결승 맨체스터 시티 전에서는 파블로 사발레타를 막아내다 퇴장을 당하면서 1-0 패배의 원흉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시즌 맨유는 19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마침내 리버풀을 제치고 PL 최다 우승 팀이 되었다. 스콜스 개인으로서는 통산 10번째 리그 우승. 여기에 챔피언스리그에서는 2년 만에 결승에 올라 다시 한 번 바르셀로나와 맞붙어 설욕을 노렸으나 페드로 로드리게스, 리오넬 메시, 다비드 비야에게 실점하며 1-3으로 완패한다. 스콜스는 이 경기에서 후반 교체로 투입되었으며, 이미 기운 경기 내용으로 뭔가 해 볼 틈도 없었다. 또 상당히 재밌는 장면이 나왔는데, 스콜스는 후반전에 교체 투입 지시를 받고서도 공이 밖으로 안 나가서 터치라인에서 10분 가량 대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가 대단했다는 방증이기도 하고, 바르셀로나의 압도적인 경기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2010-11 시즌: 33경기(선발 23경기) 2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2
16
6
1
3
챔피언스 리그
7
4
3
0
1
FA컵
3
2
1
1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33
23
10
2
4

2011년 5월 3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현역 은퇴를 발표하였다. # 가볍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제 그만 두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맨유가 2011-12 시즌 들어 최근 3골씩 먹고 2연패하자 중원 보강을 위해 2012년 1월에 다시 맨유에 합류했다. 일단 이번 시즌까지는 현역으로 뛸 예정이라고. 다만 은퇴 전까지 사용하던 등번호 18번은 현재 애슐리 영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존 오셰이의 이적 후 공석이었던 22번을 사용하고 있다.

FA컵 64강 맨체스터 더비에서 후반 15분에 교체 투입되었는데, 은퇴 후 복귀 선수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활약을 펼쳤다. 물론 실전 감각이 안 올라와서 몇몇 잔실수가 있었지만, 스콜스의 은퇴 후 맨유에서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가둬 놓고 패는 플레이를 바로 볼 수 있었다. 특유의 키핑 능력과 좌우로 뿌려 주는 패스로 상대를 진영에 가둬 두고 공격하는 형태를 가능하게 만들면서, 팬들에게 스콜스의 필요성을 다시 각인시켰던 플레이였다. 여담으로 이 경기에서 만치니가 오언 하그리브스를 교체 투입하는 것으로 대응하자 서로 예토전생 쓴다는 드립이 터져 나왔다.

여기에 곧바로 다음 경기였던 리그 볼턴 원더러스 전에서 선발 복귀전을 가졌고, 시즌 마수걸이 득점을 기록하며 3-0 완승에 기여했다. 2012년 2월 26일, 라이언 긱스의 900번째 경기였던 노리치 시티 전에는 헤딩으로 선제골을 넣었고, 긱스가 결승골을 넣으며 본의 아니게 맨유를 노인정으로 만들어버렸다.

출장 시간이 늘어나면서 폼이 올라오고 있어 톰 클레벌리 등이 부상으로 결장 중인 맨유의 중원을 책임지고 있다. 이 때,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을 수행할 수 있는 폴 포그바가 있었음에도 스콜스를 복귀시키고 박지성을 중앙 미드필더로 쓰는 모습을 보고 포그바는 이적을 결심했다고 한다. 3월 20일 기준으로 맨유는 스콜스가 은퇴 번복 후 출전한 13경기 중 10승 1무 2패, 31득점 13실점을 기록하고 있다.

4월 8일 QPR 전에서는 득점을 기록하며 2-0 승리를 이끌었고, 맨시티와의 승점차는 8점 차이로 벌렸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에 맨유가 휘청거렸고, 결국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맨시티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래도 스콜스는 복귀 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리그 17경기 4골, 시즌 21경기 4골을 기록했다.

2011-12 시즌: 21경기(선발 15경기) 4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7
14
3
4
0
유로파 리그
2
0
2
0
0
FA컵
2
1
1
0
0
합계
21
15
6
4
0

그 후, 5월 30일에 1년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2012-13 시즌도 현역으로 활약할 것이라고 한다. 2012년 9월 15일 위건 애슬레틱 전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700번째 경기를 치렀고, 선제골을 넣으며 4-0 승리를 통해 자축했다. 그리고 이날 득점으로 프리미어리그 19시즌 연속 득점을 달성했다. 이후 스콜스는 로테이션 자원으로 활약했고[8], 12-13 시즌 맨유가 클럽 통산 20번째 리그 우승을 하면서 통산 11번째 리그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9]

현지시각으로 2013년 5월 11일, 마침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다음날 스완지 시티 전에서 올드 트래포드 고별전을 치렀고, 후반전에 많은 관중들의 박수와 함께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날 프리미어리그 우승 시상식이 진행되면서, 현역 마지막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3년 5월 19일 웨스트 브롬위치 원정에서는 교체 출전을 통해 현역 마지막 경기를 치뤘다.

2012-13 시즌: 21경기(선발 10경기) 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6
8
8
1
1
챔피언스 리그
2
1
1
0
0
FA컵
3
1
2
0
0
합계
21
10
11
1
1

선수 시절 기록은 통산 718경기 155골, 리그 499경기 109골. 우승 기록은 챔피언스 리그 2회, 프리미어 리그 11회, FA컵 3회, 풋볼 리그컵 2회, 커뮤니티 실드 5회, 인터컨티넨탈컵 1회, 클럽 월드컵 1회.

파일:external/hdwallpaperfootballs.com/Paul-Scholes-Wallpaper-HD-2013-91.jpg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7년 남아공과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 명단에 선발되어 조별 리그 튀니지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였으며, 이후 유로 2000, 2002년 한일 월드컵, 유로 2004에 모두 주전으로 참가하였다.

