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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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 1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러시아 인구 1억 4,300만 명 중 5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1위
2위
3위
4위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스톨리핀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
5위
6위
7위
8위
표트르 대제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9위
10위
11위
12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이반 4세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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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21세기 새 시대를 맞아 1999년 조사한 지난 천년동안 가장 위대한 작가 조사.
1999년 2월 한 달 동안 BBC 웹사이트에서 진행한 영국인들의 투표로 매겨졌으며, 영국인들이 뽑은 순위라 영국 작가들에게 상당히 편중됐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윌리엄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조지 오웰
찰스 디킨스
이언 뱅크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J. R. R. 톨킨
제임스 조이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마크 트웨인
출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Достое́вский | Fyodor Dostoevsky


파일:614px-Vasily_Perov_-_Портрет_Ф.М.Достоевского_-_Google_Art_Project.jpg
1872년 바실리 페로프(1834~1882)가 그린 초상화.

본명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출생
1821년 11월 11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사망
1881년 2월 9일 (향년 59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제국"
행정구
]]

직업
소설가, 철학자, 저널리스트
서명
파일: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서명.pn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묘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묘지
신장
169cm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 (졸업)
주제
심리학, 철학, 기독교
사조
리얼리즘
활동
1846년 ~ 1880년
종교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 : 테오도로스)
부모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
(1787~1839)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1800~1837)
배우자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
(1857년 ~ 1864년, 사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
(1867년 ~ 1881년)
자녀
장녀 소피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1868~1868)
차녀 류보프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1]
(1869~1926)
장남 표도르 표도로비치 도스토옙스키
(1871~1922)
차남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도스토옙스키
(1875~1878)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한국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일본어
フョードル・ミハイロヴィチ・ドストエフスキー
중국어
費奧多爾·米哈伊洛維奇·陀思妥耶夫斯基
러시아어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Ѳедоръ Миха́йловичъ Достое́вскій
영어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히브리어
פיודור מיכאילוביץ' דוסטויבסקי
아랍어
فيودور ميخايلوفيتش دوستويفسكي
그리스어
Φιόντορ Μιχάηλοβιτς Ντοστογιέφσκι
조지아어
თეოდორ დოსტოევსკი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작가 데뷔
2.3. 처형 사건
2.4. 이후
2.5. 생애 후반
2.6. 사망
3. 주변 관계
4. 평가
4.1. 사후 러시아에서
4.2. 유명인들의 평론
5. 어록들
6. 작가 연보
7. 작품 목록
7.1. 중 · 장편
7.2. 단편
8. 기타
9. 외부 링크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들 중 한 명이다. 그의 문학 작품은 19세기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사회, 영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며, 다양한 현실적인 철학과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과 사상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많은 인물들에게 천재 또는 위대한 작가/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에서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와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머니 쪽은 상인의 딸인 러시아인이지만 아버지 쪽은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직업은 의사였다.

도스토옙스키의 가계는 핀스크 소택지에 있는 도스토이예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유래되는데 그의 성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서러시아에서도 가장 황량한 지방으로 인종적으로도 다채로워서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유대인 등이 잡다하게 섞여 있는 곳이다.

그의 선조 중의 누군가가 핀스크 소택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했으며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인종적인 원류에 대해서는 추측의 범위 이상을 넘을 수는 없다. 시베리아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알게 된 폴란드 정치 망명가는 "그의 성이나 용모를 봐서 폴란드 출신임에 틀림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는 19세기 초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로 나왔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1812년 전쟁[1]에서는 군의관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1819년 모스크바의 한 상인의 딸과 결혼하고서 군적을 떠나 마린스키 병원의 상근 의사로 임명되었고 근무 시간 이외에는 파트타임 진료에도 종사했다.

그의 형 미하일은 1820년에 태어났고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에 출생했다. 이 생년월일은 교회의 기록에 의한 것인데, 묘하게도 우연이든 고의든 도스토옙스키는 후년에 자신의 나이를 한 살 낮추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뒤에 바르바라와 안드레이,약간의 간격을 두고서 베라, 니콜라이, 알렉산드라가 출생함으로써 완전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년시절 집은 병원 부속의 아파트로서, 현관, 식당, 응접실, 부엌으로 이뤄졌다. 현관의 창이 없는 구석 쪽을 판자로 막아서 큰 아이 두 명의 침실로 쓰고 식당은 놀이터 겸 공부방으로 썼다. 저녁에는 일가가 응접실에 모여서, 아버지가 처방전을 쓰는 데 바쁘지 않을 때는 러시아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란한 분위기였고 소리 내어 책을 읽기도 했다고 한다. 응접실 끝 쪽의 구석은 부모님과 어린아이들의 침실이 되었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아이가 생겼을 때는 방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여름이면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병원 뜰에 회복기의 환자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 중에서 특히 나이 어린 환자들과 애기하기를 좋아했다. 가난하고 핍박받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이때부터 다듬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사귐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도스토옙스키 가문의 아이들에게는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 가족들은 모스크바에서 80km 떨어진 세르게이 트로이츠기 수도원을 해마다 한 번씩 참례했는데, 이를 포함한 한두 번의 외출 외에 10살이 될 때까지 도스토옙스키는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과 똑같은 흔적은 그의 생활이나 작품 속에 분명히 남아 있다. 세 칸짜리 집에서 여6명의 형제들과 자라난 그가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면 매우 모순에 찬 것 같이 느껴지지만, 도스토옙스키 일가는 독립되어 사회생활이란 것이 없고 대외적인 일이 없는 가정이었다.

이와 같이 묘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사교활동에 익숙치 못했고 긴밀하지 않은 가벼운 인간관계를 맺기도 하며 삶을 즐기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가 10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에서 60km 떨어진 툴라 시의 다로보예에 있는 조그만 농장을 샀다. 그해부터 어머니와 아이들은 거기서 여름을 보내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여름 중의 한두 주는 병원을 떠나 이곳으로 오곤 했다. 그 여행은 마차로 이틀이 걸렸다. 아이들에게는 이 여행이야말로 모스크바의 닫힌 세계로부터 벗어난 해방이었고, 아버지의 엄격한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형제들은 말을 탈 수 있었고 이야기를 나눌 농부[2]들도 있었지만 여기서도 또래 아이들과의 이야기가 금지되어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서 독서를 하게 된다. 12살이 되던 해 여름, 도스토옙스키는 이 곳에서 월터 스콧[3] 전집을 읽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때 부모님의 농장에서 보낸 여름을 회고하며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깊고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형제들이 자라면서 교육다운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해 최초의 전원 방문이 있었을 때부터였다. 원래는 어머니가 알파벳을 가르쳤고 저녁에 일가의 독서회에서 성경과 카람진의 역사책에 나오는 주요한 에피소드에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승려와 프랑스인 2명의 가정 교사에게 배우게 된다. 이들 교사 중 수샤르라고 하는 인물은 러시아로 귀화해 자신의 이름을 드라슈소프라는 러시아풍의 이름으로 바꿔 조그마한 사설 학교를 열게 되는데 1813년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형은 이 학교에 다니게 된다.

