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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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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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파일:풍양 조씨 종문.svg
豐壤 趙氏
풍양 조씨

관향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시조
조맹(趙孟)
중시조
조지린(趙之藺)
조신혁(趙臣赫)
조보(趙寶)
집성촌
강원도 춘천시
충청남도 아산시, 부여군
경기도 김포시, 포천시, 양주시, 화성시
경상북도 상주시
전라남도 강진군
황해도 해주시
인구
124,262명(2015년)
웹사이트
풍양조씨 대종회
풍양조씨참판공파 홈페이지
풍양조씨한산군파종중

1. 개요
2. 가문의 역사
3. 풍양의 위치
4. 5대파
4.1. 호군공파(護軍公派) / 회양공파(淮陽公派) / 금주공파(錦州公派)
4.2.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4.3.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5. 항렬
6. 조선 왕실의 인척
7. 인물
8. 기타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경기도 남양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조맹이다.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이조판서 조엄이 풍양 조씨였으며, 조선 후기 장동 김씨세도를 다툰 조만영·조인영 형제는 그의 손자다.

17세기 좌의정을 지낸 평장사공파 조익(趙翼)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의 조씨 중 가장 오래되었다.[원문][번역]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백제의 개국공신이라 전하는 직산 조씨 시조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할뿐더러 고증 가능한 기록이 고려 후기에야 등장하고, 같은 고려 초의 함안 조씨 시조는 한반도에서 자생한 조씨가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1]


2. 가문의 역사[편집]


바우(岩)라는 사람이 고려 개국의 공이 있어 태조 왕건이 조(趙)라는 성과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족보에 따르면 조맹은 후삼국시대 신라 풍양현[2]에서 태어나,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서 난세를 피하고 있었다. 당시 후고구려 군을 이끌고 후백제와 전쟁 중이던 왕건이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쳤다. 영해[3] 지방에서야 한숨돌린 왕건은 군사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사'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듣고 직접 찾아가 책사로 삼았다고. 당시 조맹은 70세였다는데, 마침내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 왕건에게 왕명으로 성과 이름을 받고 삼한개국공신 3등에 이름을 올린다. 남양주시 천마산에는 조맹이 왕건과 만났다고 전해지는 현성암(見聖庵)[4]이라는 유적이 있고, 조맹이 홀로 마셨다는 우물[獨井] 인근은 '독정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그 이후 선대에 대한 계보는 기록이 없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정리가 된다.[5][6] 조선시대엔 당색으로 서인 - 소론에 속했는데, 유명한 건 역시 세도정치 때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가 모든 것을 장악했던 당시, 효명세자의 장인인 조만영과 그 아우인 조인영을 중심으로 세를 일으켰다. 조인영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세도 정치의 근간이 되는 외척 자리를 놓고 안동 김씨와 격돌한 풍양 조씨는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안동 김씨에게 밀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헌종(조선), 철종(조선) 등이 하나같이 대를 잇지 못하면서 조 대비흥선대원군의 아들 익성군을 효명세자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한다. 풍양 조씨는 흥선대원군, 여흥 민씨 등과 손잡고 안동 김씨를 밀어내는 데 마침내 성공한다.[7][8]

自洪國榮專權以來, 凡戚畹當路者, 謂之勢塗, 其指勢塗也, 必擧其所居坊洞之名, 如明世宰輔之擧地以號而曰, 長沙·江陵·分宜·貴溪之類, 故金氏稱典·校洞, 趙氏稱磚洞, 至大院君居雲峴, 故稱雲峴, 非但勢塗爲然, 近世之稱大臣也亦然, 必以閤字, 配其洞名曰某閤, 如居會洞則曰會閤, 升洞則曰升閤。

홍국영이 집권한 후 외척으로 출세한 사람들을 세도가로 칭하였다. 그 세도가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그들이 거주한 방리와 동명을 명나라 때 대신들이 지명을 따라 장사(長沙)[9]

, 강릉(江陵)[10], 분의(分宜)[11], 귀계(貴溪)[12] 등으로 불렀으므로 김씨들도 전동(典洞)교동(校洞)으로 부르고, 조씨들은 전동(磚洞), 대원군운현궁에서 살았으므로 운현(雲峴)이라고 한 것이다.