투박한 뻥축구를 주로 구사하는 잉글랜드에서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선수[10]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맨유에서와는 달리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고, 유로 2004 이후 맨유에 집중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훗날 이 은퇴 선언을 너무 빠르게 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의 은퇴 이후 잉글랜드의 뻥축구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졌고, 유로 2008 당시 지역예선 탈락의 위기에 놓인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스티브 맥클라렌이 그에게 국대 복귀를 요청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잉글랜드는 유로 2008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 무대조차 밟지 못하고 망해버렸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직전 파비오 카펠로 감독 또한 복귀 제의를 했지만 역시나 거절.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대표팀 복귀 요청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 것 같다고 밝혔고, 코칭 스태프의 요청이었고 감독이 직접 요청했으면 복귀할 의사가 있었다고 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442.masterclass] 폴 스콜스: 패스 마스터가 되고 싶다면?

주 포지션은 포맷 4-4-2의 중앙 미드필더로, 전성기에는 공격형 미드필더세컨드 스트라이커로 뛴 적도 있다. 맨유가 트레블을 이룰 당시에는 로이 킨과 짝을 이루곤 하였는데, 로이 킨이 뒤쪽으로 깊게 빠지면 그 앞쪽에 포진하는 다이아몬드 대형을 이루기도 하였다.

패스, 그 중에서도 장거리 로빙 스루 패스가 최고였던 선수로 유명하다.[11] 빠르게 뻗어가는 장거리 패스는 PL 역대 최고 수준이며, 또다른 그 분야의 마스터 샤비 알론소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 알론소가 정확하게 패스하는 편이라면 스콜스는 공격수의 침투 타이밍에 맞춰 빠르게 앞쪽으로 보내주는 편. 뒤쪽에서 공을 받아, 전진하는 윙어들이나 전방의 스트라이커들에게 정확하게 볼을 공급하는 선수였다.[12] 침투하는 윙어를 향해 시간 끌지 않고 바로바로 패스해서, 빠른 경기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볼을 잡고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플레이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화려한 개인기나 전진 드리블은 없었지만 패스길을 막거나, 볼을 뺏기 위해 달려드는 상대를 벗겨내는 컨트롤에도 능했다.

무엇보다 스콜스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경기를 읽는 능력이다. 동료들을 매우 잘 이용했는데 간결한 볼터치로 볼을 안정적으로 컨트롤하고 주위 동료들에게 건네고 다시 받는 포지셔닝이 아주 좋았다. 발도 느리고 피지컬도 평범한 스콜스가 90분 내내 안정적인 볼 소유를 가져갈 수 있던 비결은 이 영리한 움직임에 있다. 그러다가 전방에 좋은 위치를 잡고있는 동료가 있다면 언제든 날카로운 롱패스를 넣어주었다.

전성기 시절엔 주로 로이 킨과 윙어 및 공격수들 사이에 위치하여 그 사이를 마치 프리롤처럼 움직였는데, 바로 그 위치에서 스콜스가 가진 독특한 재능이 더욱 부각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각 상황에 맞게 최적의 움직임으로 최고의 효율적인 판단을 매 순간 가져가는 것. 단순히 공격의 플레이메이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프리롤로서 매 순간 남들보다 한 수 앞서는 판단을 하며 경기 전체를 손아귀에 놓고 주무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들을 실제 플레이로 실천할 수 있는 뛰어난 발밑기술과 패싱력, 행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냥 "축구 자체를 잘했다"고 보면 된다.

한편, 스콜스의 이런 자질은, 경기장에서 드러나게 보이진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축구팬들이 이런 능력을 파악하긴 쉽지 않다. 알렉스 퍼거슨 조차도 처음 스콜스를 봤을 땐 "기술은 뛰어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작다"며 마음에 안들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스콜스가 지닌 진가를 점점 알아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고. 퍼거슨이 평하길 스콜스의 진가는 패싱게임에 있어서의 지능과 조직화 능력에 있으며 이건 순전히 타고난 재능이며, 본인은 스콜스에 대해 내린 첫 혹평[13]을 반성해야만 했다고.[14]

상술한 이런 장점 덕분에, 스콜스는 나이가 들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로 낮은 위치에서 플레이 했을 때도 여타 선수들과 다르게 곧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스콜스 입장에서는 애초에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을 더 많이 하게 된 것일 뿐. 이게 놀라운 이유가 전성기 시절 주로 전방을 드나들며 활약했음에도 이미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로서도 완성되어 있었다는 의미니까 스콜스가 가진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5]


이어서, 그는 그물이 찢어질듯이 맹렬히 차는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유명했는데, 그러한 슈팅력을 바탕으로 전성기 시절에는 매 시즌마다 10골 이상을 기록했으며, 특히 2002-03 시즌에는 20골을 기록하는 뛰어난 득점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캐논 슈터들의 전유물인 아웃사이드 슛에도 굉장한 강점을 보여주었다. 또한 170도 안되는 작은 키에서 전혀 생각해 낼 수 없지만, 통산 30골에 이르는 헤더 골을 기록했다. 점프 타이밍과 헤더의 정확도가 높았으며, 공격수로 뛸 땐 침투 타이밍도 훌륭한 편이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베컴이 크로스를 올리면 이를 스콜스가 헤더로 마무리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단점으로는 다혈질인 성격에서 오는 악질적인 파울과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괴한 반칙들이 있다. 종합적인 수비력은 알려진 것과 다르게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다. 그러나 태클을 하는 타이밍과 강도가 문제였다. 태클로 공을 빼앗는 것이 불가능한 각도에서 태클을 시도하다가 상대의 다리를 걷어차 어처구니없이 퇴장당하거나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힐 때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에게 가한 백태클. 보다시피 동업자 정신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살인 태클이었다. 이러한 정신 나간 태클 연발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스콜스의 태클은 왜 그 따위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오죽하면 다른 선수들이 거친 태클을 하면 의아하지만 스콜스가 거친 태클을 할 때는 "쟨 원래 저러니까 뭐..."하고 만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때문에 챔피언스 리그 통산 최다 옐로카드 보유자이기도 하다. 2006-07 시즌 막바지 노스웨스트 더비에서 샤비 알론소를 주먹으로 가격하려 해 퇴장당한 적도 있다. 2007-08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클로드 마켈렐레의 머리에 팔꿈치 가격을 해 놓고는 오히려 자신이 튕겨져 나가 잔디밭에 나뒹굴어 눈썹 위가 찢어졌고 응급처치 직후 경고를 받은 바 있다. 고의성이 다분한 악질적인 핸드볼 파울로도 유명하다.