1814년, 형제는 체르마크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사립기숙학교에 들어가 3년을 지내게 된다. 학과목은 당시 유행하던 일반적인 것이었고 준비 시간 없이 하루 8시간의 수업이었다. 이 학교는 여러 면에서 훌륭한 학교였으나 도스토옙스키는 학우들과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의 작품 중 이때의 학교생활에 관해 쓴 내용이라고 추측하는 부분이 있다. 미성년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나는 물론 어떤 종류의 사교에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학교에서 친한 친구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매우 적었다. 나는 나 혼자만의 구석을 만들어 그 속에서 지냈다.


특히 부모의 성격이 이와 같은 비사교적인 성격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급우가 도스토옙스키 집의 담장 안으로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형제는 혼자서 외출을 한 적이 없었고 용돈이 뭔지를 몰랐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난하다는 점,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점, 자신이 죽으면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는 등의 말을 자주 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1837년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때 도스토옙스키는 15살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어머니를 회상하는 말을 할 때 경의를 표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크게 두드러진 것은 없었다.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 이미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이 학교의 급비생으로 만들어 놓았다. 5월, 아버지와 도스토옙스키는 육로 여행에 오른다. 두 도시를 잇는 철도는 10월에야 개통되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난생 처음으로 홀로 있게 된 두 형제는 코스토마로프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 공과 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게 된다.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돌아갔으며 그 후 형제는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9월에 입학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1838년 1월 공병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형 미하일은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거부되어 수 개월 후 레발 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형제간의 이별로 서신 왕래를 하게 되었고 여기서 남은 얼마 안 되는 편지는 이후 수년간의 도스토옙스키의 중요한 전기 자료가 된다.

학교에 들어간 첫해에 16살의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유심히 그를 살핀 사람들의 얘기로는, 서투른 동작에다 작달막한 금발의 이상하리만치 푸른 눈을 지닌 젊은이였다고 한다. 댄스 시간이나 그 외 학교생활의 밝은 면을 피해, 어둡고 통풍이 나쁜 기숙사의 한구석에서 양초 불빛 아래 책을 읽거나 무엇인지를 쓰거나 또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의기투합하는 한두 명의 친구들과 인생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50년 후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한 뒤에 공식 전기에 쓰인 것이다.

이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월터 스콧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책을 많이 읽게 된다. 또한 프리드리히 실러, E. T. A. 호프만, 오노레 드 발자크의 책도 좋아했다. 이때 젊은 자기 자신을 '몽상가'로 표현하며 낭만적 와 극을 소수 쓰기도 했다. 이 시절에 읽은 통속 소설들이 그의 취향을 형성하는데 주효했다고 한다.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면서부터 공과 학교의 따분한 학과목에 대해 창작으로 스스로 위로를 찾기도 했다.

이때 도스토옙스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인물이 바로 시들로프스키다. 그는 25살의 하급관리로서 낭만파 시인이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여서 자연스레 도스토옙스키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만년의 도스토옙스키는 친구인 솔로비요프에게 자신의 생애에서 기억할 만한 영향을 준 사람으로 시들로프스키를 꼽았다. 그러나 1838년 시들로프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게 되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생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모스크바로부터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경위에 대해서 도스토옙스키 일가는 80년 동안 침묵했으며 도스토옙스키 공식 전기는 이 사건을 전혀 다루지 않았고 현존하는 편지 어느 곳에서도 그 사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해에 그와 형 미하일 사이에 오고 간 편지는 1통의 예외를 빼고는 모두 소멸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딸이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밝혔지만 이 딸이 꼭 믿을만한 증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신빙성은 적다.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는 아내의 사망으로 생각 이상으로 큰 타격을 입고 큰 아이 2명은 학교로 보내고, 다음의 세 아이들[4]은 모스크바에 두고서 끝의 두 딸을 데리고 조그만 시골 농장으로 은퇴해 버렸다. 여기서 그는 고독한 생활을 보냈는데 그의 원래도 특이했던 성격과 행동은 점점 더 기묘하게 변했고 농노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미하일과 표도르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낸 2년 후 1839년 여름 어느 날 그는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범죄는 의심할 나위도 없도 원한 관계였고 그가 소유한 농노의 소행이었다. 이 때의 도스토옙스키의 나이가 18살이었다. 이 당시의 도스토옙스키는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보낸다.

형님, 아버지의 죽음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의 입장은 더욱 두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아닌 우리 가족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2.2. 작가 데뷔[편집]


학교를 마친 후 번역 작업을 하다가 1845년에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을 읽어본 평론가 벨린스키가 "니콜라이 고골이 다시 태어났다."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극찬을 받았으며 아직 24세인 도스토옙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 갑작스러운 인기와 관심에 공허한 마음이 들어 사회주의나 급진파 모임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데뷔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면, 초고를 편집장에게 넘겨주고 나서 잠자던 중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네크라소프와 잡지 편집장이 당일 새벽에 "지금 잠 같은 건 문제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잠을 깨웠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2.3. 처형 사건[편집]


이런 식으로 지내던 중 1848년에 유럽 전체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에 이끌려 도스토옙스키가 몸담고 있던 페트라솁스키 클럽이 주민 봉기를 계획했으며 도스토옙스키도 농노들의 자유를 위해 가담했으나, 그 독선적인 성격은 여전해서 곧 모임에서 왕따당하고 빚은 빚대로 늘어날 뿐이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재위 1825~1855)는 이런 개혁 모임들에 여러 스파이를 두고 있었는데 1849년 도스토옙스키와 그가 가담한 그룹 23명이 체포된다.[5]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후에야 형 선고를 받기 위해 꺼내졌으며, 이전에는 보통 이 정도 죄는 몇 개월 간 유배가 고작이었으므로 이들은 '이제야 끝나는구나'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부, 수십 명의 병사들과 수천 명의 군중, 그리고 관들이었다. 한 장교가 나와 '죄인들은 모두 반역죄로 총살'이라 선고했으며 장교가 형수들의 죄명과 형을 낭독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이 멍해지면서 근처 교회의 종탑에서 쏟아내리는 금색 햇빛이 차차 구름에 가려지며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자기 또한 곧 영원히 어둠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만약 산다면 나의 삶은 끊임 없는, 영원처럼 느껴지며 1분이 백년과 같으리라,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인생의 단 1초를 소홀히 하지 않을 텐데...[6]


마지막으로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후, 첫렬 죄수들의 머리에 두건이 덮이고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기 직전, 갑자기 형장에 마차가 급히 난입해 황제가 특사로 그들의 형을 감형하였음을 알렸다. 사실 황제는 정말로 처형할 생각은 없었고, 단지 '혁명 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젊은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 쇼를 한 거였다.

실제로 니콜라이 1세는 소위 지식인들에게 이런 처형 연극을 즐겼고, 나름대로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때의 경험을 '죽음의 집에서의 기록'이라는 소설에서 풀어놓고 있다. 몇몇 사형수들은 이 사건의 영향으로 미쳐버렸으나,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정신을 차리는 인간'의 표본이 되었다. 단 도박 중독은 그 후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대신 4년간 시베리아 옴스크에서[7] 중노동 후 군입대를 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1844년 중위로 제대한 상태였다. 그러니 재입대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사병이었다. 4년간 군 복무 평이 좋았는지 하사관으로 진급하기도 했다.

