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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영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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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동군 출신 독립운동가, 표영준[편집]
표영준은 1896년경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에 여행렬(呂行烈), 김상만(金相萬), 주석환(朱錫煥)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고, 국내에서의 항일활동 계획을 논의한 뒤 동년 11월에 유성삼(劉成三)과 함께 권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1920년 3월 김석황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되어 오자, 그는 김석황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고 평양의 기휼병원에서 결사의용단을 조직했다.
1920년 5월, 표영준은 기휼병원에서 지부장 및 간부회의를 열고 의열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해 8월 3일, 광복군총영이 미국 의원단 일행이 조선을 방문하는 걸 기회로 삼아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보여주기로 결정하고 김영철(金榮哲)을 단장으로 하는 결사대 10여 명을 파견했다. 표영준은 이들과 연계하여 평남도청, 평양시청, 평양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8월 3일 오후 9시 30분, 표영준은 여행렬과 함께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었고, 평양성 서쪽의 칠성문으로 도주하던 중 일본 경관의 검문을 받자 권총을 쏴 죽게 만들었다. 이후 8월 20일 오후 6시경 평남경찰부장이 탄 자동차가 부벽루 앞을 지나자 총격을 가해 운전수를 부상시켰다. 이후 8월 22일 오후 2시에 기휼병원에서 다음 거사 계획을 구상했으나 도중에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이후 1921년 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8.15 해방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도와 날짜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표영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청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표영준[편집]
표영준은 1884년 4월 26일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5일 청양군 정산시장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던 중 헌병대가 30여 명의 시위 참여자를 강제 연행하자, 그를 비롯한 시위대는 분노하여 피검자 석방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로 쇄도했다. 이때 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의 철수를 주장하며 격렬히 항거하다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
4월 6일, 1천 명의 주민들은 권흥규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운구행렬에 동참했다. 이때 공주에서 지원 나온 일본 헌병들이 운구 행렬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양산시켰다. 이때 표영준은 운구행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24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청영헌병분견소에서 태형 90도를 선고받았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48년 11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표영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