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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군(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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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豐善君 李漢鎔.
생몰기간 : 1875년 2월 19일 - 1890년 8월 1일.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한용(李漢鎔). 장조의 서장자 은언군의 양 현손자이고 전계대원군의 양 증손자이자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형인 영평군 이경응의 양손자이고 청안군 이재순의 양자로 전계대원군의 종가(宗家)인 누동궁(樓洞宮)의 3대 봉사손이자 4대 종주이다.[2]
2. 초기 생애와 가계[편집]
1875년 2월 19일, 한성부에서 소현세자의 8대손 이재철(李載徹)의 아들로 태어났다.[3] 청안군 이재순의 아들로 입양되었으나[4] , 1890년 8월 1일에 16세의 어린 나이로 별세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홍제원 답동리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경기도 포천군 주내면 선단4리[5] 산 11번지 전계대원군 묘소 근처로 이장하였다. 그의 묘소는 전계대원군과 완양부대부인 내외의 묘소, 소실 용성부대부인 묘소의 동쪽 150m 지점에 있으며, 왕방산에서 이장한 양 백부(큰 할아버지) 회평군의 묘소는 그의 묘 서쪽 50m 지점에 조성되었다.
순종 때인 1907년 10월 14일 특별히 종 2품 가선대부 종정원경(嘉善大夫 宗正院卿)에 추증하고, 풍선군(豐善君)으로 추봉하였다.[6] 즉 풍선군의 작호는 죽은 뒤 추증된 것. 1909년 7월 20일 정2품 자헌대부 규장각제학(正二品資憲大夫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고 1910년 8월 21일 순정효황후가 풍선군 부인 정부인 홍씨에게 훈 2등에 서훈하고 서봉장(瑞鳳章)을 하사하였다. 이후 풍선군과 관련된 기록은 없다.
3. 후손[편집]
이미 앞 대에서부터 입양으로 대를 이었고 본인도 입양되었지만 16세의 나이에 요절하여 자식이 없다. 그래서 또 다시 입양으로 대를 이어야 했다.(...) 이번엔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이해승을 데려다 풍선군의 아들로 입양시켰다.[7] 단 청풍군 이해승의 자녀들부터는 진짜 친 자식들이다. 슬하에 아들 3명을 두었지만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제 치하 1943년에 자신보다 먼저 죽었고 그 자신도 1950년 6.25 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장손이 바로 그랜드힐튼 서울의 이우영 명예회장. 즉 풍선군의 후손이 현재 그랜드힐튼 서울 오너 일가이다.
[1] 왜 취소선 처리되었는지는 본문 참조.[2] 위 틀에 나와있는 대수(代數)와 차이가 나는데 누동궁의 종주 자체는 전계대원군부터고 전계대원군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은 영평군부터다. 그래서 1대 씩 차이가 난다.[3] 인조 이종 - 소현세자 이왕 - 경안군 이회 - 임창군 이혼 - 밀원정 이용 - 이항석(생부는 밀원정 이용의 형 밀풍군 이탄) - 이원형 - 이정현 - 이교응 - 이재철 - 풍선군 이한용.[4] 언제 입양이 되었는 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5]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선단4통.[6] 군호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豊山邑)에서 유래했다.[7] 1908년 청풍군(淸豊君)으로 책봉. 근데 눈여겨 볼 건 이미 이 전에 이해승의 직계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입양이 되었단 점이다. 실제로는 월산대군의 후손(...), 뭐 어때 고종의 5촌 조카 이지용은 아예 세종대왕 때 갈라진 광평대군의 후손인데 그래서 풍선군과는 실제 혈통 상으로 33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