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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馮雲山
병음: Feng Yunshan, 펑윈샨
(1815 ~ 1852. 6. 10)

1. 개요
2. 생애 초반
3. 사상을 전파하다
4. 배상제회
6. 죽음
7. 평가


1. 개요[편집]


태평천국의 인물이다. 정식 칭호는 전도부군사남왕(前導副軍師南王). 흔히 남왕(南王)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초반[편집]


풍운산은 광둥성 화도의 한 마을에서 출생했다. 조상은 광둥성 출신의 객가였고 화현(花縣)으로 흘러들어 왔다고 한다. 홍수전처럼 나름대로 교육을 받았고 마을 서당 선생노릇을 하고 틈틈히 광저우에서 필경사 노릇을 하며 지냈다.
과거 시험을 몇 번 치렀지만 낙방했는데 이 역시 홍수전과 비슷했다.[1]

홍수전이 열병을 앓은 후 괴상한 사상을 만들 때 홍인간과 같이 홍수전에 동조하여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완전히 빠져들어서 틈틈히 친척들에게 전도를 하고 다녔다.


3. 사상을 전파하다[편집]


하지만 고향 땅에서는 홍수전의 과격한 사상 및 행동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다지 세력이 크지 못했다. 그러자 풍운산, 홍수전 및 다른 풍운산의 두 친척들은 1844년 4월 화도를 떠났다.

1844년 봄, 풍운산은 홍수전 및 자신의 두 친척과 광동성의 곳곳을 떠돌면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34일간 160여 km를 나아갔지만 그들이 파는 붓과 벼루를 싸게 사기 위한 가짜 신도만 50명 가량 생길 뿐 성과는 미미했다. 하지만 천지회나 광동에 널린 이민족같이 치안을 방해하는 요소의 위협 없이 무사히 나아가면서 신앙은 더욱 강화됐다.

큰 성과는 없었지만 여기서 굴하지 않고 풍운산은 홍수전과 둘이서 서쪽 광서성으로 나아가, 계평(桂平) 지역까지 걸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최종 목적지는 광서의 귀현(貴縣) 사곡촌(賜谷村)이었다. 이 곳에는 홍수전의 외가인 왕씨 일가가 많이 살았고 특히 홍수전의 계모쪽 사촌형인 왕성균(王盛均)이 살았기 때문에 향했다.

하지만 당시 광서성은 민속신앙의 본산이라 할 정도로 다양한 신앙이 존재했고 그들의 생각만큼 전도는 쉽지 않았다. 어느정도 머물다가 홍수전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풍운산은 남았는데 여기서 그의 활약이 시작됐다.

풍운산은 절망하지 않고 주강(珠江) 일대를 떠돌며 전도를 계속했고 자형산(紫荊山) 일대의 금전촌(金田村)에서 근거지의 확보에 성공했다. 성공의 비결은 다음과 같았다.

이곳은 가난한 광서성에서도 빈민에 속하는 객가가 많이 살았고 묘족, 좡족과 같은 이민족 역시 많이 살고 있었다. 풍운산은 설득력과 친화력이 좋았는데, 이것을 십분 발휘하여 동족인 객가를 포섭했다. 또한 풍운산은 먼 친척에 좡족이 있어서 그들의 언어를 할 줄 알아 설득이 용이했다고 한다.

거기에 당시 광서의 상황은 복잡했다. 광서의 토착민들은 다양한 민속신앙을 믿었고 그것을 활용하여 굴러들어온 돌인 객가인을 견제하고 훼방을 했으며[2][3] 이민족들 역시 취급은 좋지 못했다. 그런데 풍운산이 말하는 사상은 모두가 상제(上帝)의 자녀이며 서로가 아껴야 한다고 하니 자연히 물질적, 정신적으로 피폐한 이들의 안식처가 됐다. 또한 풍운산은 고향에서 홍수전이 한 것처럼 기존 사상을 과격히 깨부수지 않고 현세의 복이나 질병의 치료, 내세의 평온 같은 기복신앙적 요소를 설파하여 효과는 더욱 컸다.

또한 청나라는 지방 관리들에 대해서 평점을 엄히 했는데, 그들 입장에서 외국인들의 조계가 있는 상하이나 물류와 인적 교류가 많은 항저우, 쑤저우, 그리고 광저우가 있는 광둥성은 신경써야 할 곳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낙후된 광서성은 사소한 분쟁이나 다툼도 신경 쓰는 이도 없었고 조용히 묻어버리기에 좋은 곳이라 여겨져서 객가와 토착민들의 갈등, 천지회의 이동, 종교의 포교 등도 방치됐다.

