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 리그/1992-9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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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 Premier League 시즌
디비전 1

1992-93

1993-94

1. 개요
2. 참가 클럽
2.1. 감독 교체
3. 순위
3.1. 우승
3.2. 클럽별 리뷰
4. 개인 기록
4.1. 득점 순위
4.2. 도움 순위
4.3. 해트트릭
5. 개인 수상
5.1. PFA 올해의 선수
5.2. PFA 영플레이어
5.3. FWA 올해의 선수
5.4. PFA 올해의 팀


1. 개요[편집]


총 라운드 수
42라운드
개막일
1992년 8월 15일
시즌 종료
1993년 5월 11일
우승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회)[1]
UEFA 챔피언스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아스날
UEFA컵
아스톤 빌라, 노리치 시티
강등팀
크리스탈 팰리스, 미들즈브러, 노팅엄 포레스트
득점수 (평균 득점)
1,222골 (경기당 2.65골)
득점왕
테디 셰링엄 (노팅엄 포레스트 & 토트넘 핫스퍼, 22골)
홈경기 최다골차 승리
블랙번 로버스 7 : 1 노리치 시티 (1992년 10월 3일)
셰필드 유나이티드 6 : 0 토트넘 핫스퍼 (1993년 3월 2일)
원정경기 최다골차 승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0 : 3 에버튼 (1992년 8월 19일)
셰필드 웬즈데이 0 : 3 맨체스터 시티 (1992년 9월 5일)
리즈 유나이티드 1 : 4 노팅엄 포레스트 (1992년 12월 5일)
블랙번 로버스 2 : 5 코번트리 시티 (1993년 1월 26일)
노팅엄 포레스트 0 : 3 노리치 시티 (1993년 3월 17일)
퀸즈 파크 레인저스 0 : 3 블랙번 로버스 (1993년 3월 24일)
맨체스터 시티 2 : 5 에버튼 (1993년 5월 8일)
최다득점 경기
올덤 애슬레틱 5 : 3 노팅엄 포레스트 (1992년 8월 22일)
블랙번 로버스 7 : 1 노리치 시티 (1992년 10월 3일)
올덤 애슬레틱 6 : 2 윔블던 (1993년 4월 3일)
에버튼 3 : 5 퀸즈 파크 레인저스 (1993년 4월 12일)
리버풀 6 : 2 토트넘 핫스퍼 (1993년 5월 8일)
최장 연승기록
7경기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셰필드 웬즈데이
최장 무패기록
11경기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최장 무승기록
13경기 - 입스위치 타운
최장 연패기록
6경기 - 노팅엄 포레스트
시즌 최다 관중
44,619명 - 리버풀 vs 에버튼 (1993년 3월 20일)
시즌 최소 관중
3,039명 - 윔블던 vs 에버튼 (1993년 1월 26일)

1992년부터 1부리그인 디비전 1에서 22개 팀이 떨어져 나와 새로 창설된 프리미어 리그첫 번째 시즌이다. 에릭 칸토나의 영입으로 탄력이 붙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1966/67 시즌 이후 26년 만에 우승하며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노리치 시티가 시대를 앞서간 패스축구를 앞세워 팀 역사상 최고 순위인 3위에 올랐던 것과 풋볼리그 최후의 우승팀 리즈 유나이티드의 원정경기 무승과 함께 충격적인 17위 몰락, 그리고 노팅엄 포레스트의 강등으로 브라이언 클러프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 특기할 만한 시즌이다.


2. 참가 클럽[편집]




클럽
감독
주장
경기장
전시즌 순위
리즈 유나이티드
하워드 윌킨슨
고든 스트라칸
엘런드 로드
디비전1 우승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알렉스 퍼거슨
브라이언 롭슨
올드 트래포드
디비전1 준우승
셰필드 웬즈데이
트레버 프랜시스
나이젤 피어슨
힐스버러 스타디움
디비전1 3위
아스날
조지 그레이엄
토니 아담스
아스날 스타디움[2]
디비전1 4위
맨체스터 시티
피터 리드
테리 펠란
메인 로드[3]
디비전1 5위
리버풀
그레이엄 수네스
마크 라이트
안필드
디비전1 6위
아스톤 빌라
론 앳킨슨
케빈 리차드슨
빌라 파크
디비전1 7위
노팅엄 포레스트
브라이언 클러프
스튜어트 피어스
시티 그라운드
디비전1 8위
셰필드 유나이티드
데이브 바셋
브라이언 게일
브라몰 레인
디비전1 9위
크리스탈 팰리스
스티브 코펠
조프 토마스
셀허스트 파크
디비전1 10위
퀸즈 파크 레인저스
게리 프랜시스
앨런 맥도날드
로프터스 로드
디비전1 11위
에버튼
하워드 켄달
데이브 왓슨
구디슨 파크
디비전1 12위
윔블던
조 키니어
존 스케일스
셀허스트 파크[4]
디비전1 13위
첼시
데이비드 웹[감독대행]
앤디 타운젠드
스탬퍼드 브리지
디비전1 14위
토트넘 핫스퍼
더그 리버모어, 레이 클레멘스 [공동감독]
게리 마벗
화이트 하트 레인
디비전1 15위
사우스햄튼
이안 브랜풋
매튜 르 티시에
더 델[5]
디비전1 16위
올덤 애슬레틱
조 로일
마이크 밀리건
바운더리 파크
디비전1 17위
노리치 시티
마이크 워커
이안 버터워스
캐로우 로드
디비전1 18위
코번트리 시티
바비 굴드
브라이언 바로우스
하이필드 로드[6]
디비전1 19위
입스위치 타운
존 라이얼
존 워크
포트먼 로드
디비전2 우승
미들즈브러
레니 로렌스
알란 커나한
에어섬 파크[7]
디비전2 준우승
블랙번 로버스
케니 달글리시
팀 셔우드
이우드 파크
디비전2 6위, 플레이오프 우승