4. 지도자 경력[편집]


2014년 4월 23일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코치진에 합류한다고 발표했다. 스콜스는 맨유의 원클럽맨이자 레전드로 현재 1군 코치직을 맡고 있는 니키 버트, 필 네빌과 함께 1군 코치를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의 경질 이후 라이언 긱스가 남은 기간 동안 감독 대행을 맡게 되어 그를 보좌하기 위해 시즌 종료 시점까지 코치직을 수행했다.

2019년 1월 20일 EFL 리그 2올덤 애슬레틱 AFC과 감독직 협상중이라는 기사가 떴다.

결국 2019년 2월 중순 올덤 감독에 부임했으나, 첫 경기 승리 후 한 달간 3무 3패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31일만에 사임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5.3. 클럽 기록[편집]


시즌
클럽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회[16]
기타[17]
전체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3-94
맨유
프리미어 리그
0
0
0
0
0
0
0
0
0
0
0
0
1994-95
17
5
3
0
3
2
2
0
0
0
25
7
1995-96
26
10
2
1
1
2
2
1
-
31
14
1996-97
24
3
2
2
2
1
4
0
1
0
33
6
1997-98
31
8
2
0
1
0
7
2
1
0
42
10
1998-99
31
6
6
1
1
0
12
4
1
0
51
11
1999-00
31
9
-
0
0
11
3
3
0
45
12
2000-01
32
6
0
0
0
0
12
6
1
0
45
12
2001-02
35
8
2
0
0
0
13
1
1
0
51
9
2002-03
33
14
3
1
6
3
10
2
-
52
20
2003-04
28
9
6
4
0
0
5
1
1
0
40
14
2004-05
33
9
6
3
2
0
7
0
1
0
49
12
2005-06
20
2
0
0
0
0
7
1
-
27
3
2006-07
30
6
4
0
0
0
11
1
-
45
7
2007-08
24
1
3
0
0
0
7
1
0
0
34
2
2008-09
21
2
2
1
3
0
6
0
3
0
35
3
2009-10
28
3
0
0
2
1
7
3
1
0
38
7
2010-11
22
1
3
0
0
0
7
0
1
0
33
1
2011-12
17
4
2
0
0
0
2
0
0
0
21
4
2012-13
16
1
3
0
0
0
2
0
-
21
1
20시즌
통산
499
107
49
13
21
9
134
26
15
0
718
155


6.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6.1. 한국 비하 발언[편집]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2004년의 발언인데,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나중에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입단하여 활약하던 도중에 재발굴되어 이슈가 되었다. 국내 맨유 팬들을 위시한 국내 스콜스 팬들은, "스콜스가 그랬을 리가 없다. 잉글랜드는 일본에서 경기했으니 일본을 지칭한 말이다."라고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2004년 5월, The Guardian의 기사에 의하면, 한국 비하를 한 것이 확인되었다.

'Korea,' said Paul Scholes in January, is a stupid country where the World Cup should never have been played...'

월드컵을 개최하지 말아야 했던 멍청한 나라

해당 발언은 유로 2004를 앞두고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유로 2004의 우승 후보에 대해 묻는 질문에 프랑스에 대해 언급하며 2002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조기 탈락은 월드컵이 열려선 안 되는 stupid country 에서의 일시적 부진이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최강으로 불리던 프랑스 대표팀의 뜻밖의 조별리그 탈락에 대한 놀라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당시 장마를 피하기 위해 더운 날씨 속에 진행된 일정에 대한 불만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렇다곤 해도 실드를 쳐 줄래야 쳐 줄 수 없는 발언이다. 축구 선수로서 대회 개최국의 환경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수는 있으나 문제는 이 불만을 어떤식으로 표출하느냐이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간에 특정 국가에 대하여 stupid니 월드컵이 열려서는 안 되느니 한 것은, 그가 세계적인 축구 스타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오히려 축구인으로서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에 특정 국가에게 자격이 있네 없네를 따지는 것은 명백한 실언이다. 인터넷이 지금만큼 빠르지 않고 아시아 축구의 영향력도 약한 당시니까 어물쩍 넘어간 것이지 요즘이었으면 인종 차별로 징계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나중에 "긱스와 나는 박지성이 있기에 안심하고 맨유를 떠날 수 있다"라고 말한걸로 봐선 한국인이 싫은건 아닌듯 싶다.

이후에도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는데, 기사 2017년에도 스콜스는, '한일 월드컵 이후 당신은 그런 더운 나라들에서 월드컵이 열리는거에 대해 불평했었는데 2022 카타르 월드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 라는 질문에 자신은 거기(카타르)에 안 가서 다행이고, 한일 월드컵때도 한국과 일본은 너무 더웠고, 카타르는 45도가 넘는다는데 이런 기온에선 팬들도 선수들도 좋지 않다는 등 카타르의 월드컵 개최 역시 부정적으로 말한다.

월드컵의 취지는 세계인의 축제이고, 현재 세계 축구의 주요 대회 일정은 가장 큰 축구 시장인 유럽에게 맞춰져 있다. 따라서 특정 국가의 월드컵 개최 시기 날씨가 유럽 축구 일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그 국가 자체를 비하하는 것은 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카타르나 한국의 여름 날씨가 영국인에게 불쾌하다고 해서 그것이 월드컵을 개최해선 안 될 멍청한 국가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 이 논리면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국가는 6~7월 날씨가 좋은 국가로 한정해야 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거기다 따지고보면 유럽에도 카타르만큼은 아닐지언정 한국만큼 더운 국가들은 있다. 영국인들이 그 나라들에게도 월드컵을 개최해선 안 된다고 말하던가?

