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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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배우자
프란체스카 도너 리
Francesca Donner Rhee


파일:external/www.pa.go.kr/L_FDR_01.jpg

출생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스라이타니아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現 오스트리아 공화국 )
사망
1992년 3월 19일 (항년 91세)[1]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장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2]
활동기간
초대 대통령 배우자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제2대 대통령 배우자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제3대 대통령 배우자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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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루돌프 도너 (? ~ 1922)
어머니 프란치스카 게르하르틀
형제자매
3녀 중 막내
배우자
헬무트 뵈링 (1920년 결혼, 1923년 이혼)
이승만 (1875 ~ 1965, 1934년 재혼)
자녀
양자 이강석 (1937 ~ 1960)
양자 이인수 (1931 ~ 2023, 1961년 입양)
학력
빈 상업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1]
중앙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2]
종교
개신교(감리회)[3]

1. 개요
2. 생애
3. 이름에 대하여
4. 여담
5. 갤러리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3대 이승만 대통령배우자.


2. 생애[편집]



어린 시절의 프란체스카.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수도 중 하나인 교외에 위치한 인처스도르프에서 유대교 가문의 아버지 루돌프 도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게르하르틀 사이에서 태어났다.

빈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20년에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였던 헬무트 뵈링과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만나[3] 이듬해인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했다. 프란체스카는 재혼, 이승만은 중혼[4]이었다.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오랜 친구인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의 주례로 이승만과 결혼식(중혼)을 올렸고, 이승만 측의 소송으로 지방 재판 등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며 어영부영 박승선의 호적이 말소된 사이 1950년 4월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종로구청에 결혼 신고를 했다.

파일:Syngman Rhee and Francesca Donner at port.jpg
파일: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in Washington.jpg
1935년 1월 23일, LA에 도착하여 하와이로 건너가려는 원양 정기선 마로로(S. S. Malolo) 호 옆에서 찍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사진.[5]
1942년 2월 말,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참석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6]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왔고,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초대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이 때 한국에서는 대통령 배우자가 외국인이라고 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7] 그녀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 전투기 중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견한 F-86 세이버, F-80 슈팅스타, 글로스터 미티어 등을 통틀어 호주기라고들 불렀는데, 이를 혼동하여 대통령 배우자의 친정 국가에서 지원 보내줬다면서 고마워한 한국인들도 있었다.[8]

대통령 배우자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하며 수발을 드는 등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와 속기 및 타자에 능숙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 시절에는 동지로서, 건국 후엔 대한민국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비서로서 외교 업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특히 6.25 전쟁 기간에는 3개국 언어로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전쟁의 참사를 알려 국제 사회의 동정적 여론을 이끌어냈으며, 외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통역사로 곳곳을 누비며 큰 역할을 해냈다.[9] 또한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10]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고령으로 접어들자 남편의 신변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이승만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모든 인물과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 내조로 이승만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下野)한 후, 이승만을 따라 하와이로 갔고,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승만 사망 이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잠시 돌아갔다가 1970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11] 한국에서는 이화장에서 그녀의 양자인 이인수 부부와 함께 거주했다.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면서 조용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12], 노태우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하는 등[13] 한국 최초 퍼스트 레이디로서 국가 원로로 예우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관속에 태극기와 성경책 그리고 남북통일이라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넣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 달라."는 유언[14]을 남기고 향년 91세를 일기로 이화장의 집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으며[15], 1992년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16],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합장되었다.


3. 이름에 대하여[편집]


출생 당시에는 Francesca가 아닌 독일어식 Franziska로 표기했다. 한때 Franzeska라는 표기법을 사용하다가 최종적으로 이탈리아식인 Francesca로 표기법을 바꿨다. 한국 자료에는 대부분 Francesca로 표기하는 반면 영어, 독일어 위키백과 표제어는 Franziska Donner로 되어있다. 또한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마리아 바바라라는 미들네임이 있어서 출생 당시의 풀네임은 Franziska Maria Barbara Donner였다.

한국 공식 호적상 기재된 이름은 '프랜시스카(푸랜시스카) 또나'이고, 스스로 '푸랜시스카' 혹은 '푸랜세스카'라는 한글 표기를 썼다. 한국 태생도 아니었고, 호적 관리나 주민등록 전산화 등이 명확하게 자리잡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다보니 시대에 따라 표기가 좀 왔다갔다 한다.

