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 (r20220720판)

문서 조회수 확인중...





표트르 1세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초대 황제
표트르 1세
Пётр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eter_der-Grosse_1838.jpg

이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672년 6월 9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사망
1725년 2월 8일 (52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재위
루스 차르국의 차르
1682년 5월 7일 ~ 1721년 11월 2일
러시아 제국 초대 황제[1]
1721년 11월 2일 ~ 1725년 2월 8일
신체
203cm
배우자
예브도키야 로푸히나
(1689년 결혼 / 1698년 폐위)
마르타 스카브론스카야
(1712년 결혼)
자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안나 페트로브나[2],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나탈리아 페트로브나[3]
아버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어머니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리쉬키나
형제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표도르 3세, 이반 5세,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 등
서명
파일:표트르 1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초기까지
2.2. 서유럽 사절단
2.4. 서구화 개혁
2.4.1. 근대적 관료 체제
2.4.3. 1721, 황제 등극
2.5. 후계자 문제
2.5.1. 아들에게 사형선고
2.6. 죽음과 후계
3.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루스 차르국로마노프 왕조의 제4대 차르이자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

러시아 제국의 전신인 루스 차르국을 서구화하고, 대북방전쟁 이후, 전러시아의 황제를 칭하며 러시아 제국을 탄생시켰으며 중세 수준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이다.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들었는데, 스웨덴과의 전쟁 대승 등으로 국력을 과시했으며, 아조프발트해 점령으로 발트함대를 창설하여 러시아 해군의 토대를 마련했다. 서구화를 통해 변방의 러시아를 행정적, 상업적으로 발전시키는 큰 업적을 일궈냈다. 러시아의 발전을 바닥부터 굳힌 사람이다. 물론 높은 세금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등의 대규모 건축사업으로 시민에서 반발을 샀고, 귀족들에게 능력주의 관료제를 강행해 많은 불만을 샀지만, 모두 피의 숙청으로 정리하고 많은 전쟁에서 성공적 대승을 거두어, 러시아는 유럽의 주요 정치 중심지로 역사책에 당당히 등장했다.

신분보다 능력중심의 인재등용으로 17~18세기 군주로서 굉장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표트르 1세 때 치안을 담당하는 인물이 무려 선박 심부름꾼이었다. 그만큼 능력중심적이었다. 귀족공무원으로 뽑았는데,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귀족이어도 얄짤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후계자마저도 능력중심적이기를 바랬고, 새로운 승계법을 1722년에 제정할 정도의 계몽군주였다.

기술로써는 국가의 부족함을 쿨하게 인정해 서유럽 사절단을 파견해 본인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 체계를 정립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 수도로 삼아 해상무역이 무려 몇 배로 뻥튀기되었다. 그의 밑에서 제조업이 크게 성장했으며, 표트르 1세는 키릴 문자를 서구화해 글자꼴을 재정립했고 전통 슬라브족 달력[4]서양율리우스력으로 통일하였다.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다.[5]

참고로 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다. 당시에는 영양상태가 영 좋지 못해서 러시아인이라고 해도 키가 그리 크지 못한걸 생각해보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체감상 훨씬 더 커보였을테니 가히 괴물같은 체격, 오늘날로 따지면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에게서나 나올 법한 체격이었다. 얼굴초상화처럼 꽤 훤칠하게 잘생겼는데 이 둘이 맞물려서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표트르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므로 문화권에 따라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영어권)', '페터 대제(Peter der Große, 독일어권), '피에르 대제(Pierre le Grande, 프랑스어권), '페드루 대제(Pedro o Grande, 포르투갈어권)'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초기까지[편집]


로마노프 왕조의 2대 차르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와 두번째 황후 나탈리아 키릴로브나의 아들로 1672년에 태어났다. 표트르가 4살 때에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표도르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 만에 저승으로 갔다. 이에 표트르 1세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스트렐치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일단 이복형 이반 5세[6]와 표트르가 공동 황제에 오르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소피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의 어머니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마침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7]의 정착촌과[8]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 최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9] 특히 표트르가 흥미있어한 것은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Потешные войска)'를 만들어 놀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 놀이 군대지 실탄까지 쏘며 훈련을 해 첫 전투에서 20여 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크렘린서바이벌 필드 다만 이 '놀이 군대'는 단순한 전쟁놀이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정도 무력을 가진 군사집단이었으며, 이를 증명하듯 1683년 놀이 군대는 러시아 최초의 근대식 부대이자 황실 친위대인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로 발전하여 소피아의 반란 진압이나 훗날의 대북방전쟁 등지에 투입되었다.

