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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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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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 프리드리히 2세의 자매인 마르가레테의 아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
마르가레테의 두 번째 남편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인 게르트루드의 첫 번째 남편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지슬라프
게르트루드의 두 번째 남편 바덴의 헤르만
게르트루드의 세 번째 남편 로만 다닐로비치
게르트루드의 아들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가 혈연 관계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작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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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초대 황제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파일:Hans_Burgkmair_d._Ä._005.jpg
제호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출생
1415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 공국 티롤 인스브루크
사망
1493년 8월 19일 (향년 77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린츠
재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452년 3월 19일 ~ 1493년 8월 19일
독일왕
1440년 2월 2일 ~ 1493년 8월 19일
오스트리아 공작 혹은 대공[1]
1424년 6월 10일 ~ 1493년 8월 19일
배우자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1452년 결혼 / 1467년 사망)
자녀
막시밀리안 1세, 쿠니군데
아버지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
어머니
마조프셰의 침바르카
형제
마르가레테, 알브레히트 6세, 카타리나, 에른스트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문화적 영향
4. 가족
4.1. 조상
4.2. 아내
5. 평가
5.1. 생존왕
6. 여담


A.E.I.O.U.

Alles Erdreich Ist Österreich Untertan (지상의 모든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복종한다.)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 (오스트리아가 전 지구를 다스린다.)
en, Amor Electis, Iniustis Ordinor Ultor (보아라,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불의한 자들에게 두려움받는다.)


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다. 오스트리아 공작 혹은 대공으로서는 프리드리히 5세이다.[2]


2. 생애[편집]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3]와 마조프셰의 심푸르기스의 아들로, 1424년 부친이 죽자 영지인 내지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4]를 상속받았다.

1439년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고 서열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재위기간 내내 끊이지 않은 친척들과의 갈등과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에 시달렸다.

교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프리드리히는 1452년 이탈리아 반도를 여행하면서 롬바르디아 철관을 받았고, 다시 로마에서 교황의 주관으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교황에 의해서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된 마지막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한때는 친척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을 현지 귀족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상실하기도 하였으며 정부 개혁을 추진할 수 없는 무능력, 친족들과 독일 귀족들의 반란이 겹치면서 독일에서의 정사에서 물러나는 등 상당한 시련에 시달렸다.

그러나 1463년에 분할되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가 아들 막시밀리안의 이름 하에 재통합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고, 1477년에 막시밀리안과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서 풍요로운 저지대 지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명군 마차시 1세가 이끄는 헝가리 왕국에게 1485년 을 빼앗기고 린츠로 도망가는 등 오스트리아 대공국 대부분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으나 마차시 사후인 1490년 ~ 1491년의 전쟁에서 막시밀리안이 헝가리를 격파함으로 오스트리아를 재탈환하였다.

부인이 사망한 이후로 26년을 더 살긴 하는데 재혼을 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서 다리를 절단하다가 사망하는데, 무덤에 묻힐 때 절단된 다리를 함께 넣어줬다.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하면서 명목상으로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완전히 독점 세습하게 된다.[5]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질적인 독점 세습은 프리드리히 3세의 선왕인 알브레히트 2세부터이지만, 알브레히트는 명목상으론 어디까지나 '로마 왕'이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러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지는 못했다.

3. 문화적 영향[편집]


중세 말의 다른 통치자들처럼 연금술과 마술, 천문학에 몰두했으며 여러 인문주의자와 교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서적과 귀금속들을 수집하였다. 또한 성지순례를 한(1437년) 몇 안 되는 군주이기도 하였다.


