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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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원
3. 언어
4. 종교
5. 규모
6. 폴란드인 디아스포라 문화
7. 폴란드계 디아스포라 민족 집단
8. 폴란드인 인물
9. 폴란드 국적, 출신 캐릭터
9.1. 한국 작품
9.2. 일본 작품
9.3. 미국 작품
9.4. 기타 국가 작품
10. 설정상 폴란드와 관련이 있는 캐릭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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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근교에 정착한 폴란드계 튀르키예인

폴란드인은 중부유럽 폴란드를 중심으로 거주하며 폴란드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서슬라브족 계통의 민족이다.


2. 기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폴란드/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슬라브족의 이동 이후, 중세 초 비스와 강, 바르타 강, 오드라 강 유역에 정착한 서슬라브족 중 미에슈코 1세가 이끄는 피아스트 왕조의 폴란인(Polanie)들이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이웃한 다른 서슬라브족들을 상당수 병합한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을 기원으로 본다.

중세 폴란드인들은 레흐족에서 따 와서 레히치(Lechici)라고 불렸다. 폴란드의 중세 연대기에서는 슬라브족의 이동이란 역사를 레흐와 체흐, 루스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부족들을 거느린 3형제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나라를 세우는데 루스가 세운 나라는 러시아, 체흐가 세운 나라는 체코, 레흐가 세운 나라는 바로 레히치(폴란드)가 되었다는 식이다.

폴란드인의 선조들은 발트 신화와 슬라브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페룬과 스바로지츠 같은 신들을 숭배했다. 그러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폴란드인들을 자꾸 침략하자 서기 966년 미에슈코 1세가 체코 공주인 도브라바와 혼인을 맺으면서 체코로부터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당시 폴란드 서쪽에 살며 피아스트 왕조의 통치를 거부했던 우지체 세르보비에족과 비엘레치족은 독일의 동방식민운동 결과 독일인으로 흡수되었다.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력이 절정에 당했을 시절에는 많은 빌뉴스의 리투아니아 시민들이 폴란드인 가톨릭 성직자들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어를 사용하였으며, 정교회를 믿던 루테니아왈라키아 지식인과 유력자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폴란드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단스크 등을 중심으로 폴란드계 독일인 인구도 적지 않았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독일계와 폴란드인 혼혈로 알려져 있다.

중세 및 근세 폴란드 피지배계급(농민, 도시민)의, 또는 지배계급(귀족) 내의 민족의식 공유 여부를 두고 폴란드 민족의식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기준을 적용하자면 애초에 중세와 근세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지역에서도 일부 귀족이나 도시민, 지식인이 민족의식을 자각했지 사회의 피지배계급도 민족의식을 공유하는 국가는 별로 없었다.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근대로 넘어오면서 기존 계급제도가 이완되거나 붕괴하고 초기 국민국가를 형성하면서 상하를 막론한 전사회적인 민족의식 공유가 진척되었고, 이것은 서유럽에 비해 시기만 상대적으로 늦었을 뿐 동유럽과 폴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전근대 하층민들 생활수준은 비슷비슷하고 착취 같은 인위적인 요인보다는 자연적인 요인을 더 많이 받는다. 물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멸망기의 농노의 수준이 주변국들에 비해서도 나빴지만, 말 그대로 멸망기의 조건일 뿐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학자 아자 가트(Azar Gat)와 알렉산더 제이콥슨(Alexander Jacobson)의 저서[1]는 폴란드에서 분명히 민족의식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여러 사례를 수록했다. 폴란드가 재통일된 14세기 초에는 폴란드 내에서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체코인이 독일의 협력자로 비난받고 독일인의 반란을 지원한 주교에게 '폴란드의 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진 적이 있었으며, 훗날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봉기에도 우크라이나인 농노와 처지가 다를 바 없던 폴란드인 농노들은 봉기군에 가담하지 않았다.[2] 하다못해 공화정 말기 5월 3일 헌법 제정에 반발하여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고 러시아군을 불러들여 제2차 폴란드 분할(1793)의 단초를 마련한 대귀족 매국노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Stanisław Szczęsny Potocki, 1751-1805)도 연맹의 연명서에 서명할 때 "진정한 폴란드인" 운운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을 정도니.[3][4]

결국 어떤 형태를 취했든 간에 중근세 폴란드 민족의식의 존재는 확연한 사실이며, 논쟁의 초점이 되는 것은 폴란드인의 정의가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냐, 민족의식이 민족주의로 작용했는가, 민족의식과 국가의식과 계급의식 중에 무엇이 강했는가, 민족의식이 처음부터 전사회적이었느냐 아니면 19세기 이후 근대화를 겪으면서 민족의 외연이 확장되었느냐인 것이다.

