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양시(허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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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성 동북부의 지급시. 정저우에서 동북쪽으로 130km, 한단에서 동남쪽으로 80km, 지난에서 서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황허 북쪽의 평지에 위치한다. 하남성인데 정작 황하의 이북에 있으므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으로도 볼 수 있겠다. 상고 시대의 제구를 거쳐 한대부터 복양으로 불렸으며,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여러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이 있었던 역사의 장이었다. 지명은 황하와 제수의 지류인 푸수이 강(濮水)에서 유래되었다. 관할 인구 380만명 중 도시 자체에만 북쪽의 칭펑현까지 합쳐 240만명이 거주하여, 중국에서도 매우 시가지 규모를 자랑한다. 중원 유전 덕에 석유 산업이 발달하였고, 화학/기계 공업도 발달하였다. 안양와 타이안 간의 철도가 지난다.
옛 푸양현의 치소(治所)였던 치청유지(戚城遗址)
양사오 문화의 유적이 발견될 만큼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옛 지명은 제구 (帝丘)로, 3황 5제 중 한명인 전욱이 이곳에 도읍하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중원의 한복판에 입지하였기에 기원전 632년 진나라 (晉)와 초나라가 패권을 겨룬 성복 전투가 벌어졌다. 기원전 620년 무렵 위성공이 천도한 이래로는 위나라 (衞)의 수도였다. 기원전 493년에는 진의 실권자 조간자가 6경 중 범씨, 중항씨를 격파하고 4강 체제를 확립한 철구 (铁丘)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위나라 (魏)에 속했다가 기원전 244년 진나라 (秦)가 점령한 후 위나라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군 (東郡)을 설치하였다. 그외에 제자백가 중 병가에 속하는 오기,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 진의 개혁을 이끈 법가의 상앙, 진의 실권자 여불위, 진시황 암살을 시도한 형가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전국시대 무럽부터 기존 제구 대신 복양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였다.
한대의 동군은 현 푸양과 랴오청 일대였고, 그 중심인 복양현은 현재 도심 남부인 푸양현이다. 현 시가지 중남부에 당시 복양현의 치소이던 척성 (치청) 유적지가 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서주 원정을 틈타 여포가 연주 정복을 시도한 복양 전투로 알려졌다. 여포는 남쪽의 진류 태수 장막과 함께 연주 대부분을 장악하였지만 견성을 기반으로 반격한 조조에게 밀려나 서주의 유비에게로 망명한다. 서진 시기인 277년에는 사마염의 9남 사마윤이 복양왕으로 봉해지며 동군이 복양국으로 개편되었다. 다만 301년 복양왕 사마장이 사망한 후 복양군이 되었고, 5호 16국기 일대의 주민들은 후조의 침공을 피해 동진의 경구 (전장시)로 피신해 정착하였다. 이후 그곳에 남복양군이 세워졌다. 새 주민들이 유입된 복양은 당나라 시기에는 하남도 복주에 속하였고, 당말 황소의 난에 호응했던 왕선지가 복양현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판현에서 태어났다.
송대에 들어 전주에 속한 복양에는 개덕부 (开德府)가 설치되었고, 1004년 요나라의 남침 시에 전연의 맹 (전주지맹)이 채결된 곳이기도 하다. 금나라 때에 전주는 개주로 개칭되었고, 청대까지 푸양은 대명부 혹은 개주 소속의 복양현으로 유지되었다. 중화민국 초기까지 직예성 (허베이성)에 속하던 푸양은 1928년 허난성에 편성되었고, 1949-53년까지는 임시로 설치된 핑위안성에 속하였다. 근대 들어 침체되었던 도시는 20세기 후반 들어 중원유전 (中原油田)의 발견과 발전하여 1983년 지급시로 승격하였다. 1987년 푸양에서는 기원전 4400년의 용 무늬 장식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도시는 '중국 제1룡' 혹은 '중국 용의 고향'이란 별칭을 얻으며 관광 명소가 되었다. 또한 도심의 화룽구 (华龙区)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1. 개요[편집]
중국 허난성 동북부의 지급시. 정저우에서 동북쪽으로 130km, 한단에서 동남쪽으로 80km, 지난에서 서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황허 북쪽의 평지에 위치한다. 하남성인데 정작 황하의 이북에 있으므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으로도 볼 수 있겠다. 상고 시대의 제구를 거쳐 한대부터 복양으로 불렸으며,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여러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이 있었던 역사의 장이었다. 지명은 황하와 제수의 지류인 푸수이 강(濮水)에서 유래되었다. 관할 인구 380만명 중 도시 자체에만 북쪽의 칭펑현까지 합쳐 240만명이 거주하여, 중국에서도 매우 시가지 규모를 자랑한다. 중원 유전 덕에 석유 산업이 발달하였고, 화학/기계 공업도 발달하였다. 안양와 타이안 간의 철도가 지난다.
