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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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토머스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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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HW_2005_WSChampion.gif
MLB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2005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thomas-plaque.png
프랭크 토머스
헌액 연도
2014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3.7% (1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3년~1994년 아메리칸 리그 MVP
데니스 에커슬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모 본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1년 아메리칸 리그 실버 슬러거 지명타자 부문
데이브 파커
(밀워키 브루어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데이브 윈필드
(토론토 블루제이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93 ~ 1994년 아메리칸 리그 1루수 실버 슬러거
마크 맥과이어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모 본
(보스턴 레드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0년 아메리칸 리그 실버 슬러거 지명타자 부문
라파엘 팔메이로
(텍사스 레인저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에드가 마르티네즈
(시애틀 매리너스)


파일:MLB 로고.svg 199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게임 홈런 더비 우승자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프랭크 토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보유 기록
1990년대 최고 출루율
.440[1]
1990년대 AL 최다 볼넷
1,076BB[2]
단일 챔피언십 시리즈 최다 볼넷
10BB
1993 ALCS




파일:프랭크토머스.jpg

파일:폭스 스포츠 로고.png
시카고 화이트삭스 No. 35
프랭크 에드워드 토머스 주니어
Frank Edward Thomas Jr.

생년월일
1968년 5월 27일 (55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지
조지아 주 콜럼버스
학력
오번 대학교
신체
196cm / 125kg
포지션
지명타자, 1루수[1]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7번 (CWS)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 (1990~2005)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06)
토론토 블루제이스 (2007~2008)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08)

1. 개요
2. 선수 시절
3. 수상 내역
4. 주요 기록과 위상
4.1. 1990년대의 3대 장타자
4.1.1. 1990년대 기록 비교
4.2. 청정 타자
4.3. 연도별 정리
5. 화이트삭스와의 화해
6.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은퇴 이후
8. 연도별 성적
9. 기타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Frank Thomas White Sox.jpg

"내가 선수 생활을 시작할 때 30홈런 100타점을 때려내면 대단한 선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목표를 더 높이 잡았다. 그래서 매년 40홈런과 120타점을 목표로 했고 그것을 여러 번 이뤄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들이 60개씩 홈런을 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나를 평범한 선수로 취급했다. 그들은 날더러 "넌 대체 뭐하는거야? 넌 게으름뱅이야."라고 비난했고 그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2]

[3]

미국의 前 야구 선수.

1990년대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징하는 선수. 켄 그리피 주니어와 함께 스테로이드 시대에 약물 없이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낸 '청정 타자'의 대표격인 선수이기도 하다.

무책임하고 경솔한 언행[4]으로 구설수에 오르며 역량 및 성적과는 별개로 2000년대 들어 평가가 극히 나빠지기도 했지만, 한 시대를 지배했던 약의 힘을 빌렸음이 드러난 이후 반대급부로 2010년대부터는 오히려 평가가 대폭 오르며 크게 수혜를 입은 선수이다. 별명은 상대 팀에게 큰 타격를 입힌다는 의미의 '빅 허트(Big Hurt)'.

통산 19시즌 동안 2,322경기에 출장해 10,075타석 8,199타수 2,468안타 521홈런 495이루타 1,494득점 1,704타점 .301/.419/.555 OPS .974/OPS+ 156 1,667BB/1,397K wRC+ 154/wOBA .416 bWAR 73.8/fWAR 72.1을 기록했다.

OPS가 .950을 넘는 선수들 중 통산 10,000타석을 소화한 5명 중 1명이다.[5]

2. 선수 시절[편집]


다른 미국의 운동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프랭크 토머스 역시 고등학교 시절 야구와 농구, 미식축구를 병행했다. 그러나 그 중 야구를 가장 좋아했던 토머스는 1986년 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지명해주는 팀과 무조건 계약하겠다고 결심했지만, 196cm, 125kg라는 야구 선수보다 미식축구 선수에 어울리는 피지컬을 가진 토머스를 지명하는 팀은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로 유명한 어번 대학교에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 토머스는 미식축구 팀의 타이트엔드를 맡았지만, 정작 토머스는 본업인 미식축구를 내팽겨치고 야구에만 집중했다. 이에 학교는 토머스의 장학금을 취소했으나 동시에 야구 팀 최고의 스타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특별 기금을 조성해 토머스에게 새로운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19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지명받게 된다.

마이너 리그를 빠르게 졸업하고, 1990년 메이저 리그에 콜업된 토머스는 60경기에 출장해 .330 .454 .529 7홈런 31타점을 기록하면서 빠르게 메이저 리그에 정착했다.


파일:토마스 첫 8년 성적.jpg

토마스의 첫 8년은 그토록 많은 찬양을 받는 마이크 트라웃의 첫 8년을 타격 한정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한다.[6]

이듬 해인 1991년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토머스는 158경기에 출장해 .318 .453 .553 32홈런 109타점이라는 신인답지 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7] 이때부터 1997년까지 토머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7년 연속 3할-20홈런-100득점-100타점-100볼넷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2년 160경기 .323 .439 .536 24홈런 115타점으로 자신을 예열한 토머스는, 1993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 해 토머스는 153경기에 출장해 .317 .426 .607 41홈런 128타점을 기록했다. 1993 ALCS에서,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토마스는 데뷔전인 1차전에서 5타석 1안타/4볼넷으로 5출루에 성공하는 등 총 27타석/17타수 10BB/5K 6안타 1홈런 3타점 2득점 .353/.593/.529 1.122OPS로 활약하며 단일 챔피언십 시리즈 최다 볼넷 기록을 세웠지만 팀은 탈락.

