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보이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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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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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nz-Walter Woidich.jpg
프란츠발터 보이디히(Franz-Walter Woidich : 1921. 1. 2~2004. 7. 5)

1. 개요
2. 서훈
3. 초기 경력
4. 동부전선으로
5. 신병기 훈련
6. 로켓 전투기를 탄 에이스
7. 전후


1. 개요[편집]


출생 : 체코슬로바키아 즈노이모
출격횟수 : 1,000회 이상
격추수 : 110기 (1945년 4월 22일 로켓 요격기 Me 163으로 격추 기록 달성)
소속 : JG 27, JG 52, JG 400
최종 계급 : 중위
사망 : 독일연방공화국 라인란트 마인츠


2. 서훈[편집]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3. 9. 13)
독일 황금십자장 (1943. 10. 17)
기사철십자 훈장 (1944. 6. 11)


3. 초기 경력[편집]


프란츠 보이디히는 1921년 1월 2일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모라비아 남부 지역의 마을 츠나임[1]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라면서 히틀러가 체코에 사는 자신들을 다시 대독일에 되돌려줄 유일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치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자마자 독일 공군에 투신했다. 준위(Oberfähnrich) 계급장을 단 보이디히가 제27전투항공단(Jagdgeschwader 27)의 제5비행중대(5. Staffel)에 착임한 것은 1941년 7월 11일로, 부대가 북아프리카 전선에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난생 처음 진짜 공중전을 치르면서 4대의 격추 전과를 거두었다. 첫 번째 격추는 토브룩(Tobruk) 포위 공격을 하고 있던 1941년 11월 22일에 호주 공군의 커티스 P-40 토마호크(Curtiss P-40 Tomahawk)였다. 길게 꼬리를 끌며 추락하는 적기를 쫓아가 지면에 충돌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그는 이때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무선에 대고 여러 차례 격추! 격추!를 고래고래 외쳤다고 한다.

해가 바뀐 1942년 2월 12일, 정기적인 초계 비행이 아니라 Ju 87 급강하 폭격기의 엄호 비행을 하던 보이디히 준위는 또다시 토브룩 상공에서 영국 사막공군의 전투기 편대를 포착했다. RAF의 제73스쿼드론(No. 73 Squadron RAF)의 호커 허리케인과 제274스쿼드론의 커티스 P-40 키티호크 전투기로 구성된 혼성 편대였다. 이 대규모 공중전에서 그는 포트 아크로마(Fort Acroma)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서 P-40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프란츠 보이디히는 3월 15일에는 아인 엘 가자라(Ain el Gazala) 부근에서 호주 공군 제450스쿼드론과 영국 공군의 제260스쿼드론, 그리고 남아공 공군의 제2스쿼드론을 합쳐 무려 3개국 공군으로 이루어진 P-40 대편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또다시 자신의 스코어에 1대를 보탤 수 있었다.


4. 동부전선으로[편집]


8개월 간을 서부 연합군 전투기들과 싸우며 실력을 다진 프란츠 보이디히 소위는 1942년 4월 1일에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JG 52의 제3비행중대(3. Staffel)로 전속을 갔다. 이곳은 적과 대치하고 전역이 형성되는 서부전선과는 달라서 동쪽과 남쪽, 북쪽 어디를 향해 날아가더라도 적기를 조우할 수 있어 사냥의 기회는 3배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이즈음 루프트바페의 모든 전투항공단을 통틀어 최고의 격추수를 거두고 있던 JG 52에는 대선배들이 즐비했던 탓에 그에게 적기를 공격할 기회는 보통 편대장이 기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적기를 놓치는 상황 같은 특별한 경우를 빼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 윙맨에게 떨어지는 몫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 프란츠는 1942년 말까지 7대를 자신의 스코어에 더 보탰다.

