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빅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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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프리데리케 아말리아 빌헬미네 빅토리아
Viktoria von Preußen


파일:1673842721259.jpg

이름
프리데리케 아말리아 빌헬미네 빅토리아
(Friederike Amalia Wilhelmine Viktoria)
출생
1866년 4월 12일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신궁전
사망
1929년 11월 13일 (63세)
독일국
배우자
샤움부르크리페의 공자 아돌프
(1890년 결혼 / 1916년 사망)
알렉산더 줍코프 (1927년 결혼)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형제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 지기스문트, 발데마르, 조피, 마르가레테
1. 개요
2. 생애
2.1. 성장
2.2. 첫사랑과 우울증
2.3. 결혼
2.4. 말년
3.1. 조상



1. 개요[편집]


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빅토리아 황후의 차녀이자 영국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 애칭은 모레타(Moretta).[1]


2. 생애[편집]



2.1. 성장[편집]


빅토리아는 1866년에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의 신궁전에서 프리드리히 3세의 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프리데리케 아말리아 빌헬미네 빅토리아지만 주로 마지막 이름을 딴 빅토리아 공주나 애칭인 모레타(Moretta)로 불렸다.

파일:소시와 모레타와 모시.jpg
왼쪽부터 조피, 빅토리아, 마르가레테.

프리드리히 3세의 자식들 중 빅토리아 공주 이전에 태어난 지기스문트 왕자가 요절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의 아내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자신의 아이들을 직접 돌보았다.

빅토리아 역시 오빠나 언니가 받은 것보다 덜 엄격하지만 더 살뜰한 보살핌 아래서 자랐기 때문에 부모님을 잘 따랐다. 반대로 친조부모인 빌헬름 1세아우구스타 황후는 모레타와 조피, 마르가레테를 찬밥취급했다.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였기 때문에, 빅토리아와 그녀의 동생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활발한 아이였던 빅토리아는 승마와 댄스를 즐겼다고 한다.

파일:기모노를 입은 독일 공주.jpg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빅토리아.


2.2. 첫사랑과 우울증[편집]


1881년에 불가리아 공국알렉산더르 1세[2]가 프로이센을 방문했다. 빅토리아 공주의 외할머니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두 사람의 혼인을 제안했다. 당시 15살이었던 빅토리아도 매력적인 알렉산더르 1세에게 반했고 그와의 결혼을 기대했다. 알렉산더르와 빅토리아는 어머니의 허락 아래 몰래 약혼했다.[3] 그러나 이 결혼은 비스마르크 수상과 할아버지 빌헬름 1세, 오빠 빌헬름 2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알렉산더르 1세는 팽창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차르[4]에게 밉보인 상태였기 때문에, 그와의 혼인은 자칫 독일 제국과 러시아의 관계에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알렉산더르 1세는 귀천상혼 가문 출신이였기 때문에 프로이센의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였다.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이 혼사에 굉장히 집착했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미온적인 반응이었기에 빅토리아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알렉산더르 1세가 불가리아 공국의 군주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빅토리아는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할아버지 빌헬름 1세, 오빠 빌헬름 2세,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반대로 결혼이 성사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알렉산더르를 좋게보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만이 이 결혼에 집착해 알렉산더르만 난처해졌다.

그나마 할아버지 빌헬름 1세가 사망하자 약혼에 진전이 있어보였다.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약혼을 허락하려 하자 이 둘이 약혼한다면 비스마르크는 사직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상하리만큼 이 결혼에 집착하던 어머니이자 이젠 황후가 된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는 급기야 알렉산더르에게 약혼이 가능할 것 같다면서 딸과 홈부르크에서 비스마르크 몰래 결혼하라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제시했다. 독일 궁정으로부터 지속된 압박에 지쳐서 더 이상 빅토리아와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 알렉산더르가 편지를 보내도 황후는 이 결혼을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결혼을 지지했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제 곧 황제가 될 빌헬름 황태자의 온전한 동의 없이 약혼을 진행할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딸 빅토리아 황후에게 충고했다. 황후는 아픈 남편 프리드리히 3세가 암으로 죽기전에 그가 유언에 아들 빌헬름에게 빅토리아의 결혼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조항을 삽입하도록 설득해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편지원문]

하지만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죽자 오빠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 외교관 대표를 알렉산더르의 아버지에게 보내 이 결혼은 황제가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모든 문제가 끝내야 한다고 전했다. 알렉산더르는 빅토리아가 준 모든 선물들을 다시 돌려주었고 작별인사를 전하므로써 5년 넘게 질질 끌던 빅토리아 공주와 알렉산더르의 약혼 문제는 끝났다.

계속된 압박 등으로 지쳐있던 알렌산더르는[5] 오스트리아 출신의 연극 배우 요한나 로이싱거와 결혼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아서 결혼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빠져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하다가 섭식장애에 걸렸다.