그리고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영국은 활주로가 녹고 철도 레일이 휘어질 정도인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에 시달렸는데, 대한민국은 폭우가 쏟아지기는 했지만 폭염 수준에서는 살짝 비껴나 있었다. 경기 당시의 기상문제는 복불복일 뿐 이를 함부로 탓해서는 안된다. 만일 2022년에 영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다면 똑같은 소리를 들었어도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6.2. 왓츠앱 사임 통보 사건[편집]


올덤 에슬레틱 감독으로 부임한 지 31일 만에 사임했다. 7경기에서 1승밖에 못 거둔 성적과 구단주와 마찰이 있었다는데, 본인의 첫 프로 커리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경질 과정에서 미성숙한 행동을 보여 비판을 받고 있다.

스카이 스포츠, 데일리 스타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스콜스가 SNS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왓츠앱(WhatsApp)을 통해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왓츠앱은 대중적인 SNS 메신저로, 우리나라로 치면 카톡 한 통으로 사임을 통보했다는 뜻이다. 스콜스는 메시지를 보내고 구단 수뇌부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성적이 부진하거나 구단 수뇌부와 사이가 틀어질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사임 통보를 하는 것은 본인과 함께 한 코칭 스태프, 선수들, 팬들에게 보여야 할 예의가 아니다. 아르바이트도 이런 식으로 사임 통보를 하면 욕 먹는 마당에 한 클럽의 감독이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사퇴한 것에 대해 비판이 일고 있다.

어처구니 없게도 스콜스는 과거 은퇴하고 싶은 팀으로 올드햄을 뽑았다. 같은 지역 팀인 올드햄에 애정을 갖고 있으며, 2017년에도 감독으로 일할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팀에 감독으로 부임한지 1달 만에 문자 통보로 사임한 것이다. 스콜스, 사랑하는 팀 올드햄에서 감독 데뷔


6.3. 아들의 폭행 논란[편집]


본인보다는 아들에 대한 논란인데, 스콜스 또한 욕설을 하면서 이를 가중시켰다. 기사

스콜스의 아들이 2018년 6월 학교 친구에게 주먹질을 하고 웃으며 영상을 찍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스콜스는 재판장에서 기자들에게 오늘은 어떤 XXX 같은 기사를 쓸 건가?[18]라고 욕설을 했다는 후문인데, 명백하게 아들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에서 사과는커녕 기자에게 화풀이를 한 점은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시기상으로 위의 왓츠앱 사임 통보 시기와 비슷하게 맞물리면서 비판이 가중되었다.


6.4. 불법 도박 논란[편집]


2019년 4월 16일,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협회 규정에 반하여 축구 경기에 베팅을 한 폴 스콜스에 대한 징계를 하겠다고 밝혔다. 협회에 따르면 스콜스는 2015년 8월 17일부터 2019년 1월 12일 사이에 열린 축구 경기들에서 140차례나 협회 베팅 규정을 어겼다고 한다. 가디언 기사


7. 여담[편집]


  • 키가 168cm로 축구 선수가 아니라 영국 평균 키로 봐도 평균보다 많이 작다. 여성 평균 키 정도일 정도. 맨유, 잉글랜드 국대 시절 지나갈 때 보면 유독 확실히 덩치가 많이 작게 느껴 진다. 그래서인지 후배들에게 횡포를 일삼았던 에릭 칸토나에게 많이 맞았었다고 한다.

  • 경력과 팀 내 위상을 봐서는 주장을 맡아도 손색없지만, 스콜스 본인이 주장직이 싫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남을 이끄는 역할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듯. 실제로 스콜스는 몇 안 되는 그의 인터뷰에서 그의 이상적인 하루가 "아침에 훈련하고,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오고, 아이들이랑 함께 논 후, 차를 한 잔 하고 애들을 재운 뒤 TV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매우 조용한 성격이어서, 박지성도 자서전에서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19] 워낙에 남들에게 주목받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무조건 경기, 훈련, 집밖에 모르고 구단 공식 행사 및 우승 셀레브레이션에도 거의 나서지를 않고 어쩔 수 없이 참석할 땐 대개 슬그머니 뒤로 빠져버린다.[20]

  • 이런 주목받는것을 꺼리는 성격탓에 실력과 커리어에 비하면 스타성이 떨어지는 편이라 국내 해축팬덤 사이에선 과대평가와 과소평가 여론이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선수이다. 그로 인한 에피소드를 포함한 자세한 사항은 후술.

  • 은퇴 복귀할 당시 U23팀 코치로 있으면서도 매일 훈련을 계속해서 몸상태가 괜찮았다고 한다. 첫 복귀날 작은 헤프닝이 있었는데 라커룸에 스콜스의 유니폼은 있었지만 축구화가 없었다고 한다. 구단에서 스콜스가 축구화가 없을꺼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스콜스는 나이키에 요청할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출전이 밖으로 새어나갈 수 있을꺼라 생각해서 동네 스포츠용품점(JJB)에 나가서 40파운드(한화 약 58,000원)짜리 축구화를 사서 신고 뛰었다고 한다. 당시 느낀 생각은 '축구화가 꽤 비싸네?'였다.