1854년 석방되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5년 뒤인 1859년 해배령이 내려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되었다.


2.4. 이후[편집]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건 이후로 사람이 바뀌어 4년간 최악의 환경을 견디면서 머릿속에 글을 썼다고 하며, 군에 들어가게 된 후 출판하는 것을 허가받게 된다. 근데 사실 시베리아에서도 그 성격을 못 죽이고 따돌림당했다. 위에 언급된 책에서는 "동료들은 내가 너무 잘난 집안 출신이라서 날 왕따시킴"이라고 정신승리했지만.

이후의 그는 죽는 날까지 마치 페이지 하나하나,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처럼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 불후의 명작을 연달아서 내게 된다. 그 전에는 글자 하나마다, 한장마다 시간을 들이며 하루 종일 망상을 하던 그였지만 이후로 쉬지 않고 글을 썼으며 쓰고 있지 않을 때는 쓸 내용을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그의 작품들은 거의 극도로 세밀하고, 집념이 느껴지는 묘사가 눈에 많이 띈다.

실제 이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의 저작 백치에도 주인공 미쉬킨이 말하는 삽화로서 등장한다. 시간을 낭비하던 한 남자가, 사형대 앞에 서고 나서야 1분 1초가 아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스포일러]

사형 사건 이후 그의 글은 어둡고 현실적으로 바뀌게 되지만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로부터는 탈피하지 못했다. 오죽이면 문학계에서 도스토옙스키 안티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그랬을까.

또한 이 시기부터 그는 서유럽자유주의 사상을 멀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강경 국수주의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의 전기 저자에 따르면, 황태후나 차르에 대한 탄원서와 징징거리는 편지를 수도 없이 썼다고 한다. 또한 누군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면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그 경험에 고마워했다. 자유주의에 관해서 고생을 좀 한 만큼 멀리하게 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시베리아 유배 생활이 끝나고 1857년에 유부녀였던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Мария Дмитриевна Исаева)와 결혼한다. 유부녀와 바람이 난 것은 아니고, 이사예바의 남편이 죽자 원래부터 이사예바를 사랑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적극적으로 청혼한 것. 그러나 결혼 이후에는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하필 이 시기에 간질 발작을 일으킨데다 생활고가 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8]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1864년에 사망한다. 소설 죄와 벌의 등장 인물인 카쩨리나 이바노브나 마르멜라도바는 바로 이 이사예바를 모델로 완성된 캐릭터다.


2.5. 생애 후반[편집]


도스토옙스키는 원고료로 겨우 먹고 살았으며, 이 때문에 그의 후기 소설들은 굉장히 길다. 왜냐하면 그 시절 러시아에서는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책정했고, 따라서 소설의 길이가 늘어나면 원고료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 그나마 돈이 남더라도 도박장에서 날리고 빚만 더 벌어왔다. 이렇게 돈에 쪼들리다 보니 쓰고 있던 <죄와 벌>을 급하게 완성했으며 <노름꾼>은 26일 만에, 그것도 <죄와 벌>을 쓰는 중에 구두로 완성했다.

이 때 도스토옙스키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Анна Сниткина)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애독자였던 가정에서 자라나 본인도 그 애독자였던 스니트키나는, 사실상 지금의 작가 도스토엡스키가 있을 수 있게 한 일등공신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1866년 <노름꾼>을 시작으로 도스토옙스키의 구술을 속기로 받아적은 다음 보기 좋게 정서해서 출판사로 넘겨 주는 유능한 속기사로 활약했는데,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는 비록 퇴고는 제대로 못할지언정[9] 계약 기간에 맞춰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니트키나는 <노름꾼>을 출판사에 넘긴 후 도스토옙스키의 청혼으로 결혼하는데, 이때 그녀의 나이가 21세, 도스토옙스키는 46세였다. 도스토옙스키 사망 당시에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겨우 35살이었다. 그런데도 재혼하지 않고 도스토옙스키의 글과 유품을 정리해서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 기증하고, 남편과의 삶을 회고록으로 묶어 출판하는 등 남편이 잊혀지지 않는 데에 여생을 바치다 1918년 만 71세로 사망했다. 이 정도면 단순히 성공한 팬 정도가 아니라,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구원자인 셈.

도스토옙스키는 여생 동안 수많은 빚에 시달렸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돌아와 형 미하일과 한 출판사 일이 연거푸 실패하였고, 이 와중에 세상을 뜬 형의 빚도 자진해서 맡고 과부가 된 형수와 그 자식들도 지원했고, 거기다 첫째 아내가 이전 결혼 생활에 낳은 자식까지 돌보게 된다.

그런데 미하일의 미망인인 형수는 사치가 심했고, 양아들인 파벨도 양아치라서 그는 경제적으로 시달렸다. 게다가 형수와 양아들은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도스토옙스키를 고마워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막장이었다. 파벨은 원하는 돈을 내놓지 않으면 양아버지를 두들겨 패기도 하고 물고문을 할 정도로 패륜아였으나 마음 약한 그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형수와 양아치 파벨은 도스토옙스키를 괴롭힐뿐만 아니라 아내인 안나까지 구박하였다. 안나도 폭발하여 남편에게 "형수와 양아들을 버리고 떠나자"며 설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여 잡지 「러시아 통보」에서 원고료를 가불하여 형수와 양아들에게 생활비로 준 다음, 1867년 4월 14일 형수와 양아들을 내버려두고 아내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드레스덴에 정착했다.

서유럽에서 선인세로 받은 돈을 원정 도박으로 날리고 다시 받고 하던 즈음에는 <악령>을 집필하다 결국 러시아로 다시 귀국한다. 귀국할 돈도 도박으로 날려먹어서 출판사에게 '러시아로 가서 글 써야 함' 하며 징징대서 간신히 차비를 뜯어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 이후 본격 좌파 까기 소설인 <악령>이 성공하자 보수층과 친해진 도스토옙스키는 신문사 주필 자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역시 그 성격 어디 못 가서 1년도 안 돼서 때려치워야 했다.

그가 도박 중독에 걸린 이유를, 있는 돈을 다 날리는 방법으로 사형수가 되었다가 살아났을 때를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라는 얘기가 있다. 이런 심리를 소설 <노름꾼>에서 묘사하고 있다. 왜 도박에 빠지느냐는 질문에, '주변이 가능성으로 충만할 때,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란 굉장히 힘든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 말이 간지나는지 몇몇 도박광들은 이걸 그들의 좌우명쯤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끝내 도박에서 완전히 손을 뗐는데, 이 또한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덕분이었다. 남편이 도박에서 아무리 돈을 날려도 안나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선선히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던 것. 이런 생불같은 아내에게 아무리 그래도 미안해졌는지 도스토옙스키는 결국 도박을 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도박만 즐겼던 게 아니라 남에게 적선하는 데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박을 끊었어도 돈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이런 성향은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툭하면 아내에게 선물할 옷이나 아이들 장난감을 사오는 통에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알뜰한 아내 덕분에 차츰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안나가 출판사와의 계약에 매여서 남편이 집필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포착하고선 직접 출판사를 하나 차려 버렸기 때문. 이 출판사를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철저히 아내에 의해 관리되었고, 덕분에 경제 사정도 점점 나아졌다. 이 출판사는 도스토옙스키 사후 안나의 결정으로 문을 닫는다. 꽤 튼실한 출판사여서 인수제의도 있었다고 하는데, 남편의 이름을 아름답게 지키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안나가 제의를 물리치고 아예 출판사를 닫아버린 것.