2.1. 감독 교체[편집]


팀명
이전 감독
종류
떠난 날짜
순위
신임 감독
부임 날짜
첼시
이안 포터필드
경질
1993년 2월 15일
12위
데이비드 웹[감독대행]
1993년 2월 15일


3. 순위[편집]



순위
클럽
경기수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비고
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2
24
12
6
67
31
+36
84
UEFA 챔피언스리그 1라운드 진출
2
아스톤 빌라
42
21
11
10
57
40
+17
74
UEFA컵 진출
3
노리치 시티
42
21
9
12
61
65
-4
72
UEFA컵 진출[8]
4
블랙번 로버스
42
20
11
11
68
46
+22
71

5
퀸즈 파크 레인저스
42
17
12
13
63
55
+8
63

6
리버풀
42
16
11
15
62
55
+7
59

7
셰필드 웬즈데이
42
15
14
13
55
51
+4
59

8
토트넘 핫스퍼
42
16
11
15
60
66
-6
59

9
맨체스터 시티
42
15
12
15
56
51
+5
57

10
아스날
42
15
11
16
40
38
+2
56
UEFA 컵 위너스 컵 진출[9]
11
첼시
42
14
14
14
51
54
-3
56

12
윔블던
42
14
12
16
56
55
+1
54

13
에버튼
42
15
8
19
53
55
-2
53

14
셰필드 유나이티드
42
14
10
18
54
53
+1
52

15
코번트리 시티
42
13
13
16
52
57
-5
52

16
입스위치 타운
42
12
16
14
50
55
-5
52

17
리즈 유나이티드
42
12
15
15
57
62
-5
51

18
사우스햄튼
42
13
11
18
54
61
-7
50

19
올덤 애슬레틱
42
13
10
19
63
74
-11
49

20
크리스탈 팰리스
42
11
16
15
48
61
-13
49
디비전1 강등[10]
21
미들즈브러
42
11
11
20
54
75
-21
44
디비전1 강등[11]
22
노팅엄 포레스트
42
10
10
22
41
62
-21
40
디비전1 강등[12]

  • 순위는 승점 > 득실차 > 다득점 순으로 결정된다.


3.1. 우승[편집]