  • 은퇴 후 BT 스포츠에서 전문가로 맨유 경기를 분석, 평가하기 위해 초대될 때가 많다. 맨유가 부진하자 온갖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반 할 감독이 성명을 내든 반박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으며 "쟤 왜 저래?"라는 반응까지 추가로 내비치며 이기든 지든 간에 맨유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적 시장에서 내보낸 선수는 수준이 높은데 데려온 선수는 높은 수준이 아니라는 점, 최근 부진에 빠진 루니의 문제, 반 할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 경기가 지루하고 퍼거슨 시대의 색채가 전혀 없다는 점들을 주로 언급한다. 선수 시절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의 행보다.[21] 게다가 맨유는 그의 말대로 노잼 축구만 주구장창 보여 주고 있고 반 할의 인성 문제까지 드러나며 까이고 있다. 근데 사실 스콜스는 오히려 반 할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낮은 편에 속한다. 한 번도 반 할이 경질되어야 한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고, 오히려 경질 자체는 반대한다. 그저 팀과 반 할의 변화를 원하는 편이다. 그러나 결국 반 할은 시즌 종료 후 경질된다.

  • 그러나 무리뉴 시절에도 열심히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어서 무리뉴 감독에게도 반발을 샀다. "비난만 하는 스콜스, 내 성과 25%만 해봐!" 결국 즐라탄도 퍼기의 아이들이 TV 나와서 불평만 늘어놓는다며 맨유에 직접 들어가서 도움되는 일은 안 하고 팀 레전드라는 이유로 밖에서 말참견만 한다는 식으로 지적했다. 퍼기의 아이들이라고 통틀어 말했지만, 사실상 TV에서 맨유 비판에 앞장서는 스콜스와 네빌로 타겟이 좁혀진다. 그리고 결국 이 둘은 감독으로서 실패를 맛보며 TV에 나와서 입 터는 것과 현실은 다르다는 조롱이나 듣게 되었다.[22]

  • 운동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천식, 한쪽 눈 실명 위기 등을 이겨내고 맨유의 원클럽맨, 레전드 미드필더가 되었다. 특히 눈 실명 때에는 은퇴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 논란 문단에 서술된 것처럼 한국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것 같지만 별개로 동료였던 박지성을 자주 언급하는 편이다. 해설 도중 박지성 같은 선수의 필요성을 언급하거나 훈련할 때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동료로 박지성을 뽑은 적이 있다. 박지성도 자서전에서 처음 맨유에 입단할 때 주위에서 스콜스와의 관계를 걱정했지만 스콜스가 워낙 내성적인 양반이기도 하고 서로 잘 지냈다고 한다.


7.1. 그말싫[편집]


일부 강성 맨유팬들이 스콜스를 지단과는 동급이고, 사비보다 한 수 위라는 드립을 치며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성기의 스콜스가 시대를 풍미한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였던 것은 맞지만 지단, 사비와 비교했을 때 퍼포먼스나 커리어에서 상당한 격차가 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알싸의 유명한 드립 중 하나인 그말싫이 터져나왔다. #. 누군가가 "스콜스는 역대급 중미다"라고 주장하자 다른 이가 "(스콜스의)발롱도르 순위는 몇 위가 최고였나요?"라고 반문한 것. 그러자 글쓴이는 "그건 말씀 드리기 싫습니다"라고 답변을 회피했다.

물론 선수 비교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등의 개인 커리어와 팀 커리어(특히 대표팀 커리어), 매체들이 내놓는 축구 선수 순위 등의 자료들을 종합했을 때 지단과 사비가 스콜스보다 훨씬 앞서는 평가를 받고 있음은 자명하다.


7.2. 레전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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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아프리카 TV에서 경기를 보는 도중 스콜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라는 말을 하여 큰 웃음을 주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7.3. vs 제라드 or 램파드[편집]


대부분의 해축팬들이 축구를 보기 시작한 시점의 스콜스의 전성기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롤을 본격적으로 맡기 시작한 30대 초중반이기 때문에 나이 차가 꽤 나지만 같은 잉글랜드인이자 동시대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였던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와 자주 비교된다. 이는 세 선수 모두 은퇴한 지금도 간간이 언급되는 떡밥인데, 스콜스를 위로 치는 사람들은 팀 커리어를 내세우고 제라드와 램파드는 각종 수상 기록과 스탯을 내세우며 비교할 때가 많다. 이런 선수들의 비교 자체가 병림픽이기도 하고 스콜스는 제라드와 램파드보다는 몇 년 앞서서 보냈기에 전성기를 기준으로 할 때 정확한 비교가 어렵다.[23] 그리고 이 셋의 팀에서의 역할도 각각 다르기에 미드필더라도 퉁쳐서 비교하는 건 억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런 떡밥이 유효한 건 스콜스가 우선 눈에 보이는 스탯이 부족하고 제라드, 램파드가 각각 리버풀, 첼시를 대표했던 미드필더들이기 때문이다.

이 세 선수의 비교는 유난히 개인 수상을 언급할 때 불이 붙는데 그 이유는 스콜스가 제라드와 램파드에 비해 개인 수상 기록만큼은 정말 초라하기 때문이다.[24]

가장 권위있는 개인상인 발롱도르로 비교하면 램파드는 2위, 제라드는 3위까지 해본 적이 있지만 스콜스는 순위권은 커녕 커리어 내내 단 한 표도 못 받았다. 또한 제라드는 리그 MVP라 할 수 있는 PFA 올해의 선수FW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고, 램파드는 FWA 올해의 선수와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 바가 있다. 거기에 리그 베스트 11에 해당하는 PFA 올해의 팀에 각각 제라드가 8회, 램파드가 3회 뽑혔지만 스콜스는 2회 선정되었고, 이것이 스콜스의 몇 안되는 개인 커리어다.[25]

그와 반대로 프리미어 리그 사무국에서 발표한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20주년 베스트 XI에서 스콜스는 긱스, 슈마이켈과 함께 모든 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제라드는 팬 선정 팀에만 뽑혔고, 램파드는 어디에도 뽑히지 못했다. 또한 20주년 베스트 플레이어 10명의 후보에도 스콜스만 올랐다.[26] 하지만 최근 BBC에서 주관한 프리미어 리그 25주년 올타임 XI 패널 선정 팀에는 스콜스가 빠지고 제라드와 램파드가 들어갔다. # # 세 선수의 개인 수상 기록 세 선수의 통산 스탯

