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3공화국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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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파일:프랑스 국기.png
파일:110px-Official_seal_of_the_third_French_Republic.png
국기
국장
파일:French_Republic_1939.svg.png
존속 기간
1870년 ~ 1940년
표어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형제애)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알제리[1] 및 식민제국(諸國)
수도
파리
인구
1870년 38,400,000명
1910년 41,500,000명
정치체제
내각책임제
국가원수
대통령
주요 지도자
아돌프 티에르
조르주 클레망소
아리스티드 브리앙
언어
프랑스어
종교
세속주의[2]
민족
프랑스인
통화
프랑
주요사건
1870년 건국
1940년 멸망
성립 이전
프랑스 제2제국
멸망 이후
비시 프랑스
프랑스 군정청
자유 프랑스
1. 개요
2. 역사
2.1. 제3공화국의 한계
2.2. 우파와 중도파의 득세와 정치적 연맹의 대두
2.3. 좌파의 득세
2.4. 극우파와 정치적 개혁의 열망
2.5. 멸망
3. 정치
3.1. 구성
3.2. 정교 분리
4. 외교
4.1. 유럽 내 외교정책
4.2. 제국주의
5. 주요 사건
6. 연표
7. 대중매체에서의 프랑스 제3공화국
8. 참고문헌




1. 개요


1871년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2제국이 붕괴된 이후 아돌프 티에르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세워진 프랑스의 정치 체제.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정확히 70년 간 유지됐고, 이는 지금까지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장수한 공화국이다.[3]
또한 1848년 연방헌법 제정으로 완전한 연방제 공화정 국가가 된 스위스에 이어 유럽 내에서 2번째로 정착되어 장수한 근대의 공화정 체제다. 당시 프랑스와 스위스를 제외하면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군주제를 고수하고 있었다.[4] 그로부터 약 40년 후 포르투갈 왕국에서 왕정이 붕괴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스위스와 더불어 유럽의 둘뿐인 공화국이었다.[5]
프랑스 사회가 20세기 이후 전면적인 세속적 현대 사회로 탈바꿈하는 과도기로서, 이전의 혁명 수준만큼의 폭력사태는 없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사회적, 정치적 분쟁 사태가 굉장히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2. 역사



2.1. 제3공화국의 한계


프랑스 역사의 1920년대는 미국과 더불어 정치적/사회적 불안정함으로 특정지어진다. 20년대 초반 우파에서 중반에는 좌파로, 20년대 중후반에는 극우파로 전향하는 등, 뚜렷한 정치 비전 없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2.2. 우파와 중도파의 득세와 정치적 연맹의 대두


제3공화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막강한 독일 제국군의 진격을 필사적인 방어로 정지시켰고 대전쟁의 승전국이자 승리의 주역이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청년층 인구의 25%를 날려버리며 발생한 인력난[6] , 서부 전선의 전투 대부분이 북부 프랑스에서 발발하며 발생한 도시 인프라의 파괴 등으로 프랑스의 경제적 상황은 심각히 악화되어 있었고, 외교적 파트너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전쟁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모스코의 코민테른(제3인터네셔날)에 가입할 것을 지지했고, 이러한 성향은 서서히 파급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우파와 중도파는 블록 나쇼날 (Bloc National)연맹을 성립하고, 볼셰비키 배척과 애국주의를 앞세워 1919년 9월의 국회의원 선거에 의석의 3분에 2의 (433대 180석)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이 연맹의 핵심인물인 알렉상드르 밀랑 (Alexandre Millerand)은 1923년 1월 20일에 수상에 보직, 같은 해 9월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블록 나쇼날의 의원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베테랑이 다수였던 탓에 "청회색[7] 의원"(Chambre Bleu Horizon)이란 이명을 얻는다.
블록 나쇼날의 우파 내각은 전대의 강력한 정교분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교황령과 외교를 재개하고 아쏘시아숑 디오세젱[8]의 성립 등 가톨릭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친다. 블록 나쇼날은 여지없이 보수적이고 반공산주의적 정책을 펼치는데, 가령 1920년의 대대적인 파업[9]을 진압한다. 또 프랑스를 재건하고 전쟁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배상하기 위해 세금을 올린다. 그러나 국고 지출을 크게 늘림에도 금리를 하향조정할 것을 끝끝내 거부해 1924년 경제공황을 유발시킨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프랑스는 해결책으로써 독일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한 배상금으로 눈을 돌린다. 당시 수상이었던 레몽 푸앵카레는 독일의 광산이 풍부한 루르 (Ruhr) 지방을 점령하지만, 루르의 독일인들은 프랑스 정부에 적대적인 태세를 취하고, 영국과 미국은 무역 제재를 통해 경제적 압박을 주면서 이러한 정책은 완전히 실패한다. 영국의 피해 규모는 프랑스만큼 크지 않았던 터라 독일의 배상금이 그다지 아쉽지 않아 배상금의 규모를 줄여줄 의향도 있었던 반면, 프랑스는 이런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2.3. 좌파의 득세


