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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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 제3대 국왕
프랑수아 2세
François II

이름
프랑수아 드 프랑스
(François de France)
출생
1544년 1월 19일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사망
1560년 12월 5일 (향년 16세)
프랑스 왕국 오를레앙 그로슬로 저택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559년 7월 10일 ~ 1560년 12월 5일
배우자
메리 여왕 (1558년 결혼)
아버지
앙리 2세
어머니
카테리나 데 메디치
형제
엘리자베트, 클로드, 루이, 샤를 9세, 앙리 3세, 마르그리트, 프랑수아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프랑수아 2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앙부아즈의 음모 사건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3대 왕. 스코틀랜드 왕국 메리 여왕국서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장남으로 결혼 11년 만에 태어난 첫 아들이라 그의 할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대단히 기뻐하며 후계자로 지명했다. 4세 때인 1548년 1월 27일 스코틀랜드메리 여왕과 약혼했고, 14세 때인 1558년 4월 25일 결혼했다. 메리 여왕은 부왕 제임스 5세가 급사하자 생후 9개월 만인 1543년 9월 스털링에서 이미 여왕으로 즉위한 상태였다. 프랑수아 2세도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하자 1559년 7월 10일 프랑스 왕이 되었다.

메리 여왕은 제임스 5세의 외동딸이었으니 프랑수아 2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면 그 아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의 왕이 되었을테고, 거기다가 메리 스튜어트의 증조 외할아버지는 헨리 7세였으니 그 아들은 잉글랜드 왕위까지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튜더 왕조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대가 끊기면서 헨리 7세의 후손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아야 되자, 메리 여왕이 두 번째 남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되어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의 국왕이 되었다. 만약 엘리자베스 1세를 끝으로 튜더 왕조의 대가 끊기는 동시에 프랑수아 2세가 오래 살아 메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더라면, 현재의 대영제국+프랑스 동군연합이라는 광대한 제국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었다.

문제는 프랑수아 2세가 어리고 통치능력이 없었으며, 약골이라 병치레를 자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일찍 사망하면서 짧은 결혼생활 동안 메리 여왕과의 사이에서 자손을 두지 못했다. 메리 여왕은 시어머니 카트린을 상인이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는데, 이는 자식도 없이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자 되려 카트린에 의해 스코틀랜드로 쫒겨나다시피하는 원인이 되었다.

2.1. 앙부아즈의 음모 사건[편집]


프랑수아 2세가 이런 상황이라 그의 아내 메리 여왕의 외삼촌인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과 로렌 추기경 샤를에 의해서 국사가 운영되었다[1]. 이들이 큰 권력을 가지게 되자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와 그녀의 부군인 방돔 공작 앙투안[2] 및 그의 아우인 콩데 공작 루이 등은 위그노 귀족인 라 노르디를 중심으로 한 불평귀족들과 손을 잡고 어린 왕을 꾀어 내어 기즈 집안을 공격할 것을 약조했으나, 1560년 3월 17일 시행 직전에 발각되어 수백명의 관련자들이 처형되거나 구금되었는데 이 사건을 앙부아즈의 음모라고 부른다. 기즈 형제는 부르봉 가문의 콩데 대공 루이가 흑막이라고 의심했다. 콩데 공은 11월에 체포되었는데 이 일로 양측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12월 오를레앙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위그노에 대한 심한 규제가 통과되었고 콩데 공작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에 발생한 농양으로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12월 5일 요절하는 바람에 콩데 공작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위그노들은 가톨릭 교회의 성상(聖像)을 1560년 북부의 루앙과 서부의 라 로셀에서 처음으로 파괴했는데, 프랑수아 2세가 죽은 후인 이듬해(1561)에는 20개의 도시에서 위그노들이 성상을 부수었다. 이에 격노한 가톨릭 도시 주민들에 의한 유혈 복수가 상스, 카올, 카르캉느, 투르 등 각 도시에서 발생했다. 왕태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퐁텐블로에서 자문회의를 소집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합을 의도했지만 기즈 가문은 이단자는 모두 숙청해야 한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선왕 앙리 2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억눌려 있었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프랑수아 2세의 재위 기간을 기점으로 권력 장악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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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59년에 일어난 앙리 2세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정치적 공백을 야기하여, 프랑수아 2세의 왕비인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 쪽 친족인 기즈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은 칼레를 잉글랜드로부터 탈환한 전쟁영웅이었고, 그 동생인 로렌 추기경 샤를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매우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다. 한편 신교도들은 부르봉 가문의 당주인 나바르 왕 앙투안을 맹주로 추대했지만 그는 열성적인 신교도 아내인 나바르 여왕 잔 달브레(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의 딸)에게 주도권을 내어 준 유약한 인물이었다. 이에 다시 동생인 콩데 대공 루이 드 부르봉이 신교도들의 중심이 되었다.[2] 훗날 앙리 4세가 되는 앙리 드 부르봉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