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잭 플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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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잭' 플레처
Frank Jack Fletcher(1885. 4. 29 ~ 1973. 4. 25)

1. 개요
1.1. 일생
1.2. 출생과 성장
1.2.1. 태평양 전쟁
1.2.2. 사망
1.3. 평가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합중국 해군 제독. 위의 프랭크 프라이데이 플레처 제독의 조카다. 진주만 공습 이후 산호해미드웨이를 거쳐 과달카날에 이르기까지, 미 해군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최일선에서 지탱해냈던 지휘관이다.


1.1. 일생[편집]



1.2. 출생과 성장[편집]


아이오와에서 태어난 그는 1902년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06년에 졸업한다. [1] 이후 전함 로드아일랜드, 오하이오 및 메인에서 초기 몇년간을 지냈고 이후 이글, 프랭클린 등 여러 함선을 전전하다가 1914년 4월 베라크루즈에서 있던 전투에서 공훈을 인정받아 명예 훈장을 받게 된다. 베라크루즈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금요일 삼촌에 묻히기도 하지만, 사실 삼촌 조카 둘 다 한 전투에서 명예 훈장을 받은 거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여러 함선을 오가며 지휘를 했고 그렇게 커리어를 쌓아갔다.


1.2.1. 태평양 전쟁[편집]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웨이크섬 전투가 벌어지자 14 기동부대를 이끌고 웨이크섬으로 향했으나 더이상 주력함을 손실할 순 없다는 상부의 결정으로 680km 거리까지 접근하고도 회항한다.

이후 17 기동부대를 이끌고, 포트모르즈비를 공격하러 투입된 일본의 5 항공전대를 막으러 산호해로 투입된다. 산호해에서의 전투에서 그의 기함 렉싱턴은 격침되고 같이 출격한 요크타운은 전치 3개월 이상의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일본군 항공모함 쇼호를 격침시키고 일본군의 포트모르즈비 상륙을 저지해 전략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만, 어니스트 킹 제독은 렉싱턴을 특별히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배를 날려먹은 플레쳐 제독은 미 해군 최고 권력자의 눈밖에 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살려온 요크타운은 수많은 정비공들과 수병들을 갈아넣어서 3일만에 살려내고, 함대의 기함으로써 동생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데리고 미드웨이 해전의 대역전극의 주연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기함으로 탄 요크타운은 격침되고만다. 그래서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로 기함을 옮기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상대였던 일본군 제독들과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야마구치 다몬 등 일본 제독들은 이 때까지도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무에 실패하거나 패배한 경우 기함이 침몰하는 중이라면 퇴함을 거부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은 그런 거 없이 쿨하게 퇴함하여 다음 임무를 준비했다. 이는 플레처 제독만이 아니라 미군 제독들의 공통적인 인식이기도 했고.

이후 플레처는 중순양함에서 제대로 항공전을 지휘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요크타운마저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자신이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다고 판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이끌고 있으며 여타 특별한 피해를 입지 않고 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플레처 제독이 더 상관이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권을 이양받지 못하면 스프루언스 제독 마음대로 함대 운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이후로도 계속 고마워했다고 한다. 정확히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권을 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한 것은 아니었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공격대는 적 항모를 치기 위해 출발했음. 추가적인 지시가 있는가?"라고 전문을 보냈다. 여기서 추가적인 지시가 있느냐는 질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 플레처 제독은 "그런 것 없음. 이후는 귀관의 지시에 따르겠음" 이라며 쿨하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이 두 번의 승리로, 제독의 '목표를 달성하는 역량'에 대한 태평양 사령부 내부에서의 평가는 굉장히 높아졌다. 하지만 홀시 이상의 공세적인 지휘 성향으로 금쪽같은 대형 항공모함을 2척이나 날려먹은 탓에, 그의 상사은 그가 보급과 전략에 관여하는 지위까지 승진하는 것까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건 아니었다. 상대했던 적이 일본 최강의 항모전단이었고 미군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세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2척 밖에 날려먹지 않고 전략적 승리를 두 번이나 거뒀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업적이지만, 상사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플레쳐 제독 역시 그런 평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그의 평가를 깎아먹는 사건이 2개월 후 과달카날 전투에서 벌어졌는데 과달카날에 미 해병대가 상륙한 이후 그는 항모부대에 재급유가 필요하다며 기함인 새러토가와스프, 엔터프라이즈를 과달카날에서 빼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두 번이나 기함으로 쓰던 항공모함을 잃은 그가 일본군의 공습으로 또다시 기함을 잃을 순 없다는 강박증에 걸려 퇴각한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그리고 8월 8일 사보섬 해전에서 미군 함대가 제대로 박살나면서 "핑계나 대며 도망쳤다!"라고 욕을 한바가지 먹는다. 해병대와 해군에게 쌍으로.[2] 야간작전능력도 없는 항모전단이 현장에 있었으면 일본군 제8함대에게 무자비하게 유린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플레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8월 24일~25일간 벌어진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함대에 맞서 엔터프라이즈와 새러토가를 이끌고 일본군 항공모함 류조를 격침시키고 수상기모함 치토세를 대파시켰으며 일본군의 추가적인 상륙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 후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인 8월 31일. 그가 타고 있던 항공모함 새러토가가 I-26호의 뇌격으로 대파당할 때 그도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니미츠 제독은 그에게 8개월간 쉬지않고 지휘봉을 잡았으니 이 기회에 휴식을 가질 것을 권유했고 그도 권유를 받아들여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휴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동부대의 지휘관들은 항공계통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수상함 출신의 플레처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스프루언스도 수상함 출신인 것 같지만 넘어가자[3] 결국 그는 1942년 11월부터 비교적 한직인 북태평양 방면의 Northwest Sea Frontier의 사령관이 된다. 이 부대는 알래스카부터 시애틀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사실상의 좌천이긴 하였으나, 플레쳐 제독이 부임하는 시기는 과달카날에서의 전세가 미군측으로 기울던 때였고, 미군은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공세를 펴길 원했기에, 플레쳐 제독 역시 공세의 일환 겸 사령부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로 부임한 것이긴 했다. 여기서 제독은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고, 얄류산 열도 전역이 종료된 이후에는 해당 섬들도 제독의 관리 영역에 들어왔다. 가정이긴 하나, 얄류산 열도를 통해서 홋카이도로 진격하는 북방 루트가 채용되었다면 제독 역시 다시 전장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함대를 이끌고 파라무시르를 포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루트는 결국 채택되지 않았고, 이 포격이 그가 지휘한 마지막 전투였다.