비단 세도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근세의 대신들도 그렇게 하여, 반드시 「합(閤)」 자를 동명(洞名)에다가 붙여 ‘어디 합(某閤)’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회동(會洞)에 거주할 경우 회합(會閤), 승동(升洞)에 거주할 경우는 승합(升閤)이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1권 上 - 세도가의 칭호(勢塗稱號)


물론 안동 김씨들이 그냥 물러난 것은 아니다. 몇십 년에 걸쳐 집안간 알력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도가와 그 친척 문중 후손들은 당시 얘기를 어르신들에게 많이 듣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집안의 긍지는 물론 당시의 한에 대해 알게 된다고. 조선시대에만 과거 급제자 181명, 정승 7명, 홍문관 대제학 4명을 배출했다. 2015년 인구는 12만이다.


3. 풍양의 위치[편집]


풍양현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이다. 풍양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풍양출장소[13], 풍양중학교, 풍양운수, 풍양역[14] 등에 남아 있다.

백제고구려에 속했을 때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황양현(荒壤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한양군(漢陽郡)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이름을 다시 풍양현으로 고치고 양주에 속하게 하였다. 그후 현종 9년(1018년) 포주[(抱州): 지금의 포천(抱川)]로 다시 소속이 바뀌었다. 세종 9년(1427년)에는 다시 양주에 통합되게 되면서 현은 폐지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 당시 양주목에서 양주군으로 개편됐다. 1980년 4월 양주군 남부 지역을 분리하여 남양주군을 신설하였다. 1995년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하면서 남양주시가 되었다.


4. 5대파[편집]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에 정확히 몇 세대가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3개의 계파가 각자 추적이 가능한 인물을 1세로 받들어 세계를 이어오고있다.[15]

각 계파는 자신들이 한 할아버지(조맹)의 후손임은 확실히 인정하면서도 계보를 정확하게 따질 수 있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족보는 함께 만들면서도 각각 독자적인 항렬자를 사용한다. 같은 이유로 어느 계파가 큰집(종갓집)인지 알 수 없으므로, 후손이 가장 번창한 전직공계를 족보에 가장 먼저 기재하고, 그 다음 평장사공파, 상장군공파 순으로 기록한다.

여담으로 풍양 조씨 전직공계, 평장사공파(남원공파), 상장군공파의 족보의 표제가 모두 풍양조씨세보로 똑같은데, 표제 앞에 한자로 적힌 숫자가 있는 게 전직공계이고, 상중하로 적힌 게 평장사공파, 표제 중간에 상장군이 들어가 있으면 상장군파로 구별된다.

순혈도가 상당히 높은 씨족이기도 하다. 애초에 인구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그 얼마 안 되는 문중끼리 서로 연락이 잘 되었기 때문. 그래서 돈 주고 족보 사기 어려운 가문 중 하나였다.[16] 세도정치로 유명하니까 인구가 많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풍양 조씨인 사람을 생각보다 꽤 보기 어렵다.[17]


4.1. 호군공파(護軍公派) / 회양공파(淮陽公派) / 금주공파(錦州公派)[편집]


고려 중기 천화사전직(天和寺殿直)을 지낸 전직공(殿直公) 조지린(趙之藺)을 1세로 삼고 있다. 그래서 이 세 파를 통틀어 전직공계(殿直公系)라고 하기도 한다. 전직공의 후손은 아래 설명할 3개 파로 나뉘는데, 전직공의 6세손인 대언공(代言公) 조염휘(趙炎暉)[18][19]의 장남, 3남, 4남의 후손들이다.
대언공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상서공(尙書公) 조사공(趙思恭)은 1358년 신돈을 처치하려다 발각되어 곤장을 맞고 유배를 떠나던 도중 신돈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사망하였다. 딸만 넷 두어 남계 후손이 없다. 전직공계의 후손들은 자신이 무슨 파인지 설명할 때는 전직공파/전직공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아래 3개 파중에 하나라고 설명한다.