몇 년 동안 고생한 끝에 도스토옙스키 가족은 스타라야 루사라는 지방 도시에 2층 목조 주택 1채를 구입할 정도로 경제력을 회복했다. 당시 러시아의 중산층들도 단층집에서 살았고, 구입한 집의 크기도 상당한 편이어서 중산층 중에서도 상당히 부유한 축에 속하는 수준의 경제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현재는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다.

안타까운 점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가 구상했던 소설의 1부에 해당하며, 작품의 서문에 앞으로 20년 동안 그 소설의 뒷부분을 쓸 것이라고 적었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사망으로 미완성작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하지만 문학평론가들은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들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더 가치가 높은 문학 작품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꼽기도 한다.


2.6. 사망[편집]


생활에 안정을 찾은 도스토옙스키는 <미성년>과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차례로 발표하고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불과 1년 뒤인 1881년 1월 26일, 재산 상속 문제로 여동생이 집에 찾아와 말다툼을 하고 간 후 갑작스럽게 각혈이 시작되고 병상에 누워 투병하다가 1월 28일[10] 저녁 8시 38분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결핵, 만성 기관지염, 폐기종으로 전해진다.

그의 장례식상트페테르부르크 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의식이었다고 한다.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보러왔다고 하니 말 다했다.(열린책들 전집에는 6만 명이라고 되어 있다)

의외로 드미트리 팔름이라는 무명 작가가 추모사를 읽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도스토옙스키와 매우 친했는데 바로 도스토옙스키와 처형대에 묶여서 죽음 직전에 특사로 풀려나 같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


3. 주변 관계[편집]


비록 감추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후배 작가 톨스토이에게 강한 열등감이 있었다. 당대의 비평가 스트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트라호프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는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도 안나 카레니나의 완성도에는 감탄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도스토옙스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은 작가의 개인 잡지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 이 작품을 '완전무결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열등감에는 톨스토이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자신에 비견되는 천재성을 지닌 후배는 백작 가문 출신이라 느긋하게 퇴고를 하면서 여유로운 창작을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은 속기사까지 불러가며 원고료로 먹고 살아야 했으니.

하지만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를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막심 고리키가 쓴 톨스토이 회상록에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자신이 병들어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병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그나마 가장 높게 평가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죽음의 집의 기록인데,[11] 시베리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담은 내용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처럼 등장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등장 인물이 처한 험악한 환경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보통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으로는 간주되지 않는 작품이다.

다만 톨스토이가 죽기 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던 것은 맞다. 임종 몇 주 전, 그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기 시작했고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문체에 불평을 했지만 꾸준히 읽으려고 했고, 그가 죽던 해 10월 28일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비롯한 책 2권을 보내달라고 했다고 한다. [12]

서로의 작품에서 각자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후반부 대작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츄샤가 젊은 시절 즐겨읽었던 작품의 작가가 도스토옙스키이며[13],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후반부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주인공 이반 표도로비치가 악마와 대화를 하는데, 이때 악마가 이반 표도로비치를 자극하며 '인간의 예술적 섬세함은 그 대단한 레프 톨스토이도 따라가지 못한다 ' 라고 말한다.

참고로 두사람은 생전에 한 번도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만날 기회가 있긴 했는데 1878년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철학 강의가 열린 솔랴노이 고로독이 그 장소였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는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톨스토이의 동행이었던 니콜라이 스트라호프는 자신을 아무에게도 소개시키지 말라는 톨스토이의 부탁 때문에 그를 자신의 친구인 도스토옙스키에게도 소개시키지 않았고 도스토옙스키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매우 안타까워 했으며 스트라호프를 원망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사후에 도스토옙스키의 아내 안나로부터 이 일화를 전해 들은 톨스토이 역시 그 강의에 도스토옙스키가 있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그를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 자신에게 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답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14]

또한 당대의 또 다른 대문호 투르게네프와의 관계도 굉장히 나빴다. 하긴 서민 출신에 러시아빠인 도스토옙스키 눈에 좋은 집안 출신의 유럽빠(특히 프랑스빠) 투르게네프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악령>,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에서 유럽에 갔다와서 '프랑스 혁명을 직접 목격했다.'면서 거들먹거리는 겉멋만 든 인물을 계속 등장시키며 줄기차게 깠다. 악령에는 소설가 카르마지노프라는 등장인물이 있는데, 대놓고 디스하며 이는 명백한 투르게네프의 패러디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생활난에 시달리던 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투르게네프에게 와서 돈 좀 빌려달라고 징징거리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투르게네프는 그리도 자신을 욕하던 주제에 굶어죽을 것처럼 비굴하게 100루블을 빌려달라고 온 도스토옙스키에게 별다른 말 없이 50루블를 빌려줬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그 돈의 상당수를 도박으로 아낌없이 날렸다.

보다못한 투르게네프의 지인들이 "쓰레기같은 놈에게 왜 돈을 빌려주냐?"며 분노 어린 반응을 보이자 투르게네프는 "막상 내 욕 해놓고 돈 급하면 또 나에게 와서 오만상으로 빌어대잖아? 난 그거 보는 재미로 빌려주는 거지. 그리고 저 작자는 그 굴욕감을 글로 나를 욕하면서 씻으니 뭐 서로가 각자 피해보는 게 없잖아."라고 대꾸했다.

사실 젊은 시절의 도스토옙스키는 투르게네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그가 처음 문단에 들어섰을 때, 투르게네프를 보고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문인들 중 한순간에 친해지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투르게네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1845년 11월 16일에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형에게 쓴 편지에는 투르게네프에 대한 그의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형님,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전 그에게 반했습니다. 시인이고, 수재이고, 귀족이고, 미남이고, 부유하고, 똑똑하고 교양도 있고, 나이는 25살입니다. 신이 그에게 주시지 않은 선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서 교육받아 품성도 올곧기 그지없고 훌륭합니다.


그래도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사흘 전 알렉산드르 푸시킨에 대한 연설회장에서 투르게네프와 극적으로 화해하며 서로간에 나쁜 감정을 깨끗이 정리했고 도스토옙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가 참가해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2년 뒤, 그가 죽자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4. 평가[편집]







문학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이자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양대 대문호로 평가받는다. 현대의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학가 중 한 명이며 나아가 20세기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

본인이 쓴 소설들만큼이나 극적인,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던 사건,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가난, 사형 선고 후 집행 직전 특사로 풀려나 혹독한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난 일, 광적인 도박 중독, 평생을 달고 산 뇌전증,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념 어린 애정 등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참으로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작품뿐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는 누구인가'라는 책들도 연구자들에 의해 시중에 많이 출판되어 있다.