1.2.2. 사망[편집]


1947년에 은퇴한 그는 1973년에 자신의 88번째 생일을 맞기 조금 전인 4월 25일 눈을 감는다.


1.3. 평가[편집]


"You son of a bitch, if you do that you are yellow!!"

"이 개새끼야, 그럼 넌 겁쟁이라고!!"

-리치몬드 켈리 터너 제독, 사보섬 해전 이후 플레처에게 한 말.[4]


충분히 명장 반열에 들 수 있는 제독이지만 다양한 경력을 제외하면 특출난 장점이 없던 제독이다. 뭔가 위인들이라면 가지고 있던 인생 철학도 없었고 독특한 취미도 없었으며 좋아하는 것도 평범한 아저씨들처럼 알코올이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다. 그러나 이렇다 할 약점도 없던 제독이기도 하며, 전쟁 초기의 사기도 낮고 경험도 부족한 미 해군을 이끌고 정예병들로 구성된 일본군 해군과 가장 자주 칼을 맞댄 제독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윌리엄 홀시와 달리 전투에 있어서 약간 신중하고 소심해보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실제 지휘성향은 홀시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다만 플레쳐는 뺄때 아주 쿨하게 빼는 차이점은 있었다. 덕분에 플레처 제독은 큰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으며, 상관이 지정한 전략적 목표는 매번 달성했다. 하지만 격전이 벌어지면 운이 없었던지. 공세적인 성향때문인지 간에, 큰 배를 따박따박 잃었다. 미해군은 전간기의 기동훈련을 통해서 항공모함의 공세적인 운용은 신중하게 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은 상태였는데, 수상함 출신의 제독이 항공모함만 잃고 돌아오니 이 부분이 단점으로 확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 초반 미군은 전력상 열세였으므로 실수가 일어나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으며, 본격적으로 본국의 산업 생산력이 힘을 발휘할 때까지는 전력을 보존하며 버텨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플레처 제독의 이러한 성향과 지휘는 크게 보면 도움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되는 스타일 탓에 언제까지고 계속 기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말그대로 스프루언스의 하위호환이었고, 최고 지휘관으로 기용되는 제독이 여럿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드웨이 이후로 스프루언스가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이후에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다만, 그가 스프루언스와 홀시에 가려져있어서 그렇지 결코 판단력이 나쁜 제독은 아니다. 산호해 해전에서도 렉싱턴과 요크타운이 심한 손상을 입자 계속 싸우기보단 후일을 도모하며 퇴각시키는 선택을 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스프루언스 이전에 공격대 출격시점을 결정한 것도 그다. 기함을 두 번씩 잃긴 했지만 경험이 하나도 없는 미 해군 항공대를 이끌고 수상함 전문가가 함대 항공전에서 두 번이나 전략적 승리를 거둔 것은 충분히 훌륭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플레처가 격전이 벌어질 때마다 큰 배를 따박따박 잃은 것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플레처가 일선에 있었던 시기의 일본 함대는 태평양 전쟁 중 가장 강력한 상태였다. 일본에서 세계 최강이라며 자랑하는 1항전, 상당한 실전경험을 쌓은 2항전, 신출내기이기는 해도 신형 항공모함 2척을 보유한 5항전 등.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플레처는 수적 열세 속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산호해 해전에서도 플레처는 항모 2척이었고 일본군은 3척이었으며, 미드웨이에서도 플레처는 항모 3척으로 일본 최정예 항모 4척을 상대해야 했다. 게다가 숙련된 일본군 파일럿들을 상대로 미국의 풋내기 조종사들은 아직 적수가 되지 못했다. 와일드캣으로 제로센을 때려잡는 방법도 아직은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본격적으로 제공권을 틀어잡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누가 배를 잃고 싶어서 잃었는가.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밀리는 데도 전략적 승리를 거두고 일본 최강의 항공모함들을 줄줄이 가라앉혔다. 이래도 무능하단 말인가? 플레처의 스타일을 탓할 게 아니다.