1689년 이복 누나 소피아와 애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었다. 이는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청나라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한 소피아에 대한 귀족들의 여론이 나빠지자,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사건이 커진 것이다. 또한 표트르가 소피아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데는, 서유럽 출신자들로 만든 용병대의 대장인 고든과 표트르의 두터운 친분 덕분에 최정예부대인 용병대가 표트르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반 5세는 표트르와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실권은 표트르에게 넘겨주었으나 쫒겨나지 않고 명목상의 차르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다가 곧 병사했다.

사실 이런 일 때문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황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의 권한으로 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논리였다.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 때부터 표트르는 단독 황제로 러시아를 다스렸다.

2.2. 서유럽 사절단[편집]


1698년,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포병 부사관 코스프레를 하고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목수 코스프레를 하고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해군 체험도 하면서 명예 제독의 지위도 얻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하고 뉴턴의 연구에 대하여 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의학이나 해부학까지 수강했는데, 수강 중 시체를 보고 토한 자들을 크게 문책하며 시체를 먹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0] 거기다 시체 해부하는 것까지 참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사절단이건 방문한 나라 사람들이건 다들 '표트르' 미하일로프가 코스프레 중인 표트르 1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키부터가 장신 수준이 아니라 거인이기 때문에 무척 눈에 띄었을 것이다.[11] 단지 당사자가 열심히 코스프레를 하니 장단을 맞춰줬을 뿐. 또 아무리 코스프레에 맞춰줘도 일국의 군주를 포병 부사관이나 목수처럼 굴릴 수는 없으니 일반 귀족의 예로 대우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자국을 방문 중인 외국 군주의 신변에 위협이 가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가 날 테니 표트르가 방문하는 나라의 군주들은 다들 노심초사하며 호위를 겹겹이 붙였다. 거기에 표트르 또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악동이라[12] 각 나라에서는 제발 차르가 자기 나라에 오지 말아주십사 했다고 한다. 유학 동안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서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바다에 집착하게 되었다.

유학 중간에 소피아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표트르는 급히 귀국하여 손수 처리했다. 진짜 반란이라는 설부터 반대파를 처단할 음모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백여 명의 사형수들을 속옷 차림으로 줄세운 다음 하나 하나 직접 목을 도끼로 쳤다고 한다. 키가 2m가 넘는 거구에다가 힘도 엄청난 장사여서 은쟁반을 손으로 구기고 말편자도 펼 수 있을 정도였다.

2.3. 대북방전쟁[편집]


1697년, 이웃 강국 스웨덴에서는 칼 11세가 병사하고 16살의 칼 12세가 즉위했다. 당연한 일로서 당시 팽창중이던 스웨덴과의 대립은 결국 21년간의 대북방전쟁의 시작을 알렸다.[13]

1700년 러시아군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명, 러시아군은 약 3만 7천명이었는데,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 눈보라가 스웨덴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러시아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고, 패주하던 러시아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명이 전사했지만 러시아군은 9천여명이 전사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문과 수만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러시아군에 포위당했을 때, 러시아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챘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러시아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러시아군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이때 칼 12세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면 혼란 시대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을 돌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고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작센 선제후국을 유린하는 사이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스웨덴령 리보니아도르파트, 나르바를 공격해 점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시킨 칼 12세는 곧바로 표트르 1세를 위협했다. 표트르 1세는 그로드노[14]에서 칼 12세와 소규모 병력끼리 맞붙었으나 쪽도 못쓰고 발려 점령한 잉에르만란드를 되돌려주고 나르바와 도르파트도 배상금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칼 12세는 새로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스웨덴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정면으로 스웨덴군과 붙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표트르 1세는 청야전술로 최대한 시간을 끌었고 칼 12세도 스몰렌스크를 통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전통적인 최단 침공경로를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다. 표트르 1세는 길어진 스웨덴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고립시켰고, 결국 칼 12세가 부상당한 틈을 타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1세는 무리하게 몰다비아 공국 원정을 계획하다가 1710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오스만군에게 패하였고 추격해온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결국 병력을 보전하는 조건으로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얻은 아조프를 반환했다. 이때 표트르는 임신한 자신의 정부(情婦)인 예카테리나 1세와 같이 있었다. 하마터면 러시아 황제 부부가 나란히 동물원 우리에 갇힐 뻔한 일이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당시 오스만 제국 궁정에 칼 12세가 망명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덜덜덜.

