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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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Frantz F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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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5년 7월 20일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포르드프랑스
사망
1961년 12월 6일 (향년 36세)
미국 메릴랜드 주 베세즈다
직업
학자, 정신과 의사, 독립운동가, 외교관
분야
정신분석학, 철학
학력
리옹 대학교

1. 개요
2. 생애
3. 저서



1. 개요[편집]


인간에게는 강자로부터 수직폭력을 당할수록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려는 수평폭력 심리가 있다.


마르티니크 출신 알제리의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철학자, 독립운동가, 외교관으로, 현대 탈식민주의 철학의 대부로 평가된다.

2. 생애[편집]


파농은 1925년에 카리브 해에 위치한 프랑스령 앤틸러스 제도의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어머니는 흑백 혼혈이었다.

파농이 탈식민주의를 연구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었다. 그는 승산이 없어 보였던[1] 자유 프랑스 군에 자원입대했고, 나치 독일의 괴뢰정권인 비시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도, 종전 후에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인 프랑스인과 '같은 프랑스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접한 뒤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이후 리옹 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와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파농은 프랑스에서 의사생활을 하다가 알제리로 이주했다.

알제리에 정착한 파농이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알제리에서 폭력 사태가 매우 빈번하고 그 내용도 충격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천막에 돌아온 알제리인이 옆 천막의 아기가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그 아기를 흉기로 찔러 죽이는 식이었다. 당시 알제리를 식민지배하던 프랑스인들은 '알제리인은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 없이 살인을 하고 범죄 성향이 강하다'는 논리로 알제리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즉, '깜둥이들은 원래 폭력적'이라는 인종차별적 선전이 난무했다. 하지만 파농은 자신이 1954~1959년에 직접 치료한 환자들의 치료기록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악선전에 반격했다. 반론의 요지는 '알제리 국민들이 폭력적인 이유는 바로 프랑스인들이 가하는 수직폭력 탓'이라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폭력론'은 현대 정신의학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한편 파농은 알제리에서조차,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백인 환자에게 인종차별을 당했다.[2] 그러나 그는 그런 상황을 강력한 열정으로 이겨냈고, 알제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파농의 탈식민주의 사상은 알제리 전쟁 당시 알제리인들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신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파농 자신도 외교관 자격으로 프랑스의 폭정과 학살에 맞서 알제리 독립을 위해 활약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폴 사르트르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파농은 알제리의 실질적인 독립을 3달 앞둔 시점인 1961년 12월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백혈병으로 사망한다.

현재 알제리에서는 파농을 외국 출신임에도 알제리를 독립시키기 위해 프랑스에 맞서 싸운 투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수도 알제의 중심 거리에 '프란츠 파농 가'라는 이름을 붙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3. 저서[편집]


파농은 전공인 정신분석학을 응용한 세련된 방법을 통해 식민지들이 독립해야 할 당위성을 전파하는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저서는 미국에서도 발간되어 맬컴 엑스를 비롯한 흑인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1952)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1961)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파농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알제리의 상황을 깊이 있게 통찰했다. 이로써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이끌어냈고, 알제리 사회가 독립을 이뤘음에도 민족주의를 앞세운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에 의해 재차 종속되어가고 있다며 비판했다. 이런 논의는 한때 일제의 식민지였고 친일청산에 실패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공감을 주었다. 1980년대에는 군부독재 타도를 기치로 내건 학생운동권, 개중에서도 미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주장한 NL계열의 학생들이 파농의 사상에 크게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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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 절대 다수의 프랑스 식민지들은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2] 아랍계인 북아프리카인에 비해, 부모의 출신이 중앙아프리카였던 파농은 더욱 흑인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