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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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브루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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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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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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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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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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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9대



스페인의 축구감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Francisco_Bru_Sanz.png

이름
프란시스코 브루 산스
Francisco Bru Sanz

출생
1885년 4월 12일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사망
1962년 6월 10일 (향년 77세)
스페인국 말라가
국적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신체
불명
직업
축구선수(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FC 인테르나시오날 (1902~1906)
FC 바르셀로나 (1906~1911)
RCD 에스파뇰 (1911~1915)
FC 바르셀로나 (1915~1917)
감독
스페인 대표팀 (1920)
RCD 에스파뇰 (1924~1926)
클루브 후벤투드 아스투리아나 (1927~1928)
페루 대표팀 (1930)
레알 마드리드 CF (1934~1936)
지로나 FC (1937~1939)
레알 마드리드 CF (1939~1941)
그라나다 CF (1941~1943)
레알 사라고사 (1948~1949)
국가대표
불명 (카탈루냐 / 1904~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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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생활
2.2. 심판, 감독 생활
3. 수상
3.1. 클럽
3.2. 감독



1. 개요[편집]


스페인축구선수 출신 심판, 감독.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레알 사라고사 감독을 맡았다.


2. 생애[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1885년에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브루는 1902년 16살의 나이에 바르셀로나의 지역 팀 FC 인테르나시오날에서 입단했다. 이때부터 카탈루냐 지역 대회에 참가하여 공식 선수로 참가한 그는 친선 경기였던 데뷔전에서 센터 포워드로 출전, 해트 트릭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공식 경기에 데뷔했을 때 브루의 팀 인테르나시오날은 에스파뇰에게 6대0으로 대패했다. 그러나 1904년 코파 토리노에서 우승하여 이름값을 높이게 되었다. 인테르나시오날에 있을 때에는 주로 공격수와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1906년 FC 바르셀로나로 옮기고 나서는 주로 수비수로 활약하였다.

바르사에 입단한 뒤 수비수로 변신한 브루는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캄피오낫 데 카탈루냐 3연패에 일조했고, 1910년 첫 코파 델 레이 우승에도 빼놓을 수 없는 기여를 하여 파울리노 알칸타라, 잭 그린웰 등과 함께 바르셀로나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끌었다. 이후 1911년에 이웃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로 건너가서 활약을 이어간 브루는 1915년에 또 바르사로 돌아와 1917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브루는 스페인 대표팀에서 활약한 적은 없지만 카탈루냐 대표팀에서 활약한 적은 있다. 최소 5회 정도는 참가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골 기록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2.2. 심판, 감독 생활[편집]


브루는 현역 은퇴 이후 심판으로도 활약했다. 1916년과 1917년 두 차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 주심을 맡을 정도로 탁월한 판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를 살았던 인물들의 후일담에 따르면 브루는 처음 주심을 보던 날 경기 전에 라커룸에 들어와 권총을 뽑아들고 "난 조용한 경기를 원한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권총을 허리춤에 찬 채로 경기를 주관했다. 이는 당시 빈번했던 주심 판정에 대한 반발 행위를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내 판정이 하는 이야기를 못 알아들었나? 그러면 권총으로 이야기해주지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주심을 맡은 뒤 브루는 카탈루냐 지역 대표와 카스티야 지역 대표 간의 라이벌 경기 주심을 맡기도 했다.

심판으로 활동하던 브루는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에서 스페인 국대 감독으로 감독 생활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비록 개최국 벨기에에 은메달을 내주긴 했지만 스웨덴(2-1 승), 이탈리아(2-0 승), 네덜란드(3-1 승)를 연파하고 거둔 위업이었다. 당시 브루는 주젭 사미티에르, 리카르도 사모라, 펠릭스 세수마가 등의 바르사 선수들을 비롯해 스페인 축구계의 초반 분위기를 주도했던 아틀레틱 클루브피치치바스크 출신 선수들도 공평하게 대표팀에 소집해 철저히 실력 위주 인선으로 또 한 번 신망을 높였다. 올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에스파뇰, 후벤투드 아스투리아나, 페루 대표팀 등을 이끌었다. 페루 대표팀을 이끌고 초대 월드컵 13개국 본선에 진출해 개최국이자 우승팀 우루과이, 루마니아와 함께 3조에 속했으나 그를 기다린 것은 2전 전패였다.

그리고 1934년, 고국으로 돌아온 브루는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에 취임했다. 그는 리카르도 사모라주젭 사미티에르 등 전 바르사의 주축 선수들을 레알 마드리드로 합류시켜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끈다. 1934년에는 옛 동료이자 전 바르사 감독인 잭 그린웰이 이끌던 발렌시아를 상대로 결승에서 2-1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36년에 또 코파 델 레이 우승을 할 당시에는 결승 상대가 친정팀인 바르사였다, 이 경기는 스페인 내전 전에 열린 마지막 엘 클라시코였다. 발렌시아의 홈인 메스타야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전에는 2만 2천여 명의 관중이 모였다. 당시 입장권은 6페세타였는데 암표상까지 등장할 정도로 열기가 높았다. 당시 암표 값은 실제 티켓 값의 10배에 달했다는 후문이었다.

이때 레알 마드리드는 경기시작 6분 만에 터진 에우헤니오의 골로 쉽게 앞서갔다. 6분 뒤에 레쿠에의 추가골이 터져 일찌감치 쐐기를 박는 듯했다. 바르사는 전반 29분 에스콜라의 골로 불씨를 되살렸다. 에스콜라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결정적인 슈팅을 연결했으나 당대 최대의 골키퍼인 사모라가 믿기지 않는 선방으로 이를 처리했다. 신(神)이라는 뜻의 '다비노'라는 별명으로 불린 사모라는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라 리가가 중지되어서 카탈루냐로 건너가 지로나 FC의 감독을 맡아 당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팀들이 구성하던 리가 메디테라니아 대회에 참가했다. 1939년에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에는 레알 마드리드로 돌아왔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1941년에 그라나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라다나에서는 2년간 감독생활을 했고, 1948년부터 레알 사라고사 감독직을 맡은 뒤 1년 만에 물러났다.

브루는 1962년 6월 10일 스페인 남부의 말라가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엘 클라시코 역사 뿐만 아니라 스페인 근대 축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3. 수상[편집]



3.1. 클럽[편집]




3.2.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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