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국 근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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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Garde Impériale
Imperial Guard of French Empire

1. 개요
2. 역사
3. 편성
3.1. 보병
3.1.1.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
3.1.2. 중견 근위대(Moyenne Garde)
3.1.3. 청년 근위대(Jeune Garde)
3.2. 기병
3.2.1. 중기병
3.2.2. 경기병
3.3. 포병
3.4. 해병
4. 대중 매체에서
5. 참고


1. 개요[편집]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행진곡. La Victoire est à Nous(이제 곧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프랑스 제1제국황제 나폴레옹 1세근위대이자 그랑다르메(대육군)의 최정예부대, 그리고 프랑스 제국의 인간병기.[1] 나폴레옹의 전략 예비대, 비장의 카드였다. 이들의 행진곡이 들리면 다른 나라의 군대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을 정도.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나폴레옹이 본인과 기타 프랑스 제국 수뇌진의 신변을 보호하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육군 장병들을 차출해 구성한 정예부대였다.

문자 그대로 소수(보병 3개,[2] 기병 2개 연대)였던 영국군 근위대와 달리, 제국 근위대는 단순한 육군 내 정예부대가 아니라 자체적인 포병까지 갖추어 거의 독자적인 군대 수준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숫자 자체도 나폴레옹 전쟁 중후반기에 가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거의 70개에 달하는 연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늘어난 부대는 대부분이 징집병으로 구성된 청년 근위대였고 나폴레옹 전쟁 초~중반기의 주요 전투에서 활약한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는 그 수가 매우 적다.[3]

나폴레옹은 이들을 보수나 보급과 같은 부분에서 특별히 대우했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아꼈다. 문제는 이들을 너무 아껴서 항상 예비대로 빼두고, 어지간히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쉽게 투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문에 쉽게 이길 싸움을 어렵게 이긴다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단 근위대가 투입되기만 하면 결과는 확실했다. 가령 아일라우 전투의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의해 나폴레옹의 주력부대가 괴멸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기마척탄병부대의 돌격과 그에 이은 척탄근위대의 적절한 투입으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반면 워털루 전투에서는 미셸 네가 기병의 우발적인 돌격으로 영국 육군 포병대를 잠시 무력화시킨 틈을 타 보병지원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근위대 보병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면박만 주고 보내지 않아 결국 포대를 다시 내주고 말았다.[4]

허나,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을 쉽사리 하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근위대를 아낀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은 항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할 최정예 예비대였기 때문이다. 굳이 근위대가 필요없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자원들을 소모하여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데 자신의 목숨과도 관련있는 근위대를 소모하는 짓은 나폴레옹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하지 않을 짓인만큼 전략적인 이유도 다분히 있었다.

다만, 이들의 명성이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워털루에서 근위대가 전진하다 다시 후퇴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프랑스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이것은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게 만든 큰 원인 중 하나였다.[5]

말하자면 수는 적지만 제값은 확실히 하는 장병들이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프랑스 근위대의 규모는 타국에 비하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원래 지상군 규모가 대놓고 소수정예를 표방하는 영국은 물론이요, 프랑스 대육군이 국민군의 속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해도 정예부대인 근위대를 나폴레옹의 프랑스처럼 다양하고, 거대하게 유지한 경우는 유례가 없었다.


2. 역사[편집]


혁명 직후 프랑스 총재정부 휘하에도 근위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집정정부가 들어선 이후 집정 근위대로 재편되었다. 적은 수로 인해 대규모 전투의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으나 불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을 보호하는 임무를 끝까지 완수한 부대다. 후에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제국을 선포하면서 대규모 증편이 실시되고 1810년 고참, 중견, 청년 3개 등급으로 정리된다.

규모만 해도 전성기 때는 10만에 육박했고, 보병대전열보병, 경보병, 척탄병기병대경기병, 중기병, 창기병 등을 갖췄다. 심지어 포병대까지 있어서 독자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최정예 전략 예비 부대였다.

1814년 나폴레옹 퇴위 때 해산했다가 백일천하 때 재집결하지만 워털루 전투 패배로 다시 해산한다. 근위대원들은 복고 부르봉 왕가에서 계속 복무하거나, 전역하거나, 미국 이민을 떠났다.

