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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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
(Flavius Arbogast)
출생
미상
사망
394년 9월 8일
직위
마기스테르 밀리툼
반란 대상
테오도시우스 1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반란자. 테오도시우스 1세의 부하로, 마그누스 막시무스 황제를 무찌르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황위에 복귀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갈등을 벌이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죽자 에우게니우스를 새 황제로 세우고 테오도시우스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자살했다.


2. 생애[편집]


아르보가스트 또는 아르보가스테스(Arbogastes)는 프랑크족 출신의 서방 로마군 장성 플라비우스 리코메르의 조카였다. 그는 그라티아누스 휘하 로마군에 입대한 뒤 여러 공적을 세우며 빠르게 진급하여 기병장관에 임명되었다. 380년 그라티아누스의 지시에 따라 트라키아에서 고트족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합류하여 그 밑에서 활약했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하고 서방 황제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유권을 계속 갖는 걸 용인한다면, 그의 집권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막시무스는 이에 따라 몇년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지 않았지만, 387년 이탈리아로 전격 쳐들어가서 발렌티니아누스를 축출했다.

막시무스가 약속을 어기자, 테오도시우스는 리코메르와 아르보가스트에게 고트족, 훈족, 알란족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막시무스를 토벌하도록 했다. 아르보가스트는 388년 7월 삼촌을 따라 갈리아로 진격했고, 사브 강 근처의 사스키아에서 막시무스를 격파했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으나 적에게 포위되자 항복했고 자비를 간청했지만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어머니와 자식들 역시 388년 가을에 트리어에서 처형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방 황제로 복귀시켰지만,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직 어려서 제국을 혼자 이끌기 힘들었기에 아르보가스트에게 마기스테르 밀리툼(제국군 총사령관) 직책을 맡겨서 발렌티니아누스를 보필하게 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아르보가스트는 심한 갈등을 벌였다. 아르보가스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프랑크 용병들을 주축으로 한 서방 군대를 구축하고, 궁정에서 일하는 신하들을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했다. 급기야 391년 발렌티니아누스의 친구인 하모니우스를 뇌물 수수 혐의로 처형했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아르보가스트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했고, 아르보가스트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으며 모든 건 모함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두 사람에게 화목하라는 답장만 보낼 뿐 이렇다할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392년 5월 초,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르보가스트를 해임했다. 그러자 아르보가스트는 면전에서 "폐하께서 제게 명령을 내린들, 제 권리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답한 뒤 칙서를 땅에 내팽개치고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돌연 사망했다. 아르보가스트는 그가 비엔나 별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공표했지만, 대부분의 당대 기록은 아르보가스트가 직접 황제를 죽였거나 근위대를 매수해 시해하게 했다고 추정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장례식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트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암브로시우스와 아르보가스트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동방의 황제이자 일전에 자기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보호자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인정받기 원했는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후 3개월이 지나도록 새 황제를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아르보가스트는 반기를 들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오르지 않고 친구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첫째, 아르보가스트는 프랑크족 출신이라서 로마인들에게 황제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반면 에우게니우스는 로마인이어서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둘째, 에우게니우스는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교양이 있으며, 로마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귀족이어서 원로원의 지지를 받기 쉬웠다.

술피키우스 알렉산드로스의 유실된 연대기 구절을 인용한 투르의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아르보가스트는 에우게니우스와 함께 라인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알레만니 족과 프랑크 족 앞에서 로마군을 사열시켜서 이들을 압도한 뒤, 두 종족과 예전에 맺었던 동맹을 갱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에우게니우스의 군대에는 프랑크 족과 알레만니 족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우게니우스는 즉위 직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궁정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즉위를 수락하는지를 물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사절에게 선물과 거짓 약속을 퍼부으며 안심시킨 뒤, 사절을 보낸 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윽고 393년 1월, 그는 아들 호노리우스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함으로써, 에우게니우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서기 394년 5월 중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규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출발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에우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에 맞섰다. 양군은 394년 9월 5일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 지대에 위치한 프리기두스 강에서 조우하였다. 이후에 전개된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양측은 이틀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전투 초기,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고트족 1만명과 바쿠리우스 장군이 전사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아르보가스트의 군대는 적의 퇴로를 끊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적이 병력을 분산시키자, 이를 호기로 여기고 아르보가스트의 분견대를 기습했다. 이때 강풍이 불면서 분견대의 시야가 먼지바람에 가려졌고, 결국 분견대는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궤멸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여세를 몰아 적 본대까지 공세를 퍼부었고, 결국 서로마군은 무너졌다. 에우게니우스는 394년 9월 6일 숙영지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된 뒤 공개 처형되었고, 그의 머리는 숙영지 인근에 효수되었다. 한편 아르보가스트는 산으로 도망친 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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