앞서 서술한 프랑스의 경제 공황과 파업 진압, 루르 지방 점령의 논란, 그리고 정부의 가톨릭에 대한 편애는 레옹 블룸을 선두로 새로 성립된, 좌파의 연맹으로 이루어진 까르뗄 데 고슈 (Cartel des Gauches)가 1924년 총선에 승리하는데 한몫한다. 하지만 이 우위는 전대 블록 나쇼날만큼 압도적인 게 아니라서, 내각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다. 일례로 까르뗄은 밀랑 대통령의 퇴진시키는데 성공하지만, 후임 대통령으론 우파 후보 가스통 두메르그(Gaston Doumergue)가 당선된다.
까르뗄의 새 내각은 우선 평화 회복을 위해 국제연맹 (영: League of Nations 불:Société des Nations)에 가입하고, 독일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경우 배상금을 완화하자는 도스 플랜에 동의를 한다.
하지만 좌파는 급진파와 사회주의자로 갈라져 재정적 이슈에 합의를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본적 세금의 대폭적으로 공제하고, 소득세의 인상으로 벌충할 것을 요구한다. 폴 팽르베의 협의를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까르뗄은 이렇게 소수의 사회주의자 급진당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타협안의 부재는 리브르의 240% 인플레시션율이란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된다.

2.4. 극우파와 정치적 개혁의 열망


레몽 푸앵카레는 1926년 수상으로 복귀해, 에두아르 에리오 (Edouard Herriot) 경제적 상황을 어느정도 복구한다. 그의 폭발적인 인기로 우파는 1928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승리하게 된다. 1930년 프랑스의 호황은 사회 복지 시스템, 초등학교까지의 무상 교육, 인프라 재정비를 하는데 기여한다.
비생산적이었던 정쟁과 몇년간의 당파 정치는 프랑스 국민의 원성을 산다. 당내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새로운 정치"를 부르짖음은 급진적 변화를 원하는 극우적 성향의 발달을 초래한다. 이 중 복고주의를 지지하는 왕당파 락숑 프랑세즈(l'Action française)와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모방한 르 페소(Le Faisceau)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극우 정당의 대두는 1933년 히틀러의 당선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정부의 능력에 대해 의문을 품는 한편, 프랑스 국민은 무엇보다 새로운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전쟁이 발발하면 당시 정부의 제도적 한계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2.5. 멸망


1940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멸망하고, 괴뢰국 비시 프랑스가 성립.
끝까지 독일과 싸우려는 사람들은 자유 프랑스라는 망명정부를 세운다.

