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양시(안후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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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안후이성 서북부의 지급시. 저우커우에서 동남쪽으로 90km, 허페이에서 서북쪽으로 100km, 쉬저우에서 서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시가지는 화이허의 지류인 촨허와 잉허가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관할 인구 830만명 중 도시 자체에는 190만명이 거주하며, 성도 허페이보다도 인구가 많은 안후이성 제1의 도시이다. 인근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집산되고, 기계/화학/비료 공업이 발달하였다. 이 지역은 맵고 두꺼운 면 요리가 유명하다.
고대 지명은 여음 (汝陰)으로, 동명의 군의 중심이었고 하항 (河港)으로 번영하였다. 많은 위인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거나 거쳤고, 청대에 들어 부양으로 개칭되었다. 20세기 들어 대기근의 비극을 겪은 도시는 1971년 북쪽 화이베이와의 철도가 지어지며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91년 동중국 대홍수 후 생업 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며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1996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본래 1372년 이래로 북쪽의 보저우 (박주) 역시 그 관할이었지만 1998년 독자적인 지급시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21세기 들어서도 사건 사고가 많은 동네이다.
여음후 하후조의 무덤
춘추전국시대 호나라 (胡)가 있었으나 기원전 495년 초나라에게 정복되었다. 진한대에는 저우커우에 여양현 (汝陽縣)이 있었던 것처럼 푸양에는 여음현 (汝陰縣)이 설치되었고, 둘다 여남군에 속하였다. 비록 군의 치소는 현 주마뎬 쪽에 있었지만, 여음현 역시 도위가 설치될 정도로 중시되었다. 제환공의 재상이자 관포지교 일화로 유명한 관중이 이곳 출신이고, 전한의 개국공신 하후영이 여음후로 봉해진바 있다. 그의 아들이자 2대 여음후인 하후조의 무덤이 1977년 잉저우구의 공항 확장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삼국지의 여몽 또한 여음 서남쪽의 부판현 (현 푸난현) 사람이며. 222년 위문제는 여음현을 중심으로 여음군을 신설하였다. 서진 시기에는 사마의의 7남 사마준이 여음왕으로 봉해져 손오와 맞섰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 재차 독자적인 군이 된 여음은 남조와 북조의 경계 지역이었는데, 5세기부터 남조의 지배력이 미쳤다. 한때 주민들이 옮겨졌던 합비는 남여음군이 되었다. 수나라 시기 영주(潁州)가 설치되었고, 이는 1912년까지 유지되었다. 현재의 잉저우구 지명으로 남아있다. 당나라 대인 9세기에는 활정절도사 (滑鄭節度使)령이었다. 송대에는 순창부 (順昌府)가 설치되었고, 1072년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구양수가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원나라 말엽인 1351년에는 영주 출신의 한산동이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이자 송휘종의 후손임을 칭함으로써 홍건적의 난이 시작되었다. 명대의 봉양부를 거쳐 청대에는 영주부에 속하였다. 청대인 1735년 현 지명인 부양으로 개칭되었다.
사치·부패 논란이 일고 있는 잉저우의 '백악관'
대약진운동 당시 안후이의 당서기 정시셩이 대규모 저수지 사업을 벌여 군소 관개 시설들이 기능을 상실, 240만명이 아사했고, 부주석인 동비우가 시찰을 오자 당국은 시체와 병자들을 외곽으로 옮겨 실패를 숨기려 했다. 크메르 루주 때 캄보디아와 비견될 정도의 사망률을 보인 이 참사는 덩샤오핑 집권 이후 과오로 인정되었다.
90년대 지나친 세금을 물리던 시장 왕화이종이 농민들에게 혈액을 팔도록 권유했는데, 일부 무능한 집행자들이 너무 많은 피를 뽑아 건강을 위협하기도 했고, 과도한 혈액 거래로 2000년대 초반까지 최소 3천명의 농민들이 HIV에 걸려 푸양 에이즈 고아 구원 협회가 이들을 돕고 있다. 2004년 왕화이종이 뇌물수수 혐의로 처형, 같은해 가짜 분유 사태로 아이 수십명이 사망했다.
2008년엔 임파선 질환이 유행해 2만 5천명이 감염되고 수십명이 사망했다. 2015년은 지진으로 2명이 사망, 2017년은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18명이 사망했고 2020년엔 1981년 이후 최대의 홍수가 발생해 시진핑이 위문했다. 푸양의 참혹한 현대사는 입지 조건이 좋은 도시라 해도 부패한 지도부를 만나면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선사한다.
푸양시역에는 상추시 & 보저우와 화이난 & 허페이 방면과 정저우-푸양 고속철이 지나고 푸양역에는 상추시-주장시간, 화이베이-푸양간, 뤄허-화이난간 일반 철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시가지 서남쪽 끝에는 국내선 전용 공항인 푸양 시관 공항(阜阳西关机场)이 있고, 도심에 푸양 사범대학이 있다.