프리미어 리그 1992-93 우승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여덟 번째 우승


3.2. 클럽별 리뷰[편집]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맷 버스비 감독 시절인 1966/67 시즌 이후 1부리그 우승과는 인연이 없던 맨유는 알렉스 퍼거슨 경이 1986년부터 맨유 감독을 맡은 후 일곱 시즌 만에 숙원이었던 26년 만에 1부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2위 빌라와 승점 10점 차이로 우승하여 독주했을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리그 중후반까지 퍼거슨 감독의 전임 론 앳킨슨 감독이 이끌던 아스톤 빌라와 돌풍의 팀 노리치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치열한 경쟁 끝에 승자가 되었다. 맨유의 시즌 시작은 정말 좋지 않았다. 지난 시즌 2위였지만 개막전 셰필드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1-2로 진 맨유는 홈개막전이던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도 0-3 완패를 당하며 최악의 출발을 했다. 입스위치와의 홈경기에서 비긴 뒤 4라운드 사우스햄튼 원정부터 5연승으로 반등하는 듯 했지만 곧바로 5연무에 2연패 7경기 연속 무승으로 15경기을 치른 시점인 11월 초에는 5승6무4패로 리그 순위 10위까지 내려갔다. 물론 혼전 양상의 리그라 1위 노리치와는 승점 차가 9점이라 추격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맨유의 문제는 15경기에서 14득점에 그친 공격이었다. 사실 여름이적시장에서 공격수를 보강하려고 했으나[13] 디온 더블린 1명을 데려오는데 그쳤는데 그 더블린마저 개막 1달도 안돼서 다리가 부러지며 시즌아웃당했다. 이렇게 또다시 리그 우승이 좌절되는듯 했지만 중요한 이적 하나가 맨유 역사를 바꿨다. 그 주인공은 에릭 칸토나. 탁월한 재능으로 리즈를 마지막 디비전 1 우승으로 이끌었고, 리버풀과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그 재능을 널리 알린 상황이었으나 그의 성질머리가 문제가 되어 리즈 감독인 하워드 윌킨슨과 불화가 있었는데 퍼거슨 감독은 전화 통화로 120만 파운드라는 헐값으로 칸토나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칸토나는 맨유로 합류하자마자 적응기가 따로 필요없이 마크 휴즈와 훌륭한 콤비를 이루었고 리즈 시절과 합하여 15골16어시라는 스탯을 찍으며 중위권에 있던 맨유를 연승행진으로 이끌며 순식간에 우승권으로 도약시켰다. 1월에 시즌 처음으로 선두에 도약한 맨유는 3월 들어 4경기 연속 무승으로 주춤했고 이를 틈타 아스톤 빌라와 노리치가 맨유를 추월하며 3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맨유는 4월 들어 노리치 원정에서 3-1로 승리하며 무승행진을 끊음과 동시에 타이틀 경쟁자인 노리치의 우승 희망을 꺾었다. 그리고 4월 10일 선두 아스톤 빌라와의 승점 1점 차이로 2위에 있던 상황에서 맨유는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후반 41분까지 홈에서 0-1로 지고 있다가 후반 41분과 추가시간 6분에 나온 주장 스티브 브루스의 결정적인 득점으로 극적인 2-1 승리를 거두는데 마침 아스톤빌라가 홈에서 0-0으로 코번트리에 덜미를 잡히며 선두로 등극하게 되었다. 경기 영상[14] 맨유는 잔여 경기 5경기를 모두 승리한 반면 빌라는 마지막 3경기를 모두 패하며 자멸했고, 결국 최종전을 한 경기 남기고 빌라가 강등권 경쟁 중인 올덤 애슬레틱에 홈에서 0:1로 잡히며 맨유는 26년 만의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 우승은 앞으로 20년 동안 12번을 더 우승하게 될 위대한 맨유 왕조의 대단원의 서막이었다.
  • 아스톤 빌라
개막 3연무와 에버튼 원정 패배로 시작한 빌라는 5라운드 셰필드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2-0 승리로 첫 승을 거둔 가운데 9월 9일 리버풀로부터 공격수 딘 손더스를 클럽 레코드인 2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손더스는 이적한지 10일 만에 친정팀 리버풀을 상대로 빌라에서의 데뷔골을 넣었고 데일리언 앳킨슨[15]과 함께 좋은 호흡을 보이며 빌라의 공격을 이끌었다. 빌라는 10경기 무패로 선두로 도약하며 우승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빌라는 시즌 내내 론 앳킨슨 감독의 옛 클럽인 맨유와 돌풍의 팀 노리치와 시즌 내내 우승 경쟁을 펼쳤고, 시즌 종료를 단 6경기를 남긴 시점까지 선두였다. 하지만 4월 10일 코번트리와의 홈경기에서 0-0으로 비긴 사이 맨유는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극장을 찍으며 2-1 역전승을 거두며 선두를 빼았겼고, 아스날과 맨시티를 상대로 이기며 우승경쟁을 이어갔지만 블랙번 원정에서 0-3 참패를 당하며 2경기를 남긴 채 승점 4점 차로 벌어졌고, 홈에서는 강등권 탈출이 급한 올덤에 0-1로 지며 맨유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최종전인 QPR 원정도 지며 3연패로 마감, 시즌 내내 경쟁 했던 맨유와 10점 차 준우승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원년 시즌의 준우승이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빌라의 최고 성적이었고 92/93 시즌 이후에는 리그 3위 이내에도 들지 못했다. 한편 Match of the Day가 선정한 1992/93 시즌의 골에 선정된 주인공은 빌라에게서 나왔는데 데일리언 앳킨슨이 윔블던을 상대로 중앙에서 상대 수비 몇 명을 제치고 단독 드리블한 뒤 PA 바깥에서 상대 수비와 골키퍼를 두고 칩샷으로 넣은 골이다.골 장면 센터백 폴 맥그래스는 1992년에 도입된 달라진 백패스규정에 걸맞게 양발을 잘 쓰는 빌드업이 뛰어난 수비수였고 최소 실점 2위를 기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P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 노리치 시티