하지만 오스만이 아조프를 되찾은 것에 만족하고 대북방전쟁에서 빠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표트르는 연합군과 함께 계속해서 스웨덴을 밀어붙여 발트해 지역의 스웨덴령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점령하고 핀란드 전역을 유린했다.[15] 노르웨이 침공 중 전사한 칼 12세의 뒤를 이은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레드리크 1세와 협상한 끝에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지역과 핀란드의 비보리와 켁스홀름을 포함한 카리알라 일부 지역을 얻으면서 발트해로 향하는 출구를 얻어냈다. 흑해를 잃고 발트해를 얻다


2.4. 서구화 개혁[편집]



2.4.1. 근대적 관료 체제[편집]


한편 행정면으로는 귀족회의 두마를 폐지하고 원로원을 만들었다. 1722년에는 14관등 제도를 만들어 러시아에 근대적 관료 체계를 정립했다. 또 표트르 1세는 귀족들의 정교회 문화권 특유의 긴 수염을 자르고, 러시아판 단발령 수염을 계속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물렸다. 반면 서유럽에서 보편화된 콧수염은 오히려 장려했다. 위의 초상화에서 보듯 표트르 본인도 서유럽식 콧수염을 길러서 솔선수범했다.


2.4.2.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편집]


1703년 스웨덴령 잉에르만란드를 점령한 표트르 1세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발트해 연안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지었고, 그 도시의 이름을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었다.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는데, 이 도시가 바로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그러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위치한 이조라 지역은 춥고 습한 지역이라 건설이 어렵다보니 다들 건설작업하기를 꺼려서 표트르 대제는 강제노동으로 이를 해결했다. 매년 3만명의 농민들이 끌려와서 일해야 했고 추위와 강풍, 물과 진흙탕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작업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

표트르 1세의 서구화 개혁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도시이름 그 자체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어가 아니다. 러시아어로는 "페트로그라드"[16]가 되어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스웨덴어 '상트(Санкт/Sankt)'와 독일어 '페테르부르크(Петербург/Petersburg)'가 합쳐진 이름으로 당시에 독일어권이 선진화된 지역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새로 짓는 수도 이름에 외국어 발음을 붙였다.

2.4.3. 1721, 황제 등극[편집]


1721년 11월 2일,[17] 표트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전 러시아의 황제(Императоръ Всероссійскій: 임페라토르 브셰로시스키)"[18]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Pоссiйская Имперiя)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네덜란드 공화국프로이센 왕국이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고 1723년 스웨덴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영국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1745년에는 프랑스 왕국스페인 왕국이, 마지막으로 1764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승인을 하면서 러시아는 이로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2.5. 후계자 문제[편집]



2.5.1. 아들에게 사형선고[편집]


표트르 1세는 후계 관련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특히 표트르 1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황태자 알렉세이는 아버지 표트르 1세에게 큰 불만을 가졌다. 특히 그의 개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또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예브도키야를 소박놓고 하녀 출신인 정부(情婦)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19]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아들(알렉세이)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결국 알렉세이는 이 소문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추궁을 받게되자 정부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피난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체포한 다음 법원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으로, 작가 톨스토이의 직계 조상이다.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1718년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표트르가 손수 고문치사를 시켰다거나 사형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 알렉세이의 유일한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표트르 2세에게도 좋은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이건 뭐 러시아판 임오화변도 아니고

만약 표트르 1세가 알렉세이 황태자[20]를 계속 살려뒀다면 표트르 2세 말고도 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표트르 2세가 자녀를 못 얻고 죽더라도 다른 자녀들이 계승하여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스웨덴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독일 귀족, 카를 페터 울리히의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을 통해 이어졌다.


2.6. 죽음과 후계[편집]


1725년 표트르 1세는 자신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사인은 요로결석이었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21]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 건설 공사장을 순시 중 인부들이 네바 강에 빠진 것을 보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이는 일종의 설화일 뿐 신빙성은 희박하다.

