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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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MLB 최초의 신인왕과 MVP를 같은 시즌에 수상한 인물이다.
2. 선수시절[편집]
루키 시즌은 15게임밖에 출전하지 않았기에, 신인 자격을 상실하지 않았다.
풀타임 첫해인 1975년에 23살의 나이로 타 .331, 출 .401, 장 .566, OPS .967, wRC+ 161, fWAR 7.1, bWAR 7.4을 찍고, 만장일치에서 1표 모자른 신인왕 및 MVP를 수상하였다.
커리어 하이 시즌은 1979년으로서, 27살의 나이로 타 .333, 출 .423, 장 .637, OPS 1.059, wRC+ 174, fWAR 8.6, bWAR 8.8을 찍었다.
1979년의 MVP는 양쪽에서 모두 논란거리였다. 그 해 수상자는 AL에선 돈 베일러, NL에선 키스 에르난데스와 윌리 스타젤이 공동 수상했는데 굉장히 어이없는 성적이었다. 그 해 fWAR 순위에서 양 리그 1위는 NL에서 J.R. 리차드(8.8), AL에서는 린(8.6)이었다. 하지만 리차드는 NL 19위에 그쳤고, 린은 AL 4위에 그쳤다. 더 놀라운 건 NL MVP에 오른 윌리 스타젤은 적어도 그 해엔 NL fWAR 타자 부분에서만 따져도 35위에 머문 선수였다는 것. 무엇보다도 MVP급과는 거리가 먼 2.7 fWAR를 찍었다. 심지어 규정타석도 기록하지 못했던 선수였다(480타석). 실제로 빌 제임스는 가장 멍청한 1970년대 MVP 선정을 윌리 스타젤의 1979년이라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돈 베일러 또한 AL fWAR 타자 부분 25위에 그친 타자이다. 그런데도 두 선수가 MVP를 수상한 이유는 딱 하나. 바로 팀 성적이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었기 때문에[1] 이 상을 수상했다. 1947년의 AL MVP 데자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2] 그나마 논란에서 자유로운 선수는 키스 에르난데스였다. NL 전체 2위의 fWAR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2016년의 MLB 기자들이라면 아마 린, 브렛, 리차드, 에르난데즈 중 2명을 골랐을 것이다.#
그 외에는 평범한 성적을 기록, 명전에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1996년에 첫 후보로 올라 5.5%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다음 해에 4.7%를 기록하는데 그치며 바로 탈락했다. 사실 초년병 이후 성적이 다소 평범했던 건 무릎 수술만 3차례 받은 걸 포함해 발가락, 허리, 햄스트링 부상 등 엄청난 유리몸이었기 때문.
[1] 특히 스타젤은 젊은 선수들이 많던 피츠버그 팀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고 인품에 대한 평판도 훌륭한 베테랑이었기에 성적 이상으로 주목을 받았다.[2] 적어도 그 해는 조 디마지오가 받아서는 절대 안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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