20세기 학계를 뒤흔든 유명 철학자, 심리학자, 소설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장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어니스트 헤밍웨이, 막심 고리키,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15], 헤르만 헤세, 서머싯 몸, 윌리엄 포크너[16], 코맥 매카시, 버지니아 울프, 커트 보니것 등 서구권의 유명 문호뿐 아니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오에 겐자부로, 엔도 슈사쿠,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작가에게도 막강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김동리, 이문열, 한강 등 한국 문학의 대표적 작가들 역시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도스토옙스키는 한국에서도 각광받는데, 몇몇 문학 종사자들에 의하면 도스토옙프스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을 넘는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이자 20세기를 창조한 작가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근현대 한국 문학계에 누구보다도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마광수 교수는 "우리나라 문인들한테 세계문학사상 가장 걸출한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대개는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대답한다. 톨스토이나 귀스타브 플로베르, 헤밍웨이, 위고 등 허다한 '문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누리고 있는 문학적 위상(位相)과 명예를 쫓아갈 만한 작가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문호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버금갈 만한 영광을 누리고는 있지만, 한국작가들의 창작에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느냐는 점에 있어서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비교가 안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문학가들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정도로 파급력이 대단한 작가다.

작품에서 그려낸 캐릭터와 세계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묘사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삶에의 베풂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임사 체험이나 수년간의 시베리아 수감 생활 간 읽은 성경 등이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왔으며, 이러한 경험은 인류에 대한 '연민'이라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특유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또 그에게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결한 존재에 의한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었으며, 이는 죄와 벌의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4.1. 사후 러시아에서[편집]


러시아 제국 황실에서도 유족들에게 매해 2천 루블을 연금으로 하사했다. 1880년대 러시아 직물 공장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던 노동자의 7년치 연봉에 가까운 돈으로, 꽤 많은 액수였다. 이 연금 상속을 두고 양아들 파벨이나 아내랑 친가 친척들이 싸우다가 러시아 황실에서 연금 및 재산에 대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상속권을 인정받게 한다고 엄명을 내린 통에 친척들은 데꿀멍해야 했다.

아내와 딸을 비롯한 식솔들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갔지만, 양아들 파벨은 뒷골목에서 찌질하게 살다가 1895년 칼에 맞아 살해당했고, 사치스런 형수나 여동생 같은 친가 사람들도 거지꼴이 되어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훗날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래서 레프 톨스토이와 달리 그는 평가절하당하고 후손들에게 주어지던 연금도 끊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이 칭송하던 톨스토이의 자손들은 대부분 해외로 망명한 데 반해서, 소련이 규탄하던 도스토옙스키의 자손들은 모두 소련에 남았다.

그렇지만 소련도 도스트옙스키를 완전 부정하지 못했고, 그의 책은 소련 시대에도 금서로 지정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혁명세력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 "악령"을 제외한 다른 소설들은 워낙 뛰어났던 데다가, 러시아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혁명가들도 그의 작품을 모두 즐겨 읽었고, 소련의 작가 대다수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강력하게 지지하여 금서 지정을 결사반대했다. 글을 정말로 잘 쓰면 정부의 성향에 상관없이 체제도 인정한다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를 부정하기에는 러시아 문학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이 너무 컸고, 소련 시절 작가 지망생들도 그의 작품을 교재로 삼아 습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죄와 벌1930년대에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스탈린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좋아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근거로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의 보복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사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절하도 1930년대 제정시대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던 대숙청 이후에야 가능했으며, 혁명 직후인 1920년대만 하더라도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로 좌익 평론가들조차 찬양할 정도였다. 대숙청이 마무리된 193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학교 교과과정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1950년대 이후 장편을 기반으로 영상화가 많이 되면서 어느 정도 복권되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비판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자 도스토옙스키는 "반동 작가"로부터 "위대한 작가"로 복권되었고, 그의 문학성이 재평가되면서 후손들은 정부가 주는 작가 연금도 다시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저작권과 판권도 인정받았지만,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그랬듯이 소련 붕괴 후에는 당시 생존해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증손자들은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처럼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17]

러시아 연방 치하에서는 소련 시절보다 더 위대한 작가로 칭송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했고 파문당한 톨스토이와는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고 그리스도러시아인그리스도라 믿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의 작가였다. 현재 러시아에서 도스토옙스키는 푸시킨 다음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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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국립 러시아 도서관(구 레닌 도서관) 앞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18] 그의 이름을 딴 지하철 역[19]도 건립되었다.

러시아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을 가면 그의 유품에서 별별 물건이 다 남아있다. 그가 죽던 날, 딸아이가 슬퍼하며 쓴 낙서도 그의 담뱃갑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러시아어로 "1881년 2월 9일 사랑하는 아빠가 하늘로 가셨다..."라고 적혀 있다.

2008년에는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 채널, '로시야 1'의 주최 하에 무려 5천여만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넷, 라디오, TV 투표 등을 통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뽑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의 가장 위대한 100명의 영국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행해지는 다른 유사한 프로젝트들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7위를 차지했다. 문학가로서는 푸시킨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순위였다.[20]

4.2. 유명인들의 평론[편집]


도스토옙스키는 보통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훌륭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문학적 모더니즘, 실존주의, 그리고 심리학, 신학, 문학 비평의 다양한 학파들은 그의 아이디어에 의해 깊이 형성되어 왔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예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했기 때문이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도스토옙스키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 전집 서문


도스토옙스키는 단순히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예술적 심리학자가 아니다. 그의 창조적 모습의 독자성을 여기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다. 내가 이 책의 전편에 걸쳐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그는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이다. 러시아의 모든 형이상학적 관념은 그에서 비롯된다. 그는 열화 같은 정열적인 관념의 분위기 속에서 산다. 그는 이 관념으로 주위를 감염시키고 그 주위로 사람을 유인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관념은 일용할 정신의 양식이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은 신과 악마, 불멸, 자유, 약, 인간과 인류 운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사치가 아니라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불멸이 없다면 살아야 할 가치도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관념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념이다. 그에게 관념은 살아있다. 도스토옙스키의 형이상학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이상학이다. 그는 우리에게 관념의 이 구체적인 생활의 필수적 성격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적 아들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나면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있다가 규칙적인 한정된 우리 세계, 3차원의 우리 공간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거다. 도스토옙스키를 정독하는 것은 반드시 인생의 한 사건이며, 그것은 우리를 불태우므로 정신은 새로운 불의 세례를 받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 접해 본 사람은 새로운 인간이 되고 그에게는 존재의 다른 차원이 전개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정신의 혁명가이다.

도스토옙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민족의 존재는 정당화될 수 있다.