1840년 12월, 나폴레옹의 관이 프랑스로 돌아오자(Retour des cendres) 제국 근위대 생존자들은 옛 군복을 꺼내 입고 그를 맞았다.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는 이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을 기다렸으며, 이장식이 끝나자 "이제, 집에 가서 죽자."고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는 1852년 프랑스 제2제국을 세운 뒤, 제1제국을 모방해 1853년 제국 근위대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들 역시 제국의 최정예였지만 1870년 보불전쟁 패배와 제2제국의 몰락 후 공화정에서 폐지된다.

현대에는 프랑스 국가 헌병대의 예하 부대인 공화국 수비대(Garde républicaine)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명맥을 잇고 있다.


3. 편성[편집]


제국 근위대는 시기에 따라 숫자가 많이 달라졌다. 시작시엔 8천 명이었던 것이 1812년 이후에는 근위대원의 수만 거의 10만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으나, 대다수가 비교적 신참병들로 구성된 청년 근위대였다. 러시아 원정 이후는 물론 심지어 백일천하 도중에 새로 편성된 부대(제4척탄보병연대, 제3/4샤쇠르보병연대 등)도 있어서 일일이 나열하기는 어려우므로, 비교적 전통 있는 부대들만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3.1. 보병[편집]



3.1.1. 고참 근위대(Vieille Garde)[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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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얼굴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자들은 이마를 찡그린 채 시야를 가리려고 곰가죽 모자를 눈 위로 덮어썼고, 또 어떤 녀석들은 경멸과 분노에 차 입을 삐죽거렸다. 호랑이처럼 코밑 수염 사이로 이빨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내밀었을 때, 그것은 공포의 순간이었으며 무기의 시끄러운 소리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프랑스 외무장관


"한때 유럽의 정복자였던 이 척탄병들은 얼굴이 흉터로 뒤덮여있었다. 뚱뚱하고 늙고 병든 무능한 왕에게 경례를 하도록 강요받자 이들은 어이가 없다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오히려 경례를 대신하여 이 늙은 왕이 보는 눈 앞에서 걸쭉한 가래침을 바닥에 힘차게 뱉고는, 이 늙은 왕을 위로 올려다 보면서 낄낄거려댔다."


문자 그대로 당대 대육군의 최정예 중의 최정예이며 최강의 장병들을 모아놓은 부대. 다수가 과거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기 전, 집정근위대 시절부터 복무한 베테랑 병사들이다. 고참 근위대에 들어가려면 사병들도 나이 35세 미만, 복무기한 최소 10년 이상에 3개 이상의 전역 참가,[6] 읽고 쓸 줄 알아야 했으며 키 제한도 있어 샤쇠르의 경우 172cm, 척탄병의 경우 178cm 이상이어야 했다.[7] 용감하다는 평가가 붙으면 가산점.

결국 전투 경험, 복무 성적, 지적 능력,[8] 우월한 체격 조건까지 모두 들어맞아야만 고참 근위대원이 될 수 있는 셈이었다.

  • 제1 척탄 근위연대
당대 대육군의 크림 중의 크림(Crème de la crème, '최고 중의 최고' 라는 뜻이다)이라고 불리던 제국근위대 중 최강부대. 정예부대인 만큼 이것저것 불평불만이 많고 그것을 나폴레옹에게 숨김없이 말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불평쟁이(Les Grognard)"라는 애증 섞인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워털루 전투에서 고참 근위대가 영국 전열보병의 일제사격에 격파되었으나, 그것은 사실 이 1연대가 아닌 2연대와 3연대였다.
1연대의 경우 나폴레옹이 전장을 무사히 탈출할 때까지 후위를 엄호하다 최후를 맞았다. 당시 지휘관이던 피에르 캉브론이 항복을 거부하고 남긴 마지막 말이 이후까지도 전해지고 있다.[9] 제복은 독수리 플레이트와 매듭으로 장식된 곰가죽, 역시 화려한 튜닉과 바지. 실전에 들어가면 그런 거 없고 그냥 파랑 그레이트 코트다. 상징색은 빨강.
  • 제1 추격 근위연대
위의 척탄병과 제복은 동일하지만 샤코에 독수리 플레이트가 안 붙어있다. 같은 1연대인데도 척탄병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역시 훌륭한 부대이다. 스커미시에 투입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잦았다. 상징색은 초록.

고참 근위대는 나폴레옹이 아끼고 아꼈던 정예부대였고, 그들 역시 나폴레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1814년 나폴레옹이 하야하면서 한 고별 연설식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으며 많은 이들이 전역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왕당파들을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10]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복귀하였다.

