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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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 제3대 황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파일:db54e8e7875610b0b60536ce81bcfbad.jpg
출생
1830년 8월 18일
오스트리아 제국 쇤브룬 궁전
사망
1916년 11월 21일 (향년 86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쇤브룬 궁전
재위기간
오스트리아 황제
1848년 12월 2일 ~ 1867년 5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1867년 5월 29일 ~ 1916년 11월 21일
롬바르디아-베네치아 국왕
1848년 12월 2일 ~ 1866년 10월 12일
독일 연방 의장
1850년 5월 1일 ~ 1866년 8월 24일
서명
파일:프란츠 요제프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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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이름
Franz Joseph Karl
프란츠 요제프 카를
아버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어머니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형제자매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안나, 루트비히 빅토어
배우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854년 결혼 / 1898년 사망)
자녀
장녀 조피, 차녀 기젤라, 장남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삼녀 마리 발레리
종교
가톨릭
신체
키 171cm[1]

1. 개요
2. 칭호
3. 생애
3.1. 즉위 배경
3.3. 재위
3.3.1. 통치
3.3.2. 외교
3.3.4. 실책
3.3.6. 사망
4. 가족 관계
4.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
4.2. 가계도
4.2.1. 조상
4.2.2. 자녀
5. 대중매체
6. 여담
7.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Viribus Unitis[단결]

Virtutis Confido[미덕]

오스트리아 제국의 3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 신성 로마 제국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프란츠 2세의 친손자이며, 나폴레옹 2세, 마리아 2세, 페드루 2세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어머니 쪽으로는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2세와 그 동생인 오톤, 스웨덴의 왕비 요세피나, 작센의 국왕 알베르트게오르크와 사촌간이다.

각종 언어별 표기.
독일어
Franz Joseph I. (프란츠 요제프 1세)
헝가리어
I. Ferenc József (페렌츠 요제프 1세)
체코어
František Josef I. (프란티셰크 요제프 1세)
슬로바키아어
František Jozef I. (프란티셰크 요제프 1세)
폴란드어
Franciszek Józef I (프란치셰크 유제프 1세)
우크라이나어
Франц Йосиф I (프란츠 요시프 1세)
루마니아어
Francisc Iosif I (프란치스크 이오시프 1세)
세르비아어
Франц Јозеф I (프란츠 요제프 1세)
크로아티아어
Franjo Josip I. (프라뇨 요시프 1세)
슬로베니아어
Franc Jožef I. (프란츠 요제프 1세)
이탈리아어
Francesco Giuseppe I (프란체스코 주세페 1세)


2. 칭호[편집]


파일:프란츠 요제프 1세의 문장.svg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문장

프란츠 요제프 1세가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로 즉위했을 때의 공식적인 칭호는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왕, 보헤미아의 왕, 롬바르디아-베네치아의 왕, 달마티아의 왕,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왕, 갈리치아-로도메리아의 왕,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의 대공, 로트링겐의 공작, 잘츠부르크의 공작, 슈타이어마르크의 공작, 케른텐의 공작, 크라인의 공작, 부코비나의 공작, 지벤뷔어겐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의 공작,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및 구아스탈라, 오시비엥침, 자토르테셴, 프리울리, 두브로브니크 및 자다르의 공작, 합스부르크티롤의 후백작, 키부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의 후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라우지츠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트, 코토르, 빈트마쉬의 영주, 독일 연방의 의장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원문]

이후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롬바르디아를 잃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베네치아까지 잃으며 독일 연방에서 쫓겨난 뒤 1867년 대타협으로 이중제국 창설을 통해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임하면서 공식적인 칭호는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 헝가리의 사도왕,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토스카나 대공, 크라쿠프 대공, 로트링겐,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부코비나의 공작, 지벤뷔어겐 대공, 모라비아의 변경백, 상하 슐레지엔,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 구아스탈라, 오시비엥침, 자토르테셴, 프리울리, 라구사 및 차라의 공작, 합스부르크티롤, 키부르크, 고리치아 및 그라디스카의 백작, 트렌토 및 브릭센 공, 상하 라우지츠이스트리아의 변경백, 호에넴스, 펠트키르히, 브레겐츠, 존넨베르크의 백작, 트리에스트, 코토르, 빈트마쉬의 영주, 세르비아의 군주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원문2]


3. 생애[편집]



3.1. 즉위 배경[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z_Joseph_of_Austria_young.jpg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었고 정신적 성불구자[1]였기 때문에 바로 아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의 장남이 이미 일찌감치 추정상속자로 취급받았고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이 장남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이후 1848년 혁명으로 인해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자 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이 제위 계승 순위에 따라 황제로 즉위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 안나 황후조피 대공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도 페르디난트 1세와 마찬가지로 정신지체 증상이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아들에게 양보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프란츠 카를 대공이 수락하면서 장남이 프란츠 요제프란 이름으로 즉위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황제로 재위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제국이었다. 그러나 헝가리는 프란츠 요제프 재위 때 별도의 내각을 가진 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를 섬기는 왕국으로 분리되었고 그의 재위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3.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징[편집]


파일:external/www.billerantik.de/105_FranzJosef_Orden.jpg
노년기

파일:Kaisers_Dank_by_Ludwig_Koch_1915.jpg
▲ 《황제의 감사(Kaisers Dank)》 종군 화가인 루트비히 코흐의 1915년 작품이다. 제국의 신민들과 군인들이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우러러보고 있다.

파일: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황실.jpg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가족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빅토리아 여왕[2]처럼 6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근면성실한 국정 수행[3]과 엄격함, 그리고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생전과 사망 이후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두려움을 받았다. 그야말로 백발의 노황제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 당대 남자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수염과 구레나룻을 모방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간 시절에도 시내 곳곳과 가장 호화로운 호텔인 자허 호텔[4]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으며, 제국 호텔에는 아직까지도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제정 붕괴 이후에 들어선 공화정 정부가 어떻게든 황실의 흔적을 지우고 구 왕가에 불이익과 제한조건을 늘리려는 방침을 시행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황제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체코에는 프란츠 요제프 카이저라는 통조림 브랜드도 있다.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당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후대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처럼 존재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으레 그렇듯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상태였다.

3.3. 재위[편집]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아버지


3.3.1. 통치[편집]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은 황제. 역사적으로는 1848년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5]을 겪고 그 격동의 와중에 백부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로 즉위했다.