이듬 해인 1994년은 파업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시즌이었지만 토머스는 113경기에 출장해 .353 .487 .729 38홈런 101타점을 기록해 아메리칸 리그에서 로저 매리스 이후 처음으로 MVP 2연패에 성공했다. 이때 wRC+ 205를 기록했는데 배리 본즈마크 맥과이어를 제외하면 2020년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단일시즌 wRC+ 200을 넘겼다. 같은 해 내셔널 리그 MVP 제프 배그웰도 똑같이 wRC+ 205를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생년월일도 같다. 이 시즌의 MVP 수상을 106경기만 출전하고도 .357 .438 .714 36홈런 101타점을 기록한 알버트 벨에 대한 기자들의 안 좋은 인식 덕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는 기자단과 일반인의 지식 차이를 무시한 서술이다. 당시 토머스는 타율에서 폴 오닐을 6리, 홈런에서 켄 그리피 주니어를 2개, 타점에서 커비 퍼켓을 11개 차로 뒤쫓고 있어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 이후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리플 크라운은 놓쳤지만, 1957년 윌리엄스(.528) 이후 이후 가장 높은 출루율(.487)과 1957년 윌리엄스(.731) 이후 가장 높은 장타율(.729)을 기록했다. 20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머스보다 더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아메리칸 리그의 타자는 없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4연속 MVP 시절의 본즈를 제외하면 없다. .487의 출루율은 역대 1루수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다. 장타율 역시 1996년 마크 맥과이어만이 더 높은 수치(.730)를 기록했다. 또 토머스는 112볼넷/54삼진를 기록했는데, 토머스 이후 100개 이상의 볼넷과 2대1의 볼넷/삼진 비율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배리본즈(4회)뿐이다. 즉 경기 수가 적은데 홈런과 타점 수치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토머스가 MVP를 수상한 게 벨과 기자들의 안 좋은 관계 덕분이라고 보는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994년 토머스는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오는 기록들을 달성하고, 또 달성하려는 중이었기 때문.

파업의 여파가 이어졌던 1995년에도 145경기 .308 .454 .606 40홈런 111타점을 기록하고, 1996년에도 141경기 .349 .459 .626 40홈런 134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던 토머스였지만 어느새 암운이 몰려오게 되는데 바로 알버트 벨의 영입이었다.

1997년 알버트 벨이 5년 $55M의 사상 최고 계약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하루아침에 2인자가 되어버렸고, 연봉에서도 큰 격차를 느낀 토머스는 팀에 섭섭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해 벨은 자신의 명성에 맞지 않게 조금 부진한 모습이었지만, 토머스는 146경기 .347 .456 .611 35홈런 125타점으로 타격왕과 함께 타율-출루율-OPS에서 리그 1위를 석권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8]

1998년을 앞두고 7년 $64.4M의 벨의 계약에 버금갈 만한 재계약을 맺은 토머스였지만,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체중이 크게 불어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해 토머스가 160경기 .265 .381 .480 29홈런 109타점으로 크게 부진한 반면에 알버트 벨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냈고, 시즌이 끝나자 마자 자신의 계약에 삽입되었던 엘리베이터 조항을 발동해 FA가 되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9]

1999년 토머스는 자신의 타석 위치를 뒤로 옮기는 조정을 했지만, 오히려 전년보다 부진한 135경기 .305 .414 .471 15홈런 77타점에 그치면서 끝물에 접어드는 듯 했다. 하지만 2000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건너 온 폴 코너코의 합류로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고, 절치부심해 살을 뺀 토머스는 159경기 .328 .436 .625 43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2위에 올랐고[10]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2001년 토머스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당시 메이저 리그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텍사스 레인저스가 맺은 10년 $252M 계약과 데릭 지터뉴욕 양키스 간의 10년 $189M 재계약 등의 초대형 계약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자신의 계약이 이들에 비해 초라함을 불평하던 토머스는 스프링 캠프에서 무단이탈해버리고 만다. 결국 토머스는 계약 규모를 늘리는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계약 재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기량 감퇴 조항(diminished skills)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는 돈을 밝힌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게 됐으며, 선수단 내에서의 영향력을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 난리를 피워 팀 분위기를 망쳐놓았더니, 정작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며 큰 비판을 받았다.

2001년과 2002년 동안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20경기 .221 .316 .441 4홈런 10타점과 148경기 .252 .361 .472 28홈런 92타점에 그친 토머스는, 2003년 로저 클레멘스에게 만루홈런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53경기 .267 .390 .562 42홈런 105타점을 기록했지만, 2004년과 2005년도 74경기 .271 .434 .563 18홈런 49타점과 34경기 .219 .315 .590 12홈런 26타점을 기록하며 앞서와 다른 것 없이 크게 부진했고, 결국 계륵이 되버린 토머스는 팀이 블랙삭스의 저주를 깨며 우승한 순간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팀은 내친 김에 토머스에게 은퇴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동안 이기적이고 미운 짓만 골라 했어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과거 엄청난 활약을 한 대선수가 그런 지경까지 몰리자 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화이트삭스를 떠난 토머스는 200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최저 연봉인 $0.5M에 계약하게 되는데, 이게 웬걸 137경기에서 .270 .381 .545 39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고[11]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여기에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그 시즌 사이영 상 수상자인 요한 산타나와 제시 크레인을 상대로 2홈런을 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듬 해인 200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에 성공한 토머스는 155경기 .277 .377 .480 26홈런 95타점을 기록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제법 이어갔지만, 2008년에는 부상과 부진을 거듭해 팀에서 방출된 뒤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갔지만 40경기 .240 .349 .374 8홈런 30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이후 1년간 팀을 찾지 못하며 결국 2010년 2월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AL MVP 2회 (1993[만장일치], 1994)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AL 올스타 5회 (1993-1997)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AL 실버 슬러거 4회 (1991, 1993-1994, 2000)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AL 타격왕 (1997)


4. 주요 기록과 위상[편집]



파일:전성기 토마스.jpg

토마스의 전성기 시절 스탯(4,550타석). 출루율이 가장 높은데 장타까지 잘 치는 타자였다. 타율 역시 .330으로 동 기간대 3위에[12] wRC+가 무려 177(1위)로 저 시기엔 완벽한 타자의 전형이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타자 중 한 명[13]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 팀 내 기록 중 홈런, 득점, 2루타, 타점, 총루타, 볼넷, 출루율, 장타율 부문 1위에 올라있다.