3. 언어[편집]


폴란드 평원 지대는 폴란드어 방언이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변화하지 않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폴란드는 북부 카슈브어 및 남부 실레시아어를 사용하는 일부를 제외하면 모국어로 폴란드어를 사용한다. 과거 폴란드가 지배했던 영토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들[5]도 존재했지만 이들은 리투아니아인을 제외하면 대개 종교적인 차이를 이유로 폴란드인과는 다른 민족으로 분류되었다. 근세에도 폴란드에서 방언의 변이는 다른 유럽 언어들과 보면 미약한 수준이었고 전 지역에 공통된 많은 특징들이 몇몇 차이점들을 압도했다 한다. 폴란드 농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귀족들이 사용하는 언어 상의 발음은 큰 차이가 없었다.[6] 국토 크기에 비해 방언차가 현저하게 적은 현상은 러시아에서도 관찰된다.

폴란드의 방언 분화는 지형이나 지리적 요인보다는 주로 이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폴란드인과 이민족과 공존하는 변경 주민의 언어는 본토 폴란드어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녀 각각 구분이 이루어질 정도이다. 예를 들어 루테니아(오늘날 서우크라이나) 지역의 폴란드어는 우크라이나인과 교류한 영향으로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독특한 악센트를 가졌으며, 역시 체코인과 폴란드인이 공존한 테셴[7]폴란드어 방언도 체코어의 영향으로 본토 폴란드어와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언어로 간주되는 실레지아어를 넓은 관점에서 폴란드어의 방언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실레지아 또한 2차 대전 전까지는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4. 종교[편집]


민족을 구분하는 요인으로는 언어 외에도 종교가 있다. 중유럽 가까이 위치한 폴란드는 동유럽의 다른 슬라브인들이 정교회를 믿었던 것과 다르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결과적으로 중세 말 정교회권 동유럽이 타타르의 멍에로 학문 발전이 정체되었던 것과 다르게 폴란드는 가톨릭권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8] 이는 폴란드 문화의 주요한 특징 즉 슬라브-가톨릭 문화라는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폴란드 분할 이후 폴란드는 개신교(루터교회)를 믿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정교를 강요하는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늘날에는 폴란드인 절대다수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톨릭에서 찾는다. 같은 서슬라브 계통 체코인들이 세속적인 성향인 것과 비교하면 폴란드인들의 신앙심은 유럽 기준으로는 유별난 수준이다.[9] 심지어 마찬가지로 같은 서슬라브 계통이면서 체코인들에 비해 가톨릭 신앙심이 훨씬 강한 슬로바키아인들조차도 그 정도가 폴란드인들만큼 유별나게 강한 편은 아니다. 물론 이쪽도 선진국들의 세속화의 흐름에 따라 냉담자가 느는 추세다.

다만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따른 잔재를 100% 지우지는 못했기에 루터교회를 믿는 폴란드인들과 정교회를 믿는 폴란드인들도 소수나마 존재한다. 대체로 각각 독일계와 루스계[10] 혈통인 사람들이 많이 믿지만 토착 폴란드인인 루터교회 신자와 정교회 신자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개혁교회(칼뱅파)를 믿는 폴란드인들도 마찬가지로 루블린, 자모시치 일대에 소수나마 존재하는데 이들은 프로이센의 지배와 무관하게 단순히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개종한 폴란드인들의 후손이다.

가톨릭을 믿는 대다수 폴란드인 중에서도 일부는 동방 전례의 동방 가톨릭 교회를 믿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폴란드 정교회 신자들처럼 동슬라브계 혈통이 많은 편이다.


