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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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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왕국에 대하여 다룹니다. 1814년~1830년 사이의 프랑스 왕국에 대한 내용은 부르봉 왕정복고 문서
1791년 혹은 1792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왕국.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위그 카페가 왕위에 선출된 987년 시기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카운트하지만,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 서프랑크 왕국과 동일한 정치체였으며 존엄왕 필리프 2세 재위에 비로소 국명을 프랑크의 발음이 변화된 프랑스으로 칭해지게 된다.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루이 5세가 자식 없이 사망한 후, 결국 세를 키우던 위그 카페가 귀족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된 군주였고 카페 가문의 정통성은 처음에는 매우 미약했다. 기존의 지배자인 카롤루스 왕조와는 모계로 친척 관계였으나 부계로는 혈통이 닿지 않았고,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파리 백작을 역임하긴 하였으나 당시의 내로라는 명문가들에 비하면 역사가 짧았다. 그렇기에 초창기의 카페 왕조는 자칫 실수 한번 하면 그대로 패망하는 위험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당시 남부와 서부 동부에는 카페 왕조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크고 아름다운 영지를 지닌 영주들이 있었고 카페 왕조는 이들의 명목상 군주일 뿐이지 제대로 된 실권은 없다시피하였다.
하지만 적장자들을 낳으며 점점 왕조의 정통성을 쌓아가고 결혼 상속, 때로는 과감한 영지 몰수 등을 강행하여 점진적으로 왕권 강화를 꾀하였으나 1066년, 휘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잉글랜드 왕국으로 쳐들어가더니 잉글랜드왕인 윌리엄 1세로 즉위하고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스 서북부 일부를 통째로 가지고 날라버린다.[7] 명목상으로는 윌리엄도 프랑스 군주의 신하였으나 프랑스의 군주로서도 윌리엄과 그의 후손들을 쉽게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 루이 9세와 같은 명군들을 배출하여 지속적으로 대영주들과 잉글랜드 군주의 영향력과 권력을 조금씩 빼앗아 군주의 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가 대영주들이 십자군 전쟁에 투자했다가 파산하여 몰락하는 등 프랑스 군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 따라준다. 그렇게 야금야금 잉글랜드 군주와 대영주들을 견제하던 와중 샤를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단절된다.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며 그 당시 잉글랜드 군주였던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에 대한 야심으로 인하여 백년전쟁이 시작된다.
백년전쟁은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그 결과로 잉글랜드의 군주는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8] 그리고 백년전쟁으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소비되었으나 오히려 이는 새로이 집권한 발루아 왕조에게는 호기가 되었다. 끝없는 전쟁에서 결국 승리해냄으로 그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는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고, 몰락한 영주들을 일방적으로 깨부셔 그들의 영지를 빼았고 관료들을 등용해 절대 왕정의 체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발루아 왕조는 마지막 군주가 후사를 남기지 못해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부르봉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빙하기가 끝나고 작황사정이 호전됐고, 명군 앙리 4세가 국채 경감·농민층의 세금 부담 완화·화폐개혁 등 일련의 경제 개혁 정책을 시도하면서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으며,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은 절정에 오른다. 특히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시도해서 무역으로 꽤나 많은 부를 프랑스에 선사했다. 부르고뉴 공국도 17세기 말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대 군주들이 차곡차곡 쌓은 과실을 따먹은 인물이 바로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 활발한 대외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 등의 호화 사치를 핵심으로 하는 루이 14세의 정책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인두세, 소득세, 재산세 등을 도입한다. 한편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 장관이었던 콜베르는 각종 공업을 왕실 차원에서 유치하면서 외국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보호무역를 실시하여 외국 상품의 프랑스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앙으로의 세금 징수 및 전국적인 물산 유통의 원활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으로의 교통망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도 콜베르의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가 워낙 돈을 흥청망청 써댔고, 특히 전쟁을 통한 영광에 집착한 왕의 행보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이어졌다.[9] 다만 통념과 달리 낭트 칙령의 폐지와 위그노의 이탈은 큰 타격이 아니었다.