그들은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 부르봉 왕가에게 충성을 바치며 얌전히 살기보다는 기회가 허락된 새로운 세계, 즉 미국루이지애나로 단체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나폴레옹 역시 끝까지 그들을 잊지 않았는데, 세인트헬레나에서 임종 직전 유언으로 자신의 재산 20만 프랑을 워털루 전투에서 팔다리를 잃은 근위대원들의 연금으로 기부했다.

1840년, 프랑스와 영국간의 협상 끝에 세인트 헬레나에 묻혀있던 나폴레옹의 관을 다시 파내어 파리 앵발리드에 모셔오는 이관식을 하게 됐는데, 이 소식을 듣고 아직 살아있던 고참 근위대 생존자들이 프랑스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은 장례식 하루 전날 미리 집합한 뒤 모닥불 앞에서 야영을 하였다. 그리고 장례식 당일, 이제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 되어버린 근위대원들은 다시 한번 곰가죽 모자와 군복을 차려입고 자신들이 충성을 바쳤던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사열을 했다.


3.1.2. 중견 근위대(Moyenne Garde)[편집]


  • 제2 척탄병연대[11]
베어스킨 사용. 상징색은 빨강
  • 제2 샤쇠르연대[12]
곰가죽을 사용하지만 독수리 플레이트는 부착되어있지 않았다. 상징색은 초록
  • Fusiliers-Grenadiers
직역하면 전열보병-척탄병연대. 조금 다듬어서 번역하면 전열 척탄병연대쯤 된다. 매끄럽게 번역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첫번째 하야 때 해체되어 1815년 전역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곰가죽은 쓰지 않았지만 대신 독수리 플레이트, 각종 끈과 매듭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샤코에 기다란 폼폼을 달았는데, 상징색이 빨강인지라 이게 굉장한 멋을 자랑한다! 러시아에서 후퇴할 때 러시아 제국군 야영지를 밤중에 기습하여 야영지에 있던 러시아군을 작살냈지만, 그 과정에서 1대대의 반이 날아가버렸다.
  • Fusiliers-Chasseurs
직역하면 소총엽병연대. 위의 퓨질리어-그레네디어 연대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샤코를 쓰는데 전투복은 마찬가지로 칙칙한 그레이트 코트다. 역시 첫번째 하야 때 해체되었다. 상징색은 초록.
  • 토리노 경보병 (Turin Velites)
황제의 여동생의 경호부대. 문제는 이들을 끌어다 근위대로 실전에 투입했다는 것.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다.


3.1.3. 청년 근위대(Jeune Garde)[편집]


처음엔 각각 4개 연대뿐이던 것이 각각 12개로 늘었다가, 결국엔 13개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급조된 땜빵용 부대들이다. 하지만 근위대는 역시 근위대이고, 신병들중 가장 우수한 자들만 뽑아다 만들었기에 자체 전투력은 상당하다. 라이프치히에서 엘스터강의 퇴로를 뚫은 것도 이들이다.[13] 뤼첸 전투에서는 카야 마을을 강습, 점령한 프로이센 근위 경보병대대를 몰아내고 마을을 탈환한 이야기가 에 실려있다. 블뤼허에게 다이렉트로 명령을 받은 프로이센 근위 경보병들이 카야 마을에 총검돌격을 가해 프랑스군의 탄막을 뚫고 처절한 근접전끝에 마을을 점령했고, 청년근위대가 다시 반격하여 마을을 탈환 해버렸다.[14]
  • 1~13 척후병 연대 (Tiralleures)
라이프치히에서 모르티에 사단에 대다수가 편성되었다.
견장은 술이 달린 정예병용 견장이지만 숏소드를 패용하지 않고 있기에 스트랩은 1개뿐이다. 상징색은 빨강.
  • 1~13 도약병 연대 (Voltigeurs)
복장은 상술한 티라예르와 같다. 상징색은 초록.