4. 가족[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
(Ernst, Duke of Austria)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
(Leopold III, Duke of Austria)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6]
(Albrecht II, Duke of Austria)
피르트의 요하나
(Johanna of Pfirt)
베르데 비스콘티
(Verde Visconti)
베르나보 비스콘티
(Bernabò Visconti)
베아트리체 레기나 델라 스칼라
(Beatrice Regina della Scala)
마조프셰의 침바르카
(Cymburgis of Masovia)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
(Siemowit IV, Duke of Masovia)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3세
(Siemowit III, Duke of Masovia)
오파바의 유페미아
(Euphemia of Opava)
리투아니아의 알렉산드라
(Alexandra of Lithuania)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
(Algirdas, Grand Duke of Lithuania)
트베리의 울리아나
(Uliana of Tver)

4.2. 아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ns_Burgkmair_d._%C3%84._006.jpg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36살의 프리드리히는 18살의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공주와 결혼하여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와 이후 바이에른의 공작부인이 되는 쿠니쿤데를 낳았다.[7] 결혼 당시 프리드리히는 특사를 파견해서 미래의 신부가 될 레오노르의 모습을 미화되지 않은 모습으로 보기를 원했는데 당시 프리드리히가 받아본 레오노르의 초상화는 예쁘고 귀여워서 만족스러워 했고 레오노르의 오빠인 아폰수 5세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이때의 레오노르는 프리드리히와 프랑스 왕국의 도팽 중에 남편감을 선택 할 수 있었는데 프리드리히를 선택했다. 황후의 칭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이후로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프리드리히는 아내가 데려온 시종을 모두 돌려보내 레오노르를 향수병에 시달리게 하고 레오노르의 지참금을 자기가 홀라당 써버린다. 거기다 아이 몇몇이 어려서 사망하자 레오노르가 포르투갈 음식을 먹여서 그렇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부인은 물론 자녀들과의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고, 자녀의 양육은 아내인 레오노르가 모두 담당했다. 특히나 레오노르는 살아남은 아들인 막시밀리안에게 집착적으로 애정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감정 교류가 없던 것에 대한 상심이 컸는지 레오노르는 1467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사망한 뒤에 프리드리히 3세는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새 장가를 들지는 않았다. 물론 이때 나이가 51살이라 새 장가를 들기 어렵기도 했거니와 제위를 계승할 아들도 있었기에 재혼에 목매달 필요도 없었다.

5. 평가[편집]



5.1. 생존왕[편집]


평화왕(der Friedlich)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훌륭한 통치로 국토를 평정해서가 아니라 한 게 없어서 평화왕이었다. 죽은 뒤 신성 로마 제국의 게으름뱅이(Erzschlafmütze)라는 경멸이 담긴 멸칭이 붙었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나쁜 평판을 지녔던 황제였다. 이렇듯 당대에는 일관되게 평가가 나빴던 지도자이지만 오늘날에는 비교적 재평가되고 있는데, 무능력하고 멍청했던 프리드리히 3세에게도 장수라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장수를 통해 이뤄낸 일들을 보면 그야말로 그가 끈덕지게 살아 있는 동안 하느님이 적을 죽여주셨다라고 표현이 가능할 정도다.

먼저 6촌인 알브레히트 2세가 즉위 1년 만에 급서하면서 그에게 제위가 굴러들어 왔다. 알브레히트 2세의 유복자 라디슬라우스의 후견인이 되었으나 칠리 백작 울리히 2세에게 후견인 지위를 빼앗겼다. 그런데 울리히 2세는 1456년 사망했고, 라디슬라우스도 이듬해인 1457년 겨우 17세로 요절했다.

동생 알브레히트 6세는 형에게 영지 분할 상속을 요구했는데 거절당하자 형을 에 감금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가족을 이끌고 겨우 도망갔는데 1463년에 알브레히트가 사망하면서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의 통치권을 회복했다.

말년에는 헝가리 왕 마차시 1세에게 빈까지 빼앗기고 린츠로 꽁무니빠지게 도망갔으나 마차시 1세의 급사와 아들 막시밀리안의 활약으로 실지를 되찾았다. 그 자신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토인 결혼과 자식 낳기 하나만큼은 잘 했기에 최종적인 승자가 된 셈이다.