타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컨택, 선구안, 파워 세 부분에서 모두 리그 최상위권의 기량을 뽐낸 완성형 타자로, 통산 타율 3할을 유지하면서 500홈런을 넘긴 일곱 명 중 한 명이며[14], 500홈런과 1600볼넷을 동시에 얻은 선수 중 한 명이다.[15]

선구안의 경우 통산 1667볼넷을 기록해 역대 10위에 랭크되어 있다. 동시에 1990년대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많은 1076볼넷을 기록하며, 1990년대 출루율 1위를 찍었다.[16]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단일 시즌 볼넷 1위를 4번, 단일 시즌 볼넷 TOP 10에 11번이나 들었지만, 단 한 번도 삼진 TOP 10 에 든 적이 없었다. 이 부문에서 비교되는 배리 본즈조차 삼진 TOP 10에 든 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수준이며, 단순히 볼넷을 잘 고르는 걸 넘어서 변화구에 대한 선구안도 좋아서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와 요한 산타나의 체인지업도 홈런으로 연결시킬 정도였다. 통산[17] BB% 역시 16.5%로 역대 18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출루율도 통산 .4191로 역대 20위이며 1995-2002년까지 현역 출루율 1위였다. 토머스 위의 19명 중 토머스와 같은 시기를 보낸 선수는 본즈 하나뿐이고 본즈 외에 가장 가까운 선수가 1950-60년대의 미키 맨틀이다.

장타율 역시 통산 .555로 역대 19위라는 높은 순위이며, 1995-1998년엔 현역 장타율 1위였다. 자연스럽게 OPS도 1995-2001년까지 현역 1위였다.

단 본즈와 그리피와는 다르게, 통산 Def가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양수인 적이 없었을 정도로 수비는 최악이었다. 심지어 통산 Def가 -267.4로 뒤에서 3위다.[18] 비슷한 타자로 평가받는 짐 토미마저 한 번은 Def가 양수인 해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토머스가 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에서의 평가도 수비와 도루 능력을 빼면 본즈에 필적하고, 수비와 인기를 빼면 그리피에 필적하다고 평가받는 정상급 타자였다. 젊을 때는 역대급의 공격력으로 인해 fWAR 수치가 괜찮았지만, 나이가 점점 들고 자기관리에 실패하면서 Off마저 줄고 지명타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통산 fWAR이 커리어에 비해 낮은 수치를 보이게 되었다.

그래도 토머스의 타격은 성적 자체만을 보았을 때 역사상 최고의 지명타자로 보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19] 팬그래프에서 지명타자로 분류되는 선수들 중 수비에서 토머스보다 더 감점을 심하게 당한 선수는 없다.[20] 그럼에도 지명타자로 분류되는 선수들 중 Off에서 653.0을 기록한 토머스를 넘는 선수가 존재하지 않으며[21] 지명타자 통산 fWAR 1위에 랭크되었다.[22] 그리고 토머스는 지명타자들 중에서 wRC+, wOBA, 출루율, 장타율 모두 통산 1위 기록을 갖고 있다.

4.1. 1990년대의 3대 장타자[편집]


배리 본즈, 켄 그리피 주니어와 1990년대 메이저 리그를 삼분했다고 일컬어지는 최고의 우타자이며 이 셋은 실제로도 친한 사이다.[23] 1990년대에 비록 홈런의 개수는 301개로 역대 9위이지만 wRC+, 볼넷, 출루율, wOBA 등 여러 지표를 비교한다면 본즈와 더불어 투톱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1994년에 찍은 205의 wRC+는 본즈와 맥과이어를[24] 제외하면 2020년까지 마지막으로 200을 넘은 기록이며 역대 25위에 랭크되어있다.[25]

토머스는 뛰어난 선구안과 정확하면서도 강한 타격을 앞세운 완전체 타자였고, 그리피는 간결한 스윙에서 나오는 홈런과 최고의 수비에 괜찮은 주루 능력까지 가진 선수였으며, 본즈는 토머스의 타격과 선구안, 그리피의 스윙과 수비에 케니 로프턴 같은 선수의 주루 능력까지 갖춘 역대급 5툴 플레이어였다.

타격 기록을 따져보면, 토머스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1993년에 같이 MVP를 수상했던 본즈보다도 우위로 볼 여지가 있다. 본즈가 4살 위인데다가 4년 먼저 데뷔했고, 첫 해에도 거의 풀타임인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30세까지 이 둘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배리 본즈: 1987년(22세)-1995년(30세)
= 5554타석 .292 .404 .552 1344안타 276홈런 927득점 816타점 BB/K 1.17 OPS+ 163

프랭크 토머스: 1990년(22세)-1998년(30세)
= 5502타석 .324 .443 .584 1416안타 286홈런 894득점 963타점 BB/K 1.47 OPS+ 174

같은 나이 동안 토머스의 BB/K가 더 높고, 타출장 역시 본즈보다 확실히 높다. 물론 주루와 수비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본즈가 우위였으며,[26] 당시 명예의 전당으로 직행할 거라고 여겨진 선수였다. 그리고 토머스가 첫 MVP를 수상한 1993년에 본즈는 세 번째 MVP를 수상했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였던 본즈를 타격만으로라도 제친 토머스는 분명 위대한 타자가 맞다. 게다가 선수 시절 항목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토마스의 첫 8년은 마이크 트라웃보다도 뛰어났다.