3.2. 기병[편집]


고참 근위대는 볼드체로 표시


3.2.1. 중기병[편집]


  • 기마척탄병연대(Regiment de Grenadiers-à-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7px-Guard_Grenadier_at_Eylau.jpg
제국 근위대의 기병연대 중 가장 오래된 부대로, 프랑스 혁명 이후 창설된 기병부대를 모체로 한다.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일라우 전투에서의 활약이다. 아일라우에서 기마척탄병연대는 아군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군 전열로 돌격했으나 이내 수적으로 많은 적군에게 포위당하고 항복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지휘관인 루이 레픽 대령은 거부하고 바로 돌격을 감행하여 적 포위망을 깨뜨리고 동료 기병부대와 아군 진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아일라우 전투에서 기마척탄병연대를 묘사한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드타유의 작품으로, 당시 레픽 대령은 기병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개를 들라, 제군! 저건 총알이지 똥이 아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 정예헌병대(Gendarmerie d'Élite)
제국근위대의 기마헌병대로 주로 나폴레옹의 사령부내의 질서유지, VIP호송, 포로관리나 탈영병 추적 등 헌병대가 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인적자원은 프랑스 국가 헌병대에서 선발했으며 헌병 부대이지만 전투에도 투입되긴했다.
  • '황후의 용기병연대(Regiment de Dragons de l’Imperatice)'
파일:external/www.britishbattles.com/french-dragoon-l.jpg
본래 근위대가 아니라 일반 드라군연대였다가 1805년 독일 전역에서 괄목할 만한 전공을 세운 후, 1806년 나폴레옹의 명령에 의해 근위기병대로 승격되었다. 정식 명칭은 단순히 근위용기병연대지만, 부대의 후원자가 바로 황후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였던지라 "황후의 용기병대"로 더 유명하다. 복제상의 특징은 표범 무늬가 들어간 투구.

나폴레옹은 이들에게 정예병의 상징인 흑마를 태우려고 했지만, 검은 말은 흉갑기병대나 척탄기병대 것이라며 반대한 모르티에 때문에 무산되었다.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그녀가 죽고 나서도 부대원들은 그녀를 존경했던 듯 그 이후에도 이 기병대의 대원들은 매해 조제핀의 기일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것이, 그녀의 뒤를 이은 마리 루이즈마리 앙투아네트를 연상시키는 오스트리아 황녀 출신인데다가, 군사에 관심이 없어 오늘날이라면 재평가받겠지만 열병식에 참여 안하겠다고 버티다가 부부싸움을 할 정도였으며, 결국 오스트리아로 도망간 후에는 황자를 억류하고는 오스트리아 귀족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반면 조제핀은 혁명기 군인 아내 출신답게, 비록 전시행정이긴 해도 사병들을 식사에 초대하는 등 군인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사이가 좋다 못해 바람까지 프랑스 군인들과 핀 것은 흑역사지만.


3.2.2. 경기병[편집]


  • 근위 기마샤쇠르연대(Chasseurs à Cheval de la Garde Impérial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60px-GericaultHorseman.jpg
기마척탄병과 마찬가지로, 기원이 제정 이전의 집정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기병대. 수렵기병, 엽(獵)기병, 추격기병 등으로 번역된다. 나폴레옹을 그린 그림에서, 혹시 나폴레옹 주변에 삐뚜름한 돌만(dolman) 재킷에 녹색과 붉은색이 들어간 제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칼을 빼들고 호위중이라면 그들이 바로 이 근위 샤쇠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도 나폴레옹의 경호 임무를 자주 수행했다. 이들이 전장에 나서면 적의 기병과 충돌하기 직전에 상대의 면상에 권총부터 쏘고 붙었는데,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 기병대가 프랑스 기병대와 교전시 제일 두려웠던 것이 얼굴에 권총부터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고.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은 이 기마샤쇠르연대의 연녹색 제복을 가장 좋아해서 평시에도 즐겨 입었다고 한다.[15] 프랑스군 제일의 용사이자 제일의 멋쟁이였던 조아킴 뮈라가 이를 두고 나폴레옹의 패션 센스가 촌스럽다고 뒷담화를 했다고 한다.[1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9px-Szwolezer.jpg
1807년 창설된 기병대. 프랑스인이 아니라 폴란드 슐라흐타 자제들로 구성되었다. 1809년에 고참 근위대로 승격되어 서열로 근위 기마샤쇠르연대 다음인 세 번째가 되었다.[17] 기병은 근접전 병과라는 특성상 개개인의 무예가 중요시됐는데 이들은 프랑스군의 기병대 중에서도 특히나 뛰어났다. 나폴레옹의 참관 아래 고참근위대의 용기병들과 대련을 한 적이 있었는데 폴란드 기병 한 명이 창 한 자루 만으로 프랑스 용기병 2명을 관광 태웠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처음에는 그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으나 반도 전쟁 소모시에라 협곡 전투[18]를 보고선 '프랑스군의 모든 기병을 통틀어 가장 용감한 기병대'라고 치하했고 이 전적으로 고참 근위대로 승격하였다.[19] 러시아의 전투종족 카자크 기병들도 얘네를 보면 후퇴하기 바빴다. 이후 나폴레옹이 하야하고 엘바섬으로 유배 갈 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기병을 120명만 데려갈 수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 프랑스 기병들은 다 제쳐두고 120명 전원을 폴란드 창기병연대로 구성했다. 폴란드인들 역시 자신들 나라로 돌아가도 무방했으나 단지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으로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자 이들은 워털루 전투까지 줄곧 나폴레옹을 수행하였다.[20]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뒤, 살아남은 폴란드 창기병들 역시 몇 개월 후 전부 프랑스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파일:P0zQh.jpg
이집트 원정 때 맘루크들의 용맹에 주목한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프랑스까지 그를 따라온 맘루크들을 근위대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따라온 맘루크 기병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다 보니 실제로는 원조 맘루크보다 프랑스인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21] 저 유명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다른 근위대 기병들과 함께 돌격해 그 명성을 널리 알렸으며, 그들이 사용하던 시미터의 흔적은 아직도 미군이나 영국군의 제식용 예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스페인있을 때에는, 그들의 복장이 스페인인들에게 무어인 정복자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폭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1815년까지 존속했는데 훗날 부르봉 왕가가 복고된 뒤, 이들에게 아랍인이 있는지 물었으나 전부 프랑스인이라는 대답만 들려왔다고 한다.