워낙에 장수했기 때문에 41년이라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제위를 유지했으며, 이는 카롤루스 대제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 전체에서 하인리히 4세[8] 다음으로 긴 재위 기간이다. 하지만 그 기나긴 재위기간 동안 열심히 도망다니는게 일이었다. 물론 조선선조인조의 사례처럼 도망다니는 것도 결국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6. 여담[편집]


  • A.E.I.O.U. 라고 하는 문장을 즐겨 사용했고 여기에 마술적 힘이 있다고 여겨 그 뜻을 누설하지 않았다. 소실된 것으로 여겨지다가 1666년 발견된 그의 노트에는 독일어로 'Alles Erdreich ist Österreich untertan'(지상의 모든 왕국이 오스트리아에 복종한다), '라틴어로 Austriae est imperare orbi universo'(오스트리아가 전 지구를 다스린다)라 적혀 있다. 하지만 같은 노트의 또 한 페이지에는 라틴어로 ‘En, amor electis, iniustis ordinor ultor; Sic Fridericus ego mea iura rego’(보아라, 나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불의(不義)한 자들에게 두려움받는다. 고로 나, 프리드리히는 정의롭게 통치한다)라 적혀 있다. 어떠한 한 풀이가 옳다기보다는 'A.E.I.O.U.'란 문자열 자체와 그에 깃든 마술적 힘을 사랑했고 이에 여러 뜻을 자유롭게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가 전 세계를 통치하리라는 믿음은 비록 그의 당대에는 비웃음을 당했겠지만 결국은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 초상화에서 알 수 있듯이 턱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다.
  • 그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의 공식 칭호로 최종 정착된 독일 국민(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명칭은 프리드리히 3세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1485년 발표한 평화칙령에서 사용했다. 이는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1512년 정식으로 채택된다.
  • 유대인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쳐 유대왕(König der Juden)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정확히는 비꼬는 별칭에 가까웠는데, 황제의 정적들은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유대인들의 왕이라며 비아냥댔다. 특히 의 시민들이 황제를 증오하여 그를 유대왕이라며 비난했다. 황후인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역시 유대인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는데, 정작 둘 사이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는 어릴 적부터 유대인을 싫어했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 시작 시점인 1444년 오스트리아 지도자 겸 신롬 황제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2/5/1으로 나머지는 별로 좋지 않지만 높은 외교력이 특징.
  •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 다만 이 소설에서 신롬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들인 막시밀리안이라 직접적인 등장은 거의 없다. 다만 그 거의 없는 등장에서도 무능의 극치를 보이며 아들의 속을 썩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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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가 출신으로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등을 포함해 전체 영지의 일부인 내지오스트리아를 다스렸으나 친척들의 사망과 통치권 포기로 1490년부터 통일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1453년 1월 6일부터 대공의 칭호를 인정하고 공식화했으며, 1457년 11월 23일 합스부르크 본가의 친척 라디슬라우스 대공의 사망으로 사실상 본가가 되어 명맥을 잇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던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 역시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주장했으나 1490년 4월 6일에 먼저 사망하였다.[2]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1세/3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의 대립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이다. 루트비히 4세와 프리드리히의 동시 선출은 훗날 선제후 제도가 완전히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알브레히트 1세의 손자이자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 가운데에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3세가 있다.[3]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의 3남으로 독일왕 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4남 알브레히트 2세의 손자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알브레히트 1세의 5대손.[4]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트리에스트. 1500년 이후 괴르츠 백국이 추가되었다.[5] 단,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넘어가던 시기, 카를 7세에 의해 잠시 다른 가문이 제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6]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가 아니다. 알브레히트 2세는 오스트리아 공작으로서 알브레히트 5세였다.[7] 총 3남 2녀를 낳았는데, 3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8] 49년간 재위했지만 겨우 6살 때 즉위한 만큼 직접 제국을 다스린 기간은 프리드리히 3세보다 짧다.[9] 플랑드르 반란 때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데도 교황청에 요청해 플랑드르에 파문을 때린다. 이걸로 말미암아 플랑드르는 동방 교회로 개종하며 막시밀리안 역시 이걸로 플랑드르가 두려워 할리 있냐며 아버지의 경솔함에 치를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