1991/92 시즌 강등권에 승점 3점이 앞선 18위로 마감했던 노리치는 시즌 전부터 전문가들로부터 유력한 강등 후보로 꼽혔고 설상가상으로 주포였던 로버트 플렉은 당시 첼시의 최다이적료 지출인 2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첼시로 떠났다.[16] 개막전은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아스날 원정이었는데 전반전 0-2로 끌려갈 때만 해도 전문가들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맨유에서 이적한 마크 로빈스가 교체투입 된 후 후반 24분부터 15분 동안 4골을 몰아치며 아스날 원정에서 짜릿한 4-2 대역전승을 거뒀다. 그리고 플렉이 이적한 첼시와의 홈개막전도 2-1 승리로 개막 2연승을 거뒀다. 에버튼과 맨시티에 1무1패로 주춤했지만 다시 5연승으로 9경기에서 승점 22점을 쓸어담았고 프리미어리그 선두에 오르며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0월 블랙번과 리버풀 원정에서 각각 1-7, 1-4 대패를 당하며 역시 내려갈 팀은 내려가는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4연승으로 12월 초에는 12승3무3패 승점 39점으로[17] 2위와 승점 8점 차의 선두에 올라섰고, 1992년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도 선두를 유지했다. 6경기 연속 무승으로 부진하며 선두를 빼았겼으나 다시 팀을 추스리며 우승경쟁팀 빌라를 상대로 1-0 승리로 3월 말 다시 선두에 올라갔다. 4월 첫 경기 홈에서 26년 만의 우승을 노리는 맨유를 상대로 승리하면 정말 우승이 현실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맨유에 홈에서 1-3으로 졌고, 토트넘 원정에서도 1-5 대패를 당하며 창단 첫 1부리그 우승 도전은 아쉽게 실패했다. 그렇지만 시즌 전 전문가들로부터 강등후보로 꼽힌 상황에서 팀 창단 최고 순위인 3위로 UEFA컵을 따낸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성과였다. 공격수에게 크로스를 올리는 뻥축구가 대세였던 시대였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패스축구를 구사했던 팀이었다. 양쪽 풀백인 마크 보웬[18]과 이안 컬버하우스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고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 루엘 폭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빠른 윙어 중 하나로 꼽혔고 중앙 미드필더 이안 크룩이 좋은 패스를 뿌려줬으며 맨유에서 온 마크 로빈스는 플렉의 공백을 메우며 15골로 득점을 책임졌다. 만 19세의 크리스 서튼도 8골을 득점했다. 재밌는 점은 3위인데 골득실이 무려 -4에 실점은 65실점이라는 것인데 65실점은 올덤과 토트넘 다음인 리그 3번째로 많은 실점이었다. 이는 졌다하면 대패를 당하고 이길 때 확실히 이기며 효율적인 팀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옥의 티가 있다면 입스위치 타운과의 이스트앵글리안 더비에서 모두 패배한 것 정도. 예상치 못한 선전으로 UEFA 컵에 진출한 노리치는 그 다음 시즌인 1993/94 시즌 UEFA 컵에서 분데스리가 최강팀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2-1로 승리하는 파란을 일으켰다.[19] 하지만 노리치는 92/93시즌의 기세를 더 이어가지 못했고 결국 서튼과 폭스를 팔았던 1994/95시즌 20위로 강등당했다.
  • 블랙번 로버스
1966/67시즌 이후 26년 만에 1부리그에 복귀한 블랙번은 당시 영국 최고의 재벌 중 하나였던 잭 워커 구단주의 전폭적인 투자 아래에서 엄청난 머니파워를 자랑하고 있었고 당시 영국 최대 이적료로 사우스햄튼으로부터 앨런 시어러를 33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영입했다. 시어러는 적응기 따윈 필요없이 데뷔전 팰리스와의 경기에서부터 2골을 몰아치며 전반기에만 21경기 16골을 넣었다.[20] 그러나 12월 전방 십자인대 부상으로 시즌아웃 부상을 당했고 선두권 경쟁을 벌이던 블랙번은 박싱데이를 기점으로 11경기 2승의 부진에 빠졌다. 마지막 10경기에서 8승을 쓸어담으며 20승11무11패, 팀득점 68득점은 1992-93 시즌 모든 팀 들 중 최다 팀득점이었고 승점 71점 4위로 마감했으나 당시 잉글랜드 리그 순위는 낮았기에 4위임에도 유럽대항전 진출에는 실패했다. 3위 노리치가 승점 72점이고, 준우승팀 아스톤 빌라가 승점 74점이었고, 이 두 팀이 시즌 막판까지 맨유와 우승경쟁을 했음을 생각하면 앨런 시어러가 만약 부상을 안당했더라면 충분히 우승할 수도 있었던 불운하고 아쉬운 시즌이었다.
  • 퀸즈 파크 레인저스
간판 공격수 레스 퍼디난드가 20골을 득점하는 활약에 힘입어 프리미어리그 첫시즌 5위, 그리고 런던 클럽들(토트넘, 아스날, 첼시, 윔블던, 크리스탈 팰리스)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 리버풀
1991/92시즌 FA컵 우승을 했지만 리그 6위라는 저조한 성적은 1980/81 시즌[21] 이후 처음으로 2위 밖을 벗어난 시즌이었다. 실망스러웠던 리그 성적의 요인은 에이스인 존 반스와 간판 공격수 이안 러시가 각각 리그 12경기, 18경기 출장에 그치며 부상으로 결장한 경기가 많았던 것이 원인이었는데 1992/93 시즌을 앞두고 부상에서 회복했고, 토트넘으로부터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볼 수 있는 폴 스튜어트를, 그리고 왓포드로부터 잉글랜드 21세 이하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데이비드 제임스 골키퍼를 영입하며 1992/93 시즌을 위한 보강을 했다. 그러나 개막전 노팅엄 포레스트 원정에서부터 0-1로 지며 좋지 않은 출발을 했고, 초반 10경기에서 2승에 그치며 강등권 20위에 골득실에만 앞선 19위까지 추락해버렸다. 이와중에 수네스는 딘 손더스를 아스톤 빌라에 팔았는데 손더스는 빌라에서 키 플레이어가 되어 아스톤빌라가 우승 타이틀에 경쟁하는 데 큰 기여를 해줬다. 반면 수네즈가 그 대신 선택한 폴 스튜어트는 24경기만 나서 1골만 넣었고 많은 경기를 부상으로 날려버렸다. 게다가 수네스는 시대에 뒤쳐진 전술을 고집했고 리버풀의 공격수 이안 러시 마저 컨디션 난조로 골을 넣지를 못했다. 급기야 리버풀의 성적은 10-11월의 반등에도 다시 바닥을 찍으며 12월부터 리그에서 13경기 2승5무6패를 기록했다. 결국 3월, 시즌 종료가 겨우 2달 남은 상황에서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1-2로 패했을 때엔 리버풀의 순위는 15위에 강등권인 20위와 승점 차이는 불과 3점이었다!!! 다행히 러시는 막판 2달 동안에만 11골을 넣고 부활하며 리버풀은 시즌을 간신히 6위로 마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컵대회에서 모조리 광탈해버렸기 때문에 유럽대항전에 나가는데 실패했다. 리버풀이 헤이젤 참사로 인한 징계를 제외하고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한 것은 빌 샹클리가 1962년 리버풀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고 그 다음시즌이었던 1962/63시즌 8위 이후 처음이었다.