  • 호군공파(護軍公派)[20]: 조지린의 6세손인 조염휘(趙炎暉)의 장남 조사충(趙思忠)을 중시조로 한다. 상주시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1만 4천여 인이 있다.
  • 회양공파(淮陽公派)[21]: 조염휘의 3남 조신(趙愼)[22]을 중시조로 한다. 부여군을 비롯한 충청남·북도 곳곳과 춘천시를 비롯한 강원도 곳곳, 군산시를 비롯한 전라북도 곳곳에도 집성촌이 있다. 후손이 5만 8천여 인(2000년 기준)으로, 풍양 조씨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회양공 조신은 부인 고성 이씨(이암의 딸)와 슬하에 장남 안평, 차남 개평을 낳았다. 둘째 형인 상서공 조사공이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멸문지화의 위기가 닥치자 회양공 조신은 차남 개평과 함께 충남 부여로, 부인 고성 이씨는 장남 안평과 함께 친정아버지의 연고지였던 춘천으로 피신했다. 후에 조안평은 공조 좌랑까지 올랐다. 태조실록에는 '조안평의 모친 이씨는 일찍이 가장을 잃고 살면서 수절하고 아들을 훌륭히 교육시켜 벼슬에 나아가게 했다'는 내용과 '마을 어귀에 정표(旌表)하게 하여 효행의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때 부인에게 정려문이 내려졌으나 현재는 실전되었다.
  • 금주공파(錦州公派)[23]: 조염휘의 4남 조임(趙𥙛[24])[25]을 중시조로 한다. 포천시양주시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3천여 인이 있다.



4.2.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편집]


충렬왕 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조신혁(趙臣赫)을 1세로 삼고 있다. 화성시, 해주시, 아산시, 강원도 곳곳, 동래구, 사하구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1만 3천여 인이 있다. 과거 명칭은 남원공파였는데, 중시조의 증손자인 남원도호부사를 지낸 조계팽(趙季砰)[26]의 후손이 현달하여 족보도 조계팽의 후손을 중심으로 편찬하고, 조계팽의 두 형에 대한 기록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원공파라고 부르는 어르신들이 많다.

세부적으로 참의공파(參議公派)와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나누기도 한다. 애당초 평장사공파가 워낙 후손이 적어서 이 정도로 세세하게 구분하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지만...
  • 참의공파는 조계팽의 차남으로 공조참의에 추증된 조지부(趙之孚)를 파조로 삼는다.
  • 참판공파는 조계팽의 삼남으로 공조참판에 추증된 조지진(趙之縝)을 파조로 삼는다.
    • 조지진의 후손들은 해주시, 화성시, 수원시, 온양시, 평택시, 부천시, 강서구에 세거하고 있다. 평장사공파의 약 13%를 차지한다. 들목 조씨라고도 한다.[27]

4.3.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편집]


고려 중기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조보(趙寶)를 1세로 삼고 있다. 강진군안악군에 집성촌이 있다. 후손 3천여 인이 있다.[28]

상장군공파는 사연이 특이하다. 이 파는 조보의 증손자 조함(趙瑊) 대까지는 본관을 풍양으로 썼는데, 조함의 첫째아들 조수(趙琇)의 후손들은 도강(강진의 옛 명칭)에 뿌리내리고, 둘째 아들 조천규(趙天圭)[29]의 후손들은 안악에 뿌리내리면서 이들 형제부터 도강을 본관으로 쓰게 된다. 정조강진현감으로 부임한 회양공파 조홍진(趙弘鎭)이 강진의 호적대장을 보고 이 지역에서 세거하는 조씨 일족이 같은 일족임을 안 뒤 이를 예조에 통보하였고, 임금의 명으로 풍양으로 본관(本貫)을 되돌렸다.