[10] 결국 루이 14세의 사망 무렵(1715)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루이 15세 시기에는 경제가 느리지만 천천히 회복되는가 싶었다.[11] 그런데... 루이 15세 말기 7년 전쟁이 터지면서(1756) 경제 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7년 전쟁으로 빚은 빚대로 졌는데, 전쟁까지 지면서 북아메리카와 인도의 식민지 대부분을 잃으면서[12] 프랑스의 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벌 영국을 어떻게든 엿먹여보겠다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면서 프랑스의 재정적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물론 신생국 미국이 승리하면서 목적은 달성했지만, 이 시점에서 정부의 부채는 이미 통제 내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버렸고(...) 계속해서 흉년이 일어나고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중들, 특히 수도 파리의 빈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당시 군주인 루이 16세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를 등용하면서 세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본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결국 개혁의 마지막 노력들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수백 년에 걸쳐 쌓인 프랑스 왕국의 모든 모순과 불만이 폭발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루이 18세가 즉위함으로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밀려 잠시 부르봉 왕조가 종식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여 다시 퇴위한 이후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함으로 십여년간 부르봉 왕조가 지속되었으나 샤를 10세의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구 시도가 결국 7월 혁명을 촉발하여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방계인 루이필리프가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필리프도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로 인해 2월 혁명으로 퇴위, 이후 프랑스는 제2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루이 14세를 필두로 한 절대왕정 시기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 시기 프랑스의 중앙집권화 및 전문관료들의 등장은 사실이 아님을 1960년대 이후 연구 결과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정 조직은 인원이 제대로 갖춰져 있기는커녕 기본적인 조직 틀조차 정립되지 않아서 푸케, 콜베르와 같은 초기 관료들이 골머리를 앓게 했다. 또한 과세, 사법[13] , 입법 등 많은 행정 영역에서 실제적인 통치는 군주보다는 귀족과 가톨릭 사제들의 의중에 의하여 행해졌으며, 몇몇 도시들(가령 몽펠리에)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도 각종 봉건적인 특권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했다.
한편 지방 통치의 경우 샤를 6세 시기였던 15세기 초부터 국왕은 총독(gouverneur)이라고 불리는 행정관을 지방에 파견했지만 그것조차 전국적으로 파견된 것은 아니었으며, 군주의 대리인이라는 규정과 달리 이들은 군주의 의사를 멋대로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중대로 지방을 통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총독직을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세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17세기 무렵 총독들이 각종 정치적 음모를 계속 꾸미자 이에 질려버린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과세, 사법 각종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인들을 파견했을 정도. 그리고 이게 먹혀들어서 관리인 파견 이후 총독들의 힘이 대폭 약화됐다.
프랑크 왕국 시절만 하더라도 궁재, 둑스, 코메스와 같은 관직들이 있었으나 이후 발생한 혼란기 등으로 인해 폐지되거나 아예 세습화되다가 다시 중세 중기가 되면서 다시 새로운 관직들이 신설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관직들은 전부 프랑스계였던 지배층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다만 이중 지명 섭정으로 알려진 Baillis의 경우 본래는 북프랑스 일대에 파견된 사법관들을 가리키던 명칭이었다.
이후 13세기 루이 8세가 즉위하면서 대귀족제를 실시하면서 관직를 대대적으로 개편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왕관중신으로 불리는 관료 집단이 왕의 명을 받고 프랑스의 행정을 총괄하게 된다.
이후 미남왕 필리프 4세에 이르기까지 더 복잡해진 행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 부서를 신설했다. 첫째, 정치 서류들을 조사하는 대참사원(Grand Conseil), 둘째 사법을 관장하는 고등법원(Parlement), 셋째 재정 전문 회계원(Chambre des Comptes)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6세기 중반인 1546년 앙리 2세에 의해 국무경직이 신설되어 1588년에 재대로 유의미한 행정관직으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군주가 바꿔질때마다 외교업무를 맡은 외무국무경을 제외한 4개의 국무경직들을 폐지와 복설을 반복했다.
법무와 재무, 내무업무를 맡은 국무경직은 없었으며 대신 총리가 법무, 재무 총감이 재무를 세개의 국무경직이 지방별로 내무 업무를 겸임했다.
또한 이시기에 국가 행정과 왕실 행정을 분리되어 따로 왕실부(Département de la Maison du Roi)를 만들어 왕실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을 한데 모았다.프랑스 왕실부
프랑스의 군 관련 관직 (아래로 갈수록 낮은 직위.)