결과론적으로 풍운산은 약 3,000명을 포섭하는데 성공했고 특히 훗날 활약하는 양수청소조귀가 그 중에 포함돼 있었다.
풍운산은 새로운 종교의 이름을 배상제회(拜上帝會)라 칭했다.


4. 배상제회[편집]


홍수전은 풍운산이 만든 조직을 보고 흡족해했고 풍운산은 스스로를 2인자로 칭하며 조직은 그대로 홍수전이 가지게 되었다. 이후 풍운산은 선전 및 선동 담당으로 활약했다.

약 3,000명이 된 배상제회는 거칠 것이 없었는지 명성을 위하여 다음 목표를 감왕묘(甘王墓)로 삼았다. 감왕은 광서의 상주(象州) 사람들이 섬기는 토지신인데 상주(象州) 출신이며 남한을 정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홍수전 무리는 그런 걸 상관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이 감왕묘를 때려부쉈는데 당시 사람들이 섬기는 신앙의 대상을 부수고도 천벌을 받지 않자 자연히 배상제회의 이름이 높아져 갔다.

이 일이 있은 후 홍수전은 더욱 기세등등하여 주변의 사당들을 죄다 부수고 다녔는데 당연히 이는 지방 토호 세력에게 눈엣가시 같은 일이었다. 계평의 토호인 왕작신(王作新)은 행동에 나서서 무리를 이끌고 풍운산을 잡아서 감금시켰다. 그런데 배상제회 역시 기세가 올라서 오히려 풍운산의 사촌형 노육(盧六)[4]이 여러 명을 이끌고 풍운산을 구출해 왔다.

왕작신 역시 이에 굴하지 않고 계평현 아문에 신고하여 풍운산과 노육은 잡혀가는데 사유는 불법집회, 혹세무민, 사당의 파괴 등이었다.[5]

풍운산은 스스로를 변호하며 있었고 홍수전 역시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기에 계평의 현령이나 양광총독[6]에게 탄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노육은 당시 열악한 감옥에서 사망했다.

또한 홍수전이 총독을 만나느라 잠시 고향으로 간 사이 조직은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 때 이것을 구한 인물은 양수청소조귀였다.

1848년 3월 3일, 양수청은 갑자기 쓰러지며 하느님이 빙의했다고 말하며 천부하범(天父下凡)을 시전했고 소조귀는 천형하범(天兄下犯)을 시전하며 예수가 빙의했음을 말했다. 이는 신내림과 유사한 짓으로 여겨진다.[7]

이를 통하여 흔들리는 조직을 다잡을 수 있었고 숯구이 조직 수령 출신의 양수청이 숯쟁이 신자들이 숯을 팔 때마다 일정한 분량을 저축하여 뇌물로 전달토록 해서 풍운산은 고향인 화현으로 압송되며 풀려났다.

풍운산은 고향으로 압송돼서 초여름 쯤에 도착했는데 홍수전은 봄에 광저우로 풍운산 석방을 탄원하러 간 터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압송되는 와중에도 담당하는 관리 2명을 설득하여 신자로 만드는 등 말빨은 아직 살아 있었으나 앞서 말한 양수청 및 소조귀의 활약으로 그의 입지는 급격히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윽고 1849년에 다시 고향에서 만난 풍운산과 홍수전은 10월경에 금전촌으로 돌아가는데 이 때 위창휘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쯤 석달개 역시 가입하여 조직 간부를 모두 갖춘 배상제회는 행동에 나선다.


5.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편집]


1850년, 상황은 급격히 흐르고 있었다. 당시 열악한 치안상 향촌에서 자체 운영하던 자경단과 배상제회의 충돌이 빈번했고 지방 토호들의 압박으로 신자들이 감옥에 가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발하듯 태평천국 역시 청나라를 요괴라고 묘사하며 긴장감은 고조됐다. 이에, 홍수전은 4월에 용포를 착용하고 7월에 동원령, 10월경에는 경계태세의 확립, 10월 29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서 군사집단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여기에 풍운산도 동조하여 군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신호 체계와 부대 단위 설치에 기여했는데 자세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단위를 편성하여, 표식과 깃발을 통해 각 부대를 구분했다. 오장(伍長)이 4명을 통솔하고, 양사마(兩司馬)가 오장 5명 및 그 휘하의 부하들을 합쳐 25명을 통솔하며, 양사마는 가로 세로 75cm의 깃발을 들게 했다. 양사마 4명 및 그 부하를 합친 104명은 조금 더 큰 깃발을 가진 졸장(卒長)의 명령을 받고, 이러한 등급은 여수(旅帥), 사수(師帥), 군수(軍帥)에까지 이르게 되어, 군수는 휘하에 총 1만 3,155명을 이끌었다. 군수까지는 훗날 태평천국이 세력을 떨친 후 지방을 통치하는 향관(鄕官)의 역할도 하게 된다.