이외에도 남편 이승만이 지어준 한국식 이름은 이부란(李富蘭)이 있었으며, 또 다른 한국식 이름인 이금순도 사용한 바 있다.

파일:1668170593940-0.jpg ||
파일:1668170593940-1.jpg ||
호적상의 이름 '프랜시스카 또나'로 표기된 주민등록증
프란체스카 본인은 '푸랜시스카'와 '푸랜세스카' 등 여러 표현을 섞어 사용한 듯 하다. 별세 직전인 1991년 5월 남긴 휘호.

흔히 남편 이승만의 성도 넣어서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라고 적기도 하는데, 이는 서양식으로 표기한 일종의 관용적 표기다. 부부동성 문화가 없는 한국에 귀화한 만큼 공식적으로 남편 성을 취한 적은 없다. 1934년에 미국 뉴욕에서 결혼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쭉 미국에서 남편 이승만과 같이 생활을 했으므로 이 때 이런 이름을 관습적으로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본인이 남긴 위 휘호를 보면 리푸랜세스카(Francesca Rhee)라고 본인의 이름을 적고 있다.


4. 여담[편집]


  • 저서로는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17]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 있다.

  • 잡지 《자동차생활》 1984년 10월 호[18]에서는 프란체스카와 며느리가 같이 기사에 나왔다. 이승만 생전 직접 운전하였으며 사후에는 며느리와 같이 장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 9촌 조카인 에르빈 프뢸은 1996년부터 2017년까지 총 21년간[19]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주지사를 역임했고 10촌 종손인 요제프 프뢸은 오스트리아의 전 부총리였다.[20]

  • 이승만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1934년 결혼 당시 이승만은 중혼, 프란체스카는 재혼이었고 이승만은 50대 후반, 프란체스카 도너는 30대 중반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노산에 가까운 연령대였다.[21] 이강석이인수양자이다.

파일:ezgif-2-33083042f9.gif
1952년 1월 1일, 새해부터 최전방을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추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두툼한 파카 후드 모자를 꽉 쪼여서 대통령이 당황하고 있다.

  • 젊은 시절엔 한국어에 서툴러 남편과도 영어로 대화했다. 자주 통역을 필요로 하여 영어에 능숙했던 박마리아[22]와 의존 관계가 형성되다보니, 박마리아의 남편이자 무능했던 이기붕이 이승만의 최측근이 되고 박마리아 부부의 장남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는 결과를 낳은 한 원인이 되었다.[23] 언어 소통이 원활치 않아 격의 없이 지낸 한국인이 많지 않았던 탓인지 프란체스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도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우연히 만난 오스트리아인이 "당신은 저와 같은 오스트리아 사람이군요!"라고 반가워하자 "난 한국 사람입니다.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을 뿐."이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고 하며 다른 일화로는 한복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24] 그래도 말년에는 어지간한 한국어는 할 줄 알게 되어 집안에서 한국어과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다고.

  • 프란체스카의 한국어 구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기붕이 국회의장을 역임할 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한갑수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프란체스카가 모처럼 국무위원들 앞에서 이승만이 알려준 한국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이 "오늘 이 사람 눈깔과 주둥이 아프지 아니하지만, 대가리와 배때기 아픕니다." 였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폭소했다고 한다. 그러자 프란체스카는 국무위원들에게 내 발음이 그렇게 나쁘냐고 물었고 옆에 있던 박마리아가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비속어이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가리키며 이승만이 저 말을 알려줬다고 소리쳤고, 프란체스카의 반응을 본 이승만은 너털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파일:Screenshot_20230204_233001_YouTube.jpg
파일:Screenshot_20230204_233014_YouTube.jpg
말년에는 간단한 한글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 작성한 가계부.