3. 정치



3.1. 구성


아돌프 티에르나폴레옹 3세가 도망간 이후로 집권했지만 보불전쟁에서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굴욕적인 협상안에 사인을 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한 향수로 기존 나폴레옹 3세를 지지했던 보수층들은 아돌프 티에르에게도 불만감을 나타내며 왕당파로 회귀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1871년 지방에 투표소를 덜 설치하는 등의 방해공작을 벌였음에도 총선에서 왕당파가 총 의석 638석 가운데 과반을 훌쩍 뛰어넘는 396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웠고, 공화주의자들은 불과 23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거기에다가 파리 코뮌을 강제로 진압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제3공화국에 대한 신임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로 인해서 초대 대통령 아돌프 티에르가 왕당파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지만, 왕당파가 부르봉 왕가루이필리프 1세의 오를레앙 왕가 사이에서 누구를 임금으로 추대해야 할 지를 놓고 내분을 빚은 덕분에 공화정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공화정으로 국가의 정치 체제를 규정한 헌법이 불과 한 표 차이로 의회에서 통과됐다. 당시 얼마나 왕당파의 세력이 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1876년 총선에서 왕당파의 의석이 크게 줄고 이후로도 쭈욱 세력이 줄어들면서 왕당파들이 소멸하고, 공화주의자들이 정국을 장악하게 된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는 내각제 중심의 대통령제를 정치체제로 삼았다.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 국가의 원수였지만, 프랑스 제2공화국 시절의 반성을 토대로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에 머물렀고, 실권은 내각의회의 손안에 있었다. 대통령은 상원과 하원의 동시 표결을 거쳐서 선출되었고, 관리의 임명권과 면직권 역시 대통령이 아니라 내각이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공화정이 새로 등장하면서 제2제정까지 존재했던 귀족 제도를 공식 폐지하였다. 이후에는 단순히 공식 석상에서 기존의 귀족 가문 출신인 인사에게 귀족 호칭을 붙여주는 정도의 관례로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관례는 프랑스 제5공화국 시절인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 시절에 완전 폐지된다.

3.2. 정교 분리


제3공화정 내내 정부와 가톨릭 교회 측은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가톨릭 측은 앙시앵 레짐 이후로도 왕당파 및 우파 세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공화정에 크나큰 위협이었다.[10]
특히나 이 시기 가톨릭 사제수도자들은 초등 교육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사제들이 아이들에게 반동적인 이념을 교육시킬까봐 매우 우려했다. 이에 1882년 정부는 학교 내의 모든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법안인 쥘 페리 법을 통과시킨다.[11] 경제적으로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해서 가톨릭 사제 출신의 선생들의 월급은 대폭 깎였고(...) 가톨릭 재단, 특히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이들 학교 측에게 많은 공과금을 납부하게 해서 이렇게 받은 돈으로 공립학교를 설치했다. 교사들이 정교분리를 이뤄내는 일등공신이었는데, 이 시기 프랑스 농촌으로 파견된 젊은 선생들은 모두가 공화국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이들을 지칭하는 별명 중 하나가 '공화국의 검은 경기병단'이었다. 이 시기 선생님들의 근무복이 검은 색이었기 때문에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이 법 이후로도 정부의 가톨릭 견제는 더욱 심해졌고, 20세기에 들어서면 가톨릭의 거센 반발에도 1884년 이혼이 합법화되는 한편, 군종 신부들이 군에서 추방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3세가 중재를 해보려고 나름 노력을 했지만, 19세기 말에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에서 가톨릭 측이 보여준 극우적이면서도 편향된 모습은 진보적 정치인들로 하여금 더더욱 가톨릭을 정계에서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해주었을 뿐이었고, 1904년 총리를 지낸 에밀 루베가 정교분리법을 발의하고 가톨릭 교육 단체를 강제로 통폐합시켜버리면서 가톨릭 세력은 치명타를 입고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반대로 국가가 가톨릭 교회에 간섭, 특히나 주교를 누구로 임명할 지를 놓고 정부와 교회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중단됐다. 쌤쌤
후손인 오늘날의 프랑스 정부 역시도, 오늘날의 민주 국가 중 가장 극단적인 정교분리 원칙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헌법 제 1조에서 프랑스를 비종교적, 민주적, 사회적, 불가분적 공화국으로 규정하였고, 공적인 장에서 일체의 종교적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공립 학교에서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히잡을 착용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 터지고 있는 부르키니 문제를 쉽게 이슬라모포비아로만 간주하기 어려운 것도 프랑스가 강경한 정교분리 원칙을 추구하기 때문이다.[12]