이후에는 장군(將軍), 총제(總制), 감군(監軍) 등의 단위도 설치됐지만 당시 태평천국의 인원 규모는 약 20,000명을 넘기지 못했다.

각각의 단위는 서로 다른 색깔의 깃발을 사용하여 구분할 수 있게 하고, 각각 계급에 따른 표식과 심지어 암호명까지 서로 주어졌다. 풍운산은 야간의 비상사태에 사용할 소리 암호까지 고안했다.

이 방법은 유학을 공부한 적 있는 풍운산이 《주례》에서 따온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머리가 커진 양수청소조귀는 쓸데없는 행동이라 비판했다고 한다.[8] 또한 각각 단위 부대는 서로 다른 색깔의 삼각 깃발을 사용하여 구분했고 삼각 깃발 안에는 굵은 글씨로 그들의 근거지가 적혀 있었다.

당연히 이걸 가만히 두고볼 수 없으니, 청나라도 토벌에 나섰다. 다만 1850년 12월 8일의 장계를 보면 태평천국의 성질에 대해서 아직 파악은 못하고 단순히 기독교의 한 무리라고만 인식한 걸로 보인다.[9]1850년 12월, 심주(潯州)[10] 협부장(協副將) 이전원(李殿元)이 평남현(平南縣) 사왕우(思旺圩)[11]에 와서 화주(花州) 산인촌(山人村)[12]에 있는 홍수전 및 그의 가족이 사는 곳을 포위했다. 이곳은 태평천국의 네 군데 근거지 중에서도 가장 험지에 있었다. 풍운산과 홍수전은 거기에 머무르는 중이었는데 은밀히 뒷길을 통하여 지원을 요청했고 양수청은 금전촌에서 지원군을 보내 청군을 물리쳤다. 이때 관헌과 관병 50여 명이 살해당했다. 위기를 넘긴 홍수전과 풍운산은 금전촌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에 청나라는 총병(總兵) 주봉기(周鳳歧)를 사령관으로 하고, 이극탄포(伊克坦布)를 선봉장으로 한 3,000여 명의 토벌군을 보냈다. 하지만 1월 1일, 금전촌 전투에서 선봉이 풍운산, 석달개, 홍수전의 중군을 치던 중, 채강촌에서 양수청과 소조귀의 군사들한테 양옆으로 공격받아 이극탄포를 포함한 군관 10명과 병사 300여 명이 전사했다.그리고 배상제회는 승전을 홍수전의 생일과 함께 축하했다.

결국 1851년 1월 11일, 홍수전과 배상제회는 20,000여 명의 규모가 되어 금전촌에서 마침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


6. 죽음[편집]


반란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서 영안(永安)으로 향했는데 풍운산은 이 때 후군주장(後軍主將)을 맡아 군을 인솔했고 영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청나라는 영안을 공격했는데 이 때 성 외곽의 전투에서 소조귀가 중상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부상을 계기로 소조귀의 천형하범(天兄下犯)[13]이 끊어지는데 이것을 계기로 천부하범(天父下犯)[14]을 계속하던 양수청에게로 권력의 추가 쏠렸고 안 그래도 약해져가던 풍운산의 입지는 떨어지게 되었다.

1851년 12월 17일, 홍수전은 소조귀의 상태에 대해서는 언급 없이 각 왕들을 임명했는데 풍운산은 남왕(南王)으로 봉해지고 칠천세(七千歳)를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영안성을 탈출한 태평천국군은 다시 행군하여 흥안(興安)을 무혈점령하고 그곳의 영거운하를 활용하여 이강(漓江)과 상강(湘江) 수계를 건너 전주(全州)로 향했다.