이 당시 후계자인 황태손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표트르 1세의 정부(情婦)였다가 두 번째 황후가 된 예카테리나 1세가 차기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녀도 몇 년 뒤 공식 행사에서 속옷 차림으로 오래 서 있는 바람에 고열로 사망하고,[22]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표토르 2세마저도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그 후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여제가 정국을 안정시켰다.


3. 평가[편집]


러시아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을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3년 발트함대를 창설해 대북방전쟁 후반부에 스웨덴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고,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만들어 이후 강구트급 전함중 두 척(강구트와 폴타바)이 아드미랄티 조선소에서 건조되는 등[23] 수많은 함선들을 생산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24]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25] 실제로 러시아 역사/문화의 시대 구분 기준에서 서유럽 기준인 '중세'란 표현은 그닥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을 '고대', 이후를 '근대'라고 쓴다. 역사의 시대 구분은 대사건/대변혁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표트르 대제는 바로 그 기준을 충족한다.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나 '차르'라고 하는 슬라브 왕정일 뿐 다른 국가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26]를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27]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일변시켰다.

그의 서구화주의로 인해 러시아하면 변방의 오랑캐 취급이 아닌 유럽의 국가중 하나라는 인식이 박히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국토가 아시아에 있지만 그가 발전시킨 도시 대부분이 유럽 근처이며 유럽의 문화를 들여왔기에 지금까지도 러시아는 유럽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28]

아울러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의 실책 역시 존재한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동원하여 노임도 제대로 안주고 가혹하게 부려먹어 도시 건설을 한 것이 비판받는데 이는 현대는 물론 당시에도 지나치다고 비판이 많았다. 강제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달라고 간언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며 강행했고 도시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었으며 도시가 건설되고 나서는 귀족과 백성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이주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농노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였다.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표트르 1세의 통치기 때부터 러시아의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과 교회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이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하여 러시아의 농노제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난을 계기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도 자포로제 카자크를 꾸준히 탄압했다. 이는 대북방전쟁 당시 칼 12세와 손잡고 대항했던 카자크 헤트만 이반 마제파를 제압하고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하거나 카자크 자치를 제한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오늘날(2022년 6월 10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관련해 퍼뜨리는 프로파간다[29]는 모두 표트르 대제 때부터 성립된 내용이다. 우크라이나인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인 셈.


4. 기타[편집]


  • 누가 러시아인 아니랄까봐 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문제는 술에 취했다 하면 그렇잖아도 다혈질인 성격이 더욱 더러워져 완전 개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때 누구든 표트르의 비위를 거슬렀다가는 가차없이 두들겨맞기 일쑤였다. 과음으로 인해 말년에 이르러서는 요로결석을 심하게 앓았는데, 의사들이 수술로 제거한 요로결석들의 양이 4파운드[30]나 되었다. 죽기 얼마 전에는 요독증에 걸려 오줌을 못 눠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술을 계속 퍼마셨다. 방광에 구멍을 뚫어서 오줌을 빼내기도 했지만 결국 요로결석과 요독증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게다가 사후 의사들의 부검에서 표트르 1세는 방광이 심각하게 썩어있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왕 아우구스트 2세는 동유럽의 운명을 건 대북방전쟁에서 트롤링을 일삼아,[31] 스웨덴의 소년왕 칼 12세에게 바르샤바가 점령당해 왕위에서 쫒겨났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에 빌붙어서 전쟁에서 승리한 뒤 겨우겨우 다시 왕위에 올랐다.
아우구스트 2세는 이때 표트르 대제에게 받은 은혜에 어찌나 감사했는지 즉위 기념 선물로, 생명의 은인인 표트르 대제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포르노 그림을 선물로 보내며 유럽 제일의 난봉꾼다운 기행을 벌였다. 웃긴 건 표트르 대제도 성격이 별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기행이라면 동유럽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인물이어서, 포르노 선물에 대해 기껏 살려줬더니 모욕했다며 화를 내기는 커녕 "이 녀석 완전 내 스타일"이라며 오히려 좋아했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는 표트르 대제라는 매우 든든한 큰형님이[32] 생겨서 거칠 것없이 막 행동했으며 러시아의 뒷빽만 믿는 경향이 강해졌다.
아우구스트 2세는 아예 강약약강이란 게 없었던건지 자신의 나라보다 국력이 강력한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는 옷을 안입은 여성의 초상화를 선물했다. 이 선물을 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당연히 표면상 화를 냈지만, 이후 표트르 대제처럼 아우구스트 2세의 선물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스위스 배우 막시밀리안 셸[33](1930~2014)이 주연하고 양지운이 더빙한 4부작 미국 미니시리즈(Peter the Great, 1986)가 꽤 유명하다. 노엄 촘스키의 친척인 마빈 J. 촘스키가 공동 감독하고 한국에서는 1988년 8월 6일부터 9일까지 밤 9시 50분에 MBC 심야특선 외화 드라마 <피터 대제>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오마 샤리프나 멜 페러 등 배우진은 화려하고 제작비도 많이 들여 볼거리도 많다. 다만 이 작품은 고증이나 연대기는 엉망이다. 만나지도 않은 아이작 뉴턴이 나오거나, 폴타바 전투 10년 전에 죽은 영국인 용병장교 패트릭 고든(배우는 나치 장군 역을 자주 맡았던 영국 배우 제레미 켐프)이 버젓히 폴타바에서 나온다. 1990년대 러시아에서 만든 전기 영화는 고증으로서는 완벽한 작품이다.