그런데 21세기가 시작되고 나서 토머스와 그리피는 자연스럽게 하향세를 탔지만, 본즈는 오히려 약의 힘으로 리그를 터뜨리면서 토머스와 그리피를 압도해버렸고, 그 결과 본즈를 제외한 두 명에 대한 평가는 급락해버렸다. 지금 와서 토머스와 그리피의 성적을 본즈에 갖다대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 취급받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이 셋은 서로 대등한 라이벌이었다. 물론 본즈의 성적이 압도적이지만 약물 문제 등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에 가냐 마냐로 시끄러운 반면, 토머스와 그리피는 명예의 전당에 첫 턴으로 입성했고 사람들도 둘을 더 좋게 본다.

오로지 토머스만이 가진 기록으로는 1991년-1997년까지 7년 연속 3할-20홈런-100득점-100타점-100볼넷이 있다. 이 기록은 테드 윌리엄스의 6년 연속 기록을 넘어선 것으로, 토머스와 윌리엄스를 제외하면 5년 연속으로 기록한 타자조차 없으며, 이 기록은 명예의 전당 동판에도 적힌 업적이다. 이 기록 때문에 빌 제임스는 1997년 시즌이 끝난 직후, 토머스를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완벽한 7년을 보낸 우타자로 꼽았다. 당시 토머스는 타출장 능력이 완벽하게 조화된 선수였고, 테드 윌리엄스에 가장 가까운 선수로 꼽혔다.[27]

토머스는 2010년대, 전통적인 관점보다 세이버와 2차 스탯을 중요시하며 분석에 중점을 두는 성향의 매니아들에게 고평가 받는 추세이다. 출루율과 장타율이 매우 높은데 타율마저 3할인 선수이며, 거기에 홈런도 잘 치고 세이버 스탯들도 높다. 상술했듯이 wRC+ 및 wOBA 등 팬그래프에서 제공하는 스탯들을 보면 1990년대의 경우 본즈와 토머스가 1-2위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즉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는 사람들보다는 스탯과 역대 기록을 가져와 비교하는 사람들에게 더 높게 평가받는 선수다.


4.1.1. 1990년대 기록 비교[편집]


토머스와 본즈, 그리피의 기록을 비교해보자. 참고로 토머스가 데뷔한 1990년에 이미 본즈와 그리피는 풀타임 주전이었지만, 토머스는 60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1998-1999년 토머스는 부진에 시달렸지만, 본즈와 그리피는 오히려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시즌을 제외하면 토머스의 성적은 더 좋아진다. 그런데 이 차이까지 감안하며 보기에는 귀찮아지니 그러려니 하자.

기록 비교
스탯
토머스
그리피
본즈
타석/타수
6092/4892
6182/5388
6146/4894
안타
1564
1622
1478
홈런
301
382
361
타점
1040
1091
1076
득점
968
1002
1091
BB/K
1076/741
703/901
1146/747
도루
28
151
343
타율
.320
.302
.302
출루율
.440
.384
.434
장타율
.573
.581
.602
OPS(+)
1.013/169
.965/152
1.036/179
wRC(+)
1257/166
1144/147
1270/170
wOBA
.433
.407
.434
Off/Def
502.3/-168.4
372.2/83
567.9/45
bWAR/fWAR
52.8/53.8
67.5/66.0
80.2/81.3

1990년대의 모든 선수를 3000타석 이상의 기준으로 볼 시, 토머스의 Def는 전체 최하위다. Off의 경우 본즈와 토머스만이 500을 넘겼는데, 3위인 맥과이어가 421.3이다. wRC+, wOBA, 출루율 역시 본즈와 토머스와 1-2위다. OPS는 본즈와 토머스가 각각 1위와 3위이고, 그리피는 6위이다. BB/K는 본즈와 토머스가 6-7위인데 1-5위는 모두 교타자들이자 장타력을 갖춘 선수들 중에서는 둘이 1-2위이다.[28] 장타율은 본즈가 2위, 그리피가 3위, 토머스가 8위인데 6000타석 이상으로 기준을 설정하면 이 순서대로 셋이 1-3위이다. 출루율은 토머스와 본즈가 1-2위이며,[29] WAR에서는 본즈와 그리피가 1-2위이며 3위는 제프 배그웰이다. 그런데 수비로 WAR을 깎아먹고도 토머스가 4위이다.

대부분의 지표를 보면 비율스텟에서 토머스와 본즈가 1-2위가 아닌 스탯이 거의 없고, 누적 스탯에서도 그리피까지 셋이 10위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드물다. 각 지표에서 다른 선수들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으로 이 세 명에 비견될 만한 비율 성적이 나온 건 마크 맥과이어 뿐이다. 그러나 맥과이어는 4000타석 정도 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홈런을 제외한 다른 누적 성적이 다소 부족하다.


4.2. 청정 타자[편집]


스테로이드 시대에서 켄 그리피 주니어, 짐 토미와 함께 약물에 대해서는 가장 당당한 선수다. 약물 조사를 담당했던 미첼 위원회에 자진해서 나가 조사에 응했고, 1995년에는 올림픽처럼 타이트한 약물 검사 도입을 주장했던 선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배리 본즈가 일궈낸 믿을 수 없는 홈런 기록과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토머스가 쌓은 기록이 대단치 않게 보일 정도로 심했던 슬러거들의 타격 인플레이션이, 대부분 약물의 힘으로 일궈낸 기록임이 밝혀진 이후 반대급부로 토머스의 평가가 급상승하다보니 근래는 과대평가 논란까지 나올 정도이다. 그리고 약물 복용이 의심되는 선수들이 3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신체 능력이 저하되지 않고 전성기를 계속 유지했던 반면, 토머스는 30세를 기점으로 급격한 노화 현상이 찾아오면서 기량이 들쑥날쑥해졌기 때문에 약물과의 연관성을 더욱 멀리할 수 있었다.[30]


4.3. 연도별 정리[편집]


다만 토머스도 한 때 통산 성적을 기준으로 한 평가에 불이익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인 마냥 과장되어 묘사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 미루어 본다면 많은 오류가 있다. 적어도 토머스 본인부터가 1990년대부터 한결같은 주특기인 언론에 징징거리기 신공으로 떠드는 것처럼, 당시 그가 약물을 복용한 선수들 때문에 당대에도 크게 불이익을 겪고 푸대접 받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비약이다. 단, 야구 전문가들은 토머스를 대선수로 바라봤지만 기록을 찾아보거나 누가 더 낫냐를 피상적인 접근으로만 바라본 팬들은 토머스를 정상급의 선수 정도로 보지는 않았다.