1850년, 러시아 제국이 팍팍 밀어준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과 담판을 지어 올뮈츠 협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인, 프로이센에 일대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지 검열과 경찰국가 체제를 동원한 강력한 신(新) 절대주의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문제는 이게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발상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제주의 통치 와중인 1853년에는 헝가리인 독립운동가가 황제 암살을 시도해 길을 걷던 황제를 덮쳐 칼로 찔렀다. 위병들이 빨리 달려왔기에 살았지만, 자칫했으면 아들이 그대로 사망할 뻔한 것에 충격을 받아 빨리 후손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계략으로 이듬해인 1854년 이종사촌 누이인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 가문엘리자베트(애칭 시시)와 결혼했다. 원래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애칭 네네)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프란츠 요제프가 헬레네와의 첫 선을 보는 자리에서 헬레네 옆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뿅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 엘리자베트와 결혼하도록 했다.


3.3.2. 외교[편집]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은 황제가 수행할 중요 지상과제로 외교와 국방을 고려해 외교 문제에 많이 간섭했다. 하지만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일어났던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반환한 도나우 공국[6]을 점령하며 러시아에게 빅엿을 먹였다. 이 행동은 1849년에 대군(약 16만 명)을 보내 혁명을 진압하도록 도와준 러시아에 대한 배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분노했고,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얌체짓에 영국과 프랑스까지 등을 돌려 크림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당했다. 그야말로 병크였던 셈.[7] 프로이센과는 올뮈츠 협약으로 냉전에 들어갔고, 이탈리아 반도는 원래부터 반(反) 오스트리아 지역이였던지라, 오스트리아 제국은 삼제동맹 체결 이전까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된다.

1859년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군비를 증강해 도발해오자 재상 카밀로 카보우르가 원하던 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때려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른다. 그 결과 마젠타 전투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했고[8] 1866년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패배해 베네토 지역까지 상실하며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해(1866) 통일 독일 문제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배제당했다(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7주 전쟁). 이 때 빌헬름 1세헬무트 폰 몰트케 등 프로이센 장군들은 오스트리아 땅을 갈라먹기를 원했지만[9] 비스마르크가 이를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위기를 모면하고,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영토[10]를 보전했다.

그러나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교장관이자 성 이슈트반 왕관령 초대 총리 언드라시 줄러의 활약으로, 앞서 말했듯이 악연이 있던 러시아에게는 그 바로 밑에 있던 보스니아를 병합함으로서 다시 한번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고, 7주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던 독일 제국과 강력한 동맹(대 러시아 방위동맹)을 맺는 성공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콘클라베에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교황 레오 13세 선종 후 열린 1903년 콘클라베에서 전임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인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의 선출이 유력해지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크라쿠프 대주교 푸치나 추기경으로 하여금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결국 이 해에 선출된 교황은 보수 성향의 비오 10세였다. 비오 10세는 선출 다음 해인 1904년, 오스트리아 황제의 거부권을 박탈해 추기경이 아닌 인물의 간섭을 차단했다.

파일:호엔촐레른가와 합스부르크가.jpg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와 악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왼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빌헬름 황태손[11],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조카손자 카를 1세, 조카증손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3.3.3. 이중제국 성립[편집]


1866년의 잇따른 실패로 말미암아 1867년, 헝가리인과 타협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연방 구성국이던 헝가리 왕국을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위치로 승격시킨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제국을 개편했다.[12] 하지만 대타협 이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제적 통치로 일관하며 이 이상의 개혁을 거부했다.

이렇듯 평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떠받친 인물이지만, 1867년 이중제국 체제의 선택[13]과 황제 자신도 인정한 슬라브족에 대한 차별 정책, 그리고 러시아와 대립했던 발칸 반도로의 동진 정책이 공교롭게도 그의 사후, 제국 해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과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3.4. 실책[편집]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에는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전제적 통치로만 일관했다. 어릴 때부터 자유주의가 신의 질서를 쳐부수는 악의 축이라는 메테르니히와 어머니 조피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으며 이를 평생 고수한 것. 또한 성격도 문제가 많았는데 어머니에게 휘둘렸음에도 어머니 사후에는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성격이 심하여 타인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고 모든 일을 독선적으로 처리하여 잘될 일을 제대로 망쳤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문제는 1848년 헝가리 반란을 계기로 드러났던 제국의 허약한 군사력을 강화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무관심했다는 점이다.[14] 그 결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대패했다. 결국 제국이 헝가리를 제압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헝가리인 귀족들과 대타협을 하여 이중제국을 성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전제적 통치를 고수하고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타 소수민족들의 목소리는 무시하여 그들의 반발을 크게 샀다.

또한 그는 경제 발전과 산업발전에도 무관심하여 경제까지 성과가 하나도 없었다. 동시대의 프로이센과 그 후신인 독일 제국이 산업화를 이룩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한 반면[15],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산업 지역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이스트리아 반도 정도였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되어 있었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계에서 손 꼽히는 산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함선이나 소총과 같은 무기들도 수준급으로 만들었지만, 이런 산업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모라비아 등에 집중되어 있었고 제국 동남부는 매우 낙후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의 부국강병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대표적으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문화적 발전과는 반대로 제국 내에서 매우 가난한 지역이이어서 오죽하면 지역민들조차도 굶주림이 가득한 땅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 1890년대부터는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의 헝가리 평원과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졌지만, 이것만으로 오스트리아가 다른 열강들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보스니아 합병 문제로 삼제 동맹을 깨뜨려 러시아와의 관계를 파탄내는 우를 범하고 만다.[16]

그리고 빌헬름 2세독일 제국의 황제가 된 후에는 능동적인 외교는커녕 독일에 과잉 의존했으며, 빌헬름 2세가 독일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하기만 했다.[17] 그는 오로지 자기권력 지키기에만 집중했으며,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던 제위 계승자인 조카를 홀대하며 멀리하는 등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실책들을 저질렀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86세로 장수하고 재위기간이 68년이나 되어 매우 오래 살고 오래 재위했던 것도 의도치 않은 실책이 되었다. 그의 실책을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던 것. 특히 프란츠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황태자인 아들 루돌프와 조카 페르디난트에게 끝까지 권력을 양보하지 않다보니 황태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갈등이 더욱 심했다.