  • 훗날 러시아의 장군이 되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아브람 페드로비치 간니발'을 등용했다. 이때 표트르 1세는 간니발에게 고급 교육을 받게 했으며, 간니발이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자 간니발의 대부가 되었다. 성씨 간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바르카의 이름을 딴 것으로 간니발은 한니발의 러시아어 표기. 미들네임의 '페드로비치'도 표트르가 간니발의 대부를 서줬기 때문에 표트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간니발은 오랫동안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오늘날의 연구 결과로는 실제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현대의 카메룬 북동쪽 차드 호 인근 출신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간니발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증조부다. 후손인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고.
  • 1860년에 체결된 북경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얻는데 이 때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의 을 표트르 대제 만으로 부르고 있다.

  • 러시아 500루블 지폐에 표트르의 동상이 들어가 있다.

파일:external/vignette1.wikia.nocookie.net/Peter.jpg 파일:Civ_6_Peter_splash.jpg
  • 문명 4문명 6에서 러시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특히 문명 6에서는 너무 사기적인 성능으로 원성을 살 정도. 국내 문명 6 멀티에서는 암묵적으로 필밴하는 문명이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 6, 6 능력치를 지닌 군주로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 6, 6, 6은 풀스탯 능력치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전 시리즈에서 그의 능력치는 최고치를 찍는다.