중위가 된 프란츠 보이디히는 1943년 6월 11일부터 3./JG 52의 지휘를 밭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의 격추 그래프는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중대장이 되었을 때 그의 기록은 16번의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나, 이제 이 정도 전과는 한 달도 안되어 채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7월 7일과 13일에는 하루에 적기를 4대씩이나 잡아냈다. 7월 13일,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보이디히 중위는 탁월한 윙맨인 프란츠 샬(Franz Schall) 소위와 함께 일류신 Il-2 장갑돌격기 2대를 격추했다고 보고했다. 1943년이 저물 때까지 그의 스코어는 56대로 불어나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44년 1월 11일, 그가 57번째 승리를 거두고 나서 또다시 주목할 만한 전공을 세웠다. 그는 1월 17일에 5대를 한꺼번에 잡아내 1일 에이스가 된 것이다. 4월 16일에는 또 1번의 출격에 4대를 자신의 제물로 희생시켰다. 6월 11일에 80대 격추를 달성한 그에게 기사 철십자훈장이 수여되었지만 그의 활약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훈장을 받고 더욱 사기가 진작된 것인지, 보이디히 중위는 7월 한 달에만 무려 29대의 소련 공군기를 격파하는 기세를 보였고 7월 말에 드디어 100번째 승리를 인정받았다. 프란츠-발터 보이디히 중위는 이제 루프트바페에서 84번째로 센튜리 에이스로 등극했지만 이런 개인의 활약과는 관계없이 조국 독일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5. 신병기 훈련[편집]


1944년 8월에 본토로 돌아온 프란츠 보이디히 중위는 8월 11일에 최신예 로켓 전투기인 메서슈밋 Me 163 코멧으로 기종전환 훈련을 받기 위해서 브란디스(Brandis)에 둥지를 틀고 볼프강 슈푀터(Wolfgang Späte) 소령이 지휘하고 있던 JG 400으로 전속을 갔다. 거기서 기체 교육을 위해 예비보충비행중대(Ergänzungsstaffel)로 편입된 그는 발터 엔진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추진기관이 달리고 프로펠러와 수평미익도 없는 생소한 비밀병기 Me 163을 마주하게 된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탄생한 코멧 요격기는 과산화수소 연료의 제한이나 유독성, 지독하게 짧은 체공시간으로 인하여 숙달되기가 극히 어렵다고 알려진 기종이었지만, 서부와 동부전선을 옮겨 다니며 산전수전을 겪은 보이디히 중위는 쉽게 적응해나갔다. 15 km의 성층권까지 상승이 가능한 코멧 요격기는 특별한 신체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타고 싶어도 탈 수가 없었다. 최근에 외과수술을 받았거나 피부가 터진 상처가 하나라도 있으면 고공의 극도로 낮은 기압 조건에서 생사가 걸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JG 400의 군의관은 후보 조종사를 모두 정밀한 신체검사를 해서 충치 하나만 있어도 탑승자 명단에서 탈락시켰다.

프란츠 보이디히 중위는 행인지 불행인지 그 숱한 아수라장을 헤쳐나오는 동안 단 한번도 수술을 받을 정도의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렇지만 코멧의 비행 원리와 성능과 특징에 관해 개발자와 제작자, 그리고 시험비행을 했던 테스트 파일럿들이 직접 강의하는 여러가지 교육을 받는 동안, 온갖 경고로 가득 채워졌다. 이 신무기는 아마도 생산되더라도 그걸 몰 조종사를 구할 수가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혼합 연료는 극도로 주의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 용액에 손가락을 넣으면, 뼈만 남은 손가락을 꺼내게 될 겁니다."

ㅡ 알렉산더 마르틴 리피쉬(Alexander Martin Lippisch : 1894~1976) 박사

"이 비행기는 프로펠러기와는 전혀, 완전히 다르다. 엔진을 전속으로 돌려도 기체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에, 어린애라도 조종할 수 있을 만큼 안정성이 높다. 하지만 보통 전투기를 몰 때처럼 스틱을 갑자기 당기면, 너희들은 전부 기절해버릴 것이다."