5월 24일, 전주에 도착한 태평군은 성이 튼튼한 것을 보고 우회하려고 했으나 공교롭게도 청군이 쏜 대포 한 발이 고급 가마에 명중했다. 하필이면 그 가마에 탄 사람이 풍운산이었고 이에 분노한 태평천국군은 총공격을 퍼부어서 6월 2일에 성을 점령하고 2일 간 살육을 벌였다.[15][16]

성을 점령한 후 태평천국군은 머물지 않고 다시 출발했는데 긴 원정으로 지친 나머지 정찰에 소홀했고, 또한 전주성을 쉽게 점령하여 청나라를 얕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태평천국군은 진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 장수인 강충원(江忠源)이 이끄는 매복 병력을 사의도(蓑衣渡)[17]에서 만났다.

당시 태평천국군은 상강의 물길을 따라서 호남성을 향해 이동했는데 강굽이를 지나 얕은 저수지 부근에 다다르자 강충원이 깔아놓은 나무 토막에 배가 부딪혀서 정체되고 혼란한 틈을 탄 기습에 마주했다. 이 습격의 주력인 강충원의 군대가 상강의 서쪽에서 공격하는 동안 청나라의 군대가 강 근처의 퇴로를 끊지 않아서 포위에 비하면 피해는 작았으나 약 10,000명을 잃고 300척 정도의 배를 잃었다. 또한 풍운산이 전사했으며 주력군은 상강 동안으로 피신했다.


7. 평가[편집]


홍수전이 없는 동안 태평천국의 기초가 되는 배상제회의 신도들을 모집한 인물이다. 특히 선전과 설득에 능력이 좋았는데 다양한 이질적 집단이 투쟁하던 광서에서 많은 인원을 모집하고 세력을 불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홍수전과 가까운 편이라 그의 권위 확보에 도움이 됐지만 그의 죽음은 양수청과 소조귀의 권력 강화를 불러왔고 훗날 천경사변이라 불리는 피비린내나는 내전의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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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삶의 공통점 때문인지 홍수전과 풍운산은 죽이 잘 맞았는데 고종사촌 관계라는 설도 있다.[2] 토착민과 객가간의 집단 패싸움인 계투가 흔했고 천지회가 광서로 많이 옮겨와 싸움에 영합하여 상당히 혼란한 상황이었다.[3] 아편전쟁의 여파로 청군이 광동에 많이 주둔하여 활동이 어려웠다. 또한 천지회 중 해적 노릇을 하는 자들에게 장강 하류가 흐르는 광동에 청나라 함선 및 외국 배의 출현은 좋지 않은 요소였고 물이 얕고 강이 작은 편인 광서로의 이주가 시작됐다.[4] 확실하지는 않지만 계평의 아문에 남아 있는 풍운산의 진술서에 따르면 사촌이다. 원래 금전촌 출신인데 아버지 대에 자형산 일대의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정착한 인물이며 객가다.[5] 청나라의 구성민족인 만주족은 수가 많지 않아서 한족이 뭉치거나 하는 일에 대단히 민감했다.[6] 광둥성, 광서성을 모두 다스리는 총독[7] 광서성은 무당이나 신내림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8] 양수청과 소조귀는 개인의 지능과는 별개로 태평천국 내에서도 학력이 없는 축에 들어간 것도 영향을 줬다고 한다.[9] 아편전쟁의 결과 많은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포교하여 신자가 광동, 광서에 상당히 존재했다.[10] 계평(桂平)의 당시 명칭. 심주는 당시 계평현(桂平県)・평남현(平南県)・무선현(武宣県)・귀현(貴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현재는 계평현만이 남아서 구이강(贵港)시의 현급시인 구이핑(桂平)으로 남아있다.[11] 현재 구이강(贵港)시 핑난현(平南県) 시지에향(思旺乡)[12] 현재 구이강(贵港)시 핑난현(平南県) 후아왕(花旺). 핑난현에서 북쪽 방면인데 앞에는 오강(呉江)이 흘러서 계곡이 있었고 뒤쪽은 절벽이었다고 한다.[13] 예수가 소조귀의 몸에 빙의하여 계시를 전한다는 것[14] 야훼가 양수청의 몸에 빙의하여 말을 전하는 것[15] 당시 청나라 추격군은 영안에서 패배를 당한 후로 기세가 사그라들었고 성을 구원하지 않았다.[16] 풍운산이 이끄는 부대 대부분이 광신적인 군관들이라 더더욱 분노하여 성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태평천국군이 벌인 첫 살육이었다.[17] 전주(全州)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육로로 약 5km 가량 떨어져 있다. 25km 정도를 강으로 나아가면 호남성으로 진입이 가능한 요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