  • 2022년 6월 10일 공개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얻은 땅을 대북방전쟁에서 얻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교하며 자신이 표트르 대제와 비슷한 일을 하며, 원래 차지해야 했을 영토를 얻는 것일 뿐이라고 정당화, 자기합리화를 하였다. 그리고 표트르 대제의 사상은 지금도 러시아에 유효하게 적용된다고 밝히며 자신이 제국주의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분히 표트르 대제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 사이의 존경심에 호소하려는 민족주의적 제스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푸틴은 해당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표트르 대제와 동격의 위대한 지도자로 각인시키려 했겠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표트르 대제를 단순히 전쟁광, 침략자, 학살자로 격하시키는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가 러시아 제국 이후로는 전혀 정신적인 성장 자체가 없는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으로 표트르 대제를 존경하는 이라면 결코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09 23:15:13에 나무위키 표트르 1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정식 명칭은 전러시아의 황제(러시아어: Император Всероссийский 임페라토르 프세로시스키, 영어: Emperor of all Russias)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 1세가 이반 4세가 만들어 그 전까지 사용되던 "전러시아(대러시아·소러시아·백러시아)의 차르" 칭호를 서구식으로 바꾼 것이 유래다.[2] 표트르 3세의 어머니.[3] 원래는 14명이나 되는 자녀를 뒀으나 위의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나마 위의 4명에 포함된 막내딸 나탈리아 페트로브나 역시 6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4] 슬라브족 9월에 새해가 시작했다! 혼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5] 다만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제국의 개조로서 제정 시절 내내 황제들이 본받으려는 가장 위대한 계몽군주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소련 시절이 공산주의 치하였음에도 공산당조차 표트르를 폄하하지 못하고 치켜세워줬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듯.[6] 당뇨로 추정되는 병으로 거의 죽기 직전이었고 장님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저하되었다. 누나 소피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제위에 오르기도 힘든 상태.[7]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독일 출신들이었다.[8] 쿠쿠이(KyKyй)라고 부르는 서유럽 이주민들의 마을이었다. 당시에 러시아인들은 유럽 이주민들을 모두 독일인이라고 불렀다.[9] 네덜란드인에게서는 산수와 기하학, 축성술, 항해술을 배웠고 스코틀랜드인스웨덴인에게선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10] 정확히는 시체의 조직을 입으로 절단하라고 지시한것 같다.[11] 이 양반은 키가 2미터가 넘는다. 현대 기준으로도 거대한 키인데, 이 양반이 코스프레하고 사절단으로 돌아다닌 건 17세기다. 당시의 평균키에 비하면 거의 종족 자체가 다른 급이니 눈에 안 띌 수가 없다.[12] 머무르는 집마다 총탄 자국이 가득하고 바닥은 엉망이었다고 한다. 영국에 갔을 때는 겉옷만 걸치고 윌리엄 3세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고급 식기를 사용하는 데에 서투르기도 하여 영국인들은 표트르 대제를 부정적으로 보았다.[13] 이 때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서 재미있는 법안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러시아인들이 가정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던 보드카를 앞으로는 국가에서만 제조와 판매를 독점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 정부가 벌어들이는 세금의 40%는 보드카 판매에서 나올 정도였다. 물론 표트르 대제는 민심을 얻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매일 무료로 보드카를 지급해주었다고 한다. 덤으로 병사들에게 보드카를 지급한다고 홍보하자 군 지원율이 상당히 높아졌다고도 한다(...).[14]벨라루스 흐로드나[15] 이때 러시아군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한 핀란드는 때마침 기근과 역병까지 덮치면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하였다.[16] 여담으로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과 사이가 안 좋아졌을 때 본래 이름 대신 사용되었던 이름이기도 하다. 이후 소련 시절 내내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을 따다 붙인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소련 해체 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환원되었다.[17] 당시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0일.[18] 러시아가 제국을 칭한 것은 전 러시아의 차르를 자칭한 이반 4세가 최초이지만 서구식 황제 개념인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은 군주는 표트르 1세가 최초이다.[19] 전시 억류자로 노예로 팔려와서 표트르의 신하의 집의 가정부로 있다가 헌납된 여자다. 나중에 표트르의 정부로 살았는데, 표트르가 황후를 폐위한 뒤에 정식으로 결혼했다.[20]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와는 다르다.[21] 실제로 요로결석의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이다. 지금이야 뒤지게 아파서 그렇지 별거 아니라지만 파석술이 개발되기 전까지의 요로결석은 난치병이었다.[22] 이때 강추위가 심했는데 이로 인해 감기에 걸리다가 맞지 않고 폐렴으로 악화된 것이다.[23] 나머지 두 척은 네바강을 끼고 마주하고 있는 발트 조선소(여기는 1856년 민간 조선소로 설립되었다)에서 건조했다.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24] 이 기마상을 보고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청동기마상'이라는 시를 남겼다.[25] 세수는 8배로 늘리고, 러시아를 서유럽국가와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다.[26] 표트르 대제 ~러시아를 일으킨 리더십~ 번역본 참고.[27] 표트르 대제 이후 가라앉을 때도 있었으며, 농민들에게는 그다지 많이 퍼지지 않은 면도 있다.[28] 100년 이상 떨어져 있는 사건이기에 표트르 대제는 그저 기반을 다지는 정도였기는 하다.[29]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방언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으로 다시 통합되어야 한다 등.[30] 약 1.8kg.[31] 러시아 빽과 인구 3배 차이라는 체급 차이만 믿고 먼저 공격했다가 역으로 지도에서 지워졌다(...).[32] 아우구스트 2세가 표트르 대제보다 2살 많은 형이다. 나이가 더 많은데도 철이 없다[33] 그 유명한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 <철십자 훈장>에서 악덕 지휘관 '스트란스키 대위' 역으로 열연한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