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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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발터의 수상 이력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독일의 前 축구 선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itz_Walter_cropped_2.jpg

이름
프리츠 발터
Fritz Walter
본명
프리드리히 '프리츠' 발터
Friedrich 'Fritz' Walter
출생
1920년 10월 31일
바이마르 공화국 카이저슬라우테른
사망
2002년 6월 17일 (향년 81세)
독일 라인란트팔츠카이저슬라우테른
국적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1920~1933)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1933~1945)
파일:연합군 점령하 독일 상선기.svg 연합군 점령하 독일(1945~1949)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1949~2002)
신체
174cm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소속
선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37~1959)
국가대표
파일: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61경기 33골 (서독 / 1940~1958)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선수 생활
2.3. 선수 복귀 이후
2.4.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4. 어록
5. 여담




1. 개요[편집]




독일 출신의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포워드를 겸임했다. 전성기를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보냈다.

우베 젤러-프란츠 베켄바워-로타어 마테우스-미하엘 발락-필립 람-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마누엘 노이어로 이어지는 디 만샤프트의 전설적인 주장 계보의 첫 장에 자리하고 있는 선수로 베른의 기적의 주역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선수 생활[편집]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출생한다. 그의 부모는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경기장에서 식당을 운영했고, 이런 환경 속에서 프리츠 발터는 열렬한 카이저슬라우테른의 팬으로 성장했다. 8살의 나이로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유스에 입단한 발터는 17살의 나이에 처음 프로에 데뷔하게 되고 이후 39살의 나이로 은퇴하는 시점까지 프리츠 발터는 2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오로지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머물렀다.[1] 20살이 되는 1940년에는 제프 헤어베어거가 이끄는 독일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루마니아와 가진 데뷔전을 해트트릭으로 장식했다. 이렇게 그의 앞날은 밝아보였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운동 선수들도 징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고 1942년 발터는 공수부대에 입대해야만 했다. 결국 종전할 무렵 소련군에 포로로 잡혔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면 시베리아를 비롯한 각종 오지의 굴라크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종사했는데 이들 중 다수가 사망했기에 사실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늘이 그를 도왔다. 발터가 예전에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던 헝가리 포로감시원이 소련군에 발터가 독일 본토 출신이 아니라 자를란트[2] 출신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덕분에 발터는 다른 전우들과 달리 굴라크로 끌려가는 것을 면하고 무사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2.3. 선수 복귀 이후[편집]


독일로 돌아온 발터는 다시 고향팀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소속으로 뛰면서 첫 시즌부터 16골을 넣었고, 1949-50 시즌에는 26경기 34골을 넣는 등 카이저슬라우테른의 리그 우승을 두 차례[3] 이끌었다.

여전히 뛰어난 발터의 모습에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은 1951년 그를 다시 국가대표팀으로 발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장 자리를 맡긴다.[4] 이후 10년만에 다시 출전한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발터가 이끄는 서독은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헝가리에게 3:8로 대패하는 치욕을 겪었으나 튀르키예를 상대로 발터는 골을 넣으며 7:2 대승을 이끌며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토너먼트에서 발터와 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를 격파했고, 4강에서 발터는 페널티 킥으로 2골을 넣어 오스트리아를 6:1로 격파하며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5]

결승전에서는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기의 대역전극을 선보이며 헝가리를 꺾고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포로 수용소에서 헝가리인 감시원이 소련군에 거짓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1956년 헝가리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헝가리 대표팀이 자국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자 발터는 그들의 게임을 주선해주는 한편으로 그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등 결코 헝가리 감시원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발터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독일의 4강 진출을 이끌었지만 이 대회에서 큰 부상을 당했고 본인의 나이도 이미 40을 바라보고 있던 차라 이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어 다음해인 1959년에는 아예 축구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2.4. 은퇴 이후[편집]


은퇴 이후 독일 축구계에서 가장 위대한 다섯명의 주장 중 하나[6]로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던 발터는 2002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17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6월 21일 8강전 독일미국의 8강전 울산 경기에서 경기 전 추모묵념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발터는 기술이 대단하고 파괴적인 2선 공격수였다.


4. 어록[편집]


"발터는 흠잡을데 없고 페어플레이를 즐기는 선수의 표본이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5. 여담[편집]


  • 동생인 오트마어 발터(Ottmar Walter, 1924~2013)도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독일 국가대표팀의 레전드 중 하나로 베른의 기적 당시 함께 했다. 해군으로 참전한 오트마어는 전쟁 중 무릎에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이 부상으로 4살 많은 형보다도 빨리 은퇴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ielautrerheldenvonBern.jpg

"Die Außenseiterrolle ist ein Schlüssel für die Schatzkammer unermesslicher Kräfte, die -geweckt und geschürt- Energie freisetzt, die helfen, Berge zu versetzen"

"(깨어나서 불씨를 지필수 있다면) 산들조차 옮겨버리게 돕도록 힘을 발휘하는, 무한한 능력으로 가득 찬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가 바로 아웃사이더의 역할이다."



  • 1985년 그의 공적을 기려 카이저슬라우테른은 자신들의 홈구장을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Fritz Walter Stadion)으로 개칭했다.

  • 특히나 비가 오는 악천후일때 더더욱 무시무시한 실력을 자랑해서 당시 독일 축구계에서는 비가 오면 프리츠 발터의 날씨(Fritz-Walter-Wetter)라고 부르는게 유행했다고 한다. 덧붙여서 베른의 기적 때도 비가 무척 쏟아지던, 프리츠 발터의 날씨 상황에서 벌어진 경기였다.


  • 2005년부터 독일의 그 해 최고의 유망주에게 프리츠 발터의 이름을 딴 프리츠 발터 메달을 수여한다.
[1] 해외 클럽에서 이적 제의가 왔지만 고향을 떠나기 싫었고, 가족들의 만류도 있었던데다가 독일 국가대표팀의 주장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주는 책임감 때문에 다 거절했다.[2] 자를란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지역은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인데, 꽤나 공업이 발달한 지대이기도 해서 이 지역에 침을 흘리던 프랑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지역을 합병하려는 야욕을 품었지만 다른 연합국의 반대로 합병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군사적 완충 지역을 만든다는 구실로 독일에서 자를란트를 분리시켜 자치구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결국 주민투표로 독일에 재합병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2차 대전 직후에도 다시 한번 자를란트를 차지할 야심을 품고 이 지역을 자치구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10년 후 자를란트는 다시 주민 투표를 통해 독일(서독)로의 귀환했다. 이처럼 당시 프랑스가 자를란트에 계속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할 경우 프랑스가 다시 한번 자를란트의 합병을 시도할 것이 뻔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때문에 프랑스와 같은 연합국인 소련은 같은 연합국인 프랑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자를란트 주민 출신들은 다른 독일인들과 달리 굴라그로 끌고 가지 않았다.[3] 1951, 1953[4] 다만 조국이 구 추축국이라서 1953년까지 국제대회 출전은 불가능했다.[5]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브론즈볼을 발터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과 RSSSF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82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드컵/수상 문서 참고.[6] 나머지는 1960년대 독일 국가대표팀을 이끈 우베 젤러, 1970년대를 이끈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1990년대로타어 마테우스 그리고 여자축구의 베티나 비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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