1. 1997년 토머스는 35홈런 125타점과 함께 타율-출루율-OPS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장타율은 리그 2위를 기록했는데, 팀 동료인 알버트 벨의 최고 연봉에 혼자 삐져서 시즌 내내 툴툴거리는 바람에 팀을 골치 아프게 했으며, 벨 역시 이 시즌에는 주춤해버렸다. 결국 팀은 시즌 종류 후 7년 $64.4M이라는 당시 최고 규모의 연장 계약을 체결해 토머스에게 제대로 대접해줬으며, 언론에서도 최고 계약으로 대서특필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허나 역시 약물과는 무관한 청정타자인 켄 그리피 주니어 역시 이 해 무려 56홈런 147타점을 기록하면서, 골드 글러브까지 수상해 MVP에 올랐다. 토머스는 그런 그리피보다 한참 더 높은 연봉을 받았다. 물론 토머스가 돈값을 못한 것이 아니라, 그리피가 적게 받는 거긴 했다.

2. 1998년 스프링캠프 당시 토머스는 무려 135kg가 넘는 파오후가 돼서 등장했고, 시즌 내내 위력이 확 떨어진 모습을 보인 끝에 타율이 .267로 떨어진데다가 29홈런 109타점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반면에 벨은 48홈런 152타점을 올렸다. 그러고도 MVP는 약물 복용자인 후안 곤잘레스에게 돌아갔다. 이쯤 되면 진짜 약물의 피해자는 벨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내셔널 리그에서 마크 맥과이어새미 소사가 홈런 레이스를 벌인 덕분에 아메리칸 리그의 모든 타자들이 묻히는 비운을 맛보았다. 오히려 1998년 약물때문에 불이익을 본 진짜 피해자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벨과, 2년 연속으로 56홈런 146타점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고도 별 것 아닌 취급을 당한 그리피였다.

3. 1999년 토머스는 지명타자로만 출장했으면서도 15홈런 77타점이라는 너무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는데, 이건 약물이고 뭐고 따질 성적이 아니다. 최악의 투고타저 시기이던 1960-1970년대에도 이 성적이면 지명타자로서는 너무 초라한 성적이다. 이 해에도 그리피는 또 다시 48홈런을 기록하면서 3년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골드 글러브까지 가져갔지만, 맥과이어와 소사가 또 다시 홈런 레이스를 벌이는 바람에 또 다시 묻히는 비운을 맛보았다.

4. 2000년 토머스는 재기에 성공해서 자신의 홈런 기록을 경신하는 등 43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며, MVP 투표 2위에 오르고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팬들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MVP는 43홈런 137타점을 기록하며 비슷한 성적을 거둔 제이슨 지암비에게 돌아갔는데, 비슷한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지암비의 공헌도를 더 높이 쳐준 것이었다. 사실상 토머스가 정상적인 상태였음에도 약물 복용자에게 불이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이 때가 유일하다. 그리피는 이 해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한 이후 40홈런 118타점을 기록하고도, 다섯 명이나 되는 약물 복용자들에게 밀려 홈런 9위에 그치고 평범한(?) 성적으로 실망스럽다는 쓴 소리까지 들었다. MVP는 놓쳤어도 팬과 언론의 극찬을 받은 토머스와, 약물 선수들에게 밀려 저 성적으로도 욕만 잔뜩 먹은 그리피 중 대체 누가 더 큰 피해자였나?

5. 2001년 토머스는 자신이 징징거려서 받아낸 장기 계약에 불만을 품고 더 많은 돈을 달라는 황당한 고집으로 팀 분위기를 망친 데다가, 팀을 무단으로 이탈하는 최악의 판단으로 팬들의 지지와 팀의 신뢰, 동료들의 존중을 모두 잃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 억지로 연봉을 올려 놓고는 정작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부상을 당해 아웃되었으며, 이쯤부터 토머스는 팀의 골칫덩이로 전락하고 폴 코너코가 새롭게 팀의 리더로 자리잡았다.

6. 2002년은 타율 .252에 28홈런 92타점을, 2003년은 타율 .267에 40홈런 105타점을 기록했는데 펀치력은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이었던 타격의 정확도가 크게 하락했다. 게다가 2004-2005년은 부상과 부진한 성적에도 정신 못 차리고 계속 팀에 대한 불평불만을 언론에 떠들어대서, 동료들도 완전히 등을 돌리고, 팀에서 처리 1순위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부상으로 월드 시리즈 엔트리에도 완전히 제외되어, 팀이 88년 만에 우승하는 순간에도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는 약물에 의한 저평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자업자득으로 인한 인과응보였다.