4. 외교



4.1. 유럽 내 외교정책


보불전쟁에서 참패한 이후 프랑스의 외교목표는 오로지 독일 제국에 복수(Revanche)하고 잃어버린 고토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는 외교의 천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건재했던 탓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이후 유럽 외교의 지형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빌헬름 2세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안전보장 조약을 연장하지 않고 파기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또한 빌헬름 2세가 군함 건조 경쟁을 벌이면서 독일-영국 사이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치닫자 당시 프랑스의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도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오랜 경쟁 심리와 더불어 파쇼다 사건으로 독일만큼이나 영국도 싫어했던 프랑스 여론은 델카세의 외교노선에 거세게 반발했지만 영국에 대한 원한보다는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서 결국은 이를 수용한다.
프랑스는 1차대전 승전국 중 최대 지분국이다. 프랑스가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된 원인도, 프랑스가 먼저 독일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면서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동시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자주 정권이 교체되어 일관성이 없는 국방정책을 펴던 정치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부는 보불전쟁의 수모를 앙갚음하고 군국주의적인 독일 제국의 팽창주의를 우려해서 방위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의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전선을 유지하면서 막강한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켰고, 결국 승전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4.2. 제국주의


보불전쟁에서 비참한 패배와 더불어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민족주의가 더해지면서 프랑스 역시 활발한 식민지 구축에 나서게 된다. 이미 제3공화국 시기 이전에 차지했던 알제리베트남을 발판으로 하여 북/중 아프리카 일대와 인도차이나에서 거대한 프랑스의 식민 기지가 건설된다. 이러한 식민지 건설에는 특히나 가톨릭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13] 이렇게 획득한 식민지는 프랑스의 경제 체제에서 원료 공급과 상품 소비와 같은 경제 활동으로 해외 투자자의 투자 수익을 얻게 해서 프랑스의 경제에 일부 참여한다.[14] 대공황 시기에 프랑스는 이들 식민지에 대한 산업을 거의 독점해서 세계적인 경제 교류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5. 주요 사건


: 1886년~1887년 육군 장관이었던 불랑제 장군이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15] 그의 인기를 두려워했던 내각은 그를 육군 장관에서 해임한다. 이후 그의 주위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극단적 공화주의자 등이 몰려들었고 특이한 정치적 연합이 형성된다. (가령 극단적 공화주의자이자 1884년 이혼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던 Naquet이란 국회의원도 여기에 참여하여 'Dissolution, révision, constituante' 이란 슬로건을 내놓는다.) 육군 장관에서 해임된 이후 블랑제는 총선에 출마하여 여러 곳에서 당선 되었고[16] 1889년 1월에 실제로 쿠데타 계획을 세웠지만 정부가 먼저 손을 써서 불랑제의 측근을 체포한다. 불랑제는 벨기에로 망명해서 그 곳에서 자살한다.[17]
: 1880년대 후반에 민간업체를 이용하여 프랑스 정부는 파나마 운하를 시공하였는데, 말라리아 유행, 당시 기술로는 힘들었던 건축, 자금 부족등이 겹쳐셔 건설이 중도에 중단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민간업체가 내각과 의회에 엄청나게 뇌물을 뿌렸던 것이다. 덕분에 정국은 뒤집어졌고 반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정의 부패상을 신랄하게 씹고 다닐 수 있었다. 여기에 해당 민간업체가 유대계 자본에 의해 설립된 유령회사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대중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거세진다. 그리고 이렇게 팽배해진 반유대주의는 3년 뒤 드레퓌스 사건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6. 연표


연도
대통령
주요 사건
1870 ~ 1873
아돌프 티에르
보불전쟁 패전으로 집권.
파리 코뮌 진압.
1873 ~ 1879
파트리스 드마크마옹[18]
1873년 대통령 임기가 7년으로 확정
1875년 권력기구 구성에 관한 법률 재정.
1879 ~ 1887
쥘 그레비
파나마 스캔들
1887 ~ 1894
사디 카르노
국방장관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의 제거.
1894 ~ 1895
장 카지미르페리에
드레퓌스 사건.
1895 ~ 1899
펠릭스 포르
레옹 "부르주아" 내각.
1899 ~ 1906
에밀 루베
정교 분리
1906 ~ 1913
아르망 팔리에르

1913 ~ 1920
레몽 푸앵카레[19]
제1차 세계대전
1920
폴 데샤넬[20]
1920 ~ 1924
알렉상드르 밀랑
"국민 블록(Bloc National)" 출신.
사회주의자 출신의 권위주의 우파.
루르 점령
1924 ~ 1931
가스통 두메르그
인민 전선(좌파)의 집권.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
바이마르 공화국 국제연맹 가입허용.
(1925~1930)[21]
1931 ~ 1932
폴 두메르
인민 전선.
1932 ~ 1940
알베르 르브룅
인민 전선.
국무총리의 신설(두메르그#)[22]
마지노 선, 뮌헨 조약.

