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톰발바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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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드 공화국 제1-3대 대통령
프랑수아 톰발바예
François Tombalbaye | فرنسوا تومبالباي


출생
1918년 6월 15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남부 모옌 샤리 주
사망
1975년 4월 13일(향년 56세)[A]
파일:차드 국기.svg 차드 공화국 은자메나
국적
파일:차드 국기.svg 차드
출신 정당
차드 진보당 (1960~1975)
임기
1960년 8월 11일 ~ 1975년 4월 13일[A]
종교
기독교
1. 개요
2. 생애
3. 사망



1. 개요[편집]


차드의 정치인이며 초대, 2대, 3대 대통령이다.(1960~1975) 쿠데타로 처형되기 전까지 약 15년간 공식적으로[1]차드 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2. 생애[편집]


1918년 6월 15일생으로 프랑스령 차드 남부의 모옌 샤리 주에서 태어났다. 차드 남부지역 샤리 주에서 사라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나름 고귀한 출신이다.[2] 젊은 시절 모국인 차드의 열악한 교육시설로 그는 콩고 공화국의 수도였던 브라자빌로 유학을 갔고 결국에 교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나치 독일괴뢰 정부였던 친나치 성향의 비시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며 자유 프랑스를 지원하였다.

개명으로 1973년부터 총살직전까지 응가르타 톰발바예(Ngarta Tombalbaye)라고 불렸다. 그는 젊은 시절 교사였으며 무역연맹 운동가로 점점 정계에 입문하다 결국 차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 총리였고 당시 여당이던 차드 진보당의 당수로서 톰발바예는 1960년 8월 11일 독립 이후 대통령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무슬림계 북부 차드인들을 몰아냈고 차드 진보당을 제외한 정당들을 불법화하는 등 독재 성향을 보였다.


3. 사망[편집]


1970년대에 들어 톰발바예는 모부투 세세 세코를 따라 아프리카화 정책을 실시하여 포르라미를 은자메나로 고치고 자신의 이름도 은가르타 톰발바예로 바꿨다. 하지만 아프리카화 정책은 기독교계나 무슬림계를 막론하고 차드 국민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 가뭄이 악화됐기 때문에 경제침체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 차드 국민들에게 목화 생산관련 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강요했지만 결국 기독교계 남부에서의 톰발바예 지지율은 급락했다. 급기야 톰발바예는 군대 내 진급과 강등을 제멋대로 처리하여 많은 군인들의 불만은 커져만갔다. 결국에는 불만이 고조될대로 고조된 1975년 4월 13일 반역죄로 여러 군 지도자들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이것을 필두로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쿠데타를 일으켜 톰발바예에게 총살형을 집행한 뒤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마치고 쿠데타를 주도하던 전 육군참모총장이자 톰발바예의 정적이던 펠릭스 말룸 장군[3]노엘 오딩가르를 주축으로 새로운 내각 수반을 내세우며 그의 독재정권은 15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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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임기중 쿠데타로 인하여 총살당했다.[1] 정확히는 5358일로 14년 35주로 15년에 약간 못 미친다.[2] 그래서 상단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얼굴에 사라족 부족원들 특유의 칼로 새긴 여러 개의 흉터들이 있다.[3] 계급은 준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