3.3.5. 7월 위기1차 세계대전[편집]


1914년에 사라예보에서 조카가 살해당하자, 이를 핑계로 세르비아를 손보기 위해 군사행동에 나섰다.[18]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발생한 이중제국군의 전쟁 범죄에도 그의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다만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은 전쟁에 무척 부정적인 입장이었다.[19] 오히려 외무부 장관인 레오폴트 베르히톨트와 육군 참모총장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가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 폰 슈튀르크는 이들을 지지하였다. 각각 정부, 군부, 외교 수반이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었기에 황제는 그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황제가 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쟁이 변화를 가져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제국의 안정을 해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판단은 옳았고, 헝가리 왕국 총리 티서 이슈트반도 전쟁이 가져올 변화를 두려워했다. 제국 내에서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권력을 동등하게 나눈 상황은 헝가리 인구의 숫자로만 정당화할 수 없는 문제로서 제국의 제도가 정확히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야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슬라브족에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제국이 해체되고 삼중제국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국 내부의 슬라브인들이 기여하여 전쟁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삼중제국이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세르비아에 즉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신중함으로 제어되었다. 그 신중함은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의 침착함과 티서의 당파성에 기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에게 티서와 협의하기 전에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고, 티서는 베르히톨트에게 황제가 시간을 갖고 헝가리가 제기한 반대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독단적으로 신속하게 행동하려는 욕구가 좌절된 베르히톨트는 독일 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지원한다는 확답을 구함으로써 러시아의 호전적인 전쟁 계획으로 초래된 위기에서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지는 않을까라는 황제의 걱정을 덜어주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독일의 지지를 확인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결국 베르히톨트가 내민 동원명령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3.3.6. 사망[편집]


파일:프란츠 요제프 1세 사망 당시 모습.jpg
파일:external/1.bp.blogspot.com/Frans+Josefs+Tomb.jpg
제1차 세계 대전의 와중인 1916년 11월 21일 68년간 제국을 짊어졌던 86세의 노황제는 쇤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빈에 있는 황실묘지(Kaisergruft)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석관 양옆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황후와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잠들어 있다.

20세기 초까지 재위하였기에 합스부르크의 역대 황제들 중 유일하게 장례식 장면이 영상으로 남아있다.


4. 가족 관계[편집]



4.1. 비극으로 얼룩진 가정사[편집]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nrycheNsqf1uaslkjo1_1280.jpg
사적으로는 매우 불행했다. 당대 유럽 군주들은 숱한 염문을 뿌리며 추문을 달고 살았던 것과는 달리 프란츠 요제프는 사생활적인 면으로는 깨끗했던 편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초능력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가정은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도 모자랄 만큼 막장 드라마로 굴러갔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딸, 아들, 동생, 사촌, 아내, 조카들 등등)이 하나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여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산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 하지만 장수한 덕분에 그는 온갖 못 볼 꼴까지 다 보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황제가 혁명 때 사형시킨 헝가리 민족주의자의 어머니가 그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

황제의 가족 관계는 정말로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어머니 조피는 너무 어렵게 얻은 장남을 구세주 마냥 떠받들면서도 무섭게 다그치며 혹독하게 길렀다. 그 영향으로 젊은 시절부터 프란츠 요제프는 남들에게는 심각하게 권위적이고 꼰대였지만, 정작 여장부인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기세에 눌려 지냈고 결혼 후에는 아내 엘리자베트와 조피 사이의 갈등이 더해졌다. 자유롭고 발랄한 가풍의 바이에른에서 자란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빈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가 약혼 직후 시어머니 조피에게서 가장 처음 받은 건 예물이나 편지 같은 게 아니라 6페이지에 걸친 궁중예법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조피는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간섭했고, 첫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자기 이름을 따다 붙이고 손녀를 아예 자신의 거처에 데려가서 직접 키웠다.[20] 때문에 고부 간에 아이들의 양육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는데 엘리자베트가 데려간 헝가리에서 첫 딸이 죽는 바람에 조피 대공비가 이긴 모양이 되었다. 결국 엘리자베트는 둘째딸 기젤라와 기다리던 황태자 루돌프를 둘 다 시어머니에게 넘기고 양육에서 손을 뗐다. 엘리자베트는 아이들이 자기보다 할머니를 더 따르는 것에 큰 상처를 받고, 시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그녀의 거처에 있는 자식들을 보러가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 중독자인 프란츠 요제프는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황제는 아내의 부탁으로 어머니에게 자식들을 돌려주라고 부탁했지만, 조피는 손녀들을 데려가면 자기가 궁을 나간다고 위협해 황제가 말도 못 꺼내게 했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사랑한다지만 이도 저도 못해주는 남편을 원망했고, 결국 현실에서 도피해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며 여기저기로 여행만 다닐 뿐이었다. 프란츠 요제프도 마찬가지로 이런 아내의 행동으로 크게 상처받았지만 그녀를 차마 비난하지 못했다.

황제의 자식들 역시 불행했다. 아버지는 일만 하느라 제대로 만날 수 없었고 어머니는 일년에 한 두번 얼굴이나 보는 정도, 할머니 조피는 손주들을 사랑하고 아끼긴 했지만 황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우선해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지만 막내딸 마리 발레리(애칭 마리, 혹은 발레리)만은 예외였다. 엘리자베트는 직접 기르게 된 마리 발레리에겐 자기 손으로 못 키웠던 위의 세 아이 몫까지 몰아주며 편애했지만, 대신 발레리는 늘 도피성 여행이나 해대는 엘리자베트에게 끌려다니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했고 어머니의 우울증을 달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발레리는 '엄마가 나 때문에 못 죽고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느꼈다고 하며(아이 입장에서 이런 생각이 들게끔 하는 상황은 절대로 좋지 못하다.) 엘리자베트는 정작 그렇게 아끼는 발레리가 결혼해서 낳은 외손주들한테는 무심했다고 하니 이 역시 정상은 아니다. 특히 루돌프 황태자는 차기 황제라는 이유로 도가 지나치게 엄격한 교육을 받아서 군사교관에게 7세부터 군대식 교육을 받았다. 겨울 새벽 눈 속을 행진시킨다든지, 냉수목욕이라든지, 숲 속에 혼자 내버려두고 온다든지. 심지어 루돌프를 깨울 때는 옆에서 권총을 쏴서 그 소리로 일어나게 했다고 한다.[21]

이것이 황제의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나이에 받았던 것들로, 황태자인 루돌프는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며 양친을 원망하는 반항적인 청년으로 자랐다. 프란츠 요제프도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해 부자 관계도 막장이었다. 이처럼 황제의 가정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 같은 비극이 따로 없지만 이것도 근본적, 전체적으로 제일 큰 책임자는 황제 자신이었다. 자세한 건 루돌프 황태자 참고.