  • 셰필드 웬즈데이
지난시즌 3위로 UEFA컵에 출전한 웬즈데이는 시즌 중반인 12월 중순까지 리그 19경기에서 4승8무7패로 강등권 근처에서 시작했으나 12월 19일 QPR과의 홈경기 1-0 승리를 시작으로 10경기 8승2무에 7연승이라는 엄청난 상승세로 단숨에 순위를 4위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리그컵과 FA컵 모두 결승까지 올라갔고 그 과정에 무승부로 인한 재경기만 3경기로 후반기 일정은 굉장히 빡빡했다. 결국 리그 마지막 11경기에서 2승에 그치며 7위로 내려갔다. 한편 결승에 올라갔던 리그컵과 FA컵은 아스날에 패해 모두 준우승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다.
  • 토트넘 핫스퍼
전 시즌 15위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피터 슈리브스 감독이 경질되고 레이 클레멘스와 덕 리버모어 공동감독 체제로 운영됐다. 토트넘의 공격을 이끌었던 게리 리네커폴 개스코인 그리고 폴 스튜어트는 나고야와 라치오, 리버풀로 떠났고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우스햄튼 윙어 유망주 대런 앤더튼을, 노팅엄 포레스트부터 공격수 테디 셰링엄을 영입했다. 이 이적생 듀오는 적응기가 따로 필요없이 맹활약했는데 앤더튼이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면 셰링엄은 영리하게 질주해 뛰어난 판단력으로 득점으로 연결하는 훌륭한 조합이었다. 셰링엄은 22골9도움[22]으로 득점왕에 도움 7위, 대런 앤더튼은 6골11도움으로 도움 순위 2위에 오르며 공격진의 공백을 잘 메워줬고, 리그를 8위로 마감했다. FA컵은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대회 우승팀이 되는 아스날에 0-1로 패하며 우승에 실패했다.
  • 맨체스터 시티
1990/91 시즌과 1991/92 시즌 5위를 거둔 맨시티는 1992/93 시즌 대부분을 5~6위권에서 보냈으나 마지막 11경기에서 2승에 그치는 뒷심부족으로 9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마감했다.
  • 아스날
시즌 전부터 우승후보로 평가받았으나 리그 10위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조지 그레이엄 감독은 지난시즌 리그 4위에 그치자 극단적인 수비 지향적 전술을 택했다. 안 그래도 강력햇던 수비진은 훨씬 견고해진 반면, 공격은 오로지 이안 라이트에게 맡겨졌다. 1986년에서 1992년까지 6년간, 아스날은 평균 66골을 기록했고 1991-92 시즌엔 81골을 거두었던 아스날은 1992-93 시즌엔 고작 40골을 기록하며 22개 팀 중 최소득점 팀의 불명예를 안았다. 아스날은 경기당 1실점을 넘지 않는 38실점 리그 최강의 수비진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원천 봉쇄했지만 이안 라이트를 향해 롱볼 패스를 보내서 라이트가 알아서 공격하는, 이른바 '롱볼 전술'을 채택했다. 그 결과 실점은 극도로 줄어들었지만 골은 잘 터지지 않았고 관중들은 경기 내내 지루해했다. 안티팬들은 아스날이 너무 지루한 축구를 한다며 '보링 보링 아스날'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이 수비적인 전술은 토너먼트에서 빛을 발했는데 리그컵에서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우승했고, FA컵까지 같은 상대를 만나 재경기 끝에 승리를 거두며 컵대회 더블을 달성하며 리그에서의 부진을 만회했다. 한편 시즌 도중 아스날 유스 출신이던 마틴 키언을 에버튼에 200만 파운드를 지불하며 재영입했고, 아스날의 최다 출전 기록의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722경기를 마지막으로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떠났다.
  • 첼시
첼시의 스타트는 좋았다. 초반 18경기에서 9승4무5패를 기록, 한때 2위까지 올라가며 프리미어리그 원년 우승에 도전하는 듯 했으나 곧바로 12경기 연속 무승의 늪에 빠지며 강등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이안 포터필드 감독은 프리미어리그 첫 경질 감독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1970년 FA컵 결승전 리즈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데이비드 웹이 임시 감독으로 남은 시즌을 이끌게 되었다. 웹 임시감독은 남은 기간 팀을 잘 추스리며 11위로 무난하게 잔류시켰지만 계약 연장에 실패했고, 스윈든 타운을 선수 겸 감독으로 승격시키며 당시 잉글랜드의 젊은 감독 최대어로 꼽힌 글렌 호들을 새 감독으로 맞이했다.
  • 윔블던
개막 3연전을 모두 1점차 패배를 당한 윔블던은 개막 후 7경기 만인 아스날을 상대로 홈에서 3-2 승리로 첫 승을 신고했다. 까다로운 리버풀과 맨유 원정에서 의외의 3-2, 2-1 승리를 얻어냈지만 박싱데이 시점에서의 윔블던의 성적은 4승7무10패, 20위였다. 그러나 12월 올덤과의 홈경기 5-2 승리가 반등의 신호탄이 되었고, 리버풀 상대로는 후반기 홈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더블이라는 굴욕을 안겼다. 그러더니 1~2월 사이 무실점 4연승[23], 그리고 3월의 3연승으로 강등 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중위권에 안착했고, 또한 셀허스트 파크에서 벌어진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남런던 더비, 집주인 대 세입자의 대결[24]에서도 4-0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에버튼과 디펜딩챔피언 리즈보다 위인 1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공격수 딘 홀즈워스는 19골로 리그 득점 3위에 오르며 좋은 활약으로 팀을 이끌었다.