  • 그나마 프란체스카의 개인적인 면모가 어땠는지 증언한 사람으로는, 먼저 해방정국 당시 이승만의 공보비서를 역임했던 최기일 교수[25]가 있다. 최기일 교수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주변 사람들에게 다소 인색하고 냉정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승만과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돈암장을 방문했던 안재홍송필만 등에게 대놓고 "나가요."라고 화를 내면서 밀쳐대기까지 했던 탓에 이 때문에 정내미가 떨어져 돈암장에 발길을 끊은 인사들도 몇 명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의 생일을 맞이한 날에 이승만의 지지자들이 가져다 준 진귀한 음식들마저 프란체스카가 거의 다 독식하다시피하고 그나마 먹다 남은 것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상할 때까지 보관했다가 결국에는 버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최기일 교수의 이승만·김대중 전 대통령 등에 대한 혹평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은 독자의 세밀한 취사선택을 요하는 부분이다.[26] 이와는 대조적으로, 1947년 이화장 뒷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이승만 일가와 14년간 가까운 이웃으로 생활했던 방재옥(1930년생)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전 대통령은 매우 자상한 분, 프란체스카 여사는 매우 알뜰한 분이었다고 증언하며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평했다.[27]

  • 2012년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 앞 길이 2㎞ 오솔길 이름이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길'로 명명되어, 한-오스트리아 양국 우호의 상징이 되고 있다.[28]

  • 대통령 부인 집무실 및 접견실로 사용되던 청와대 본관 내 무궁화실 벽면에, 초대 영부인으로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29]


5. 갤러리[편집]


파일:Francesca_donner_passport.png
파일:Franceska_Donner_frontal_photo.png
프란체스카 도너 리의 여권 사진.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카 여사.

파일:Married Syngman Rhee and Francesca Donner arrived at Hawaii.jpg
파일:rhee's.jpg
1935년 1월 24일, 신혼여행을 마친 이승만 부처가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
1947년 5월, 서울에서 신탁통치 반대 집회에 참여한 이승만과 아내 프란치스카.[30]

파일:Syngman_Rhee_and_his_wife_Francesca_Donner.png
파일:Syngman Rhee and Francesca interviewed by LIFE Magazine.png
독일 잡지슈피겔(Der Spiegel)》에 실린 경무대에서의 프란체스카와 이승만.
1950년 10월 10일, 미국 잡지LIFE》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영부인 프란체스카 내외.

파일:Francesca Donner Rhee with Korean Embassador in Austria.jpg
파일:Francesca Donner Rhee with her elder sister.jpg
1968년, 오스트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저에서 유양수 대사 내외와 함께.
1970년 5월 14일, 비엔나를 떠나 귀국하는 공항에서 언니와 마지막 작별을 아쉬워 하는 푸랜세스카 여사.

6. 둘러보기[편집]




