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릴루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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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푸의 여름 궁전'에 그려진 폴릴루어 전투 벽화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마이소르 왕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제2차 마이소르 전쟁 시기인 1780년 9월 10일 인도 칸치푸람의 폴릴루어에서 영국군과 마이소르 왕국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이 인도에 진출한 이래 겪은 최악의 패전이다.

2. 배경[편집]


마이소르 왕국의 통치자 하이데르 알리는 영국이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한 이래 벵골 일대의 패권을 확립하고 인도에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걸 경계했다. 그러다가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측에 가담한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한 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프랑스 기지들을 공략하자(퐁디셰리 공방전), 하이데르 알리는 영국의 행보에 반감을 품었다. 급기야 1779년 영국군이 자신의 영향력 내에 있던 말라바르 해안의 마헤 항구를 점령하자, 하이데르 알리는 분노했다. 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선전포고한 뒤 1780년 7월 8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카르나틱 일대를 침공했다. 알리는 고츠 산맥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후 알리와 큰아들 티푸 술탄은 아르콧을 포위했고, 둘째 아들 카림은 포르토 노보로 진격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마이소르 왕국의 대대적인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헥터 문로 장군 휘하 영국군 5,000명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문로는 8월 25일 마드라스를 떠나 나흘 간의 행군 끝에 8월 29일 칸치푸람에 도착했다. 여기에 윌리엄 베일리 중령이 이끄는 3,800명의 병력이 군투르에서 출발해 문로와 합세하려 했다. 8월 25일 코탈라이야르 강에 도착한 그는 강을 건널 준비를 했지만 하필이면 장마가 내리는 바람에 며칠간 발목이 묶이다가 9월 3일에서야 건널 수 있었다. 그 후 9월 9일 칸치푸람에서 15마일 떨어진 폴릴루어에 도착한 베일리는 즉시 자신과 합세할 것을 원하는 문로의 뜻과는 달리 병사들이 오랫동안 행군에 지칠대로 지쳤다고 판단하고 이곳에서 쉬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리는 본대를 이끌고 문로의 영국군과 대치하는 한편 큰아들 티푸 술탄에게 일부 병력을 이끌고 베일리의 영국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칸치푸람 시 근처 폴릴루어 마을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영국군[편집]


  • 지휘관: 윌리엄 베일리 중령
  • 병력: 3,800명

3.2. 마이소르 왕국군[편집]


  • 지휘관: 티푸 술탄. 하이데르 알리
  • 병력: 8,000 ~ 10,000명

4. 전투 경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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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9월 10일, 티푸 술탄의 군대가 폴릴루어 마을 인근에 도착했다. 당시 베일리의 영국군은 마이소르 왕국의 강력한 기병대를 경계해 기병대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습지대에 군대를 깊숙히 배치했다. 티푸 술탄은 지형을 살펴본 후 기병대를 투입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신 마이소르 왕국의 신무기인 로켓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마이소르 왕국군엔 로켓을 주요 무기로 사용하는 약 1,200명의 정규 로켓 여단이 있었다. 이 로켓 여단은 철로 된 튜브로 만든 로켓을 장검에 묶은 뒤 대나무 통에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로켓을 적에게 날렸다. 이 로켓 세례에 직면한 적군은 폭발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로켓에 묶인 장검에 찔려 살상당한 이가 더 많았다. 티푸 술탄은 이 로켓 여단을 200명의 부대로 나눠서 중장 보병과 중장 기병 사이에 배치시켰고 코끼리 위에도 로켓병을 배치시켰다.

베일리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은 이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적은 생전 처음 만나봤기에 적군으로부터 로켓 세례를 받자 경악했다. 베일리는 이에 맞서 포병대를 동원했고, 티푸 술탄의 군대는 적 포병대의 포격으로 9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갈수록 아군의 손실이 커지고 병사들이 로켓을 매우 두려워하자 더이상 싸워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밤에 어둠을 틈타 병사들을 탈출시켰다. 그는 어떻게든 문로의 군대와 합세하려 했지만 티푸 술탄이 뒤늦게 적이 빠져나갔음을 알아채고 추격하면서 영국군 후방을 향해 로켓을 발사하자,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려 티푸 술탄과 대치했다.

얼마 후, 티푸 술탄으로부터 적을 섬멸하기 위해 지원병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은 하이데르 알리는 문로의 영국군이 움직이려 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본인이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아들과 합세해 베일리의 영국군 측면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급히 폴릴루어 마을에 들어가서 농성했지만, 마이소르 왕국군은 그들을 에워싸서 로켓과 대포를 연신 퍼부었다. 영국군 척탄병 2개 부대가 출격해 적 대포를 파괴하려 했지만, 마이소르 왕국군 기병대가 이를 격퇴해버리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결국 베일리는 탄약 창고가 파괴되자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리하여 폴릴루어 전투는 마이소르 왕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영국군은 폴릴루어 전투에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베일리 중령이 이끌던 3,800명은 전멸했다.[1] 영국군에 가담했던 세포이들은 모두 살해되었고, 영국인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세링가파탐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중 200명 만이 1784년에 석방되었지만, 베일리 중령은 1782년 11월 13일에 병사했다. 이후 마이소르 로켓에 큰 인상을 받은 영국은 1804년 콩그리브 로켓을 도입해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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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 죽었다는 것은 아니고 전사+부상+포로가 된 수치를 모두 합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