4.1. 폴란드 유대인[편집]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대부분이 폴란드 출신인 폴란드 유대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전 세계 유대인의 60~80%가 거주했다.[11] 폴란드 분할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각각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으로 흩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귀족이나 외국인이 아닌 경우 해외 무역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폴란드어 대신에 이디시어를 사용했다. 다만 이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언어가 독일어 계통 이디시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과 이름은 폴란드어식으로 작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폴란드 침공독소전쟁 시기에 아인자츠그루펜에 학살당하거나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집단학살당하며 폴란드에서 유대인 인구는 급감했다.[12] 그로 인해 2차대전 이후 폴란드의 최대 소수종교 자리는 유대교에서 폴란드 정교회로 넘어간 상황이다. 심지어 종전 이후로도 1968년 학생 운동이 벌어지자 공산 정권에서 폴란드 유대인들을 다시 제물로 삼아 1만 5천명이나 추방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환멸을 느낀 건지[13] 현대에는 이스라엘 유대인 사회에서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 후예들이 폴란드어식 성과 이름을 버리고 히브리어로 성과 이름을 작명하기가 점점 대세가 되면서 폴란드어식 이름과 성을 가진 유대인들도 점점 줄고 있다.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와 수난은 아트 슈피겔만의 《》나 파벨 파블리코프스키의 〈이다〉에서 다루고 있다.


5. 규모[편집]


폴란드에는 3,8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며 해외의 폴란드인 디아스포라 인구를 합치면 5,500만여 명까지 늘어난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독일영국, 스웨덴노르웨이로 일하러 간 폴란드인들[14]도 수백만 명 가까이 된다. 폴란드 분할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 브라질로 망명한 폴란드인 후손들도 많으며 이들은 이민간 나라에서 다른 민족 주민들과 혼혈되면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힘들지만 폴란드계 미국인 인구가 대략 8백만에서 1천만 명 가까이로 추산한다. 브라질에도 폴란드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폴란드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구는 드물다.

과거에는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에도 많은 폴란드인들이 거주했지만 2차대전의 혼란기 와중에 대거 추방당하거나 학살당하면서 수가 많이 줄었다. 오늘날에는 벨라루스에 30만 명, 리투아니아에 17만 명, 우크라이나에 15~20만 명 정도만 남아있다. 그외에도 러시아, 카자흐스탄에도 폴란드인들이 거주한다.[15] 또한, 아이티에는 소수의 폴란드인 후손들이 거주한다.

2차대전 이후 프로이센 동부 영토 상당수가 폴란드로 이양되는 과정에서, 그단스크 지역의 카슈브어를 사용하는 카슈브인실레시아실레시아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폴란드로 흡수되었다.[16] 해당 언어들은 폴란드어의 방언연속체로 분류 가능한 언어들이기도 하다. 다만 프로이센에 살던 마주리아인들의 경우 20세기 초까지는 마찬가지로 폴란드어 방언연속체에 해당하는 언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 근세 루터교회로 개종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 기준으로는 폴란드인 정체성을 버리고 독일인에 거의 완전 동화된 상황이다.


6. 폴란드인 디아스포라 문화[편집]


대부분 폴란드어를 사용한다. 폴란드인들은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 미국브라질에 이민간 폴란드인들은 이민 2~3세대 넘어가면 폴란드어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폴란드계 영국인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영문학의 거장으로 유명하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그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의 배경을 바꾸고 영화화한 것이다. 폴란드계 프랑스인 중 음악에서는 프레데리크 쇼팽이, 그리고 과학 분야에서는 마리 퀴리가 유명하다. 폴란드 분할을 기점으로 많은 폴란드인들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쇼팽과 퀴리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 특히 당시 프랑스어는 귀족들과 고위층 사이에서 오늘날 영어보다도 높은 위상을 가져 대부분의 고위층이 불어에 능숙했기에 더더욱 많은 폴란드인들이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 것이다. 이후 쇼팽과 퀴리는 19세기 폴란드 민족주의의 구심점이 되며 추후 폴란드 독립 후 수도 바르샤바에 지어진 국제 공항 이름도 쇼팽 국제 공항이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이유로 많은 폴란드인들이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도 거주하였다. 이들은 갈리치아 볼히니아 일대의 폴란드인 농민들처럼 직접 이민을 간 경우도 있으나,[17] 귀족 계층은 루테니아인 정교회를 믿던 지역 유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며 폴란드화한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도 폴란드식으로 ~스키 돌림 성씨를 가진 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 일대에 주민 대다수는 한 때 폴란드인이었으며, 현재도 빌뉴스 교외 지역의 주민 상당수가 폴란드계이다. 요가일라 치세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맺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폴란드인 성직자들이 빌뉴스의 성당에서 성직을 맡았는데, 그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뉴스의 리투아니아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점차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폴란드인과 통혼하며 폴란드인과 동화되었다. 그래서 현대 리투아니아는 토착 리투아니아계 성씨를 가진 이들 다음으로 폴란드계 성씨를 가진 이들이 많다.