2. 역사[편집]
옛 푸양현의 치소(治所)였던 치청유지(戚城遗址)
양사오 문화의 유적이 발견될 만큼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옛 지명은 제구 (帝丘)로, 3황 5제 중 한명인 전욱이 이곳에 도읍하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중원의 한복판에 입지하였기에 기원전 632년 진나라 (晉)와 초나라가 패권을 겨룬 성복 전투가 벌어졌다. 기원전 620년 무렵 위성공이 천도한 이래로는 위나라 (衞)의 수도였다. 기원전 493년에는 진의 실권자 조간자가 6경 중 범씨, 중항씨를 격파하고 4강 체제를 확립한 철구 (铁丘)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위나라 (魏)에 속했다가 기원전 244년 진나라 (秦)가 점령한 후 위나라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군 (東郡)을 설치하였다. 그외에 제자백가 중 병가에 속하는 오기,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 진의 개혁을 이끈 법가의 상앙, 진의 실권자 여불위, 진시황 암살을 시도한 형가 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전국시대 무럽부터 기존 제구 대신 복양이라는 지명이 등장하였다.
한대의 동군은 현 푸양과 랴오청 일대였고, 그 중심인 복양현은 현재 도심 남부인 푸양현이다. 현 시가지 중남부에 당시 복양현의 치소이던 척성 (치청) 유적지가 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서주 원정을 틈타 여포가 연주 정복을 시도한 복양 전투로 알려졌다. 여포는 남쪽의 진류 태수 장막과 함께 연주 대부분을 장악하였지만 견성을 기반으로 반격한 조조에게 밀려나 서주의 유비에게로 망명한다. 서진 시기인 277년에는 사마염의 9남 사마윤이 복양왕으로 봉해지며 동군이 복양국으로 개편되었다. 다만 301년 복양왕 사마장이 사망한 후 복양군이 되었고, 5호 16국기 일대의 주민들은 후조의 침공을 피해 동진의 경구 (전장시)로 피신해 정착하였다. 이후 그곳에 남복양군이 세워졌다. 새 주민들이 유입된 복양은 당나라 시기에는 하남도 복주에 속하였고, 당말 황소의 난에 호응했던 왕선지가 복양현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판현에서 태어났다.
송대에 들어 전주에 속한 복양에는 개덕부 (开德府)가 설치되었고, 1004년 요나라의 남침 시에 전연의 맹 (전주지맹)이 채결된 곳이기도 하다. 금나라 때에 전주는 개주로 개칭되었고, 청대까지 푸양은 대명부 혹은 개주 소속의 복양현으로 유지되었다. 중화민국 초기까지 직예성 (허베이성)에 속하던 푸양은 1928년 허난성에 편성되었고, 1949-53년까지는 임시로 설치된 핑위안성에 속하였다. 근대 들어 침체되었던 도시는 20세기 후반 들어 중원유전 (中原油田)의 발견과 발전하여 1983년 지급시로 승격하였다. 1987년 푸양에서는 기원전 4400년의 용 무늬 장식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도시는 '중국 제1룡' 혹은 '중국 용의 고향'이란 별칭을 얻으며 관광 명소가 되었다. 또한 도심의 화룽구 (华龙区) 지명의 유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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