  • 에버튼
1990/91 시즌 초반 강등 위기로 에버튼을 1985/86 시즌 우승시켰던 하워드 켄달 감독이 돌아와 시즌을 9위로 마감했으나 1991/92 시즌 오히려 12위로 후퇴하며 1980/81 15위 이후 최악의 순위를 기록했는데 1992/93 시즌에는 전 시즌보다 또 한 단계 내려가며 실망스러운 13위로 마감했다. 그러면서 하워드 켄달 감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 셰필드 유나이티드
개막전 브라이언 딘의 프리미어리그 역사적인 제1호골로 맨유를 2-1로 격침시킨 일과 토트넘을 상대로 6-0 대승을 거둔 것이 시즌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 중후반부까지 강등권에서 신음했으나 후반부 9경기에서 5승3무1패로 선전하며 14위로 잔류에 성공했다. FA컵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스틸 시티 더비에서 1-2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개막골의 주인공 브라이언 딘은 15골10어시스트라는 스탯으로 득점 순위 7위와 도움 순위 5위를 기록하며 팀을 하드캐리했고, 시즌 후 데이브 바셋 감독은 LMA(리그감독협회)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감독 상을 수상했다.
  • 코번트리 시티
지난시즌 19위에 그치며 간신히 프리미어리그에 합류한 코번트리는 지난 시즌 18위였던 노리치와 함께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개막 후 8경기 6승으로 2위까지 올라갔지만 이후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법칙을 증명하듯 11경기 무승(무승부만 8번)에 빠지며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그러다 11경기 무승의 늪을 홈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무려 5-1 대승을 거두며 끊어냈고 그다음 경기였던 선두권 아스톤 빌라와의 홈경기에서도 3-0 대승을 거두며 반등했다. 그러면서 2~3월에는 5위까지 올라가며 UEFA컵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오는 듯 했다. 그러나 3월 피터 들루부와 미키 퀸과 삼각편대를 이루던 공격의 한 축 로버트 로사리오를 노팅엄에 넘겨준 것이 악수로 작용하며 골가뭄에 시달렸고 마지막 11경기에서 단 1승만을 거두며 두 번째 DTD를 시전, 결국 강등팀 크리스탈 팰리스에 승점 3점만 높은 15위로 마무리했다. 초반의 선전이 코번트리를 살린 셈.
  • 입스위치 타운
2부리그 우승으로 승격한 입스위치는 전반기 쉽게 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1월까지 입스위치의 순위는 4위였다. 라이벌 노리치를 원정에서 2-0 승리를 거뒀고, 26라운드에서 맨유를 2-1로 격파하던 시점까지만 해도 리그 26경기에서 4번 밖에 안졌으며 선두인 노리치와의 승점 차이는 불과 6점. 전반기 춘추전국시대 양상의 우승경쟁에 참가했던 팀이었다. 그러나 내심 창단 첫 1부리그 우승을 위한 기폭제가 될 줄 알았던 맨유전 승리 이후 입스위치는 거짓말같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후 13경기에서 4무9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우승경쟁권에서 불과 세 달 만에 3경기 남기고 강등을 걱정하는 상황으로 돌변해버렸다. 다행히 이스트 앵글리아 더비에서 노리치를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며 한숨을 돌렸고, 최종전에서 강등이 확정된 노팅엄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16위로 잔류를 확정지었다.
  • 리즈 유나이티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신인 디비전 1의 마지막 우승팀인 리즈 유나이티드는 FA컵 우승팀 리버풀과의 채리티 실드에서 에이스 에릭 칸토나의 해트트릭으로 4-3 승리를 기록할 때만 해도 리즈가 하위권으로 추락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워드 윌킨슨 감독은 유로피언 컵에서 명칭이 변경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해 도전하려는 포부를 보였으나 "영국 더비"라고 불렸던 스코틀랜드 리그 우승팀 레인저스 FC와의 대회 2라운드에서 홈어웨이 모두 1-2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한 뒤 1달도 안지나서 리즈 역사상 최악의 뻘짓을 저지르는데 바로 에이스 칸토나의 맨유 이적이었다. 칸토나는 A급 이상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의 성질머리가 문제가 되어 윌킨슨 감독과 불화를 겪고 있었는데[25] 맨유의 퍼거슨 감독의 전화 통화로 리즈의 최고 에이스를 그것도 최대 라이벌 팀인 맨유에 그것도 120만 밖에 안되는 헐값에 내준 것이다. 칸토나를 손에 넣은 맨유는 칸토나의 합류를 기점으로 상승세를 타며 중위권에서 선두로 도약하며 결국 26년 만의 우승에 성공했고, 칸토나를 어이없게 내준 리즈는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원정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말도 안되는 기록(7무14패, 리그 꼴찌)을 세운 뒤 강등팀 크리스탈 팰리스에 승점 2점이 앞선 17위라는 충격적인 순위로 마쳤다. 홈에서 좋은 성적을[26] 기록하지 않았다면 1937/38 시즌 1부리그 우승 후 강등당한 맨체스터 시티 처럼 디펜딩챔피언이 강등당한 두 번째 사례가 될 뻔 했다.
  • 사우스햄튼
오프시즌 360만 파운드로 당시 영국 최다 이적료에 블랙번으로 이적한 젊은 공격수 앨런 시어러의 공백에 대처하는 것이 과제였다. 시즌 초반 강등권으로 빠졌던 사우스햄튼은 15골11어시를 기록한 매튜 르 티시에와 골키퍼 팀 플라워스의 철통 방어에 힘입어 한때 9위까지 도약했고 강등권에 승점 1점 앞선 18위로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이안 도위 역시 11골을 기록하며 르 티시에와 함께 좋은 모습을 보였다.