이전에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와 같은 동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폴란드인들은 러시아 제국소련을 거치며 독립을 꾀하던 이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거나 러시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폴란드계 러시아인이 되거나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다시 쫓겨나게 된다.

폴란드 내 영화 산업도 활발하고 미국 내 폴란드인 &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영화계에서 활약 중이다. 폴란드계 미국인들은 게임 산업계에서 활약하고, 폴란드 본국도 게임 관련 산업이 강세이다. 폴란드인들은 자국의 게임과 영화 산업을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근데 사펑 2077은 왜... 미국에서는 시카고, 미네소타 등지에서 흔히 볼수 있는데 코왈스키, 사도우스키, 코스첵(쿠쉬차크),라돈스키, 예코빅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십중팔구 폴란드계이다. 이를 노리고 게임 내에서 폴란드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경우도 많다. 레인보우 식스 시즈조피아, 엘라 등이 대표적이다.

현실적으로 폴란드인은 서유럽에서 입지가 좋은 편은 아니다. 서유럽에 이주노동자로 간 폴란드인들은 자조적인 농담으로 자신들을 Gunner(주유소 총잡이)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화장실 청소 노동자 드립은 좀 도가 넘었고, 실질적으로는 농촌 노동자[18] 혹은 레스토랑 웨이트리스[19]로 일하는 경우가 더 많은 편이다.

폴란드인이나 폴란드 유대인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가난한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조직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미국 금주법 시기 폴란드 마피아로 유명했다.


7. 폴란드계 디아스포라 민족 집단[편집]






8. 폴란드인 인물[편집]



9. 폴란드 국적, 출신 캐릭터[편집]


※ 해당국 작품 제외.

배우 및 성우가 폴란드인인 경우 ☆표시.

9.1. 한국 작품[편집]


  • 블랙 서바이벌 - 루크
  • 사이퍼즈 - 기류의 그레타
  • 조선, 혁명의 시대 -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21]

9.2. 일본 작품[편집]



9.3. 미국 작품[편집]



9.4. 기타 국가 작품[편집]



10. 설정상 폴란드와 관련이 있는 캐릭터[편집]