7. 결국 화이트삭스에서 쫓겨나고 받아주는 곳이 없자, $0.5M이라는 최저 연봉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한 뒤 39홈런 114타점으로 다시 한 번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토머스의 재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팬들도 너무 비참하게 쫓겨난 토머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크게 격려하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또한 2005년 열린 의회 청문회로 인해 토머스의 재기에 더욱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 때부터 약물로 인한 불이익은 커녕, 청정 타자의 상징으로 낙점되어 그동안 묻혀있던 기록들이 꺼내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위에 거론한 내용들처럼 토머스가 전성기를 누릴 당시에는 해당 시즌에 약물 복용자들로 인해 상대적으로 받은 불이익은 크게 없다고 봐도 좋으며, 오히려 그리피, 토미와 벨이 토머스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큰 타격을 받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토머스는 이기적이고 철부지같은 태도가 크게 드러나면서 평가가 바닥까지 떨어졌으며, 그에 더해 비율 스탯은 최고였지만 누적 스탯은 약물을 복용한 스타들의 성적보다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아 저평가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기에 성공한 2006년 이후 스타들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그런 시각이 빠르게 바뀌었으며, 토머스 본인이 한결같은 언론에 징징거리기 신공을 펼치면서 마치 토머스만 푸대접을 받아온 것처럼 과장된 흐름이 만들어진 것이다.[31]


5. 화이트삭스와의 화해[편집]



파일:Frank Thomas Retired.jpg

화이트삭스와는 쫓겨나는 모습으로 안 좋게 결별했지만, 그래도 은퇴 후에는 팀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과거의 구설수들도 다 옛날 일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2010년 은퇴 선언도 화이트삭스에서 했으며, 토머스의 등번호인 35번은 2010년 8월 30일 성대한 행사 속에서 영구결번되고, 그의 사진이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외야에 남게 되었다.[32] 화이트삭스에서 쫓겨날 당시 팀과 동료, 팬들의 냉랭한 태도와 달라진 따뜻한 환영에 격세지감을 느낀 것인지, 토머스는 영구결번식에서 기념 연설 도중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환대에 감사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 해인 2011년에는 화이트삭스가 토머스의 동상을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 외곽에 건립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현재는 팀을 대표하는 레전드로 인정하며 극진하게 모시는 중이다. 이에 토머스 역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때 당연히 화이트삭스 모자를 쓰고 들어갔고, 팀 역시 별도의 페이지를 만들어 기념할 정도였다. 이를 보면 토머스는 팀의 상징에서 팀의 암적인 존재로 떨어지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토머스와 구단 모두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모습이다. 사실 토머스는 우여곡절이 많았다지만 화이트삭스 팀내의 타자 부문 기록 대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단에서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던 것도 컸다.


6. 명예의 전당 입성[편집]


500홈런 돌파 및 빼어난 비율 스탯, 커리어 대부분을 지명 타자로 뛰며 WAR 70을 돌파한 엄청난 성적으로 인해 입성 자체는 무난하게 예측되던 선수였고, 실제로도 2014년 명예의 전당 투표 후보로 등록된 첫 해에 83.7%의 득표율로 당당히 첫 턴에 입성했다. 같은 해 첫 턴 입성에 성공한 그렉 매덕스톰 글래빈에 묻혀 주목을 덜 받는 감이 있어 아쉽지만, 첫 턴 입성은 그야말로 "명예 중의 명예"이다.[33]

사실 은퇴 직전만 해도 명예의 전당 입성은 당연하겠지만 첫 해 입성은 확실하지 않다는 시각이 많았다.[34] 그러나 대형 약물 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면서 스테로이드와 무관한 선수들의 대접이 더욱 좋아졌으며, 그만큼 약물에 손대지 않고 기록을 쌓아온 명예로운 선수들에겐 더 큰 대접을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늘어나 입회 시점에 상대적으로 많이 이득을 본 셈이다.

6.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프랭크 토머스
21
200
194
60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9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프랭크 토머스
73.7
45.2
59.5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7. 은퇴 이후[편집]




춤추는 토머스


춤추는 토머스 with 윌리스 1


춤추는 토머스 with 윌리스 2


춤추는 토머스 with 윌리스 3
FOX의 메이저 리그 프로그램 패널로 꾸준히 출연중이다. 포스트 시즌 등의 현장 중계 때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데이빗 오티즈와 함께 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분석시간은 주로 돈트렐 윌리스와 함께 한다. 진행을 맡는 케빈 버크하트는 토머스를 항상 Hall Of Famer Big Hurt 프랭크 토머스라고 소개하는데, 같이 있는 로드리게스와 오티스는 그냥 이름만 부른다. 약쟁이라 명예의 전당에 못 들어가니 당연하지.[35][36]

2019년 6월에 런던 시리즈를 앞두고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런던에 가서 시민들과 이런저런 인터뷰를 할 때 어떤 아줌마에게 프랭크 토머스를 어찌 생각하냐고 묻자, 아줌마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대답하니 크게 기뻐했다. 영상의 55초부터 나온다.
}}}


8.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프랭크 토머스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90
CHW
60
240
63
11
3
7
39
31
0
44
54
.330
.454
.529
.983
2.4
2.3
1991
158
701
178
31
2
32
104
109
1
138
112
.318
.453
.553
1.006
7.2
7.0
1992
160
711
185
46
2
24
108
115
6
122
88
.323
.439
.536
.975
7.1
7.0
1993
153
676
174
36
0
41
106
128
4
112
54
.317
.426
.607
1.033
6.3
6.2
1994
113
517
141
34
1
38
106
101
2
109
61
.353
.487
.729
1.217
7.0
6.4
1995
145
647
152
27
0
40
102
111
3
136
74
.308
.454
.606
1.061
5.4
5.3
1996
141
649
184
26
0
40
110
134
1
109
70
.349
.459
.626
1.085
6.1
5.6
1997
146
649
184
35
0
35
110
125
1
109
69
.347
.456
.611
1.067
7.2
7.3
1998
160
712
109
35
2
29
109
109
7
110
93
.265
.381
.480
.861
3.0
3.5
1999
135
590
148
36
0
15
74
77
3
87
66
.305
.414
.471
.885
2.1
2.3
2000
159
707
191
44
0
43
115
143
1
112
94
.328
.436
.625
1.061
5.9
6.0
2001
20
79
15
3
0
4
8
10
0
10
12
.221
.316
.441
.758
-0.1
0.0
2002
148
628
132
29
1
28
77
92
3
88
115
.252
.361
.472
.834
1.4
1.9
2003
153
662
146
35
0
42
87
105
0
100
115
.267
.390
.562
.952
4.2
4.3
2004
74
311
65
16
0
18
53
49
0
64
57
.271
.434
.563
.997
2.5
2.8
2005
34
124
23
3
0
12
19
26
0
16
31
.219
.315
.590
.905
0.4
0.4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6
OAK
137
559
126
11
0
39
77
114
0
81
81
.270
.381
.545
.926
2.4
3.2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7
TOR
155
624
147
30
0
26
63
95
0
81
94
.277
.377
.480
.857
1.8
2.2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8
TOR/OAK
71
289
59
7
1
8
27
30
0
39
57
.240
.349
.374
.723
-0.3
0.2
MLB 통산
(19시즌)
2322
10075
2468
495
12
521
1494
1704
32
1667
1397
.301
.419
.555
.974
72.1
73.8