그를 알고 난 후부터 인간은, '도스토옙스키人'과 '그와는 무연한 인간'의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 니콜라이 베르쟈에프#


그의 후기 생활로 미루어 보건대, 명성에 의해서도 그처럼 타락하지 않고 끝까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던 위대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에드워드 카, 《도스토옙스키 평전》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이다 : 그는 내 인생의 가장 멋진 행운 중의 하나이다. 이 심오한 인간이 천박한 독일인을 하찮게 평가한 것은 열 번 지당한 일이었으며, 그는 그가 오랫동안 살았던 시베리아 형무소의 수감자들, 사회로의 복귀 가능성을 더 이상 갖지 못하는 중범죄자들을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게 느꼈다ㅡ 러시아 땅에서 자라는 것 중에서 가장 최고의 재목이자 가장 강하고 가치 있는 재목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21]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가 낳은 악마적인 천재였다.

막심 고리키#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문학이라는 산의 여행자가 뒷걸음질로 물러나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다볼 때에나 고원 사이로 우뚝 솟은 그 꼭대기가 보일 법한 장대한 봉우리가 톨스토이라면, 도스토옙스키는 그 너머에 솟은 광대무변한 봉우리다.

앙드레 지드#


도스토옙스키는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창조해냈다. 사람들이 광기라 부르는 그 안에 그의 천재성의 비밀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근대 작가 그 누구보다 위대하다.#

제임스 조이스


도스토옙스키는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는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인 작가였다.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는 사실상 신을 창조해야만 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헨리 밀러#


도스토옙스키는 세계 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 단테처럼, 그는 인간 지옥의 모든 계(界)를 통과한다. 그런데 이 지옥은 '신곡'의 중세적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

― 콘스탄틴 모출스키#


도스토옙스키는 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심지어 수학자 가우스보다도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도스토옙스키밖에는 아무도 없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더 이상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없다.#

그의 소설은 오직 순수하게 영혼의 재료로만 빚어낸 작품들이다.#

버지니아 울프


도스토옙스키는 근대적 서사의 틀을 넘어섰다.

― 루카치 죄르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지하 인간'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이자 대변인이다. 이 작품과 인물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한다.

장폴 사르트르#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안에 있다.

커트 보네거트#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는 카를 마르크스가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였다.

알베르 카뮈#


삶 전체가 그냥 타는 듯한 아픈 상처로 느껴질 때, 절망을 숨쉬고, 희망 없음의 죽음을 죽을 때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비참함으로 고독해지고 마비되어 망연히 삶을 건너다볼 때, 삶의 거칠고도 아름다운 잔인함을 더는 이해하지 못하고 더는 삶을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무시무시하고 위대한 작가가 울리는 음악에 마음을 연다.

헤르만 헤세#


만약 찰스 다윈이 도스토옙스키가 본 것을 인생에서 보았다면, 그는 종의 기원에 관한 법칙이 아니라 그것의 파괴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 레브 셰스토프


그의 심리학적 감각은 압도적이고 예지력 있다.

크누트 함순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 밤새워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감동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제 30여년이 지나 그 감동을 제대로 정리해 냈다는 기분이다. 19세기 작가였던 도스토옙스키를 21세기에 읽는다는 것에 의문을 느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작품을 통해 추구했던 자유 의지와 신,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출간하며 남긴 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은 인간이 써낸 가장 충격적인 예닐곱 편의 소설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정치 소설이다.

오르한 파묵#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다양한 희화(戱畵)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그 희화의 대부분은 분명 악마조차도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들은 허영심이 많고 질투가 심하다. 적어도 나는 그런 작가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와 견주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레프 톨스토이#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창조해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헤르만 헤세#


창작자의 내면에 이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옙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낸 작가도 없을 뿐더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낸 작품 또한 없다.

조이스 캐럴 오츠#



5. 어록들[편집]


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곁의 이웃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괴로움과 번민은 위대한 자각과 심오한 심정의 소유자에겐 언제나 필연적인 것이다.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이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또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땅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고 눈물로 그것을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어줄 것이다. 이 땅을 꾸준히 언제까지라도 사랑하라.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 이 사랑의 열광과 환희를 맛보아라. 네 기쁨의 눈물로 이 땅을 적시기도 하며 너의 그 눈물을 또한 사랑하라.


자기에게 거짓을 말하고, 스스로에게 한 그 거짓말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진리를 더 이상 분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죽음'이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할 거다.


6. 작가 연보[편집]


