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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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1777년 1월 3일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에서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과 영국군이 맞붙은 전투. 워싱턴은 트렌턴 전투에 이어 이 전투에서도 영국군을 격파함으로서 전쟁 초반 불리한 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2. 배경[편집]


1776년 12월 26일 트렌턴 전투에서 헤센군을 습격해 값진 승리를 쟁취한 워싱턴은 다음날 델라웨어 강의 서쪽 둑으로 철수했다. 그는 영국군이 장악한 뉴저지 주를 탈환하기 위해 며칠 내로 공세를 감행하려 했다. 얼마 후, 존 캐드월레이더 대령이 이끄는 펜실베니아 민병대는 델라웨어 강을 다시 건너 트렌턴으로 진군한 뒤 워싱턴에게 적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이에 워싱턴은 그의 군대 대부분을 뉴저지 주로 다시 이동했다. 그는 영국군이 트렌턴 전투 패배를 보복하려 들 거라고 예상하고 트렌턴 남쪽의 어순핑크 개울 건너편에 그의 군대를 배치하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

워싱턴은 영국군의 반격을 늦추기 위해 마티아스 알렉시스 로체 드 페르모이 준장에게 라이플 보병이 다수 포함된 그의 여단을 프리스턴 방면으로 내려가서 적의 진군로를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12월 31일이 되자 많은 부하들이 복무 기한 만료로 인해 군대를 이탈하려 했다. 그러자 워싱턴은 한 달만 더 있어달라고 호소하며 10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해줄 것을 약속했고, 병사들은 트렌턴 전투의 승리로 사기가 고양된 데다 자신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워싱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러기로 했다.

한편, 트렌턴에 주둔한 헤센군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윌리엄 하우 소장은 격분했다. 그는 찰스 콘월리스 소장의 휴가를 취소하고 약 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을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델라웨어 강으로 향한 콘월리스는 프린스턴에 알렉산더 레슬리 준장 휘하 일부 병력을 남겨뒀다. 프린스턴에 도착한 알렉산더 레슬리 준장은 적군이 프린스턴에서 5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는 걸 파악하고 즉시 요격하려 했다. 이때 페르모이 준장이 술에 취해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에드워드 핸드 대령이 대신 군대를 통솔했다. 그는 영국군과 짧은 교전을 벌이며 적의 진격을 지연시킨 뒤 1777년 1월 2일 오후 워싱턴과 합류했다.

워싱턴이 어순핑크 개울에 있다는 걸 확인한 콘월리스는 대륙군이 점령한 고지를 포위한 뒤 어둠이 깔리기 전에 다리를 점거하려고 세 차례 공세를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자, 콘월리스는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이에 부하들이 워싱턴이 밤에 탈출할 수 있다며 만류했지만, 콘월리스는 반란군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거라며 묵살했다. 워싱턴은 적이 물러가자 전쟁 위원회를 소집하고 그의 장교들에게 고지에 머물면서 계속 싸워야 할지, 강을 건너 철수해야 할지, 프린스턴을 기습 공격할 지를 물었다. 장교들의 여러 의견을 귀담아들은 워싱턴은 프린스턴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장교들에게 프린스턴으로 진격할 채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대륙군[편집]



3.2. 영국군[편집]


  • 지휘관: 찰스 콘월리스 소장
  • 병력: 8,000명[1]

4. 전투 경과[편집]


1777년 1월 2일 밤, 대륙군은 영국군 몰래 숙영지를 떠나 동쪽으로 진군하다가 방향을 틀어 프린스턴을 향해 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때 워싱턴은 콘월리스를 붙잡아 놓기 위해 400~500명의 병사와 대포 2문을 개울 가에 남아서 불을 피우고 소란을 피우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동이 트기 전에 숙영지를 떠나 본대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워싱턴은 퀘이커 브릿지 도로를 통해 프리스턴으로 나아가다가 날이 밝을 무렵 프리스턴에서 약 2마일 떨어진 스토니 브룩을 건넜다.