21세기 들어 아내와의 불화에 대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Family Tree DNA라는 집단의 DNA 연구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인인 찰스 홀트(Charles Holt, 1865~1947)가 프란츠 요제프의 사생아일 확률이 매우 높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부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 찰스 홀트가 태어난 1865년 이후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1867년), 막내인 마리 발레리를 출산(1868년)한다. 엘리자베트는 딸 둘을 낳은 뒤에야 후계자가 될 루돌프를 낳았고 프란츠 요제프는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아들을 더 낳으려 했으나, 아이들과 교육권을 모두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빼앗기고 인내심과 분노가 극에 달한 엘리자베트는 더 이상 임신하지 않겠다고 사실상의 파업을 선언하며 그 직후부터 궁정을 떠나 여행하며 살았다. 그리고 10여 년 후 막내를 낳고 본격적으로 유랑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엘리자베트가 다른 여자와 관계하여 사생아를 낳은 프란츠 요제프를 전보다도 더 경멸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1889년에는 아들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했고, 1898년에는 아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에게 암살당했다.[22][25] 아내의 죽음을 들은 장소는 엘리자베트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집무실 책상 위였다. 그녀를 일생 고독하게 했던 그 책상에서 부관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잠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후 한 말은 "짐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짐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였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된 것은 돌봐주지 못한 아들의 사후 자책하며 늘 상복만 입고 다닐 정도로 우울하게 살던 아내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비극을 겪으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지만, 특유의 성실함과 의무감으로 사망할 때까지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할 일이 있다며 부득부득 일어나고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는 묘사도 있을 정도다. 그 스스로도 당대에 조신에게 "나는 운이 없는 놈이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몰락해 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제국을 떠받치기에 60년이나 매진한 스스로에게 남긴 자조일지도.

출판된 참고할 만한 자료로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와 <석양녘의 왈츠>가 읽을 만하다.


4.1.1. 정부: 카타리나 슈라트[편집]


파일:Katharina Schratt.jpg
카타리나 슈라트(Katharina Schratt).

그나마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사적으로 위로가 되어준 사람은 정부인 카타리나 슈라트(1853~1940)라는 여배우였다. 대외적으로 정부로 알려져 있지만 황제와의 관계는 애인이라기보다, 그가 생애 단 한 번도 갖지 못 했던 인간적인 감정들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 같았다고 한다. 황제를 만나면 정치, 사회 등의 분야에 대해 대화하고 조언하는 등 황후가 하지 않는 일을 어느 정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흠이 있다면 도박 중독자라 종종 심한 도박빚을 지곤 했는데, 황제는 갚아주긴 했지만 대신 온갖 잔소리와 훈계를 퍼부었다고. 슈라트는 그렇게 욕 먹어가면서도 계속 도박에 빠져 황제에게 갚아달라고 편지하면 또 욕 먹는 패턴 반복이었는데, 정작 아내 엘리자베트가 온갖 뻘짓과 사치에 낭비하는 돈은 군말도 않고 갚아주었다.

카타리나 슈라트는 정실인 엘리자베트 황후가 남편을 자신에게서 떼어 내려고 자발적으로 소개해준 여자다. 비로소 뜻대로 됐다고 여긴 엘리자베트는 자신을 어려워하는 슈라트에게 늘 여행만 다니는 자기 대신 황제 곁에서 돌봐주는 것을 고마워했다. 직접 슈라트를 초대해 황제와 셋이서 노닥거리거나 외국에서도 친절한 편지나 선물 같은 것들을 보내줘서, 슈라트도 거의 황후의 열혈 덕후에 가깝게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며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타리나 슈라트 역시 엘리자베트를 아름답고 위대한 황후 폐하로 여기며 존경한 듯. 황후에 걸맞게 최고로 아름다운 미모와 카리스마도 있겠지만 엘리자베트가 일반적인 황후답지 않게 일개 여배우이자 정부에 불과한 카타리나에게 친절한 조언과 감사도 잊지 않고, 해외 여행 중에 사온 후한 선물들까지 내주는 파격적인 배려와 자신이 황제와 대놓고 친분을 쌓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는 여유 넘치는 태도가 카타리나가 엘리자베트에게 반한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 유럽에서 왕이나 황제의 정부 역을 맡는 여자는 대개 황실의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자 감정 쓰레기통, 궁중 욕받이나 다름없었으며 어느 순간 왕의 관심을 벗어나면 한없이 무력해지는 힘 없는 존재이다. 자신을 한사코 질투하거나 물고 늘어지지 않고 묵묵히 넘어간 것만으로 대단히 감사할 일인데 카타리나가 보기에는 흔쾌히 자발적인 환대와 호혜도 전해주는 엘리자베트는 단순히 복종이 아니라 경외와 존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26]

마누라 오타쿠 황제, 황후를 팬질하는 열혈 성덕 애첩, 둘을 여유롭게 조련하며 노는 황후라는 로판 소재로 써먹기 충분한 이 기묘한 조합을 실시간으로 보는 자식들은 물론 귀족들과 신하들도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없어했다. 한편으로는 자타공인 유럽 최고의 절세미녀로서 칭송과 명성이 자자한 엘리자베트는 아름다움에 있어 자기확신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성격이었기에 카타리나의 외모를 독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면전에서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망신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식으로 뒷담까기만 한 게 전부였다. 이를 감안하면 엘리자베트는 아무나 애첩으로 고르는 경솔한 짓은 하지 않고 매우 세심하게 신경 썼던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라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만만한 외모와 배경, 그리고 황제와 정신적인 유대 관계를 맺을 만큼 든든한 인생 상담 친구가 되고 황후인 본인과도 굳건한 친분을 유지할 만한 뛰어난 능력과 지성, 처세술, 충성심을 지닌 여자라서 카타리나를 남편의 애첩으로 선임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 의미에서 카타리나는 엘리자베트 황후가 원하는 '애첩'으로서의 이상적인 조건을 한꺼번에 충족하는 가장 완벽하고 현명한 선택지였고 엘리자베트도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물론, 그런 내막이 있었다고 해도 로얄 미스트리스를 향한 세간의 평판과 취급이 얼마나 처참하고 나빴는지를 고려하면, 엘리자베트의 대우가 당대 황후 치고는 굉장히 너그럽다 못해 파격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마저도 엘리자베트가 가족 관계에 깊이 얽매이지 않을 정도로 천성이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대범한 성품이었기에 가능한 일.