여담으로 강진군에서 조씨를 발견하면 열에 아홉은 풍양 조씨(=강진 조씨)이다.


5. 항렬[편집]


앞서 말했듯이 5대파는 서로 소목(昭穆)를 가릴 수 없다. 전직공과 평장사공과 상장군공 각자의 인물이 시조로부터 가계가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물론 몇 대 후손인지조차도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파별로 항렬을 따로 쓸 수밖에 없다.

전직공계 :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에,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뒤에 쓰인다. 천간을 이용해 항렬을 제정하였다.
전직공계(殿直公系)
24세
동(東)



34세
용(用)
25세
구(九)

35세
원(元)
26세
남(南)

36세
상(商)
27세
연(衍)

37세
형(衡)
28세
성(誠)

38세
무(茂)
29세
희(熙)

39세
범(範)
30세
용(鏞)

40세
강(康)
31세
신(新)

41세
재(宰)
32세
중(重)

42세
종(鍾)
33세
규(揆)

43세
주(湊)

평장사공파 :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에,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뒤에 쓰인다. 천간+지지오행을 결합하여 항렬을 제정하였다.[30]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甲木 17세
만(萬)
子水 31세
순(淳)
午火 18세
년(年)
卯木 32세
경(卿)
己土 19세
희(熙)
丁火 33세
기(祺)
申金 20세
재(載)
戌土 34세
성(成)
子水 21세
돈(敦)
辛金 35세
창(彰)
甲木 22세
묵(默)
壬水 36세
중(重)
丙火 23세
병(柄)
寅木 37세
연(縯)
己土 24세
기(紀)
丁火 38세
직(稙)
庚金 25세
강(康)
己土 39세
범(範)
癸水 26세
규(揆)
庚金 40세
용(鏞)
寅木 27세
연(演)
子水 41세
승(承)
丁火 28세
행(行)
乙木 42세
욱(旭)
辰土 29세
진(振)
丁火 43세
영(寧)
申金 30세
동(東)
戊土 44세
무(茂)

辛金 45세
재(宰)
壬水 46세
정(程)
乙木 47세
태(兌)
丁火 48세
우(宇)
丑土 49세
건(建)
申金 50세
보(輔)

상장군공파 :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에,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뒤에 쓰인다. 천간을 이용해 항렬을 제정하였다.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24세
갑(岬)



34세
진(陳)
25세
일(日)

35세
건(乾)
26세
병(昺)

36세
천(遷)
27세
종(宗)

37세
정(正)
28세
성(晟)

38세
무(武)
29세
기(玘)

39세
회(回)
30세
강(慷)

40세
용(庸)
31세
상(庠)

41세
신(薪)
32세
성(聖)

42세
영(郢)
33세
채(蔡)

43세
규(葵)

상장군공파 항렬은 2005년에야 공식적으로 정해졌기에 대부분 이름을 제각각 지었고, 지금도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6. 조선 왕실의 인척[편집]




7. 인물[편집]




8. 기타[편집]