이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1년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면서 현재의 프랑스 공화국의 행정조직들의 기틀이 되는 법무부, 내무부, 재무부, 해군부, 전쟁부, 외무부로 전환되어 다음 해에 왕실이 폐지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왕국의 행정구
흔히 프로뱅스(Province)를 오늘날과 같은 용례로 생각하고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프랑스 왕국의 행정 체제는 앙시앵 레짐에도 쓰여 있듯이 모든 것이 모호했다. 심지어는 프로뱅스(Province)라는 단어의 용례조차도 모호하게 쓰였다.
아르망 브레트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프로뱅스는 사법구(Bailliages et Sénéchaussées)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고 군구(Gouvernements généraux militaires)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서 프로뱅스라고 올라오는 지도는 군구(Gouvernements généraux militaires)의 지도이다. 행정구(Généralités ou intendances)는 원래 징세구였으나, 행정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15]
프로뱅스의 기원은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영지들로서, 과거에 같은 위치에 있던 국가나 영지와 비교해보면 대충은 들어맞는다. 기원이 이렇다보니 시간이 흘러 지역의 유력 귀족이 여전히 영주처럼 군림하고[16] , 지역별로 법률, 조세제도, 문화 등등이 상이한 상황이었기에 혁명에서 승리한 프랑스 제1공화국 정부는 이것이 프랑스의 통일성을 저해한다고 보고 폐지해버렸다. 그리고 탄생한게 바로 지금도 레지옹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는 데파르트망. 오늘날의 레지옹은 이 군구를 바탕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프랑스는 이미 르네상스 시기에 국토 대부분이 광활하고 비옥한 평지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각종 다양한 농산물[17] 을 재배하는 한편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중요성이 증대한 광업 및 대장간과 같은 가내수공업을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다만 이 시기의 농공업 기술은 전반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중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그로 인해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는 단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그 당시 웬만한 유럽의 강대국 2개 이상을 합친것을 넘는 인구를 가졌다. 프랑스가 대부분의 영토를 확립한 16세기에 프랑스의 인구는 15,000,000명에 달했고 17세기에는 오스만 제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국가였으며[18] 1755년에는 인구 2,500만명으로 오스만 제국을 제치고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되었다.[19]
175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이 급격하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도 인구가 같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에 계속 1위를 유지했다. 결국 러시아가 프랑스의 인구를 완전히 추월한건 1814년부터였다.[20] #
그외 주요 경쟁국들인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보다는 2~3배, 나머지 국가들에 비해서는 몇 배는 되는 인구였다. 수도였던 파리는 1600년에는 220,000명이었고 1685년에는 510,000명이나 되어 런던 다음으로 유럽에서 인구가 많았고, 마르세유와 리옹 같은 도시들도 무역 및 금융업의 중심지로 번성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와 비슷하게 한 때는 유럽의 강대국이었으나 이후 제후국들로 분열된 신성 로마 제국[21] 의 제위를 반독점세습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결국 19세기에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을 프랑스 세력권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1804년 프란츠 2세는 느슨한 동군연합으로 묶여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지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전환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했다.[22]
이렇듯 언제든지 제국을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였지만 제국이라 스스로를 칭하지는 않았다. 물론 중세부터 언제나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던 건 틀림없다. 당장 프랑스 왕국의 궁전인 베르사유 궁전만 봐도 당시 황제국의 궁전인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궁전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23]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강력한 국력을 기반으로 나중에 나폴레옹 시대에 가면 진짜로 제국을 선포했다.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사 관련 정보/프랑스 역대 군주 항목 참조.
프랑스 역대 왕비 항목 참조.
, 1830년~1848년 사이의 프랑스 왕국에 대한 내용은 7월 왕정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1791년 혹은 1792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왕국.