3.3. 포병[편집]



3.4. 해병[편집]


본래 나폴레옹의 영국 진공시 그의 배를 경호할 목적으로 1804년 창설된 부대였다.[22]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전으로 영국 침공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해병 근위대는 유럽전선으로 돌려졌고 울름전역, 반도전쟁, 러시아 원정 등에 종군하면서 황제를 경호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숫자 자체는 자주 변했지만 대체로 1000명 대를 유지했으며 소수의 인원이 엘바 섬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1815년에 해체되었다.

복제상의 특징으로는 후사르의 그것을 많이 따와서 돌멘 자켓이나 허리띠 등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였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문명 6에서 프랑스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 산업 시대의 보병 유닛인 전열보병을 대체하는데, 전투력이 더 높고 프랑스의 수도가 위치한 대륙에서 추가적인 전투력 보너스를 받으며 적 유닛을 제거할 때마다 위대한 장군 점수를 생성한다. 고유 유닛 시스템이 처음 생긴 문명 3 이래 문명 5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고유 유닛은 줄곧 머스킷티어였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공용 유닛으로서 문명 1문명 2에서도 머스킷티어가 나왔다는 점에서, 새로 나온 요소로서 의미가 크다.


5. 참고[편집]


  • 영국군 근위대[23]
  • 덴마크군 근위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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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이들의 위상을 현재에 대입하면, 그린베레 정도와 비슷하다.[2]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보병 근위대는 척탄 근위 연대, 콜드스트림 근위 연대, 스코틀랜드 근위 연대까지 총 3개 연대였고, 아일랜드 근위 연대와 웨일스 근위 연대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1910년과 1915년에 창설된다.[3] 이 영향으로 나폴레옹: 토탈 워에서는 프랑스 제국이 가장 많고, 가장 강력한 엘리트 유닛을 보유한 세력으로 군림한다. 다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스펙 또한 압도적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1개 풀스텍 근위군단, 그것도 선임&청년근위대 총 12부대 + 기마척탄병연대 4부대, 아틸리에 아 슈발 2부대 + 콘벤시옹 포병대의 조합으로 된 부대는 어지간한 타 정규 군단 2개를 손쉽게 제압할 정도의 괴력을 자랑한다.[4] 다만 이는 나폴레옹이 단순히 근위대를 아꼈다기 보단 기병대를 말아먹은 네 원수가 저지른 패착이 워낙 심해서 나폴레옹이 근위대 투입의 효과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이 더 큰 요인이었다.[5] 워털루 전투 막바지에 지칠 대로 지친 영국군도 척탄병 근위대 2개 연대를 막기 위해 중앙의 병력을 한 곳에 모아 이들에게 집중 사격했다. 그 괴물같은 인식 그대로 근위연대 병력 3할이 날아갔음에도 전진하자 영국군도 결의를 다지고 총검을 맞댔다. 만약 여기서 영국군의 사기가 무너지거나 백병전에서 버티지 못했다면 블뤼허가 왔어도 졌을 것이라 사료된다.[6] 2번 이상의 원정 참가라는 얘기도 있다.[7] 당시 프랑스 남성 평균키는 164cm였다. 현대 프랑스인 남성의 평균키가 179cm니까 현대로 비유하면 샤쇠르는 187cm 이상, 척탄병은 193cm 이상인 셈이다.[8] 읽고 쓰는 게 뭐 대단하냐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시만 해도 문해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거기다 현재보다 평균적으로 문장을 이루는 단어의 수가 훨씬 많고 어려운 표현들도 남발되었던 시대다. 