9. 기타[편집]


  • 별명인 빅 허트(Big Hurt)에서 풍기는 타석의 포스와 큰 체격의 위압감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성격이 상당히 온순한 걸로 알려져 있다. 1998년 장기 계약을 체결하기 전만 해도, 집과 연습장 외엔 별 취미도 없다보니, 몸 관리를 매우 잘해서 큰 체구에도 생각보다 날렵한 편이었다. 2000년/2006년에도 체중 감량에 거듭 성공하여 좋은 활약을 하는 등 프로로서 신경쓸 건 철저히 신경썼다. 어린애처럼 순박한 미소만큼이나 성격은 정말 솔직하고 순수했고 특히 팬 서비스도 팬들에게 차별없이 모두 다 웃으면서 다 해줄정도로팬서비스 해줄려다 팬들이 덩치때문에 오해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귀여운 소문도 있다 인성과 실력 모두 갖춰진 메이저리그에 몇없는 선수, 그만큼 어린애같이 잘 토라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느 악동들처럼 을 벌이거나, 술마시며 사고 치는 일은 선수생활 내내 없고, 그냥 하소연 하는 것뿐.리얼 소녀 감성 단, 하소연을 장소 못 가리고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이 문제로, 프런트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잦았다. 팀의 상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리그 최고의 강타자가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접하는 언론에다 대고 전혀 절제되지 못하고 아 무생각 없는 듯한 화법을 사용했다. 이런 점 때문에 툭하면 징징거리는 것으로 비춰져서 철부지 같다는 평이 많았다.

  • 그리고 워낙 순둥이라서 역으로 리더가 갖춰야 할 투쟁심이 부족하다며 지적 되기도 했다. 뭐 이런 정도는 사실 알버트 벨이나 밀튼 브래들리, 칼 에버렛 같은 악동들의 사고에 비한다면 문제라고 할 차원도 아니고, 그냥 좀 성가시거나 철이 좀 없는 대신 순해 빠졌으니. 덕분에 클럽하우스에서 동료들과 다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역 사회에 봉사 활동을 비롯해 자선 사업 활동에 적극적인 선수로도 유명했으니, 잘 삐져서 하소연 늘어놓는 점만 아니었어도 사생활 바르고 순박한 만큼, 실력과 성품 모두 그림에 그린 듯한 모범 선수로만 남았을 듯하다.