'조'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외국인이 한국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풍양 조씨 드립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조니 뎁, 조 바이든 등.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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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趙氏在東方者。惟我豐壤爲最舊。他處之趙皆後出。[번역] 동방에 있는 조씨(趙氏) 중에서는 오직 우리 풍양(豐壤)이 가장 오래되었고 다른 곳의 조씨들은 모두 뒤에 나왔다.[1] 다만 조익의 기록은 후삼국시대 이후를 기준으로 한 것이라 그 이전에도 한반도에 조씨 가문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조익이 저술한 내용도 확실한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고 직산 조씨가 실제로 풍양 조씨보다 늦게 등장했더라도 백제의 성씨 직산 조씨가 원래 성씨가 없다가 고려 초중기의 토성분정을 통해서 성씨를 가졌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사칭이라 단정짓기는 어렵다. 현대에 출토된 통일신라 초기의 금석문을 통해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검증된 천안 전씨 족보에 직산 조씨 시조 조성(趙成)이 백제의 십제공신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같은 한국의 백제계 성씨인 마씨(馬氏)는 6세기 중반 백제 성왕 시기에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720년)에 처음 확인되고 전씨(全氏)는 7세기 금석문(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73년)에서 백제 유민 집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전씨(全氏) 일족이 확인된다.[2] 현 남양주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 그중에서도 조맹이 태어난 곳은 진건읍 송능리이다.[3] 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 일대[4] 見은 보통 '견'으로 읽으나 '뵈다/뵙다'의 뜻으로 쓰일 때는 '현'으로 읽는다. 예시로 알현(謁見)이라는 단어가 있다.[5] 고려 중기까지의 기록은 전하진 않지만, 고려 말에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여럿 있고, 내로라하는 유력 가문들과 사돈을 맺은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고려 후기부터 힘을 떨치던 신흥 귀족가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조선왕조실록에도 시조 조맹이 고려의 재상이라 나와있다. 단, 한양 조씨의 시조라 기록되어있는데,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본관이 시조의 거주지 개념이 아니라 지금의 본적과 유사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본관 항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내가 원래 어디 김씨인데 여기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여기 김씨로 바꾸겠다가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서울에서 대대로 살던 풍양 조씨 일족이 있었고,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은 이 일족을 '서울에서 대대로 살았으니 한양 조씨다'라고 인식하고 이 일족의 맨 윗대 조상을 한양 조씨의 시조로 기록한 것이다.[7] 여담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유홍준은 세도 정치 시기 풍양 조씨를 딱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책 내용 중에 헌종이 외조부 조만영이 사망한 것 때문에 개혁 의지를 잃었다던지... 실제로 이하전 등 안동 김씨 세도에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여러 종실이 풍양 조씨 세력의 비호를 받았다.[8] 사실, 사학계에서도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시가타 히로시를 비롯한 초기 연구자들이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찾다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집권이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 이 일파가 잘못 정치했으므로 나라가 망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린 뒤 연구를 거기에 끼워맞췄고, 그 결과 우리가 아는 세도정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특정 일파가 정치를 장악하던 것은 조선시대 내내 있었던 현상인데 우리가 세도정치로 아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 사학계의 다수설이다. 연구 결과 세도정치라고 불린 시기가 그다지 백성들이 살기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9] 명나라 때 대신 이동양(李東陽)[10] 장거정[11] 엄숭[12] 명나라 때 대신 하언(夏言)[13] 다만 현재의 풍양출장소는 옛 풍양현과는 다르게 진건읍이 속하지 않고 진접읍ㆍ오남읍ㆍ별내면ㆍ퇴계원읍ㆍ별내동이 속한다.