7. 대중매체에서의 프랑스 제3공화국



8. 참고문헌


박지향,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0
POUPAULT Christophe Le monde depuis 1914, Ellipses, 2016
MONIER Frédéric, Les années vingt: 1919-1930,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1999
GIRARD Louis, « TROISIÈME RÉPUBLIQUE », Encyclopædia Universalis (en ligne), 2020
[1] 알제리는 특이하게도 유럽에 속하지도 않는데 프랑스 본토로 취급되었다.[2] 물론 국민들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다.[3] 현 프랑스 제5공화국은 1958년에 성립되어 앞으로 별다른 헌법 개정이 없다면 2027년에 70주년을 맞이한다.[4] 물론 입헌군주제 체제로[5] 이웃나라인 스페인에선 여러번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첫번째는 1년만에 망했고 두번째는 내전에 시달리다가 쿠데타로 단명했다.[6] 당시 프랑스는 본토의 인구 3900만명 중 총 840만명을 동원하였고, 135만명의 사망자와 616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즉 동원된 군인 중 76%가 죽거나 다쳤다는 뜻이다. 이로인해 전간기에 사회 여러분야에 걸쳐 프랑스는 고질적인 인력난을 겪게된다.[7]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 군복의 색은 지평선 청색(horizon blue), 즉 청회색이었다.[8] Association diocésaine: 프랑스 가톨릭 고유의 종교적 공동체로, 각 교구에 하나씩 있는 주교가 감독하는 예배 장소[9] 철도/광산업 종사원들이 높은 생계비에 반발해 일어난 사건. 블록 나쇼날 내각은 15000명의 해고로 대응한다.[10] 여담이지만 위그노유대교는 이 다툼에서 열심히 정부의 편을 들어줬다. 적의 적은 동지[11] 다만 모든 종교 교육을 금지시킨 것은 아니고 목요일은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12] 한국의 경우, 프랑스의 방식이 아닌 미국/독일 방식의 정교분리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에서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특정 교단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라는 개념이며, 그렇기에 독일에서는 종교 정당인 기민련 등이 활동할 수 있으며 정치인이 종교적인 동기를 가지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물론 선택은 여론의 몫이지만.[13] 다만 이는 프랑스 만이 아니라 모든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다. 선교사를 보내 문화적으로 침투어그로 끌기하는 한편, 이에 반발해서 선교사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이를 빌미로 군대파견(...)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그런 침략과 정복에 동의한 건 아니었고, 일부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면서 동시에 그들에 대한 고국의 탄압에 반발을 해서 고국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14] 제국주의가 과연 본국의 경제에 실질적으로 얼마나 공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과거부터 회의적 검토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해외의 학자를 잘 모른다면 한국의 학자 중에서는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지향, 「제국주의-신화와 현실」등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제국주의 정책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학적 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적 감정과 지배 계층의 체제 유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15] 1887년 Schnaebelé 사건 이후 독일에게 공공연히 복수할 것을 맹세하고 다녔고 병사들의 병영생활 개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6] 당시 프랑스에선 한 사람이 여러 곳의 선거구에 동시에 출마할 수 있었다.[17] 재미(?)있게도 정치적 이슈로 인한 자살이 아니라, 망명지까지 따라와 준 애인이 병사하자 상심해서 자살했다.[18] 왕당파로 합법적인 왕정복고를 추진했지만 왕위 계승자인 보르도 공작 (앙리 5세)가 입헌군주정이고 공화정이고 가리지 않고 증오하는 인물인지라...[19] 20세기 초의 저명한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와는 사촌지간이었다.[20] 여담으로 이 사람의 증손녀가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썸머 역을 맡아 유명해진 프랑스계 미국인 배우인 조이 데이셔넬이다.[21] 1926년 노벨 평화상 수상.[22] 1936년 거국일치 내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