정부라고는 하지만 카타리나 슈라트와의 관계는 매우 플라토닉했기에 황제는 그녀의 집을 방문해도 담소를 나눈 정도였다고 한다. 밤 늦게까지 무대 공연 후에도 깔끔하게 단장하고 직접 만든 소박한 요리나 디저트 등을 놓고 평범한 부부처럼 수다 떨고 입씨름을 하면서도 정치적 간섭 같은 것도 일절 하지 않았다. 보통 왕이나 황제의 정부는 그들의 사후 내쳐지기 마련인데 카타리나 슈라트는 프란츠 요제프를 워낙 살뜰히 모신 덕분인지, 황제가 서거하자 후임인 카를 1세는 직접 그녀를 불러들여 정중하게 인도해 카타리나는 전 황제의 시신에 작별 인사도 하고 카를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평생 카타리나를 싫어했던 황제의 막내딸 마리 발레리 여대공은 이 때도 카타리나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이후 카타리나 슈라트는 빈 근교에 있는 히칭의 저택에서 조용히 살다 1940년에 사망했다.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사후 수많은 언론사와 출판사가 카타리나에게 황제와의 관계에 대해 인터뷰를 따려고 하거나 회고록 계약을 제시했지만 일절 거절했고, 이후에도 카타리나는 황제나 황후와의 관계나 뒷얘기를 팔아 이득을 보려하지 않는 품위 있는 태도로 칭송 받으며 별다른 발언이나 눈에 띄는 정치적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가장 정치적인 행동으로는 안슐루스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 집의 창문을 가리고 바깥을 보지 않고 사실상의 문전박대를 한 정도.

그 외에 엘리자베트 황후가 암살로 사망하자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재혼 후보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황제의 제수이자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도 있었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본인이 고령인 관계로 재혼 자체를 거절했다고.

4.1.2. 첫째 남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편집]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1832~1867)은 나폴레옹 3세의 꼬드김에 넘어가 1864년에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멕시코에서 반 프랑스 저항군이 들고 일어나 1867년에 막시밀리안을 붙잡아 총살해 버렸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싸움에서 참패해 엉망진창인 상태라 동생을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일로 유럽의 왕실들을 돌아다니며 남편의 구명 활동를 벌이던 막시밀리안의 아내 샤를로트는 그만 미쳐버렸고, 오빠인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유폐되었다. 황제의 어머니로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조피 대공비도 차남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는지 이 사건 이후로 정치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하게 된다.


4.1.3. 아들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편집]


프란츠 요제프 1세 부부의 유일한 적장자였던 루돌프 황태자는 항상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으로 보내는 어머니 아래서 외롭게 자랐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주의자였고 제국의 황제로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또한 루돌프는 어머니 엘리자베트의 자유분방하고 예민한 기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당대 가장 보수적이었던 합스부르크 황실 예법을 갑갑해했고 황실 내에서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오스트리아는 조부 대부터 명문 귀족이 아니면 황제의 특허가 없는 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도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었지만 루돌프는 개방적이고 소탈해서 궁정을 어지럽히는 문제아로 찍혀있었기 때문.

이후 루돌프 황태자는 레오폴드 2세의 딸로 벨기에의 공주인 스테파니정략결혼했지만[27] 처음부터 사랑없는 결혼이었고 둘은 성격도 달랐다. 외향적인 스테파니는 내성적이고 우울증을 앓는 루돌프를 나약하다며 들볶고, 루돌프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스테파니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의 바르던 두 사람의 사이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가 태어난 후 급격히 멀어져 루돌프는 외도를 일삼고 딸도 거의 찾지 않았다. 게다가 스테파니가 병을 앓은 후 출산이 불가능해지자[28] 부부 사이는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에 루돌프 황태자는 외사촌 라리쉬 백작부인[29]에게 소개받은 베체라 남작의 딸 '마리 폰 베체라'와 사귀게 되었고, 독단으로 교황에게 스테파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은 당연히 대경실색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이 사태를 알렸다. 애초에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이 루돌프 황태자의 이런 요청을 허가해줄 턱이 없었고[30][31] 왕가의 일이면 더 안 해준다. 이에 극대노한 아버지에게 루돌프는 제대로 찍혀버렸다. 프란츠 요제프는 즉시 루돌프에게 마리와 결별하라 강요하고 신임 대사를 환영하는 접견식에서는 경의를 표하러 나온 아들에게 등을 돌려 외면하면서 모두의 앞에서 빅엿을 먹이고는 또 따로 불러 "너 같은 놈은 보기도 싫으니 당장 정부랑 결별하고 가정에 충실하라!"며 크게 화를 냈다. 루돌프 황태자는 이 공개적인 창피와 심한 질책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1889년 1월 30일에 마리 폰 베체라와 함께 메이얼링으로 가서 자살한다. 이를 통칭 마이어링 사건'이라고 부른다.[32]

그러나 정확하게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카를 1세의 아내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어렸을 적 루돌프의 누나 기젤라가 "시신의 총상 주변에 화상이 없었다.[33] 따라서 암살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타살설을 지지하는 증언들도 꽤 있다. 진보적인 루돌프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파 세력, 혹은 황실을 증오하던 공산주의자가 마이어링의 별장에 침입해 두 사람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암살설 같은 타살설을 지지하는 쪽의 주장 중에는 루돌프의 장례가 교황의 인가를 받은 가톨릭식 장례 미사로 치러졌다는 점을 든다. 당시 가톨릭 교회법은 자살한 사람에 대한 장례 미사를 불허했는데 루돌프도 처음에는 교황이 장례 미사를 거부했지만 후에 입장을 바꿔 장례 미사를 했다. 이에 대해 황제가 교황에게 아들이 반 황실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교황이 인정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제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비밀이 알려진 순간 일어날 제국 내의 혼란을 두려워해서라고 한다. 일생 제국의 통합에 목숨을 건 황제로서는 가장 우려하는 사태이기도 했다.