[14] 2026년 예정.[15] 바꿔서 말하자면 억지로 없는 조상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보통 양반 가문의 경우 가문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시조삼아서 그를 고관대작으로 소개하고, 그 인물로부터 시작하는 정확한 계보가 존재하는데, 풍양 조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상을 알 수 없으면 알 수 없는 대로 냅두고, 고증 가능한 사람부터 1세로 족보에 기록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는 학자인 에드워드 와그너는 한국의 족보 중 풍양 조씨 족보가 가장 신뢰도가 높다고 평했다.[16] 계보를 고증할 수 없는 사람은 모두 별보(別譜)에 기록되었다. 부자관계를 증명하지 못해 별보에 기록된 경우도 많다.[17] 사실 세도정치라는 것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 교육자들이 조선 멸망의 원인을 세도정치로 돌렸는데, 그것이 그대로 교과서에 기록되면서 대중들에게 세도 가문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나 특정 일파가 권세를 쥔 경우가 늘 있었을 뿐더러, 풍양 조씨는 신 안동 김씨, 반남 박씨, 연안 이씨, 달성 서씨, 풍산 홍씨 등과 더불어 그저 평범한 권세 가문 중 하나였을 뿐이다. 또, 당대 풍양 조씨 집안이 수천 가구가 있지만 권세 가문은 조엄의 후손인 몇 가구 뿐이었고, 가난한 풍양 조씨 집안도 많았다. 이는 풍양 조씨뿐만이 아니라 모든 가문의 공통점이다.[18] 고려사엔 趙炎輝로 기록되어있다. 부인은 밀양 손씨 손원계(孫元桂)의 딸이다.[19] 삼남 조신이 고성 이씨 이암의 딸에게 장가간 관계로 조염휘의 이름이 고성 이씨 족보에도 기록되어있는데, 이에 따르면 조염휘는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고 기록되어있다.[20] 호군(護軍)은 고려 때 정4품 관직으로, 중앙군 소속 지휘관이다. 원래 호칭은 장군이었다가 공민왕 때 호군으로 개칭되었다.[21] 회양부사(淮陽府使) 관직을 지냈다. 회양은 지금의 강원도 회양군이다.[22] 원래 사렴(思廉)이었다가 신(愼)으로 개명했다. 아래 조임/조덕린이 동일인물인 것인지 불분명한 것과는 다르게 조신/조사렴은 동일인물임이 확실하다. 조선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조신에게서 글을 배웠다 한다.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이었던 조만영, 조인영 형제가 조신의 후손이다.[23] 지금주사(知錦州事) 관직을 지냈다. 금주는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이다.[24] ⿰示任. 유니코드 확장한자이다. 1970년 이후에 발간된 족보에는 袵(⿰衣任)으로 나와있는데, 당시엔 이 글자를 타자로 입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5] 풍양 조씨 족보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덕린(德麟)이었다가 임(𥙛)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다만 이 부분은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데, 최초 발간 족보였던 신해보(1731)에서는 조덕린과 조임이 동일인물이 아닌 부자관계로 기록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조염휘의 4남이 조덕린, 조덕린이 나광만(羅光萬)의 딸에게 장가가서 얻은 외아들이 조임이다. 또한 강릉 김씨 족보에서는 19세손 김지복(金之福)의 둘째 딸이 조임에게 시집간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그 주석에 豊壤人判事父直提學德麟祖右代言炎暉...(풍양 조씨이고 판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직제학 조덕린이고 조부는 우대언 조염휘이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로 보아 정황상 조임은 조염휘의 아들이 아닌 손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현재 족보에서는 조덕린과 조임이 동일인물이고, 첫째 부인이 나광만의 딸, 첫째 부인을 잃은 후 다시 장가들어 얻은 둘째 부인이 김지복의 딸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26] 포천시 출신이나 결혼 후 처가가 있는 광주하도송라촌(廣州下道松蘿村), 즉 지금의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송라리, 원리 일대로 거처를 옮겼다.[27] 조지진은 외조부(즉, 조계팽의 장인)에게 아들이 없어서 외손봉사를 하기 위해 광주하도송라촌에 남았다. 들목 조씨라는 이름은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의 원래 이름인 들목에서 따온 이름이다.[28] 이들 3천 명 중 안악군 출신의 풍양 조씨는 1%, 즉 30명도 안 된다. 집성촌이 북한에 있고, 1.4 후퇴 때 내려온 소수만이 집계되었고, 족보도 이들의 직계 외엔 기록이 거의 없는 등 굉장히 부실한 편이다. 다만 국조방목에 안악에 거주하는 강진 조씨 중 무과에 급제한 이가 많은데, 강진군의 강진 조씨보다 후손이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29] 초명 조규(趙珪)[30] 여담으로, 청송 심씨 26~35세손 항렬 규칙이 이와 같다.[31] 순우리말 이름으로 한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