2. 역사[편집]
2.1. 카페 왕조[편집]
일반적으로는 편의상 위그 카페가 왕위에 선출된 987년 시기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카운트하지만,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 서프랑크 왕국과 동일한 정치체였으며 존엄왕 필리프 2세 재위에 비로소 국명을 프랑크의 발음이 변화된 프랑스으로 칭해지게 된다.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루이 5세가 자식 없이 사망한 후, 결국 세를 키우던 위그 카페가 귀족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된 군주였고 카페 가문의 정통성은 처음에는 매우 미약했다. 기존의 지배자인 카롤루스 왕조와는 모계로 친척 관계였으나 부계로는 혈통이 닿지 않았고,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파리 백작을 역임하긴 하였으나 당시의 내로라는 명문가들에 비하면 역사가 짧았다. 그렇기에 초창기의 카페 왕조는 자칫 실수 한번 하면 그대로 패망하는 위험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당시 남부와 서부 동부에는 카페 왕조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크고 아름다운 영지를 지닌 영주들이 있었고 카페 왕조는 이들의 명목상 군주일 뿐이지 제대로 된 실권은 없다시피하였다.
하지만 적장자들을 낳으며 점점 왕조의 정통성을 쌓아가고 결혼 상속, 때로는 과감한 영지 몰수 등을 강행하여 점진적으로 왕권 강화를 꾀하였으나 1066년, 휘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잉글랜드 왕국으로 쳐들어가더니 잉글랜드왕인 윌리엄 1세로 즉위하고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스 서북부 일부를 통째로 가지고 날라버린다.[7] 명목상으로는 윌리엄도 프랑스 군주의 신하였으나 프랑스의 군주로서도 윌리엄과 그의 후손들을 쉽게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 루이 9세와 같은 명군들을 배출하여 지속적으로 대영주들과 잉글랜드 군주의 영향력과 권력을 조금씩 빼앗아 군주의 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가 대영주들이 십자군 전쟁에 투자했다가 파산하여 몰락하는 등 프랑스 군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 따라준다. 그렇게 야금야금 잉글랜드 군주와 대영주들을 견제하던 와중 샤를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단절된다.
2.2. 발루아 왕조[편집]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며 그 당시 잉글랜드 군주였던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에 대한 야심으로 인하여 백년전쟁이 시작된다.
백년전쟁은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그 결과로 잉글랜드의 군주는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8] 그리고 백년전쟁으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소비되었으나 오히려 이는 새로이 집권한 발루아 왕조에게는 호기가 되었다. 끝없는 전쟁에서 결국 승리해냄으로 그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는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고, 몰락한 영주들을 일방적으로 깨부셔 그들의 영지를 빼았고 관료들을 등용해 절대 왕정의 체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발루아 왕조는 마지막 군주가 후사를 남기지 못해 사라져버리고 만다.
2.3. 부르봉 왕조[편집]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부르봉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빙하기가 끝나고 작황사정이 호전됐고, 명군 앙리 4세가 국채 경감·농민층의 세금 부담 완화·화폐개혁 등 일련의 경제 개혁 정책을 시도하면서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으며,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은 절정에 오른다. 특히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시도해서 무역으로 꽤나 많은 부를 프랑스에 선사했다. 부르고뉴 공국도 17세기 말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대 군주들이 차곡차곡 쌓은 과실을 따먹은 인물이 바로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 활발한 대외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 등의 호화 사치를 핵심으로 하는 루이 14세의 정책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인두세, 소득세, 재산세 등을 도입한다. 한편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 장관이었던 콜베르는 각종 공업을 왕실 차원에서 유치하면서 외국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보호무역를 실시하여 외국 상품의 프랑스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앙으로의 세금 징수 및 전국적인 물산 유통의 원활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으로의 교통망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도 콜베르의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가 워낙 돈을 흥청망청 써댔고, 특히 전쟁을 통한 영광에 집착한 왕의 행보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이어졌다.[9] 다만 통념과 달리 낭트 칙령의 폐지와 위그노의 이탈은 큰 타격이 아니었다.[10] 결국 루이 14세의 사망 무렵(1715)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루이 15세 시기에는 경제가 느리지만 천천히 회복되는가 싶었다.[11] 그런데... 