  • 1992년에는 유니버설 영화사 제작, Fred Schepisi 감독, Tom Selleck 주연의 영화 "Mr. Baseball"에 뉴욕 양키스의 루키 선수 역할로 출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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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건 공을 치라고 드는 물건이 아닌데요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때 연습용 배트가 아닌 철근을 휘둘러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투수들이 저거 휘두르는거 보고 지릴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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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명이인인 1929년생 프랭크 토머스도 있었다. 이쪽도 MLB 통산 .266/.320/.454 286홈런으로 나름 준수한 활약을 했으며,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오래 뛰었다. 그는 2023년 1월에 사망했다.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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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루수 971경기/지명타자 1310경기[2]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메이저 리그, 일명 스테로이드 시대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금지 약물을 복용한 선수들이 판을 쳤었다.[3] 원문은 다음과 같다. "When I came into the league, if you were hitting 30 homers and driving in 100, you were a great major-league baseball player. Not good. Not great. So I set my goal every year at 40 and 120. But overnight, everybody caught up. My 40 home runs, and my 120 RBI wasn't what it once was. Guys started ramping up 50 and 60 home runs. They were doing things that were crazy. So people started talking like my numbers were just average, and I took a lot of flak for that. They looked at me like, "What are you doing? You're not working out." That's the one thing I was pissed off about.''[4] 악인이라는 게 아니라, 책임감이 부족하고 자기가 당대의 아이콘이자 스타라는 걸 모르는 듯한 언사를 자주 했다.[5] 루스, 본즈, 뮤지얼, 토마스, 토미.[6] 물론 시대가 다르다는 점, 트라웃은 수준급 중견 수비를 보여줬고 스피드 툴도 갖췄다는 점, 토머스는 만 21세 데뷔지만 트라웃은 19세 데뷔라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7] 1991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칼 립켄 주니어였고 ,2위는 세실 필더였다.[8] 1997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켄 그리피 주니어였고, 2위는 티노 마르티네즈였다.[9]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벨이 얻은 엘리베이터 조항은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벨의 연봉액을 초과하는 경우 항상 연봉 랭킹에 들어가도록 차액을 추가로 지급하지 않으면 FA가 되어 자유롭게 타 팀과 계약할 수 있는 극단적인 꿀 보장이었다. 설마 화이트삭스도 5년 내에 더 큰 계약이 나타날까 했지만 당시 메이저 리그의 연봉 폭증과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페드로 마르티네즈와 6년 $75M 재계약을 맺으면서 현실이 되어버렸다.[10] 2000년 아메리칸 리그 MVP는 제이슨 지암비였고, 3위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11] 이 상을 아메리칸 리그에서 두 번 받은 건 토머스가 유일하며, 내셔널 리그에서는 크리스 카펜터가 두 번 받았다.[만장일치] 만장일치 수상.[12] 1위는 토니 그윈(.353, 3,873타석), 2위는 마이크 피아자(.334, 2,856타석).[13] 물론 타율은 토니 그윈, 홈런은 켄 그리피 주니어 등의 선수들에게 밀렸지만 토마스는 당시 기준 모든 타자들 중에서 가장 균형 잡힌 타격 지표를 기록한 타자 중 한 명이었다.[14]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행크 애런, 윌리 메이스, 멜 오트, 지미 폭스.[15]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행크 애런, 배리 본즈, 미키 맨틀, 짐 토미.[16] 내셔널 리그 1위는 배리 본즈의 1146볼넷.[17] 3천 타석 이상. 5천 타석 이상만 보면 11위. 1만 타석 이상만 보면 4위.[18] 토머스보다 Def가 더 낮은 선수는 -300.9게리 셰필드와 -276.6의 매니 라미레즈 뿐이다.[19] 100% 지명타자로 출장한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20] 토머스 다음으로 감점을 심하게 당한 선수는 -247.7의 데이비드 오티즈와 -235.7의 해롤드 베인스다.[21] 짐 토미가 554.5를 기록했고, 에드가 마르티네즈가 500.5를 기록했다.[22] 2위는 짐 토미의 69.1, 3위는 폴 몰리터의 67.7이다.[23] 마크 맥과이어는 90년대 최다인 415개의 홈런, 새미 소사도 365개의 홈런, 후안 곤잘레스는 2차례의 MVP와 4년 연속 40홈런 130타점 이상을 올려 이들 역시도 1990년대 최고의 우타자들이다. 물론 모두 스테로이드 복용이 확인되었으므로 같은 선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제프 배그웰은 카더라 정도의 이야기만 나온적이 있었으나, 적발된 사례나 미첼 리포트에도 이름은 없었다. 마이크 피아자, 이반 로드리게스와 비슷한 경우.[24] 마크 맥과이어는 1998년에 wRC+ 205를 기록했는데 순위(26위)로는 토머스보다 낮다.[25] 마이크 트라웃조차 최고 기록이 2018년에 기록한 191이다.[26] 나무위키의 윌리 메이스, 타이 콥 같은 10위 안에 드는 레전드 선수들의 문서에는 스포팅 뉴스가 1998년에 선정한 탑100 틀이 있는데, 본즈는 여기서 34위로 현역 중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27] 테드 윌리엄스(1939-1948): .354 .488 .640 1029경기 222홈런 879타점 939볼넷
프랭크 토머스(1991-1997): .330 .452 .604 1016경기 250홈런 823타점 835볼넷
알버트 푸홀스(2001-2007): .332 .420 .620 1091경기 282홈런 861타점 592볼넷
[28] 그리피는 62위.[29] 그리피는 30위.[30] 물론 토머스의 성적 하락은 장기 계약 이후 나태해진 자기 관리에 팀과의 연봉 싸움과 노쇠화까지 삼박자가 모두 맞은 결과로, 그 전까지 토머스는 경솔한 언행이나 불평불만으로 구설수에 오르긴 했어도 허리가 출렁거리는 모습은 전혀 없이 기량 유지에 충실했던 선수였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영상을 보면 덩치는 크지만 꽤 날렵해 보인다.[31] 사실상 짐 토미가 약물에 의해 가장 큰 피해자를 본 선수라고 볼 수 있는데, 전성기를 맞이한 1996년부터 알버트 벨과 약물 복용자인 매니 라미레즈라는 완성도 높은 슬러거들과 같은 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늘에 맍이 가려진데다가, 토미의 전성기는 사실상 스테로이드 시대를 관통하는 10년이었다. 당시 토미는 9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했지만, 1990년대 말의 30홈런은 웬만한 팀의 중심 타자들이 기록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며, 2001년부터는 4년 연속 40홈런을 기록했고, 2003년에는 무려 52홈런을 기록했지만 역시 약물을 복용한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57홈런에 밀렸다. 토미는 2003년 리그를 옮겨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하고 나서야 47홈런으로 생애 최초의 홈런왕에 오르고서 겨우 최정상급 슬러거로 인정을 받았다. 토미는 꾸준하게 기량을 유지하면서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2005년을 제외하면, 38세인 2008년까지 34홈런을 기록하는 등 1996년-2008년까지 모두 30홈런을 기록하고 1004년-2010년까지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최고의 슬러거였지만, 전성기 내내 약물 복용자들의 맹활약에 묻혀 직접적인 저평가의 대상이 된 스테로이드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이다.[32] 프랭크 토머스 사진 위의 'The Catch'는 마크 벌리가 2009년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18번째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경기에서, 9회초 드웨인 와이즈가 퍼팩트게임을 깨뜨릴뻔한 홈런성 타구를 잡아낸 곳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33] 그 와중에 가장 언론에 떠들어대는 것도 토머스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크게 높이면서 자랑하는 뉘앙스의 인터뷰는 여전했다. 과연 습성은 어디 안간다. 물론 레전드인 만큼 예우하기도 하고, 예전처럼 철없게 보는 시각은 사라졌다. 은퇴한 마당에 굳이 과거에 징징거린 일들이나 꼬장부리고 무단이탈한 흑역사는 그냥 묻어두는 분위기여서, 약물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미지 변신에 크게 성공한 셈이다.[34] 일단 비율 스탯은 아름다운 수준이고 MVP도 두 번이나 탔지만 지명타자였던 데다가 언론에 징징대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35] 사실은 둘 다 아직 명예의 전당 투표 자격이 되질 않는다. 2021년 시즌이 끝난 후 부터 자격이 될 예정이며, 둘 다 약물 논란(로드리게스는 징계 전력이 있으나 오티즈는 없는 것이 차이)이 있지만 친 미디어적인 행보를 보여왔으므로 이 둘의 입성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예정이다.[36] 결국 데이비드 오티즈가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정되면서 오티즈 앞에 Hall of Famer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