2.3. 결혼[편집]



파일:Princess_Victoria_of_Prussia_and_Prince_Adolf.jpg

빅토리아와 아돌프의 약혼사진, 1890년

빅토리아에게는 여러 구혼자들이 있었다. 빅토리아는 그들 중에서 샤움부르크리페 후작 아돌프 1세의 4남인 아돌프 빌헬름 빅터 공자와 약혼했다. 1890년 11월 19일, 베를린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빅토리아는 남편을 존중했지만 사랑하지 않았고 두 사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1916년에 아돌프가 사망한 후에도 빅토리아는 남편과 살았던 에 위치한 성에서 살았다.


파일:Bundesarchiv_Bild_102-08649,_Ehepaar_Zoubkoff.jpg

빅토리아와 알렉산더 줍코프, 1927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아돌프 공자와 사별한 지 11년이 되던 해에 빅토리아가 35살 연하의 평민과 결혼을 한 것이다. 상대는 알렉산더 줍코프라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대학생이었다. 빅토리아가 자신의 성에서 연 파티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알렉산더는 자신을 러시아 혁명을 피해 망명한 귀족 출신이라고 소개했다.[6] 빠르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처음 만난 해인 1927년에 빅토리아의 당주이자 큰 오빠인 빌헬름 2세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빅토리아는 예순이 넘었으며 알렉산더는 20대 후반이었다. 빌헬름 2세는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재혼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4. 말년[편집]


이렇게 큰 논란을 일으키며 결혼한 알렉산더는 사치스러운 청년이었기 때문에, 결혼하자마자 아내 빅토리아의 재산을 실컷 낭비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렉산더는 돈과 관련된 불법 행위로 체포되어 독일에서 추방당했다. 알렉산더가 추방당했을 때 빅토리아는 혼자인데다 재정적인 문제에 놓이게 되어, 생계를 위해 자신의 물건을 경매에 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928년에 빅토리아는 이혼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이혼 절차가 마무리 되기 전인 1929년에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929년 11월 13일에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빅토리아는 동생 마르가레테의 집 프리드리히쇼프 성에 안장됐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Princess Viktoria
of Prussia)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빌헬름 1세
(Wilhelm I)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Luise von Mecklenburg-Strelitz)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Augusta von Sachsen-Weimar-Eisenach)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arl Friedrich
Großherzog von Sachsen-Weimar-Eisenach)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마리야 파블로브나
(Мария Павловна Романова)[7]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st I
Herzog von Sachsen-Coburg u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제
(Luise von Sachsen-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8]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Victoire
von Sachsen-Coburg-Saalf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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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니 샤를로테의 애칭은 샬리, 첫째 여동생 조피의 애칭은 소시(Sossy), 둘째 여동생 마르가레테의 애칭은 모시(Mossy)였다.[2] 불가리아 공국의 군주로 추대되기 전에는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자였다.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율리아 하우케귀천상혼하여 낳은 아들로 형이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다. 즉,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작은 외할아버지이자 루이 마운트배튼의 작은 아버지가 된다. 형 루트비히는 빅토리아 공주의 사촌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했고, 동생 하인리히는 막내 이모인 베아트리스 공주와 결혼했다. 알렉산더를 불가리아의 군주로 추천한 사람은 그의 고모부인 알렉산드르 2세다.[3] 하지만 알렉산더르가 추정하길 빅토리아의 언니 샤를로테 공주가 퍼뜨린 소문 때문에 더 이상 약혼은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4]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사촌인 바텐베르크 가문의 남매들에게 굉장히 냉정했다.[편지원문] 프리드리히 3세가 아들 빌헬름 황태자에게 보낸 편지. Should your Mother or myself be suddenly called to depart this life, I hereby wish to state definitely that I give my full consent to the marriage of your second sister with the ex-Prince of Bulgaria, Prince Alexander of Battenberg. I charge you by the love you bear your father to carry but this, my wish, which has been the heart's desire of your sister Victoria for many years. To avoid any suggestion of politics and to obviate any political difficulties, I renounce my natural wish to grant the Prince, to whom I am greatly attached, a position in the army or any official decoration. I count on you to fulfil your duty as my son by complying with my wish and trust that, as a brother, you will not refrain from helping your sister. Your loving father.' Charlottenburg, April 12th, 1888.[5] 일단 7년 동안 러시아에 맞서 불가리아를 통치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다가 지속된 암살시도와 납치, 유럽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인해 한마디로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었다. 근데 퇴위하고도 결혼 문제로 독일 궁정에서 지속된 압박을 받자 다 포기하고 빅토리아 황후에게 따님과의 결혼에 큰 뜻이 없다고 전해도 빅토리아 황후는 절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아 알렉산더르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6] 사실 확인은 안 되었으나 허세일 가능성이 높다.[7] 파벨 1세의 3녀이다.[8] 조지 3세의 4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