루이 15세 말기 7년 전쟁이 터지면서(1756) 경제 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7년 전쟁으로 빚은 빚대로 졌는데, 전쟁까지 지면서 북아메리카와 인도의 식민지 대부분을 잃으면서[12] 프랑스의 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벌 영국을 어떻게든 엿먹여보겠다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면서 프랑스의 재정적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물론 신생국 미국이 승리하면서 목적은 달성했지만, 이 시점에서 정부의 부채는 이미 통제 내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버렸고(...) 계속해서 흉년이 일어나고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중들, 특히 수도 파리의 빈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당시 군주인 루이 16세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를 등용하면서 세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본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결국 개혁의 마지막 노력들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수백 년에 걸쳐 쌓인 프랑스 왕국의 모든 모순과 불만이 폭발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루이 18세가 즉위함으로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밀려 잠시 부르봉 왕조가 종식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여 다시 퇴위한 이후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함으로 십여년간 부르봉 왕조가 지속되었으나 샤를 10세의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구 시도가 결국 7월 혁명을 촉발하여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방계인 루이필리프가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필리프도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로 인해 2월 혁명으로 퇴위, 이후 프랑스는 제2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3. 행정[편집]
루이 14세를 필두로 한 절대왕정 시기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 시기 프랑스의 중앙집권화 및 전문관료들의 등장은 사실이 아님을 1960년대 이후 연구 결과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정 조직은 인원이 제대로 갖춰져 있기는커녕 기본적인 조직 틀조차 정립되지 않아서 푸케, 콜베르와 같은 초기 관료들이 골머리를 앓게 했다. 또한 과세, 사법[13] , 입법 등 많은 행정 영역에서 실제적인 통치는 군주보다는 귀족과 가톨릭 사제들의 의중에 의하여 행해졌으며, 몇몇 도시들(가령 몽펠리에)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도 각종 봉건적인 특권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했다.
한편 지방 통치의 경우 샤를 6세 시기였던 15세기 초부터 국왕은 총독(gouverneur)이라고 불리는 행정관을 지방에 파견했지만 그것조차 전국적으로 파견된 것은 아니었으며, 군주의 대리인이라는 규정과 달리 이들은 군주의 의사를 멋대로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중대로 지방을 통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총독직을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세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17세기 무렵 총독들이 각종 정치적 음모를 계속 꾸미자 이에 질려버린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과세, 사법 각종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인들을 파견했을 정도. 그리고 이게 먹혀들어서 관리인 파견 이후 총독들의 힘이 대폭 약화됐다.
3.1. 관직과 행정기구[편집]
프랑크 왕국 시절만 하더라도 궁재, 둑스, 코메스와 같은 관직들이 있었으나 이후 발생한 혼란기 등으로 인해 폐지되거나 아예 세습화되다가 다시 중세 중기가 되면서 다시 새로운 관직들이 신설되기 시작했다. 일례로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관직들은 전부 프랑스계였던 지배층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다만 이중 지명 섭정으로 알려진 Baillis의 경우 본래는 북프랑스 일대에 파견된 사법관들을 가리키던 명칭이었다.
이후 13세기 루이 8세가 즉위하면서 대귀족제를 실시하면서 관직를 대대적으로 개편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왕관중신으로 불리는 관료 집단이 왕의 명을 받고 프랑스의 행정을 총괄하게 된다.
- 재상(Chancellier) -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부터 있던 관직으로 정부의 수장을 연상케하는 명칭이나 실상 주업무는 법령 포고나 프랑스 각지에 있던 지방자치제로 운영되던 고등법원을 총괄하거나 업무로 그 아래의 장관들은 직접 군주에게 보고를 하도록 되있었으며, 중세시기엔 대체로 성직자들이 맡았다.
- 대시종관(Grand Chamberlain) - 앙리 1세 시기인 11세기경에 창설되었으며, 사법, 재무, 도량에 관한 임무를 총괄했기에 일종에 재무장관+법무부 장관 정도의 관직이었다.
- 궁내성 주류관(Bouteiller) - 1080년 창설된 관직으로 왕실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를 주관했고, 귀족에 관한 재판권이 있었으며, 군주의 식탁과 와인을 관리했다.
- 시종관(Grand Chambrierlain) - 11세기 초에 신설, 왕실의 사무를 주관하는 관리로 그 아래로 식품부 장관, 사냥부 장관, 산림청 부장이 있었다.
- 식품부 장관(Grand Panetier) - 11세기 경에 신설, 궁정의 각종 식품의 관리 및 파리의 빵집들이 식품 관련 법령을 위반했는지를 감찰했던 관직.
- 사냥부 장관(Grand Veneur) - 14세기 초에 신설된 왕실 숲의 관리자.
- 산림청 부장(Grand Maitre de Eaux et Forests) - 중세 중·후기 쯤에 신설된 각종 하천과 숲을 관리한 관직.