  • 컨트리볼 - 폴란드볼[24]
  • 골든 카무이 - 빌크[25]
  •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 - 제이콥 코왈스키[26]
  • 아르카나 하트 - 리리카 펠프네로프
  • 울펜슈타인 시리즈 - B.J. 블라즈코윅즈
  •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 루시나 쿠시나다[27]
  • Eddsworld - 파트릭[28]
  • Wall Su - Wall Su[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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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ations: The Long History and Deep Roots of Political Ethnicity and Nationalism(2012). 국내에는 민족: 정치적 종족성과 민족주의, 그 오랜 역사와 깊은 뿌리로 번역됨.[2] 우크라이나 코자키들은 농민들을 잡아서 흑해 노예상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도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노예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을 정도. 때문에 민족의식 때문에 저항했다기보단 현실적인 생존과 이익을 위해 저항하다 보니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고 볼 여지가 더 크다.[3] 원문은 다음과 같다: "프로이센과 왕당파 도당에 의해 눈멀지 않은 진정한 폴란드인들은, 오직 러시아만이 우리 조국을 수호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민족은 노예가 되리라고 확신한다.(Każdy prawdziwy Polak, nie zaślepiony przez pruską i rojalistyczną kabałę, jest przekonany, że naszą Ojczyznę może uratować tylko Rosja, bo inaczej nasz naród zostanie zniewolony)" 갑자기 프로이센과 왕당파가 나오는 이유는, 포토츠키를 포함하여 전통적인 귀족공화정 체제를 옹호하던 수구파 귀족들이 영국식 입헌군주제 도입을 옹호하는 개혁파 귀족들을 '왕당파'라고 매도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왕당파'들이 러시아를 최대의 위협으로 보아 프로이센과 동맹을 추구했기 때문이다.[4] 여담으로 3차 분할로 폴란드가 멸망한지 1년 후인 1796년 포토츠키가 다른 연맹 가담자인 세베린 제부스키(Seweryn Rzewuski)에게 쓴 편지 내용이 참말로 기가 막히다: "옛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기 싫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다른 국가와 국명과 마찬가지로 사라졌을 뿐. 옛 폴란드인들은 각자 조국을 찾아야 한다. 나는 영원히 러시아인이다.(Nie mówię już o przeszłej Polsce i Polakach. Znikło już i to państwo, i to imię, jak znikło tyle innych w dziejach świata. Każdy z przeszłych Polaków ojczyznę sobie obrać powinien. Ja już jestem Rosjaninem na zawsze.)"[5]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리투아니아인, 독일인, 유대인 등등[6] 인도의 경우 카스트가 다르면 사용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어휘나 발음이 상당히 달라진다. 또다른 사례로 중남미 국가들에서 상류층과 일반인 사이에 스페인어 발음 차이에서도 반영된다. 영국의 용인발음도 비슷한 사례다.[7] 폴란드어로 치에신, 체코어로 테신[8] 전근대에는 학교가 종교 기관에 예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9] 리투아니아인들도 가톨릭 신앙심이 비슷한 이유로 유럽 기준으로는 유별나게 강한 편이다.[10]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루신인동방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많은데 동방 가톨릭은 전례는 정교회와 거의 같지만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다.[11] 폴란드는 14세기부터 대체로 유대인에게 관대했다.[12] 홀로코스트 타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유대인 그룹이라 할 수 있다.[13] 참고로 폴란드 현지에서는 매우 뜨거운 감자 중 하나며,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탄압을 부정하려고 한다. 후술할 <쥐>나 <이다>가 공개되었을 당시 "위대한 폴란드는 저런 적 없다"는 투로 발광한 적이 있다.[14] 특이하게도 영국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본국의 폴란드인들보다 출산율이 훨씬 더 높다. 전자는 평균 출산율 2.5 후자는 평균 출산율 1.6. 출산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가톨릭 신앙이 독실한데다, 생활조건이 본국에서 누리던 것보다 좋기 때문이다.[15] 러시아 영내에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이 상당한 편이다.[16] 실레시아 지역과 주민 일부는 체코로도 흡수되었다.[17] 크림 타타르의 노예 납치로 우크라이나 각지의 인구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스테판 바토리와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본토의 폴란드인 농민 상당수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던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갈리치아로 새로 이주하는 폴란드인 농민에 한해서 20년동안 세금 감면, 봉건 요역 면제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이를 계기로 갈리치아 각지에 폴란드인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하였다.[18] 대표적으로 영국 농촌의 경우 폴란드계 이민자가 없으면 노동력 부족으로 마비가 될 정도이고, 실제로 브렉시트 전후하여 영국 농업계가 심각한 혼란을 겪었다.[19] 서비스 직종이라서 외모도 중요하다.[20] 당시엔 바르샤바 공국 시기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프랑스 국적자였으나, 항상 스스로 조국을 폴란드라고 생각하며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21] 에밀리 브라운 & 조선북부에 정착해서 살았던 실존인물 미하일 얀코프스키를 모티브로 한 인물[22] B.U.G.I.[23] SKOT-2AM.[24] 컨트리볼(폴란드볼)의 주인공.[25] 19세기말 러시아에 의해 분할통치되던 시기라 국적은 러시아였다.[26] 설정상 폴란드 태생이지만 폴란드라는 나라가 없을 때라 시대상 어디 태생인지는 불명.[27] 폴란드계와 일본계 혼혈이다.[28] 모티브가 된 인물이 폴란드인이다[29] 국적이 폴란드라는 방송용 컨셉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