이러한 루돌프 황태자의 최후는 순수한 처녀와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마리는 루돌프보다 무려 약 14살 연하인 어린 소녀였고 루돌프는 아무리 애정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내와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자살할 당시 루돌프의 나이는 만 30세였고, 마리의 나이는 겨우 만 16세. 거기다 이들이 만났을 때는 더 어렸다. 실제로 루돌프는 외도가 잦았기 때문에 마리 베체라 뿐 아니라 창부 출신의 미치 카스파(Mizzi Kaspar) (1864년 ~ 1907년) 등 많은 정부가 있었다. 처음 루돌프가 동반 자살하자고 꼬셨던 사람도 미치 카스파였는데 그녀가 거절하자 그 다음 순위(?)인 마리를 꼬드겨 동반자살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찌질남과 중2병의 불륜 막장극이지만, 정황상 후대인들은 그냥 낭만적인 비극으로 보게 되면서 마이어링 사건은 2차 저작물로까지 만들어졌다.《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라는 책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일루셔니스트》란 영화도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만들었고[34], 루돌프에 대한 뮤지컬도 2012년 말, 2014년말 한국에서 공연했었다.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에서는 제임스 모리어티가 개입한 사건 중 하나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기사가 나온다.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일대기를 다룬《엘리자벳》에서도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 사건을 마이어링 왈츠라는 춤으로 표현한 장면이 있다.


4.1.3.1. 손녀 엘리자베트 마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엘리자베트 마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4.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편집]


루돌프 사망 후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가 황태자가 되었지만 그는 1896년 형보다 먼저 사망하고, 세 번째 황태자로 선택된 황제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1863년 ~ 1914년)는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35]와 함께 1914년 6월말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차 갔다가 가브릴로 프린치프 (1894년 ~ 1918년)[36]의 피격을 받아 죽고 만다.[37] 그로부터 딱 한 달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4.1.5. 종손 카를 1세[편집]


네 번째 황태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인 카를[38] (1887년 ~ 1922년)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종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를 1세는 즉위 후 딱 2년 만에[3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중분해되면서 몰락하고 만다. 카를 1세는 일반적인 "망국의 군주"들과는 달리 성실하고 머리 좋은 인물이었지만 당시의 상황상 제국의 해체를 막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제국 해체 이후 몇 년 뒤에 사망한다. 자세한 내용은 카를 1세 항목을 참고.


4.2. 가계도[편집]


비극적으로 사망한 인물은 ☆ 처리.


4.2.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Archduke Franz Karl of Austria)
프란츠 2세
(Francis II)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공주
(Infanta Maria Louisa of Spain)[41]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
(Princess Maria Theresa of Naples and Sicily)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King of the Two Sicilies)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Carolina of Austria)[42]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e of Bavaria)
바이에른 왕국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ederick Michael,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Franziska of Sulzbach)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4.2.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조피 여대공
(Archduchess Sophie)
1855년 3월 5일
1857년 5월 29일

2녀
기젤라 여대공
(Archduchess Gisela)
1856년 7월 12일
1932년 7월 27일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43]
슬하 2남 2녀
1남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Rudolf, Crown Prince of Austria)
1858년 8월 21일
1889년 1월 30일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44]
슬하 1녀[45]
3녀
마리 발레리 여대공
(Archduchess Marie Valerie)
1868년 4월 22일
1924년 9월 6일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대공 프란츠 잘바토어[46]
슬하 4남 6녀


5. 대중매체[편집]


중년의 엘리자베트 황후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로 당연히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초상화의 모습으로 익숙한 콧수염을 단 중년으로 나온다.
75번째 에피소드인 "요한 제리(Johann Mouse)"에서 카툰풍 그림체로 등장한다. 나레이션은 단순히 황제라 칭하지만 시대적 배경도 그렇고 황제의 수염이 누가 봐도 이 분이다. 근위병을 시켜서 제리를 황궁으로 초대하여 그들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한다.
'프린세스 시씨' 스토리에선 초반에는 언급을 통해 존재 자체가 암시가 되었으나 사실은 다르게 흘러갔다.[47]
작중 주인공의 행동으로 인해 보오전쟁의 피해를 빠르게 수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복원하는 등 실제 역사보다 더욱 유능한 군주로 등장한다.
하츠오브아이언 4의 1차 세계대전 모드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내가 주인공인 뮤지컬이니만큼 당연히 조연으로 등장한다.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주인공인 뮤지컬이라 조연으로 등장한다.

6. 여담[편집]