- 왕궁 집사(Senechal) - 12세기 중반쯤에 만들어진 왕궁내의 모든 것을 관리한 관직으로 그 아래로 궁내부장, 마구부장, 매 부장 있었다.
- 궁내부장(Grand maître de France) - 14세기쯤에 만들어진 궁재의 후계 관직으로 왕궁 집사 바로 아래의 직위로 부 집사 정도 된 직위.
- 마구부장(Grand Ecuyer) - 1290년대쯤에 만들어진 군주의 말을 관리했으며, 여러 전령을 수하에 두고 있었다. 전령사 부장 정도의 직위.
- 매 부장(Grand Falconer) - 1250년대쯤에 만들어진 왕실에서 주관하는 사냥을 관리한 관직.
- 요리부장(Grand Queux) - 이름 그대로, 군주의 주방장인 관직으로 1490년대에 폐지되었다.
이후 미남왕 필리프 4세에 이르기까지 더 복잡해진 행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 부서를 신설했다. 첫째, 정치 서류들을 조사하는 대참사원(Grand Conseil), 둘째 사법을 관장하는 고등법원(Parlement), 셋째 재정 전문 회계원(Chambre des Comptes)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16세기 중반인 1546년 앙리 2세에 의해 국무경직이 신설되어 1588년에 재대로 유의미한 행정관직으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군주가 바꿔질때마다 외교업무를 맡은 외무국무경을 제외한 4개의 국무경직들을 폐지와 복설을 반복했다.
- 외무국무경
- 전쟁국무경
- 해사국무경
- 왕실국무경
- 자칭종교개혁국무경
법무와 재무, 내무업무를 맡은 국무경직은 없었으며 대신 총리가 법무, 재무 총감이 재무를 세개의 국무경직이 지방별로 내무 업무를 겸임했다.
- 전쟁국무경은 국경지대를 관할.
- 왕실국무경은 국유지를, 1747년 이후로는 외무국무경이 관할을 거부한 여러 기타 영토를 관할.
- 해사국무경은 식민지를 관할. 단 1749년-1754년은 예외.
또한 이시기에 국가 행정과 왕실 행정을 분리되어 따로 왕실부(Département de la Maison du Roi)를 만들어 왕실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을 한데 모았다.프랑스 왕실부
프랑스의 군 관련 관직 (아래로 갈수록 낮은 직위.)
- 무관장(Grand Connetable) - 1060년대 신설된 프랑스 전군을 통솔한 총사령관, 현대의 국방장관 정도의 직위였으나 1627년에 폐지가 되었다.
- 해군장관(Amiral de France) - 1270년대에 신설된 프랑스 해군을 통솔한 사령관, 현대의 해군참모총장 정도의 직위.
- 원수(Marcheaux de France) - 1185년에 신설된 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 2명의 원수가 프랑스군을 책임졌으며, 무관장이 폐지되면서 프랑스 육군의 고위 군계급이 되었다.
- 중장(Lieutenant General) - 군주가 직접 임명한 지위로 일정 지역사령관의 성격이 강했다. 국왕이 위임한 지역에서는 중장이 최고 지휘권이 있었다.
- 국왕 기수(Port Oriflamme) - 왕실기를 전투에 들고다닌 사람으로, 상당한 권위가 보장되는 직위였다.
- 궁병 단장(Grand Maitre de Arbalestries) - 군의 전 궁병을 담당한 사령관.
- 포병 단장(Grand Maitre de l'Artillerie) - 포병(각종 공성기 포함) 전체를 담당한 사령관.
이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91년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면서 현재의 프랑스 공화국의 행정조직들의 기틀이 되는 법무부, 내무부, 재무부, 해군부, 전쟁부, 외무부로 전환되어 다음 해에 왕실이 폐지가 될 때까지 이어진다.
3.2. 행정구역[편집]
프랑스 왕국의 행정구
흔히 프로뱅스(Province)를 오늘날과 같은 용례로 생각하고 최상위 행정 구역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프랑스 왕국의 행정 체제는 앙시앵 레짐에도 쓰여 있듯이 모든 것이 모호했다. 심지어는 프로뱅스(Province)라는 단어의 용례조차도 모호하게 쓰였다.