[1] 대한민국대통령 배우자 중 3번째로 장수한 인물이다. 가장 오래 장수한 대통령 배우자향년 96세의 이희호 여사, 두번째는 향년 95세의 손명순 여사다.[2] 배우자이승만 전 대통령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3] 당시 프란체스카와 어머니가 제네바의 한 호텔 카페에 들렸다가, 빈 테이블이 없어서 이승만과 합석하게 되었다. 훗날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이승만이 점잖아 보이는 노신사라서 합석했는데 내 딸과 결혼하게 될 줄 몰랐다."라고 회고했다. 둘의 나이차는 25세이다.[4] 이승만과 첫 부인 박승선은 1891년 혼인했다.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5] 사진 : Keystone-France[6] 사진 : 마이런 데이비스(Myron Davis)[7] 사실 이는 외국에서도 흔히 하는 실수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아듣고 "캥거루 있어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고 영화 덤 앤 더머에서도 이를 소재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로 더 많이 부른다. 그래서 그나마 현대 한국인들은 잘 안 헷갈리는 편인데, 외국인들은 지금도 헷갈려 한다. 심지어 서양인조차도 헷갈려한다. 참고로 오스트리아의 음차는 오지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음차는 호주로 완전히 다르다. 여담으로 주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과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모두 종로 교보빌딩에 있다.[8] 참고로 프란체스카의 진짜 친정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에 흡수되었다가 패전 후 연합군에 분할되어 군정을 받는 중이었다. 1955년에야 영세중립국이 되는 조건으로 독립을 되찾았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에는 군대 자체가 없었으며 연합군의 군정을 끝내고 주권을 회복하였던 1950년대 후반에는 2차대전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재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9] 정부기록사진집: 피난지를 둘러보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 (1951년 6월 8일, 경남 거제) 한국전 참전 노르웨이 병원 관계자 격려 (1951년 6월 27일)[10] (출처) 이승만 기념관: 베일 속의 외교관 - 프란체스카 도너 리 (Francesca Donner Rhee)[11] 당시 언론보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가 정치적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망명 목적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고 전했지만, 정작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는 국내의 여론을 감안해 요양과 휴양을 목적으로 한 달 정도를 하와이에서 지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 단기여정계획은 여론악화로 인한 정부의 귀국만류통보, 이 대통령의 투병과 임종, 프란체스카 여사 본인의 지병 악화 등의 사정이 생기며 수년의 해외체류로 바뀌었다. 여사의 영구 귀국은 육영수 여사의 권유와 지원으로 1970년 5월 16일에나 이루어졌다. 1960년 5월 29일에 출국한 이래 10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출처) 대통령기록관: 기록으로 본 프란체스카 여사 1970.05.16일자 신문 기사 (네이버 옛날신문): '영주하러 귀국, 프란체스카 여사'[12] 동아일보 (1982.1.30.): 양말꿰매며 근검한 생활, 철저한 국산품 애호가. 못다한 내조 아쉬워하는 프란체스카 여사.[13] 조선일보 (1989.6.16.): 盧(노) 대통령, 프란체스카 女史(여사) 초청[14]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다. SYNGMAN RHEE라는 금박의 이름이 박힌 영어 성경책이 발견되었을 때, 조혜자 여사가 그녀의 유언을 언급하는데 다음과 같다. "어머님은 유언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틀니를 끼워주고 태극기로 나를 덮어달라. 그리고 성경책을 무덤에 꼭 넣어달라.' 이렇게 무덤에 넣은 것 때문에 두 분이 날마다 기도하고 읽으셨던 성경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런데 영문 성경이 발견되었다니.. #[15] KBS 뉴스 영상 (1992.3.19.): 프란체스카 부인 사망[16] KBS 뉴스 영상 (1992.3.23.): 프란체스카 여사 영결식 가족장으로 거행[17] 프란체스카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참전 이후 UN군이 남쪽으로 철수하는 1951년 2월 15일까지 쓴 일기가 있는데 이를 엮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시중에 이 나와있다.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6.25 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의 행적, 카투사 제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고위층 자식들의 병역기피, 부유층들의 일본행 등 당시의 사회상도 볼 수 있다. 《농촌여성신문》 (2011.8.8.): 〈이승만 전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비망록〉[18] 정확히는 2013년 10월 호에서 30년 전 기사와 광고를 다시 보여주던 것.[19] 오스트리아에서 최장 기간 주지사를 역임했다.[20] 《중앙일보》(2013.9.15.): 〈프란체스카 여사, 오스트리아 유력 정치인 집안과 친척〉[21] 게다가 당시의 30대와 21세기의 30대는 다른 취급을 받았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22] 박마리아는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영어를 잘 했다.[23] 사실 이승만 주변에는 박마리아하고 이기붕 말고도 윤치영임영신 등 미국 유학파출신 인사들이 더 있었지만 이 둘은 이기붕 내외와 대조적으로 프란체스카를 탐탁치 않아했다. 심지어 자기네들끼리 있을 때 "이 박사께서 한국 여성과 결혼하셨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식으로 뒷담화까지 했을 정도였다고.[24] 해당 문서에 있는 사진들도 한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25] 장준하김준엽의 친구이기도 하다.[26] 이북출신 팔순 지식인의 현대사 증언 - 최기일 박사 자서전 '3부' 소개 문단 중에서 (조선일보, 2002.12.13.)[27] 월간조선 뉴스룸 (2001년 3월호): 李承晩 대통령 내외와 14년간 생활한 方在玉씨 인터뷰.[28] 조선일보 (2012.5.7.): 오스트리아 빈 한인문화회관 앞 길이 2㎞ 오솔길에는 대한민국 첫 영부인 이름이.[29] 동아일보 (2022.5.26. 문화면 기사 하단) : 대통령 침실 앞엔 피아노, 욕실엔 사우나 靑속살 32년만에 공개.[30] 사진 : 존 플로리아(John Fl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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