  • 올덤 애슬레틱
조 로일 감독의 지휘 아래 시즌 초반 매력적인 공격축구를 앞세우며 중위권에서 시작했으나 DTD를 시전하며 우승팀 맨유와의 홈경기에서 깜짝 1-0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종료 10경기를 앞둔 시점에선 꼴찌까지 추락해버리며 강등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미들즈브러와 윔블던에 3-2, 6-2 승리를 거두며 상승세를 타나 했는데 곧바로 4경기 연속 무승의 수렁에 빠져버렸고 시즌 종료까지 3경기를 남긴 시점에서 올덤은 잔류권인 19위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승점차가 8점차였고, 잔류하기 위해서는 잔여 3경기를 무조건 승리하고 크리스탈 팰리스가 남은 2경기에서 승점 2점 이상을 얻지 않아야하는, 즉 자력으로 잔류할 수 없는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잔여 3경기의 시작은 아직 우승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던 아스톤빌라 그것도 원정경기였다. 모두가 올덤의 강등을 예상했던 시점에서 기적이 시작되었다. 올덤은 예상외로 전반전에 나온 선제골을 잘 지키며 1-0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맨유[27]의 26년 만의 우승이 확정되었다. 3일 뒤에는 홈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고 팰리스는 맨시티와 비기며 최종전을 앞두고 승점 3점 차로 19위와 20위가 나뉘게 되었다. 올덤으로서는 최종전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승리하고 팰리스가 아스날 원정에서 패배하면 극적으로 잔류를 할 수 있었다. 올덤은 결국 기적을 완성했다. 최종전에서 팰리스가 아스날 원정에서 0-3으로 지는 사이 올덤은 홈에서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4-3 승리를 거두며 승점이 같아졌고, 골득실 -11의 올덤이 골득실 -13의 팰리스에 앞서 극적으로 잔류에 성공했다. 팰리스가 1-0으로 져서 득실이 같았더라도 올덤의 득점이 63득점이고 팰리스의 득점이 48득점이라 이 경우에도 올덤이 생존할 수 있었다. 올덤은 4-1로 앞서고 있었으나 매튜 르 티시에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4-3 턱밑까지 추격을 당했지만 1골 차를 잘 지키며 기적을 완성했다.
  • 크리스탈 팰리스
오프시즌 주포 마크 브라이트를 셰필드 웬즈데이로 이적해버리며 공격진에 공백이 발생했다. 팰리스는 개막 후 9번째 경기에서야 에버튼에 1-0 승리를 거두며 22개 팀 중 마지막으로 EPL 첫승을 올렸고, 개막 후 17경기에서 단 1승만을 거두며 노팅엄과 꼴찌 다툼을 했다. 하지만 12월에 있던 5경기를 모두 이기며 중위권으로 도약했고, 이후 4연패가 뒤따랐지만 이후엔 시즌 15골을 득점한 크리스 암스트롱을 중심으로 잘 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마지막 2경기에서 승점 2점을 거두면 잔류 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그러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맨시티 원정 순연경기에서 승리하면 잔류가 확정되는 상황이었지만 0-0으로 비기며 잔류를 확정짓지 못했고, 강등권의 올덤이 빌라와 리버풀을 연달아 잡고 끈질기게 쫓아오며 최종전을 앞두고 승점 3점차로 좁혀졌다. 그래도 팰리스는 마지막 아스날 원정에서 최소 무승부만 거두면 잔류할 수 있었고 아스날은 셰필드 웬즈데이와의 FA컵 결승을 앞두고 있어 그래도 해볼만 했으나 아스날 원정에서 0-3 참패를 당했고, 같은 시각 올덤이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4-3 승리를 거두며 골득실 2 차이로 강등당했다. 충격의 강등 이후 스티브 코펠 감독은 사임했다.
  • 미들즈브러
1988년 강등 이후 4년 만에 1부로 승격한 미들즈브러는 개막 7경기에서 4승을 거두며 무난한 출발을 보였고, 박싱데이 기점에서 전반기 6승9무6패, 12위로 중위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마지막 경기인 강등권 팰리스와의 홈경기에서 0-1로 진 것을 시작으로 18경기에서 단 승점을 10점만 얻으며 강등권으로 추락해버렸고, 시즌 종료까지 3경기를 남긴 시점에서는 사실상 강등이 유력해졌다. 미들즈브러는 토트넘을 상대로 3-0 승리,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며 마지막까지 발악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결국 19위 올덤에 승점 5점 뒤진 21위로 1년 만에 2부리그로 돌아갔다.
  • 노팅엄 포레스트
전 시즌을 8위로 마친 노팅엄은 개막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테디 셰링엄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테디 셰링엄은 토트넘으로 이적했고, 잉글랜드 국가대표 센터백 데스 워커는 삼프도리아로 이적하며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노팅엄은 개막전 승리 후 18실점, 6연패에 빠지며 꼴찌로 추락해버렸고, 전반기 내내 3승에 그쳤다. 1993년 들어 7경기 5승1무1패를 기록하며 잠시 강등권을 탈출하며 올라올 팀은 올라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그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부진에 빠졌으며 결국 41라운드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0-2로 패하며 강등이 확정되고 말았다. 이렇게 유로피언컵 2번을 우승하며 노팅엄 포레스트의 전성 시대를 열었던 브라이언 클러프의 시대는 강등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시즌이 끝난 뒤 브라이언 클러프는 28년 간의 감독 생활을 마감했고 팀의 강등에도 불구하고 PFA 선정 베스트 11에 선정된 로이 킨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4. 개인 기록[편집]