아르망 브레트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프로뱅스는 사법구(Bailliages et Sénéchaussées)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고 군구(Gouvernements généraux militaires)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서 프로뱅스라고 올라오는 지도는 군구(Gouvernements généraux militaires)의 지도이다. 행정구(Généralités ou intendances)는 원래 징세구였으나, 행정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15]
프로뱅스의 기원은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영지들로서, 과거에 같은 위치에 있던 국가나 영지와 비교해보면 대충은 들어맞는다. 기원이 이렇다보니 시간이 흘러 지역의 유력 귀족이 여전히 영주처럼 군림하고[16] , 지역별로 법률, 조세제도, 문화 등등이 상이한 상황이었기에 혁명에서 승리한 프랑스 제1공화국 정부는 이것이 프랑스의 통일성을 저해한다고 보고 폐지해버렸다. 그리고 탄생한게 바로 지금도 레지옹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는 데파르트망. 오늘날의 레지옹은 이 군구를 바탕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4. 경제[편집]
프랑스는 이미 르네상스 시기에 국토 대부분이 광활하고 비옥한 평지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각종 다양한 농산물[17] 을 재배하는 한편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중요성이 증대한 광업 및 대장간과 같은 가내수공업을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다만 이 시기의 농공업 기술은 전반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중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그로 인해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는 단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5. 국력[편집]
그 당시 웬만한 유럽의 강대국 2개 이상을 합친것을 넘는 인구를 가졌다. 프랑스가 대부분의 영토를 확립한 16세기에 프랑스의 인구는 15,000,000명에 달했고 17세기에는 오스만 제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국가였으며[18] 1755년에는 인구 2,500만명으로 오스만 제국을 제치고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되었다.[19]
175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이 급격하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도 인구가 같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에 계속 1위를 유지했다. 결국 러시아가 프랑스의 인구를 완전히 추월한건 1814년부터였다.[20] #
그외 주요 경쟁국들인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보다는 2~3배, 나머지 국가들에 비해서는 몇 배는 되는 인구였다. 수도였던 파리는 1600년에는 220,000명이었고 1685년에는 510,000명이나 되어 런던 다음으로 유럽에서 인구가 많았고, 마르세유와 리옹 같은 도시들도 무역 및 금융업의 중심지로 번성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와 비슷하게 한 때는 유럽의 강대국이었으나 이후 제후국들로 분열된 신성 로마 제국[21] 의 제위를 반독점세습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결국 19세기에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을 프랑스 세력권으로 끌어들였고, 결국 1804년 프란츠 2세는 느슨한 동군연합으로 묶여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지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전환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했다.[22]
이렇듯 언제든지 제국을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였지만 제국이라 스스로를 칭하지는 않았다. 물론 중세부터 언제나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던 건 틀림없다. 당장 프랑스 왕국의 궁전인 베르사유 궁전만 봐도 당시 황제국의 궁전인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궁전보다 더 크고 화려하다.[23]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강력한 국력을 기반으로 나중에 나폴레옹 시대에 가면 진짜로 제국을 선포했다.
6. 외교[편집]
6.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역대 군주[편집]
역사 관련 정보/프랑스 역대 군주 항목 참조.
8. 역대 왕비[편집]
프랑스 역대 왕비 항목 참조.
9. 기타[편집]
- 부르봉 왕조 시기의 군주들은 뛰어난 정력과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정부(情婦, 로얄 미스트리스)를 둠은 거의 기본 스펙급이고 심지어 근친상간과 같은 루머들까지도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왕실의 사생활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 예외가 있다면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만을 사랑한 루이 16세지만 루이 16세 고자설과 마리 앙투아네트 악처설만 번져 왕가에 대한 평판이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여주었다.(...)