축구 해설가들의 말을 빌려 스콜스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자면, 스콜스는 단순히 램제에 비해 나이가 몇 살이 많은 것이 아니라 PL의 위상 자체가 낮을때 활약을 하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달성하면서 PL이 세계 정상의 리그로 올라온 이후가 램제의 전성기였다. 특히 2010년대는 라리가가 리그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월드 XI도 거의 라리가에서 나온 것[27]을 보면 알 수 있듯 제라드와 램파드는 리그의 위상이 올라온 후에 PL에서 활약하였기에 여러 개인 수상에 있어서 스콜스보다 유리했다는 점도 비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스콜스가 개인 수상 기록이 부족해도, 초라했던 PL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있어서는 저 셋 중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스콜스의 득점과 어시스트가 두 선수에 대해 부족한 점에서는, 스콜스는 두 선수에 비해 득점이 연결되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나 윙어의 역할이라기보다는, 그들까지 연결되기 위해 경유되는 과정에서 볼을 배급하는 역할을 더 많이 수행한 점에 있어서는 참작할 여지가 있다. 남는 것은 결국 개인 커리어나 스탯이기에 스콜스가 후대에는 둘에 비해 평가가 밀릴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벌써부터 스콜스에 대한 평가가 뒤로 밀려야만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이다. 후대에 밀릴것 같으니 지금부터 맨 뒤에 두자는 주장은 이미 그 자체로 오류다.

한편, 스콜스의 화려한 커리어는 조정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스콜스의 화려한 팀 커리어는 사실 스콜스 이름을 지우고 당시 맨유 스쿼드의 누구를 넣어도 성립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스콜스의 화려한 팀 커리어는 그의 평가에 있어서 분명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를 통해서 자신의 위상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맨유의 선수단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커리어를 이끌어낸 퍼거슨 감독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28] 스콜스 대신 제라드 혹은 램파드가 있었어도 맨유의 전성기는 여전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퍼거슨이 아닌 다른 감독이였다는 가정을 깔면 맨유의 전성기의 존재여부는 매우 회의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맨유의 화려한 선수단을 고려했을 때, 맨유의 성공이 오로지 스콜스 덕분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스콜스가 그저 맨유 전성기에 버스를 탔을 뿐이라는 주장은 더욱 말이 안된다. 스콜스는 그만큼 맨유의 트레블에 매우 중요한 '키'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제 스콜스의 전성기 시절(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 플레이를 직접 목격한 축구 해설가 한준희는 '원투펀치' 방송에서, 맨유의 성공에 있어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스콜스를 꼽았다.# 물론 한준희의 말이 항상 옳을리야 없겠지만, 그가 전성기 시절의 스콜스부터 램파드-제라드의 시대를 경험했고, 축구에 관한 논평에 있어서 대중들에게 상당히 객관적인 신뢰성을 인정받는 전문가라는 점에서 그의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당시 스콜스의 자리에 누구를 넣어도 맨유의 성적은 변함이 없었을 거라는 주장보다는, 오히려 스콜스의 존재 덕분에 맨유의 전성기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또한 스콜스의 재능은 램제와는 다소 다른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에 과연 스콜스 대신 램제가 들어갔어도 맨유의 성공이 가능했을지는 쉽사리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맨유 신화의 공로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인 퍼거슨이 본인 은퇴하는 날까지 끝까지 집착한 선수가, 많고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 중 오직 긱스와 스콜스 뿐이었다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알다시피, 스콜스 은퇴 이후 스콜스의 대체자를 찾을 수 없었고, 맨유의 중원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하자 퍼거슨은 은퇴한 스콜스를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스콜스의 복귀 시즌에 리그 2위의 준수한 성적으로 마감하고[29], 다음 시즌에 다시 리그 우승컵을 탈환하였다.[30] 퍼거슨의 이전까지의 행보(특정선수에 집착하지 않는 성격)을 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뭔 짓을 해도 혼나지 않았던 선수가 스콜스 뿐이었다는 퍼디난드의 증언을 봤을 때, 퍼거슨의 스콜스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측면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스콜스는 맨유의 가장 화려한 순간을 함께한 만큼, 스콜스 개인의 기량으로 중요한 경기에서 클러치 능력을 발휘해 임팩트를 준 순간을 찾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당장 1998-99 시즌 트레블 당시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인테르라는 우승후보들을 상대로 중요한 골들을 기록하고, FA컵 결승전에서는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우승을 이끈 바 있으며, 2007-08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침몰시킨 결승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콜스 역시 어느 월드클래스 선수들 못지 않게 훌륭한 클러치 능력을 가졌었다고 봐야 한다.

또 흔히 스콜스의 약점이라 지목되곤 하는 또 다른 부분은 팀 주축으로서의 리더 역할에 대한 의문이 있다. 화려한 팀에서 영광스러운 역사를 함께한 것은 그의 행운이지만, 불우한 환경에서도 팀의 리더로서 제 역할을 해낸 라이벌과 비교했을 때 과연 스콜스가 한 선수로써 그에 대응할 수 있냐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적(한 선수로서의 리더십)에 의문이 드는 이유는, 당시 맨유에는 이미 칸토나, 슈마이켈, 킨이라는 압도적 카리스마를 가진 베테랑들이 있었고, 그 이후 곧바로 좌-긱스, 우-베컴이라는 화려한 스타일의 선수들이 나왔기에 스콜스 본인이 맨유라는 팀의 얼굴을 자처하기는 힘들었다. 또한 그와 별개로 팀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는 결코 긱스, 베컴, 킨에 밀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과 25%씩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는 한준희의 주장을 고려했을 때, 미드필드 진영에서 스콜스의 영향력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31] 또 생각해보면, 스콜스 자체가 공을 쓸데없이 오래 갖고 있는 스타일이 아니며 각 상황의 흐름에 맞춰서 지능적이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경기흐름을 주도해 나가는데 탁월했기에 관중들의 주목을 받기엔 불리한 측면도 있다. 다시 말해, 스콜스가 얼핏 리더십이 부족해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시의 정황 상 그저 팀의 얼굴이 될 수 없었고, 본인의 플레이 스타일 상 스포트라이트가 덜 비추어졌기 때문인 것일 뿐, 스콜스라는 선수 자체가 경기 내적으로 리더십이 없던 것은 아니다. 이런 선수를 단지 팀의 얼굴이 아니라는 이유로 리더십이 없다고 폄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요약하자면, 경기의 내용적인 면에서는 충분히 리더십 있는 선수였지만, 단지 경기 외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밋밋했을 뿐이다. 즉, 리더십의 문제라기보단 선수 본인의 스타성이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하는게 더 알맞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스콜스의 개인 수상 기록은 확실히 램제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팬들은 축구인들의 리스펙트성 발언[32]이나 평가를 기준으로 삼을 때가 많다.[33]