이때 헤센 병사들이 공격하고 있다는 루머가 갑자기 퍼지더니 민병대원 몇 명이 몸을 돌려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워싱턴은 재빨리 병사들을 진정시킨 뒤 콘월리스의 구원군이 올 것에 대비하기 위해 휴 머서 준장과 캐드왈레이더 소장의 부대를 차출해 트렌턴을 향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게 한 뒤 나머지 부대는 프린스턴을 향해 계속 진군하게 했다.

1월 3일 새벽, 모후드 중령이 이끄는 제 17보병대, 제 55보병대, 제 16 용기병대 1,200명이 프린스턴에서 출발해 메이든헤드로 향했다. 이 부대는 이른 아침 안개를 헤쳐 나가다 휴 머서 준장의 대륙군과 마주쳤다. 모후드는 저들이 헤센 병사들이며 콘월리스의 본대에서 탈영한 거라고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내 저들이 적이라는 걸 깨달은 모후드는 뒤늦게 과수원에 병력을 배치하려 시도했지만, 그때는 이미 대륙군이 과수원을 장악한 뒤였다.

이에 모후드는 적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양측은 서로에게 사격을 가했지만 총검이 부족한 대륙군은 곧 밀려나기 시작했다. 휴 머서 준장은 병사들을 집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적의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윽고 캐드왈레이더의 병사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목격한 모후드는 다시 군대를 포대가 설치된 곳으로 이동시킨 뒤 적을 향해 포도탄을 쏴 적군을 흩어지게 했다.

워싱턴은 흩어진 머서와 케드왈레이더의 부대를 규합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다른 부대를 규합하여 모후드를 향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때 머서의 부대가 끌고 갔던 대포 2문이 전장에 남아있는 걸 확인하고 이를 이용해 적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이에 모후드는 용기병대에게 적의 측면을 치게 했고 제 17보병대와 제 55보병대에게 메이든헤드로 향하는 퇴로를 뚫게 했다. 다수 병력은 적의 공세를 회피해 퇴로를 뚫는데 성공했지만 일부는 프린스턴으로 퇴각했다.

대륙군이 프린스턴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레슬리 준장은 급히 군대를 뉴브런즈윅으로 퇴각하게 했다. 그러나 194명의 병사들은 건물의 두꺼운 벽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고 믿고 나사우 홀로 피신했다. 이후 프리스턴에 도착한 워싱턴은 적이 나사우 홀에 있는 걸 확인하고 알렉산더 해밀턴 대위에게 적의 항복을 받아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해밀턴은 나사우 홀에 포격을 가하며 항복을 강요했고, 결국 병사 194명은 저항을 포기하고 대륙군에게 귀순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콘월리스의 영국군이 프린스턴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프린스턴 마을에 비축된 방대한 물자를 챙기지 못한 채 프린스턴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리하여 프린스턴 전투는 대륙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영국군 공식 기록은 전사 18명, 부상 58명, 실종 및 포로 200명이지만 워싱턴을 비롯한 대륙군 장교들은 최소 10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주장했다. 한 민간인 목격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영국군 전사자만 24명이라고 증언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대륙군 측 기록이 사실에 가까우며 최소 5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본다. 또한 해밀턴 부대에 의해 194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들은 프린스턴에 잠시 억류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이들 외에도 80~100명 이상의 포로가 존재했다는 주장이 있다. 대륙군은 휴 머서 준장과 하슬렛 대령을 비롯해 25~44명이 전사하고[2] 40여 명이 부상당했다.

워싱턴은 프린스턴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콘월리스의 추적을 피해 모리스타운으로 철수했다. 콘월리스는 프리스턴을 되찾은 뒤 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고 전군을 이끌고 뉴욕으로 철수했다. 이렇게 미국 독립 전쟁은 장기전으로 치달았고,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열강은 미국 민병대의 활약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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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1,200명.[2] 워싱턴은 6~7명의 장교가 전사했다고 기록했으나 10명, 14명이 전사했다는 기록도 발견되었다. 전사자 중 장교의 비율이 매우 높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