- 당시 프랑스에서 프랑스어(오일어의 파리 방언)는 파리와 그 근교에서나 통하는 정도였고 지방으로 갈수록 각종 방언과 기타 언어들이 통용되었다. 북부만 해도 브르타뉴어, 알자스어라는 로망스어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언어가 통용되었고, 같은 오일어라 해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갈정도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남부에서는 오크어가 통용되었다, 더 남쪽으로 가면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도 통용되었다. 심지어 절대왕정 시기를 통해 한 세기 이상의 중앙집권화를 거친 뒤인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마르세유에서 온 대표단이 파리에서 행한 연설을 파리 시민들이 도통 못 알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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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91년부터 1792년까지는 '프랑스 입헌왕국/Monarchie constitutionnelle française'[2] 1365년 샤를 5세가 백합 개수를 3개로 표준화했다.[3] 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 시대의 어기. 1643년부터 사용했다.[4] 부르봉 왕조 시절에 나바르와 동군연합하며 쓰던 국장. 왼쪽의 노란색 백합 배경의 푸른 문장은 프랑스를 상징하고 오른쪽의 윷판(?)같이 생긴 그림 배경의 빨간 문장은 나바르를 상징한다.[5]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의 지도이다. 남부에 뚫려 있는 곳이 바로 아비뇽인데, 1789년 프랑스 왕국이 몰수하기 전에는 교황령이었다.[6]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인해 루이 16세가 파리로 돌아오게 된 이후, 여러 정책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7] 다만 이는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군주를 겸하게 된 것이며, 노르망디 공국이 잉글랜드 왕국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봉건제, 동군연합 문서 참조.[8] 다만 칼레는 백년전쟁 종전 이후인 1558년 메리 1세 재위 시까지 잉글랜드 왕령지로 남는다.[9] 통념과 달리 배르사유 궁전 건축은 재정 지출의 5% 미만으로 그리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60만에 달하는 상비군과 전쟁으로 인헤 75%를 상회했던 군사비 지출.[10]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낭트 칙령 철회)는 선왕 시기부터 각종 특권을 두고 왕실과 대립하던 위그노 탄압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탄압의 결과물을 선포한 것이며,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유출되는 만큼 개신교권에서 반대로 유입되는 인구도 상당하였다.[11] 화폐가치의 안정이나 생산과 인구 같은 내용을 이런 시기에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런 것들은 정책적인 사안과는 별로 상관이 없이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물가의 상승과 임금의 상승은 서로 상쇄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가 잘못되었다.[12] 그나마 당시 설탕과 커피 수출로 프랑스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던 생도맹그 등의 카리브해의 섬들은 건지는 데 성공해 최악은 면했다.[13] 대체로 북부지방에서는 관습법을, 남부지방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의 법에 의거해서 재판이 행해졌다고 한다.[14] 아르망 브레트의 논문에는 경계가 모호하다고 적혀있는데 이를 반영하여 경계를 애매하게 그려놓았다.[15] 윗 문단에 쓰여진대로 총독의 권한을 축소시키기 위해 구역을 비일관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16] 물론 어느 정도의 봉건제가 유지되던 전근대 국가였던 만큼, 진짜로 영주인 곳도 많았다.[17] 특히 16세기부터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감자, 담배 등을 재배하기 시작했다.[18] 1643년 기준 오스만 제국의 인구는 2,800만명, 프랑스의 인구는 1,900만명이었다.[19]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은 2,500만명이었으나 프랑스보다 몇십만명 더 적었으며, 러시아 제국은 1,900만명이었다.[20]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프랑스 최전성기였던 프랑스 제1제국이 거의 몰락한 해였다.[21] 1617년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인구는 1,900만명이고 프랑스 왕국의 인구는 1,700만명이다. 그리고 30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인구의 3분의 1이 날아갔다.(...)[22] 결국 영방국가들이 대부분 탈퇴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 왕국만 남은 신성 로마 제국은 2년 뒤인 1806년 해체되었다.[23] 사실 국왕이 강대국 수장으로서 격이 낮은 칭호라는 오해는,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관계를 유럽에 대입해서 나온 잘못된 오해이다. 처음부터 국왕 위의 존재란 개념에서 출발한 중국의 황제(皇帝)와 달리, 로마의 황제(Augustus) 개념은 공화국인 로마에서 왕(Rex) 노릇을 해먹으려는 꼼수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왕(Rex)이라는 단어의 어감은 역사 내내 자주국의 수장으로서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동로마인들은 라틴어로 황제(Augustus)인 자국 수장을 헬라스어로는 그냥 왕(Basileus)라 불렀다. 분명 중세 프랑스인들도 '로마 황제'라는 말의 특별한 어감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국 국왕을 봉신 따위로 본 건 아니고, '내왕외제' 따위의 지리적으로도 무관한 동아시아적 개념으로 사고한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