8. 스콜스에 대한 말, 말, 말[편집]


만약 그가 나와 함께 뛰었다면, 난 훨씬 더 많이 득점을 기록했을 것이다.

펠레


지난 15~20년 동안 내가 본 최고의 미드필더는 스콜스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갖춘 환상적인 선수입니다. 난 사비 알론소와 여러 차례 스콜스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스펙타클한 선수입니다. 만약 그가 스페인 사람이었다면 더 높은 평가를 얻었을 것입니다.

사비 에르난데스


제 커리어에서 스콜스와 함께 플레이할 수 있는 기회가 없던 것이 후회됩니다.

지네딘 지단


그는 언제나 다른 선수들의 관심사였다. 심지어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을 때조차 선수들은 나에게 와서 '스콜스가 좋아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다. 그들은 다른 위대한 축구 선수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데이비드 베컴


의심의 여지없이 스콜스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선수여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티에리 앙리


연습게임을 하면 스콜스가 있는 팀이 항상 이겼다.

박지성


스콜스는 뛰어난 테크닉과 패싱력을 갖춘 것 이외에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립니다.

에르네스토 발베르데


스콜스는 내가 본 최고의 미드필더다. 그는 오른발, 왼발, 머리 등 어느 부위로도 득점과 패스를 할 수 있다.

나니


그는 브라질에서 뛰기 충분하다. 난 붉은 머리와 유니폼을 하고 있는 소년의 패스를 보는 것, 스콜스의 플레이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소크라치스


나와 같은 모든 미드필더들은 스콜스만큼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모두가 스콜스에게 배워야 한다.

에드가 다비즈


그는 풍부한 특성과 퀄리티를 가진 올라운드 미드필더이다.

마르셀로 리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폴 스콜스는 그의 세대 중 최고의 선수다.

펩 과르디올라


나이는 상관없다. 스콜스를 봐라. 스페인의 차비, 이니에스타와 같은 플레이를 한다. 그는 결코 공을 빼앗기지 않는다.

해리 레드냅


피를로와 함께 뛰는 건 내게 기쁨을 준다. 그러나 최고의 패서를 꼽으라면 스콜스다.

카를로스 테베스


(스콜스, 램파드, 제라드 중 누가 최고냐는 팬의 질문에) 폴 스콜스.

토니 크로스


전문가들이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물론 그는 내 드림 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지만, 또한 개인적으로 경기 관점에서 그는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데쿠


그 세대에서 정말 뛰어난 미드필더. 그냥 경기를 뛰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설계했다. 모든 패스들이 그의 지능과 경기 이해도에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안드레아 피를로


패스가 정말 환상적이었다. 레이더처럼 정확하게 향했다. 스콜스 오른발은 경이로웠다. 피치 위 어디든 상관없다. 스콜스는 타깃을 정확히 맞출 것이다.[34]

리오 퍼디난드


스콜스와 제라드와 경기하면 정말 곤란했다. 둘은 볼 처리가 뛰어나고, 태클도 강하게 들어온다. 정말 잘했다. 강한 상대였다.

마이클 에시엔


[1]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2] 세컨드 스트라이커[3] 지분 10% 소유[4] 리그 26경기 10골.[5] 4강 2차전에서 공을 뺏으려고 태클을 하다가 디디에 데샹의 발목을 그대로 밞아 버렸고, 결국 경고를 받아 경고누적이 되고 말았다.[6] 실제로 그 경기에서 메시에게 팬텀 드리블로 벗겨지는 짤은 메시의 엄청난 드리블 짤로 지금까지도 각 축구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고 있다.[7] 이 결승전에서 스콜스를 거르고 안데르손을 선발출장시킨 퍼거슨의 결정에 많은 의문이 제기됐다.[8] 맨유에서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후로는 처음 로테이션 자원으로 임한 시즌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9] 이 우승이 2023년 현재까지 맨유의 마지막 리그 우승이다.[10] 포포투에서는 브라질인처럼 축구하는 영국인이라고 표현했다.[11] 박문성 해설위원은 폴 스콜스의 경기를 보고 실제로 느낀점은 진짜 게임에서나 보던 패스를 실제로 보고 사람이 아닌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고 스콜스가 패스를 한 번씩 할 때 마다 경기장 전체가 감탄을 했다고 한다.[12] 정확한 장거리 패스에 대해 유머러스한 일화가 있는데, 알렉스 퍼거슨에 따르면 한 번 게리 네빌이 훈련 중 소변이 마려워서 한 50야드 떨어진 곳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스콜스가 주저 없이 공을 차서 소변을 보던 네빌의 엉덩이를 정확히 맞췄다고 한다.[13] 실제 한 말: "He's got no chance, he's a midget."
ㄴ해석: "그는 어떠한 기회도 부여받지 못할 것. 난쟁이임."