년도
사건
1821년
러시아력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빈민구제병원에서 일등군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나다.
1831년
양친이 툴라현에다 영지를 사들이자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다.
1834년
모스크바에 있는 체르마크가 경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다.
1836년
문학사(文學史)를 가르치는 교사의 감화를 받아 푸시킨에 열중하다.
1837년
2월 27일, 어머니 마리아 표도르브나 도스토옙스키야가 죽다. 5월, 형과 함께 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코스트바로프 기숙학교에 입학, 공병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 7월, 군무에서 아버지가 제대하다. 9월, 육군공병학교에 입학이 허가되다.
1838년
1월 16일, 공병학교에 정식으로 입학. 이때부터 발자크, 위고, 호프만 등의 소설을 탐독하다. 가을 진급시험에 낙제하다.
1839년
영지 농노들의 원한을 사서 아버지가 피살당하다.
1840년
호메로스, 실러, 프랑스 고전 비극을 탐독하다. 11월 29일에 하사관, 12월 27일에는 견습사관이 되다.
1841년
이해가 시작될 무렵 <보리스 고두노프>, <마리야 스추아르트>의 극작을 시도했으나 둘 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8월 5일, 공병소위로 임관되었으나 특별연구를 위해 공병학교에 남다.
1842년
8월 11일, 중위로 진급하다.
1843년
8월 21일, 공병학교를 졸업, 페테르부르크 공병대에 편입되다. 23일, 제도과에 지원하여 근무하다.
1844년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 번역하다. 조르주 상드의 번역도 시도하다. 10월 19일, 중위로 진급함으로써 제대가 허락되다. <가난한 사람들> 쓰기 시작하다.
1845년
5월, <가난한 사람들> 완성하다. 네크라소프,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다. 여름에 <분신>을 쓰기 시작하다. 가을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 쓰다. 풍자 신문 ≪즈브스칼≫의 발행을 계획하다.
1846년
1월 15일, <가난한 사람들>을 네크라소프가 편집하는 ≪페테르부르크 문집≫에 발표하다. 2월 1일 <분신>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봄, 페트라세프스키와 알게 되다. 10월에 <프로하르친씨> 발표하다. 12월 <네토치카 네즈바노바> 쓰기 시작하다.
1847년
이해 첫무렵 벨린스키와 사이가 나빠져 페트라세프스키와 가까워지다. <아홉 통의 편지에 담긴 소설>을 ≪현대인≫ 1월호에 발표하다. <여주인>, <조국의 기록> 10,11 월호에 발표하다. <가난한 살마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48년
<폴준코프> 발표하다. <약한 마음>, <유부녀>, <정직한 도둑>, <크리스마스와 결혼식>, <백야>를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1849년
<네토치카 네즈바노바>를 ≪조국의 기록≫ 1,2,5,6 월호에 발표하다. 3월, 페트라세프스키 집에서의 회합에서 벨린스키의 고골리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다. 4월 23일 페트라세프스키 회의 검거로, 다른 회원들과 함께 붙들려 페트로파블로스키 요새감옥에 감금되다. 감금된 동안 <작은 영웅>, <첫 사랑> 쓰다. 12월 22일,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에 끌려갔으나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과 4년간의 병역근무를 선고받고 24일 밤에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하다.
1850년
유형지인 옴스크 감옥에서 복역하다.
1854년
2월 15일 형기가 만료되어 3월 2일 일개 병졸로 시베리아 국경수비연대 제 7 대대에 편입되다. 가을부터 그 마을의 세무관리의 아내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하다.
1855년
<죽음의 집의 기록> 쓰기 시작하다.
1856년
2월 15일, 근무 성적이 좋아 하사관으로 진급되다. 3월 24일, 황제에게 사면 탄원서를 내다. 10월 1일, 척명으로 대대의 기수(旗手)가 되다.
1857년
2월 6일,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와 크즈네츠크에서 결혼하다. 4월 18일, 옛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척명이 내리다. 8월, <작은 영웅>을 ≪조국의 기록≫에 발표하다. 이해 말 사표를 제출하고 모스크바에서의 거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다.
1859년
3월 18일 소위로 임관됨과 동시에 예편, 거주지는 트베리로 한정되다. 7월 2일 트베리에 도착, 가을에 거주지 선택의 자유에 대한 탄원서를 황제에게 내다. 12월 27일, 페테르부르크에의 거주허가가 내려 트베리를 떠나다.
1861년
형과 함께 ≪시대≫를 창간, <학대받은 사람들>을 1월호부터 연재하다. 연재가 끝나자 단행본으로 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을 1월부터 ≪러시아 세계≫에 연재했으나 4월부터는 이 작품을 ≪시대≫로 옮겨 처음부터 다시 게재, 이듬해 완결하다.
1861년
6월 7일 출발하여 파리, 런던, 제네바를 여행하다. 8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다. 이해 <죽음의 집의 기록>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3년
5월 폴란드 문제에 관한 스트라호프의 논문 <운명적인 문제>(4월 호) 때문에 ≪시대≫가 발행정지처분을 받다. 여름에 연인 수술로바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다. 여행중에 도박에 열중, 경제적인 궁핍으로 <도박자>를 구성하다. 수슬로바와의 사랑에 파탄이 일어, 10월 모스크바의 아내에게로 돌아오다. 겨울, 아내의 병이 악화, 병석을 떠나지 않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다.
1864년
3월 24일, ≪시대≫를 계승한 새로운 잡지 ≪세기≫ 창간호를 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창간호에 게재하다. 4월 16일, 아내가 폐결핵으로 죽다. 6월 10일, 형 미하일 죽다. 12월 25일, 친구 그리고리예프 죽다. 이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마르타 브라운과의 연애사건 일어나다.
1865년
안나 그로코프스카야에게 구혼했으나 거절당하다. 4월 ≪세기≫ 폐간되다. 7월에 세번째 외국여행을 떠나다. 다시 수슬로바와 사랑을 속삭이며 도박에 열중, 궁핍하여 <죄와 벌>을 쓰기 시작하다. 다시 사랑에 실패, 11월 러시아에 돌아오다. 출판업자에게 저작권을 팔아 버리고, 이듬해에 걸쳐 전집 3권을 출간하다.
1866년
<죄와 벌>을 ≪러시아 통보≫ 1, 2, 4, 6, 8, 11,12 월호에 연재 발표하다. 여름에 모스크바 근교 류플리노에 머물다. 10월, <도박자>를 여자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니트키나에게 구술하여 탈고하자마자 전집 3권 속에 수록하고 곧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7년
2월 15일, 스니트키나(20 세)와 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하다. 4월 14일, 그냐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 4년간 머물다. 6월, 드레스덴에서 투르게네프와 말다툼하다. 8월, 제네바로 옮겨가다. 9월 <작가의 일기>를 계획, 연말에 <백치>를 쓰기 시작하다. 이해에 <죄와 벌>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68년
<백치>를 ≪러시아 통보≫ 1, 2, 4~12 월호에 연재, 이어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2월 22일, 제네바에서 맏딸 소피야가 태어났으나 5월에 폐렴으로 죽다.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옮겨 12월 피렌체에 도착, 연말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구상하기 시작하다.
1869년
7월 말까지 피렌체에 머물다. 스트라호프가 편집하는 ≪여명≫에 관계하다. 8월, 이탈리아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다시 드레스덴에 머물다. 9월 14일, 둘째딸 류보피(에메) 태어나다. 생활이 궁핍하여 <영원한 남편>을 쓰기 시작, 12월 초에 탈고하다.
1870년
<영원한 남편>을 ≪여명≫ 1, 2 월호에 연재. 1월부터 <악령>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탈고. <죄와 벌> 제 4판이 나오다.
1871년
<악령>을 ≪러시아 통보≫ 1, 2, 4, 7, 9, 11 월호에 연재, 제 2편까지 완결했으나 그 후 1년간 중단하다. 7월 8일, <영원한 남편>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1872년
근동 지방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다. <악령> 제 3 편을 ≪러시아 통보≫ 11, 12 월호에 발표하여 완결하다. 주간지 ≪시민≫의 편집국에 입사하다.
1873년
<작가의 일기>를 ≪시민≫ 1 호에 50 호까지 1년에 걸쳐 연재하다. <악령>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4년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시민 편집자≫가 되다. 3월 말 검열법 위반으로 구속되다. 가을부터 페테르부르크의 남쪽 지방 온천장으로 옮기다. <미성년>을 쓰기 시작하다.
1875년
네크라소프의 요청으로, 그가 편집하는 잡지 ≪조국의 기록≫에 <미성년>을 발표하다. 1, 2, 4, 5, 9, 11, 12 월 호에 연재하여 완결하다. 여름에 서부 독일에 머물다. 8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태어나다. <죽음의 집의 기록> 제 4판 나오다.
1876년
1월부터 <작가의 일기>를 원간으로 게재하다. <미성년> 단행본으로 출간하다.
1877년
5월, 둘째아들 알렉세이 죽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쓰기 시작하다. <죄와 벌> 제 5판이 나오다.
1878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2, 4, 5, 6, 8, 9, 10, 11 월호에 연재하다. 이해 <작가의 일기> 재판 발행하다. <학대받은 사람들> 제 5판이 나오다.
1880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러시아 통보≫ 1, 4, 7, 8, 9, 10, 11 월호에 계속 연재하다. 5월 25일 모스크바의 작가, 저널리스트가 주최한 도스토옙스키를 위한 축하회가 베풀어지다. 8월, <작가의 일기>를 복간하다. 푸시킨제(祭)에서 연설하다.
1881년
2월 9일 오후 8시 30분 페테르부르크에서 영면하다. 향년 59세. 2월 12일, 페테르부르크 대사원 묘지에 묻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7. 작품 목록[편집]



7.1. 중 · 장편[편집]