세계 오염 도시 열손가락 안에 드는 두개의 중국 도시 중 하나인 티엔잉이 이 행정구역 안에 있다.[1]
1. 개요[편집]
중국 안후이성 서북부의 지급시. 저우커우에서 동남쪽으로 90km, 허페이에서 서북쪽으로 100km, 쉬저우에서 서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시가지는 화이허의 지류인 촨허와 잉허가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관할 인구 830만명 중 도시 자체에는 190만명이 거주하며, 성도 허페이보다도 인구가 많은 안후이성 제1의 도시이다. 인근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집산되고, 기계/화학/비료 공업이 발달하였다. 이 지역은 맵고 두꺼운 면 요리가 유명하다.
2. 지명[편집]
고대 지명은 여음 (汝陰)으로, 동명의 군의 중심이었고 하항 (河港)으로 번영하였다. 많은 위인들이 이곳에서 태어나거나 거쳤고, 청대에 들어 부양으로 개칭되었다. 20세기 들어 대기근의 비극을 겪은 도시는 1971년 북쪽 화이베이와의 철도가 지어지며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고, 특히 1991년 동중국 대홍수 후 생업 기반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며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그 결과 1996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본래 1372년 이래로 북쪽의 보저우 (박주) 역시 그 관할이었지만 1998년 독자적인 지급시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21세기 들어서도 사건 사고가 많은 동네이다.
3. 역사[편집]
여음후 하후조의 무덤
춘추전국시대 호나라 (胡)가 있었으나 기원전 495년 초나라에게 정복되었다. 진한대에는 저우커우에 여양현 (汝陽縣)이 있었던 것처럼 푸양에는 여음현 (汝陰縣)이 설치되었고, 둘다 여남군에 속하였다. 비록 군의 치소는 현 주마뎬 쪽에 있었지만, 여음현 역시 도위가 설치될 정도로 중시되었다. 제환공의 재상이자 관포지교 일화로 유명한 관중이 이곳 출신이고, 전한의 개국공신 하후영이 여음후로 봉해진바 있다. 그의 아들이자 2대 여음후인 하후조의 무덤이 1977년 잉저우구의 공항 확장 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삼국지의 여몽 또한 여음 서남쪽의 부판현 (현 푸난현) 사람이며. 222년 위문제는 여음현을 중심으로 여음군을 신설하였다. 서진 시기에는 사마의의 7남 사마준이 여음왕으로 봉해져 손오와 맞섰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 재차 독자적인 군이 된 여음은 남조와 북조의 경계 지역이었는데, 5세기부터 남조의 지배력이 미쳤다. 한때 주민들이 옮겨졌던 합비는 남여음군이 되었다. 수나라 시기 영주(潁州)가 설치되었고, 이는 1912년까지 유지되었다. 현재의 잉저우구 지명으로 남아있다. 당나라 대인 9세기에는 활정절도사 (滑鄭節度使)령이었다. 송대에는 순창부 (順昌府)가 설치되었고, 1072년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구양수가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원나라 말엽인 1351년에는 영주 출신의 한산동이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이자 송휘종의 후손임을 칭함으로써 홍건적의 난이 시작되었다. 명대의 봉양부를 거쳐 청대에는 영주부에 속하였다. 청대인 1735년 현 지명인 부양으로 개칭되었다.
4. 사건사고[편집]
사치·부패 논란이 일고 있는 잉저우의 '백악관'
대약진운동 당시 안후이의 당서기 정시셩이 대규모 저수지 사업을 벌여 군소 관개 시설들이 기능을 상실, 240만명이 아사했고, 부주석인 동비우가 시찰을 오자 당국은 시체와 병자들을 외곽으로 옮겨 실패를 숨기려 했다. 크메르 루주 때 캄보디아와 비견될 정도의 사망률을 보인 이 참사는 덩샤오핑 집권 이후 과오로 인정되었다.
90년대 지나친 세금을 물리던 시장 왕화이종이 농민들에게 혈액을 팔도록 권유했는데, 일부 무능한 집행자들이 너무 많은 피를 뽑아 건강을 위협하기도 했고, 과도한 혈액 거래로 2000년대 초반까지 최소 3천명의 농민들이 HIV에 걸려 푸양 에이즈 고아 구원 협회가 이들을 돕고 있다. 2004년 왕화이종이 뇌물수수 혐의로 처형, 같은해 가짜 분유 사태로 아이 수십명이 사망했다.
2008년엔 임파선 질환이 유행해 2만 5천명이 감염되고 수십명이 사망했다. 2015년은 지진으로 2명이 사망, 2017년은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18명이 사망했고 2020년엔 1981년 이후 최대의 홍수가 발생해 시진핑이 위문했다. 푸양의 참혹한 현대사는 입지 조건이 좋은 도시라 해도 부패한 지도부를 만나면 참담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선사한다.
5. 교통[편집]
푸양시역에는 상추시 & 보저우와 화이난 & 허페이 방면과 정저우-푸양 고속철이 지나고 푸양역에는 상추시-주장시간, 화이베이-푸양간, 뤄허-화이난간 일반 철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시가지 서남쪽 끝에는 국내선 전용 공항인 푸양 시관 공항(阜阳西关机场)이 있고, 도심에 푸양 사범대학이 있다.
6. 기타[편집]
세계 오염 도시 열손가락 안에 드는 두개의 중국 도시 중 하나인 티엔잉이 이 행정구역 안에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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