그랬던 양반이... 스콜스 선수생활 끝나는 날까지 붙박이주전으로 써먹더니, 2011-12 시즌에는 팀이 위급해지자 이미 1년 전에 은퇴한 스콜스를 긴급호출시킨다. 그리고 스콜스가 오자 바로 안정을 찾은 맨유는 그 시즌 2위(맨시티 우승)로 마감하고, 2012-13 시즌에 다시 리그 우승컵을 탈환한다. 다만 2012-13 시즌에는 부상으로 출전시간이 800분이 채 되지 않아 기여도 자체는 미미한 편이다.
[14] #, #[15] 특히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전술적으로 잘 해내기 위해선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꽤 크다. 그저 내려앉는 일이야 쉬운 일이지만 그 낮은 위치에서 공격의 중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느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16] UEFA 챔피언스 리그, UEFA 유로파 리그[17] FA 커뮤니티 실드, UEFA 슈퍼컵, 인터컨티넨탈컵, FIFA 클럽 월드컵[18] As he walked into the public gallery, Paul Scholes approached the press bench and said: What b******s are you going to write today then?[19] 또한 워낙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 탓에 팀 동료들 중에서는 스콜스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동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20] 자기 은퇴 경기에서 주목받기 싫어서 에릭 칸토나를 부를 정도였다. 맨유 레전드인 칸토나를 부르면 그쪽으로 이목이 쏠릴 것을 노렸다고 한다.[21] 자신의 은퇴식 때도 주목받는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 이렇게 총대를 매고 나설 정도라는 상황에서 스콜스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다.[22] 돈 받고 분석 프로에 초빙된 것이니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곤 하지만, 그 수위가 강하고 빈도가 너무 잦으니 과하다는 의견이다. 선수 시절도 겪어본 사람이 감독들에게 비난만 일삼다가 결국 본인들이 감독 했을 땐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이들의 비판은 탁상공론 수준의 현실과 무관한 것이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무리뉴는 네빌에게도 "경기 중에 PAUSE 버튼은 없다"면서 현실성 없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다는 식으로 둘러서 지적했다. 비판이나 쓴소리도 적당해야 듣는 사람도 수긍하는 법이다.[23] 스콜스가 램파드보다 4살 가까이 많고 제라드가 램파드보다 2살 가까이 어리다. 순전히 나이로 비교하자면 실바, 크로스, 포그바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한데 생각해보면 포그바와 크로스라면 몰라도 포그바와 실바를 비교하는 경우는 적다. 요컨데 롤도 다르고 시기도 차이가 있다는 것. 이때문에 한국에서 스콜스의 전성기인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을 직접 본 시청자의 수는 매우 적다.[24] 거의 절대다수의 공신력있는 언론사와 해설가 등 축구 전문가들이 선수 개개인을 평가하고 랭킹을 매기는데 있어서 팀 커리어보다 개인의 커리어나 활약상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 당장 역대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선수들만 보아도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 호날두, 푸스카스, 플라티니 등의 선수들은 월드컵 우승이 없다.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퍼스트팀 스트라이커로 선정된 호나우두만 해도 챔스 무관에 리그 우승도 1회에 불과하고, 랭킹 상위에 포진된 선수보다 팀 커리어가 좋은 선수는 무척이나 많지만 팀 커리어가 온전히 개인의 기량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다. 반대로, 역대 최강의 팀을 논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커리어는 뒤로 밀리는데, 이는 선수단의 조합과 그로 인한 성과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 1기는 개개인은 당대 최고였지만 팀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의 평가에 비해 훨씬 박한 편이다.[25] 축구 해설가 한준희는 같은 팀에 유명한 선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석했다.원투펀치에서 다룬 스램제 실제로 동시기에 초기에는 에릭 칸토나, 한창 전성기에는 라이언 긱스와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걸출한 스타들이 있었고 후방으로 내려올때는 반 니스텔루이와 루니가 포커싱을 전부 가져갔다. 게다가 당시 맨유는 윙어천국이라고 불릴정도로 뛰어난 윙어들이 많았고 동시에 웨인 루니, 루드 반 니스텔루이 등 걸출한 선수가 너무 많았다. 팀의 주장, 부주장을 맡은 제라드와 램파드보다 포커싱을 덜 받을 수 밖에 없었다.[26] 긱스가 선정되었다.[27] 주로 2010~2018년까지[28] 이스타 TV의 해설위원 3명과 감스트, 박문성의 스램제 관련 토론방송에서 언급된 내용이다.[29] 맨시티와 맨유는 각각 리그 마지막 경기 결과에 따라 우승컵의 향방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마지막 경기를 치루었다. 맨유는 리그 마지막 경기를 1-0으로 승리하며 시즌을 마무리한 이후 맨시티의 결과를 지켜보던 상황. 같은 시간에 경기한 맨시티는 추가시간 종료 1분 전까지 2-2 상황이었고, 이대로만 끝나면 맨유가 우승을 차지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아구에로가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말도 안 되는 역전골을 넣으면서 맨시티가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한다.[30] 다만 맨유의 2012-13 시즌 리그 우승에 스콜스의 기여도는 미미한 편이다. 선발 출장이 8경기뿐이고 출전 시간도 장기 부상으로 800분이 채 되지 않는다.[31] 이는 축구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견해이기도 하다. 당시 맨유의 미드필드진에서 킨과 대등한 비중을 갖고 있던 선수가 바로 스콜스였다.[32] 물론 엄밀히 따지면 정답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말이 바뀔 때가 많고, 국적, 환경, 인간관계 등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향이나 높게 치는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서도 선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찌되었든 직접 뛰어본 선수들과 가장 가까이서 봐온 프로들의 발언이기에 그저 허무맹랑하게 넘길 부분은 아니다.[33] 아무래도 누가 더 나은 선수인지 가리는 것이다보니 축구 선수, 전문가, 해설위원들의 평가를 꺼낼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런 평가 역시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대부분의 축구인은 그 셋을 나눠서 평가하는 것을 피로해하며 차이가 나도 아주 극소한 차이라고 말할 때가 많다.[34] 돈이 걸린 내기라면 당연히 스콜스에게 걸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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