파일:나폴레옹 2세, 프란츠 요제프 1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jpg
  • 어렸을 때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와 만난 적이 있다. 상단의 초상화에서는 나폴레옹 2세가 어린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안고 있다. 참고로 나폴레옹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와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이 친남매이니 두 사람은 사촌 지간이다.
  • 본인이 80세 이상 장수한 백발의 노인인데다가 동맹국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워낙 철딱서니없이 외교를 해서(...) 의외로 잘 부각이 안되는 사실인데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30년생이고 빌헬름 2세는 1859년생으로 의외로 나이차이가 아버지뻘 정도 밖에 안난다.(...) 그러니까 막나가는 손자와 한숨 내쉬는 할아버지 수준의 나이차이는 아니다.(...) 빌헬름 2세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3세보다 1살 더 많다. 참고로 루돌프 황태자는 1858년생으로 빌헬름 2세보다 1살 더 많다.
  • 앞서 언급되었듯, 이 사람 본인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가족구성원들이 본인보다 더 유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가족들을 소재로 뮤지컬만 두 편이 나왔을 정도. 마누라아들내미는 본인과는 여러모로 상극에 황실 최고의 유별난 인품을 지녔던 데다 본인의 가정사 문제도 작지 않았겠지만 그로 인해 말미암은 최후가 너무도 비극적이었고, 동생은 후계자도 없이 바다 건너에서 총살당했으며, 심지어 본인의 장조카이자 제국의 후계자전세계를 할퀸 대전쟁의 단초로 희생당했다. 당연히 가족들 전부 좋은 쪽으로 유명한 건 아니었는데다 하나같이 동생을 제외하면 본인과의 충돌로 인해 벌어진 여러 문제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본인이 장수했기 때문에 삶이 꽤나 고달팠을 것이다.
파일:빈_두정갑.png
  • 조선과 오스트리아의 수교 당시 조선 군주인 고종에게 선물받은 조선식 두정갑 세트를 한 벌 소유했다. 일명 빈 두정갑. 해당 갑주는 현재 빈미술사박물관에서 보존 및 전시 중이다. 해외 소재 조선 갑옷 유물 중 반출 경로가 명확한 유일한 유물이며, 보존 상태 또한 최상급이다. 거기다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며 주고 받은 선물이었기에 그 역사적 가치 또한 막대하다. 이 갑주는 지난 2022년 10월부터 2023년 3월까지 국내로 잠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생전에 당연하게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었다. 다만 정식으로 군 계급을 가지고 있진 않았었고, 독일 제국으로부터 부여받은 명예계급인 독일 육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 계급만을 보유하고 있었다.[48] 다만 문서 최상단의 초상화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 예복 차림의 모습이다. 총사령관으로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위치는 실질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었다. 군사 문제에 개입할 때에는 친한 동갑내기 중신이었던 육군참모총장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백작의 조언을 받아 개입하곤 했다. 그리고 1차 대전 발발 직전에 총사령관직을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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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 With united forces.[미덕] My trust in virtue.[원문] Sein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apostolische Majestät, Franz Joseph I., durch die Gnade Gottes Kaiser von Österreich, König von Ungarn, Böhmen, König von Lombardei und Venedig, vo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und Illyrien; König von Jerusalem usw., Erzherzog von Österreich; Großherzog der Toskana und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von Salzburg, der Steiermark, Kärnten, Krain und der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schlesien und Niederschlesien, von Modena, Parma, Piacenza und Guastalla, von Auschwitz, Zator und Teschen, Friaul, Dubrovnik und Zadar ;. Fürstlicher Graf von Habsburg und Tirol, von Kyburg, Görz und Gradisca; Prinz von Trient und Brixen; Markgraf der Ober- und Niederlausitz sowie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usw .; Herr von Triest, von Kotor und über den Windmarsch; Präsident des Deutschen Bundes.[원문2] Seine kaiserliche und königliche apostolische Majestät Franz Joseph I. durch die Gnade Gottes, des Kaisers von Österreich; Apostolischer König von Ungarn, König von Böhmen, Dalmatien, Kroatien, Slawonien, Galizien, Lodomerien, Illyrien; König von Jerusalem usw .; Erzherzog von Österreich; Großherzog der Toskana, Krakau; Herzog von Lothringen, Salzburg, Steiermark, Kärnten, Krain, Bukowina; Großfürst von Siebenbürgen; Markgraf von Mähren; Herzog von Oberschlesien und Niederschlesien, Modena, Parma, Piacenza, Guastalla, Oswiecin, Zator, Cieszyn, Friaul, Ragusa, Zara; Fürstlicher Graf von Habsburg, Tirol, Kyburg, Görz, Gradisca; Prinz von Trient, Brixen; Markgraf der Ober- und Niederlausitz in Istrien; Graf von Hohenems, Feldkirch, Bregenz, Sonnenberg usw .; Herr von Triest, von Kotor und über den Windmarsch; Großer Woiwode der Woiwodschaft Serbien usw. usw.[1] 성교를 할 때면 간질 발작이 일어났다고 한다.[2] 재위: 1837년 6월 20일~1901년 1월 22일, 63년 216일.[3] 매일 새벽 5시에 어김 없이 일어나서 10시간 이상 집무했다.[4] 초콜릿 케이크 자허토르테를 개발한 그곳.[5] 최종적으로는 러시아 제국군의 도움으로 헝가리 독립군을 진압했다.[6]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인 왈라키아 공국몰다비아 공국. 크림 전쟁 시기까지도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다.[7] 헝가리 반란 진압에 도움을 주고자 대규모 병력과 차관까지 보낸 것에 대한 보답이 배신이었던지라, 러시아 제국 정부는 니콜라이 1세가 임종할 때 그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고 보불전쟁 때까지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한 것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에 비스마르크삼제동맹을 제의했을 때부터였다. 이때쯤 와서는 시간도 많이 흐르고 보오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대패하자, 러시아가 이를 신나게 비웃으면서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상황이었다.[8] 그나마 상당한 희생자(7,000명 이상)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를 배신 때리고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덕분에 베네치아는 간수했다. 하지만 7년 뒤…[9] 빌헬름 1세는 최소 보헤미아 왕국은 가져와야 한다 생각했다.[10] 니더외스터라이히, 오버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포어아를부르크, 케른텐, 슈타이어마르크, 티롤,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부코비나, 크라인, 달마티아, 퀴스텐란트, 헝가리,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디나. 그리고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포함한다.[11] 제정이 유지되었다면 빌헬름 2세, 빌헬름 황태자(빌헬름 3세)에 이어 빌헬름 4세가 되었겠지만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가문에서 대대로 쓰던 "빌헬름"이란 이름을 물려준 것에서 장남에 장손으로서 빌헬름 황태손에 대한 기대감은 컸었다.[12] 그 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사도왕을 겸하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가 한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이던 헝가리 왕국을 제국에서 분리한 뒤 헝가리를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파트너로 인정해준 것이지 새롭게 헝가리의 사도왕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13] 이쪽은 헝가리인들의 입장에선 긍정적인 업적이지만 그 헝가리인들이 자국 치하의 민족(특히 슬로바키아인)을 탄압했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마냥 긍정적인 업적으로만 보기 힘들다.