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룩스(백야극광)

네 그 엽서, 나도 본 적 있어. 맞아, [유포리아] 라고 쓰여 있는 그 엽서 말이야. 운치 있는 건물들이 밀집한 가운데 교회가 높이 솟아 있고... 너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어느 리조트 타운으로 착각했을 정도라니까. 그러게. 깜빡 잊어버릴 뻔했네. 유포리아에도 그런 [빛나는] 시절이 있었다는 걸 말이야. 수없이 많은 길이 유포리아로 통했고, 거리에는 마차와 행인들이 끊이지 않았지. 내 기억 차이인가? 그때 유포리아는 지금처럼 안개가 짙지 않았던 것 같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도 유포리아의 경치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어. 왜냐하면 난... 유포리아의 영광을 진정한 의미에서 누린 적이 없거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부드러운 빵도, 박수갈채를 받는 쇼도, 눈길을 끄는 보석들도... 전부 돈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들한테만 허락된 것이었으니까. 퇴페적인 생활에 잠긴 찬란한 세계 밑에 숨은 쇠사슬과 곤봉이야말로 유포리아의 진짜 모습이야. 그리고 그것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어.
　

꼭 인정하고 넘어갈 게 있는데, 난 교회의 아이들한테 언제나 상냥하게 대하는 건 아니야. 내가 저들의 선택에 간섭한다거나, 내가 통제욕이 강하다거나... 그런 말에 이의는 없어. 난 그저 아이들이 나와 같은 전철을 밟길 원하지 않을 뿐이야. 내 지난 반생의 선택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유포리아의 끝없는 비와 안개를 바라보고 있으면 도저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거든... 만약 그때 누군가가 내 귀를 잡아끌고 유포리아로 향하는 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걸 알려줬다면, 이 모든 게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부모님도 없고, 진심으로 날 생각해주는 가족도 없었단다. 속아서 유포리아의 지하 용병단에 갇힌 것도 어쩌면 운이 좋은 편이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용병단에서는 어른들의 환심만 사면 굶주림에 시달리진 않았으니까.
　

왜 교회에서 아이들을 거두어서 돌보고 있는지, 어째서 싸울 수 있는 인재를 키워서 [레이븐즈 블러드] 의 규모를 늘리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해. [레이븐즈 블러드] 의 멤버는 단 두 명이야. 나랑 카스타. 난 [레이븐즈 블러드] 의 인원을 늘릴 생각은 전혀 없어. 만약 굳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이유를 댄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 그건 내 사명이라고. 왜? 이렇게 말하면 내가 오만해 보이니?
오래전, 난 이용 가치가 없어져 용병단에게 버려졌고, 교회의 수녀님에게 주워졌단다. 하지만 그땐 전쟁이 한창이었고, 그 수녀님은 더 많은 아이들을 구하러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지. 그녀의 사명은 누군가가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경험자로서 난 아주 잘 알고 있어. 유포리아는 순수한 아이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
순수하지 않은 일은 [레이븐즈 블러드] 한테 맡기면 돼.
　

네가 동료를 그렇게까지 믿고 있는 걸 보고 난 왜 이렇게 놀란 걸까? 아마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 생활이 너무 길어서, 나까지 그림자의 일부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네. 난 오랫동안 카스타한테 계속 말해왔어. 아무도 믿어선 안 된다고, 특히 날 말이야. 전에 난 지하 격투장에서 날 가장 신뢰하던 친구의 가슴에 내 손으로 직접 칼을 꽂았었거든... 지금도 한밤중에 자주 피로 물든 두 손을 꿈에서 보곤 해. 그리고 땀에 걸터앉아서 난 영원히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말해. 그럼 카스타는 말없이 물 한 잔을 내밀어. 그건 그야말로 넘쳐흐를 정도의 신뢰인 거야. 으음? 글쎄,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난 사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레이븐즈 블러드] 의 멤버로서... 난 카스타를 누구보다도 믿고 있는 거야.
고마워, 조종사.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