4.1. 득점 순위[편집]




4.2. 도움 순위[편집]




4.3. 해트트릭[편집]




5. 개인 수상[편집]



5.1. PFA 올해의 선수[편집]




5.2. PFA 영플레이어[편집]




5.3. FWA 올해의 선수[편집]




5.4. PFA 올해의 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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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비전1 포함 8회[2] 통칭 하이버리. 2006년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된 38,419명 규모의 홈구장이다.[3] 2003년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된 38,419명 규모의 홈구장[4] 원래 홈구장은 15,876명 규모의 플라우 레인(Plough Lane)을 사용했었으나 1989년 힐즈브러 참사 이후 1990년에 모든 축구장을 좌석으로 바꾸라는 테일러 보고서의 발표가 있었는데 빈약한 재정 문제 때문에 구장 개조를 못하여 1991/92 시즌부터 플라우 레인 대신 크리스탈 팰리스의 홈구장인 셀허스트 파크에서 홈경기를 치렀다.[감독대행] A B [공동감독] [5] 세인트 메리즈 스타디움 개장 이전 2000/01시즌까지 사용했던 15,200명 수용인원의 옛 구장이다.[6] 2005년 리코 아레나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23,489명 규모의 옛 홈구장[7] 1995년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26,667명 규모의 옛 홈구장.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이 열렸던 구장 중 하나로 이 경기장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올라가는 이변을 연출한 바 있다.[8] FA컵 우승팀 아스날의 리그컵 우승으로 인해 3위에게 UEFA컵 진출권이 돌아갔다.[9] FA컵 우승[10] 4년만의 강등[11] 1년만의 강등[12] 16년만의 강등[13] 사우스햄튼으로부터 앨런 시어러를 영입하려 했으나 블랙번 로버스에게 빼았겼고, 셰필드 웬즈데이로부터 트레버 프랜시스 영입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14] 퍼기 타임의 시작이라고 한다.[15] 훗날 K리그 대전 시티즌전북 현대 모터스에 잠시 몸담게된다.[16] 물론 첼시의 이 영입은 실패작이 되었다.[17] 당초 마이크 워커 감독이 잔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승점이다. ~~하지만 이 시즌 팰리스는 49점으로도 강등당했다. 꼴찌 노팅엄도 승점 40점이었다.[18]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뒤 2004년 블랙번을 시작으로 마크 휴즈를 따라다니며 14년째 보좌하고 있다.[19]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승리한 유일한 영국 클럽이 되었다. 뮌헨 원정에서 이긴 잉글랜드 팀은 2012/13 시즌 아스날이 챔피언스리그 16강 뮌헨 원정에서 2-0으로 이기기 전까지 나오지 않았던 사례였다.그럼에도 아스날은 16강에서 떨어졌다.[20] 시즌 반절을 통째로 날렸는데도 득점 5위에 올랐다.[21] 유로피언 컵에서 레알마드리드를 상대로 우승하며 유로피언 컵 진출엔 성공했다.[22] 1골은 노팅엄에서 득점[23] 이 기간에 하이버리 원정에서 1-0 승리를 거두며 아스날 상대로도 더블을 완성했다.[24] 윔블던의 홈구장이었던 플라우 레인은 1991년 이후 팀의 재정 문제로 구장 개조가 불가능해 크리스탈 팰리스의 홈인 셀허스트 파크에서 남의 집살이를 하던 처지였다.[25] 롱볼축구를 구사하던 윌킨슨 감독의 스타일과 천재적이고 기술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칸토나는 상극이었다. 더구나 개성이 강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더더욱 눈밖에 날 수 밖에 없었다.[26] 리즈가 홈에서 거둔 성적은 12승8무1패로 전체 3위, 홈 최소패배팀이었다. 의외로 리즈에게 유일하게 홈에서 패배를 안긴 팀은 꼴찌 노팅엄이었다. 그것도 4-1이라는 스코어로.[27] 맨체스터와 올덤의 거리는 11.1Km 밖에 안될 정도로 매우 가까운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