[14] 실제로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던 것에서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한지 제대로 드러났다.[15] 심지어 1880~90년대 독일의 생산력은 산업 혁명의 종주국인 영국과 강대국 프랑스를 뛰어넘을 정도였다.[16] 이때 독일 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선택은 이상하게도 근시안적이었다.[17]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18]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이 대전쟁 첫 전투였으니 당시 이중제국의 지리멸렬함을 엿볼 수 있다.[19] 이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책임이 오스트리아 및 합스부르크 왕가에만 있다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전술했다시피 동맹국인 독일이 외교적으로 뻔히 고립되는 선택을 하는걸 방관한 점에서 아예 자유로운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들어가면 협상국에서도 프란츠 요제프 1세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전쟁 원인을 제공한 인물과 국가는 많다. 예를 들면 차기 국왕 후보 암살단을 지원한 세르비아와 그 세르비아를 처음으로 전면 지원한 러시아 등.[20] 합스부르크 황실과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조피 대공비 입장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엘리자베트에게 가혹한 시어머니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가정사에까지 어머니한테 휘둘리고 산 프란츠 요제프 역시 좋은 남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이러니한 건 조피도 젊었을 땐 엘리자베트처럼 당찬 성격에 총명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정략결혼으로 정신박약아로 유명한 프란츠 카를과 사랑없는 결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조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외롭게 지냈던 나폴레옹 2세와 가깝게 지냈지만, 나폴레옹 2세 사후 더 이상 마음 기댈 곳이 없어지자 마음을 닫고 흑화해 버렸다.[21]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친할머니 자격으로 차기 황제의 교육을 빌미로 몰인정한 짓을 한 셈. 엘리자베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루돌프 황태자는 저렇게 어린 시절부터 훈육을 빙자한 학대를 당하며 일찍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에게 교관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꾸라고 협박해 교관을 바꾸게 한 것.[22] 루케니는 체포되고 나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스위스는 사형이 폐지된 터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0년 후 교도소에서 목매어 자살했다.[23] 프란츠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카를 대공이탈리아 왕국움베르토 1세의 어머니 아델하이트가 친사촌 관계다.[24] 움베르토 1세의 장모 제노바 공작부인 엘리자베트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종사촌이다.[25] 번외로 6촌 동생이자[23] 5촌 조카사위인[24] 움베르토 1세도 그로부터 2년 뒤인 1900년에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 가에타노 브레시의 손에 암살당한다. 이탈리아 역시 사형이 폐지된 터라 이 브레시도 루케니처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6] 적어도 애첩 문제와 그에 관한 뒷처리만큼은 엘리자베트와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더 깔끔하고 현명했다. 두 사람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생팬 마리 폰 베체라를 애첩으로 삼아 사촌인 라리쉬 백작부인까지 끌어들여, 불륜 행각을 벌이고 본래 아내인 스테파니 황태자비와 혼인무효화를 하겠다니 뭐니 온갖 추문을 일으키다가 동반자살하기까지 했다.[27] 풀네임은 스테파니 클로틸드 루이즈 헤르미네 마리 샤를로트(Stéphanie Clotilde Louise Herminie Marie Charlotte).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트보다 못할뿐 미녀였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미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엘리자베트 황후가 며느리인 스테파니를 싫어했던 이유가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 루돌프 역시 스테파니가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다'며 탐탁치 않았지만 그동안 여러 지체높은 가톨릭 왕가와의 혼담을 내친 터라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28] 사실 이 병이 황실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를 여성편력으로 풀던 루돌프가 스테파니에게까지 옮긴 성병이라는 얘기도 있다.[29] 루돌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의 오빠 루트비히 빌헬름이 귀천상혼하여 낳은 딸.[30] 예외적으로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혼인성사 참조.[31] 영국헨리 8세도 교황이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을 무효화해주지 않자 빡쳐서 가톨릭을 버리고 성공회를 만든 뒤 앤 불린과 재혼했다.[32] 당연히 루돌프와 베체라의 밀회를 적극적으로 주선한 라리쉬 백작부인도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분노를 사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쫒겨나고, 전부터 사이가 나쁘던 남편에게도 이혼당했으며 말년에는 고모 엘리자베트 황후를 비롯한 오스트리아 황실 이야기를 팔며 빈곤하게 살다가 1940년에 사망했다. 심지어 그냥 베체라를 소개시켜준 것도 아니고 루돌프에게 수입을 보장받는 대가로 두 사람의 불륜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뚜쟁이 노릇을 자처한터라, 조카딸을 아끼던 엘리자베트 황후마저 큰 충격을 받고 분노하여 이후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라리쉬는 이름조차 불러선 안될 자가 되었다.[33] 머리에 총을 대고 자살하면 총 내부의 가스가 터져나오면서 총상 주변에 총구 모양의 화상이 남게 된다. 화상이 없다는 것은 멀리서 쐈다는 뜻이다.[34]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많은 내용이 사실과 정말 많이 다르다. 이 영화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현실 역사와는 무관한 패러럴 월드로 보는 것이 맞다. 여기선 약혼녀를 죽인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려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약혼녀는 주인공 마술사에게 뺏긴다. 덤으로 천하의 개쌍놈으로 모는데 그 약혼녀도 일조했다.[35] 조피는 왕녀가 아니라 한낱(?) 백작의 딸이었기 때문에 귀천상혼(貴賤相婚)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황태자였지만 조피는 황태자비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도 모두 계승권이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조피와 그녀의 자식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쌍하게 여긴 것인지 이들의 결혼과 함께 조피에게 호엔베르크 공작 작위를 주고 그 후손들이 계승하게 했다.[36]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검은 손> 조직원으로 수감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공범 중 한 명은 잡혀서 16년 동안 복역하다 나와 1990년 93살로 죽었다.[37] 귀천상혼 문제로 조피는 페르디난트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날 사라예보에서의 행사는 공식 행사이긴 해도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아닌 군 사령관으로서 참석한 행사였기에 아내도 동석할 수 있었다. 기필코 아내를 공식석상에 동행시키려는 페르디난트의 꼼수였으나 운이 없어도 참 더럽게 없던 셈. 페르디난트가 필사적으로 남긴 유언은 "조피! 죽지 마시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였다고 한다.[38]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남동생인 오토 프란츠 대공의 장남.[39] 1916년 11월 말에 즉위해 1918년 11월 퇴위[40]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건 아니지만 오스트리아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락하고 폐위되자 실의에 빠져 병고에 시달리다 사망했다.[41] 카를로스 3세의 차녀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녀이다.[42]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이다.[43]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다.[44] 레오폴드 2세의 차녀이다.[45] 빈디슈그레츠의 오토 공비 엘리자베트 마리[46] 토스카나 대공국레오폴도 2세의 손자이자 양시칠리아 왕국페르디난도 2세의 외손자이다.[47] 스포일러 시씨가 초반에 만났던 수수께끼의 육군 장교 '리샤르트'의 진짜 정체였다! 여기서는 실제와는 달리 적극적이고 좋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리고 비극으로 얼룩져 버린 실제 가정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게 프란츠 황제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다.[48] 당시 동맹국 수장들끼리는 서로 자기 군대의 명예 원수직 호칭을 수여하였다. 그 외에도 일부 왕족들 역시 동맹국의 명예 장성 계급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