요크타운 상실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플레처로부터 지휘권을 인수받았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호넷 항공대가 제 일을 똑바로 했더라면 요크타운을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게 일리가 있는 게, 운명의 5분 당시에 엔터프라이즈는 아카기와 카가를 때려잡았고 요크타운은 소류를 때려잡았다. 호넷이 일을 제대로 했다면 히류도 이때 저승으로 갔을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해전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요크타운이 히류에게 얻어맞고 대파되지도 않을 거고, 일본 잠수함에게 무방비로 얻어맞을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미 해군의 최고 명장 중 하나인 스프루언스의 의견이니까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호넷 항공대의 실패도 결국 플레처의 잘못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그렇지 않다. 호넷 항공대가 일을 제대로 못한 이유는 뇌격비행대의 지휘관 스탠호프 링 중령이 엉뚱한 곳으로 호넷 항공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링 중령의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한 존 왈드론 소령의 뇌격기 편대는 일본 함대를 제대로 찾아냈지만 공격 도중 전멸했고, 멍청한 링 중령 때문에 급강하폭격기와 전투기들은 공격도 못해보고 연료만 낭비했으며, 살기 위해 링 중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귀환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수많은 함재기들이 바다에 추락해서 불필요한 피해를 입었다. 뇌격기 편대가 괴멸된 원인도 전투기가 그들을 엄호하지 못한 탓이며, 그 원인은 링 중령이었다. 심지어 마크 미처는 거짓 보고까지 하면서 링 중령을 감싸다가 스프루언스에게 걸려서 쫓겨났고, 한동안 한직을 전전했다. 링 중령과 미처 같은 자들이 발목을 잡았는데도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플레처는 정말로 대단한 명장이 아닐 수 없다.

사보섬 해전에서 항모를 물린 것 때문에 당대에는 꽤나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는 플레처 제독의 판단도 반드시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사보섬 해전 자체가 워낙 막장스러웠기 때문에 항모가 있었더라도 큰 변수로 작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사보섬 해전은 야간에 일어났다. 아직 비행장이 완전치가 않은 상태에서 야간에 함재기를 날리는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보내는 자살 행위이다.) 괜히 난전에 항모가 끼어있다가 야간 수뢰전에 휘말려 격침이라도 당했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야간작전능력도 없는 항모들이 야간전에 능숙한 일본군 중순양함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사보섬 해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미 해군의 병크였기 때문에 플레처 제독이 어느 정도 속죄양으로 희생된 감도 없잖아 있다. 플레처가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과달카날을 지키던 미 해군 남부부대와 북부부대의 중순양함들이 그렇게 한심하게 박살날 줄 어떻게 알겠는가.

이런 점으로 보면 미 해군 제독들 중에서 가장 제 실력만큼 대우받지 못한 인물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10:11:12에 나무위키 프랭크 잭 플레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참고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와 동기다.[2] 평가 문서에도 크게 써있듯이 과달카날 전역에서 해군의 켈리 터너 제독은 플레처 제독의 결정에 반발하며 자신보다 계급도 위인 플레처 제독에게 이 “개새끼야 넌 그러면 겁쟁이야!”라고 일갈 하기까지 한다.[3] 스프루언스 제독은 예외인 것이 해군참모총장이자 함대 총사령관인 어니스트 킹 제독이 다른 제독들과 달리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신임을 보내고 있었다.[4] 참고로 당시 플레처는 중장이었고 터너 제독은 소장이었다. 그렇다! 플레처는 그보다 상관이다!! 터너 제독의 더러운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자 플레처 특유의 지휘방식이 드러나는 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