제목
발간년도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1846년
분신
Двойник
1846년
여주인[22]
Хозяйка
1847년
네또츠카 네즈바노바[23]
Неточка Незванов
1849년
아저씨의 꿈
Дядюшкин сон
1859년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Село Степанчиково и его обитатели
1859년
상처받은 사람들
Униженные и оскорблённые[24]
1861년
죽음의 집의 기록
Записки из Мёртвого дома
1862년
지하로부터의 수기
Записки из подполья
1864년
죄와 벌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1866년
노름꾼
Игрок
1867년
백치
Идиот
1869년
영원한 남편
Вечный муж
1870년
악령
Бесы
1872년
미성년
Подросток
1875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25]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1880년


7.2. 단편[편집]


제목
발간년도
쁘로하르친 씨
Господин Прохарчин
1846년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Роман в девяти письмах
1847년
빼째르부르크 연대기
Петербургская летопись
질투하는 남편
Ревнивый муж
1848년
남의 아내
Чужая жена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ужая жена и муж под кроватью[26]
약한 마음
Слабое сердце
뽈준꼬프
Polzunkov
정직한 도둑
Честный вор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Ёлка и свадьба
백야
Белые ночи
꼬마 영웅
Маленький герой
1849년
악몽같은 이야기
Скверный анекдот
1862년
악어
Крокодил
1865년
보보끄[27]
Бобок
1873년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Мальчик у Христа на ёлке
1876년
백 살의 노파
Столетняя
농부 마레이
Мужик Марей
온순한 여자
Кроткая
우스운 사람의 꿈
Сон смешного человека
1877년


8. 기타[편집]


  • 이오시프 스탈린은 젊은 시절부터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위대한 심리학자로 여겼다. 그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책에는 그가 작품을 읽으면서 적은 여백에 광범한 기록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분석해왔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말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kino-teatr.ru/54346.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도스토옙스키(드라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도서 갤러리독서 마이너 갤러리[28]에서는 도끼 선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한국 문학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외국 문학 커뮤니티에서도 인기 작가 중 한 명이다. 4chan의 문학 게시판인 /lit/에서는 하루에 도스토옙스키의 관한 글이 한 개 이상은 무조건 올라온다.

  • 2005년에 바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기존에 쓰이던 도스토예프스키에서 도스토옙스키로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

  • 러시아의 극우 정치인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는 수형자였던 도스토옙스키와 동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를 예로 들며, 러시아의 문화 역량이 쇠퇴한 것은 사람들이 너무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궤변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국민들을 감옥에 가두면 고난과 역경을 딛고 러시아의 문화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물론 이를 듣고 있는 푸틴을 포함한 러시아 정치인들은 폭소했다.

  • 열린책들 등의 출판사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로 표기한다.


9. 외부 링크[편집]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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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06:42:54에 나무위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나폴레옹 전쟁에도 종군했다.[2] 환상 속의 이리에 대한 어린이다운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마레이라는 농부가 그를 안심시켜 주었던 10살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875년에 쓴 작품 미성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3] 아이반호의 작가.[4] 바르바라는 결혼했고, 두 아이들은 학교로 보낸다.[5] 이 때 도스토옙스키는 클럽에서 인쇄기를 맡고 있었는데, 이는 대중 선동 담당을 뜻하기 때문에 중죄인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룹은 도스토옙스키가 보수주의로 전향을 한 뒤에 쓴 본격 좌파까기 소설인 악령에서 등장한다.[6] 몇몇 책에서는 봉기 내용은 빼고 처형 사건 내용만 적어놓아서 도스토옙스키가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처럼 묘사된다.[7] 옴스크는 현재 시베리아 연방관구 서부에 있는 도시로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한다. 옴스크를 관통하는 이르티시강과 함께.[스포일러] 하지만 묘하게도, 그 남자는 살아나게 되자 결심했던 대로 살지 못하고 다시 시간을 낭비하면서 보냈다는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도스토옙스키도 마누라 잘 만나기 전까지 도박을 못 끊었으니 자전적인 인물이라 할 수도.[8] 도스토옙스키와 이사예바의 자세한 이야기는 고려대 노문과 석영중 교수의 기사에 실려있다. 기사 링크-뭐, 애 딸린 미망인과 결혼하겠다고?[9]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유독 문장이 긴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문장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얼른 출판사에 넘겨야 했기 때문. 심지어 <미성년>에서는 인물의 이름이 중간에 바뀌기도 한다.[10] 율리우스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 9일. 가톨릭 국가들은 그레고리력의 시행이 빨랐지만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 이후인 1918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시행했다.[11] 1880년 9월 26일, 톨스토이는 평론가 니콜라이 스트라코프에게 편지를 보내 "<죽음의 집의 기록>은 푸쉬킨의 작품을 포함하여 새로운 모든 문학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썼다.[12] https://www.oprah.com/oprahsbookclub/what-was-on-leo-tolstoys-bookshelf/15[13] 카츄샤가 네흘류도프 집안에 살았던 시절, 그와 더불어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탐독했다고. 그러나 카츄샤는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더 좋아했다고 나온다.[14] 안나 그리고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15] 카프카의 작품 소송죄와 벌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도스토옙스키를 문학적 '혈연관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16] 포크너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셰익스피어 작품과 성경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문학 영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문학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비할 만큼 충분히 위대한 것은 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압살롬, 압살롬!>의 등장인물 토마스 서트펜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외 유사점이 많다.[17] 2000년 영국 가디언지의 탐방기사. # [18] 이 동상을 레닌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 과거 이름이 레닌 도서관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19] 모스크바 지하철 10호선도스토옙스카야역. 다만 러시아 지하철에 유명인의 이름을 본따 역 이름을 짓는 것은 일종의 관습이다.[20] 1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2위 표트르 스톨리핀, 3위 스탈린, 4위 푸시킨, 5위 표트르 대제,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도스토예프스키, 8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9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10위는 이반 4세였다.[21] <<죄와 벌>>의 여주인공이자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인 소냐는, 니체의 기준에서 보자면 '노예의 도덕'을 신봉하는 부정적 인간상이기도 하다. 물론 니체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아마 심리 묘사를 높게 평가한 듯. 니체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사상에서는 그를 깐 전례도 있고.[22] 한국에선 단편 모음집인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에 실려있다. 열린책들 기준[23] 미완성작[24] 영어로 하면 Humiliated and Insulted이고, 굳이 직역하자면 '모욕당한 그리고 굴욕당한'이 되겠다.gg[25] 본래 3부작 장편으로 기획된 소설집으로 제3의 인물인 화자가 주인공 알렉세이를 추억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1부작은 알렉세이가 수도자에서 환속하는 프롤로그이고 알렉세이가 본격 혁명가로 발걸음하는 2부는 본편으로 정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미완성집이 되었다.[26] '남의 아내'와 '질투하는 남편'을 합쳐서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서 개작한 단편[27] 이 작품부터 마지막까지 쓰여진 단편들은 전부 도스토옙스키가 쓴 「작가의 일기」라는 연재 일기의 부분으로 발표된다.[28] 이곳에서는 갤주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작가다. 작가 인기 투표에서 1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