ㅡ 테스트 파일럿 하이니 디트마르(Heini Dittmar : 1912~1960)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는 아무거나 먹으면 절대 안됩니다. 삼킨 음식은 장내에서 가스를 만드는데, 고공으로 올라가면 그 가스는 수 십배로 부풀게 됩니다. 어떻게 될지는 알겠지요? 그리고, 임무를 위해 1만 미터 이상까지 빠르게 올라가기 때문에 신체가 기압에 적응할 시간이 없어요. 혈액 속의 질소가 확장되면서 몸 여기저기 핏발이 서고 부풀어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아마 아침은 굶는게 나을 겁니다."

ㅡ JG 400 군의관

반면, 좋은 이야기도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고출력 엔진을 단 기종을 몰아봤다고 자신하는 사람? 1,800마력? 2,000마력? 귀관들이 몰던 커다란 프로펠러를 돌리는 전투기들이 그 정도겠지만, 이 요격기는 저공에서 4,500마력의 힘을 내지. 놀라운건, 고공으로 올라가면 더 강해진다네. 이걸 타면 대기가 희박한 성층권까지 올라가는 일이 자주 있을 텐데, 그 고도에서는 9,000마력의 출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게나. 자네들은 모두 비상착륙에 관해 전문가가 되어야만 한다네"

ㅡ 볼프강 슈푀터 소령


6. 로켓 전투기를 탄 에이스[편집]


모든 이론 교육과 비행 숙달과 활강 훈련, 그리고 1회의 동력 비행까지 마친 프란츠 보이디히 중위는 중폭격기 요격 임무를 맡은 제6비행중대(6./JG 400)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에게 독일 공군의 최고 기밀병기 16대가 맡겨진 것이다. 그는 1945년 4월 22일에 이 로켓 전투기로 출격했다. 발터 엔진을 점화하자 그는 마치 대포알에 탄 것처럼 빠르게 가속되었고, 이륙 결심 속도에 이르자 조종간을 살짝 당겼다. 활주용 바퀴는 곧바로 분리시키지 않으면 큰일난다! 스틱을 더 바짝 당기자, 그가 탄 코멧은 상승하면서 Bf 109의 최고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륙 후 겨우 3분 30초 만에 프란츠 보이디히는 12 km 고도까지 단숨에 올라올 수 있었다. 연료를 아끼지 않으면 안되니까 보조 엔진으로 전환하고 주연료 밸브는 잠가야만 했다.

3 km 눈 아래에 B-17들이 떼지어 유유히 날고 있는 모습이 프란츠 중위의 눈에 띄었다. 거리는 10 km 이상 떨어져 있지만, 이 비행기는 시속 900 km를 낼 수 있으니 따라잡는데 1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브란디스 기지에 첫 Me 163을 직접 몰고 가져온 파울 루돌프 오피츠(Paul Rudolf Opitz : 1910~2010) 중위에 따르면, 기지 상공을 낮게 날자 난생 처음 보는 코멧을 적기로 착각한 지상의 대공포반이 비오듯이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루돌프 중위는 회피기동도 하지 않았는데 단 한발도 맞지 않았다고 했다. 그 속도가 바로 코멧이 가진 최고의 무기이자 방어력이었다. 발터 엔진이 켜져 있는 8분 동안, 이 전투기에 대적할 수 있는 항공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제트 전투기 Me 262라도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프란츠 중위는 마음 편하게 공격을 할 수 있었다. 보조 엔진만으로 완만하게 강하하는데도 속도는 이미 850 km/h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도 까마득히 떨어져 있던 폭격기들이 순식간에 다가왔고, 마침내 프란츠 중위는 속도를 더 줄이지 않으면 공격할 기회가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러더를 차면서 조종간을 반대로 꺾자, 코멧은 아름다운 스크류 모양의 궤적을 그리면서 적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보통의 재래식 전투기를 타고 있었다면 훨씬 더 접근해서 사격을 가해야만 했지만, 이름처럼 유성같은 속도로 날으는 코멧으로는 그래선 안된다. 그는 점찍어둔 폭격기에 900 m까지 접근했을 때 2문의 30mm 중기관포를 일제히 발사했다. 발사 버튼을 누른 지 고작 2.5초만에 목표의 코앞에 이르자, 프란츠는 버튼에서 손가락을 뗄 틈도 없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종간을 당겼다.


7. 전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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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Znoj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