또한 지적능력이 뛰어날수록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닌, 이해하고 수행하면서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서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9] MERDE. 아르덴 대공세 당시의 NUTS와 비슷한 뉘앙스로, 한국어로 해석하면 대략 "좆까" 정도로 볼 수 있다.[10] 대불 동맹군은 나폴레옹에게 단 5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 100명의 포병만을 허용했는데 지원자가 쇄도했다. 심지어 장교들조차 백의종군하여 사병으로 들어가겠다고 지원했다.[11] 1813년 전역 당시 올드가드로 승격되었다.[12] 1813년 전역 당시 올드가드로 승격되었다.[13] 그런데 엘스터강의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는 바람에 이들이 뚫어놓은 퇴로도 무용지물이 되었다.[14] 오스프리사의 책 'Armies of NAPOLEONIC WARS', pg292. 평범해 보이지만, 청년근위대에 대한 원문의 서술이 특이하다. 프로이센군이 마을을 점령하는 과정을 여러 문장에 걸쳐 서술해놓고는, 마지막 문장으로 찬물을 끼얹음으로써, 프로이센군의 활약이 수포로 들어가고 이들 근위대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을 간단명료하게 부각시킨 서술이 되는 것이다.[15] 심지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삶을 마감했을 때도 이 옷을 입고 관 속에 들어갔다.[16] 하지만 당시 수많은 장식과 훈장이 빼곡한 타 장성들의 화려한 군복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수수한 군복에 훈장 한두 개만 패용하고 회색 롱코트를 즐겨입은 나폴레옹의 모습은 오히려 위엄있고 카리스마 있는 독재자 기믹의 원조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오늘날 우리가 나폴레옹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바로 이 것.[17] 주무장은 창이지만 전부 창을 든 건 아니고 적과 부딪히는 제일 앞의 1열만 창을 지급받았다. 이유는 뒤에서 창을 들고 돌격하다 앞의 동료를 팀킬할까봐.[18] 125명의 폴란드 기병들이 우주방어를 펼치고 있던 스페인군 포대 4곳을 돌파했다. 폴란드 기병들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이란 걸 알았지만 뭐 어쩌겠나, 까라면 까야지. 이때 지휘관이 "개새끼들아, 돌격해라! 황제가 보고 있다!"라고 폴란드어로 외치며 돌격했는데 나중에 나폴레옹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19] 원래 고참 근위대가 되려면 청년 근위대와 중견 근위대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그걸 한 번에 뛰어넘고 2계급 특진을 시켜준 것.[20] 흔히 워털루 전투에서 닥돌해오는 영국군 스코츠 그레이스 기병연대를 역닥돌로 개발살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일반 경창기병들의 공적이 영화 워털루로 인해 와전된 케이스다.[21] 지휘관급은 맘루크였으나 사병들은 그리스인, 조지아인, 튀르크인, 프랑스인들이 섞여 있었다.[22] 다만 나폴레옹의 예하에서 해병이 처음으로 창설된 것은 아니다. 원래 선원들의 규율 단속이나 승함전투 등에 대비해서 해병이라는 군종 자체는 존재했고 나폴레옹은 그 중에 정예병들을 간추려서 정예부대로 편성한 것이다.[23] 영국군 근위대 특유의 곰털모자(Bearskin)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척탄병 근위대를 격파한 상징으로서 척탄병 모자를 채용한 것이다.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군 제1근위보병연대가 척탄병 근위대의 타이틀을 사용한다.[24] 이 쪽은 모자는 물론이고 군도까지도 따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