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금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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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androgon.com/MAX300_3_Ruestung.jpg

고딕 양식 판금 갑옷

1. 개요
2. 양식
2.1. 공통 양식(International style)
2.2. 카스튼 브르스트 갑옷(Kasten-brust armour)
2.3. 고딕 양식(Gothic style)
2.4. 밀라노 양식(Milanese style)
2.7. 그리니치 갑옷(Greenwich armour)
2.8. 군수용 갑옷(Munition armour)
3. 구성 요소
3.1. 머리
3.1.1. 바르부타(Barbuta)
3.1.2. 샐릿(Sallet)
3.1.3. 아흐메(Armet)
3.2. 몸통
3.2.1. 흉갑(cuirass)
3.2.2. 랜스 걸이(lance rest)
3.2.3. 폴드(fauld)
3.2.4. 태싯(tasset)
3.3. 팔
3.3.1. 폴드런(pauldron)
3.3.2. 스파울더(spaulder)와 베사규(besagew)
3.3.3. 쿠터(couter)
3.3.4. 뱀브레이스의 상박, 하박 원통(upper, lower cannon of vambrace)
3.3.5. 건틀릿(gauntlet)
3.4. 다리
3.4.1. 퀴스(cuisse)
3.4.2. 폴린(poleyn)
3.4.3. 그리브(greave)
3.4.4. 사바톤(sabaton)
3.5. 기타
3.5.1. 사슬 거셋(mail gusset)
3.5.2. 아밍 더블렛(arming doublet)
3.5.3. 방지턱(stop rib)
3.5.4. 방패(shield)
3.5.5. 코드피스(codpiece)
4. 착용 순서
5. 오해와 진실
5.1. 너무 비싸서 귀족들의 전유물이다?
5.2. 두껍고 무거운 갑옷이다?
5.2.1. 입으면 둔해져서 넘어지면 끝이다?
5.2.2. 혼자 입고 벗을 수 없으며, 너무 더워서 탈진하기 십상이다?
5.3. 쇠뇌에 쉽게 뚫린다?
5.4. 둔기에 약하다?
6. 단점
7. 쇠퇴
8. 대중 매체



1. 개요[편집]



Plate Armour
금속판을 판금 방식으로 가공하여 만들어진 갑옷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는 서양에서 중세 말~근세에 사용했었던 판금 갑옷을 말한다. 사실 ‘금속 판으로 몸을 보호한다’는 개념 자체는 이미 고대 시대 때부터 있었다. 다만 이때는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서 판금 형태로 만들기가 힘들었었다. 서양에서 중세 이전에 사용되었던 고대의 판금 갑옷에 대해서는 서양 갑옷 문서를 참고.

유럽갑옷14세기를 기점으로 과도기(transition period)를 거치면서 사슬 갑옷이 축소되고 판금 방어구가 확대된 끝에 주객이 전도되어 사슬 갑옷이 판금 갑옷의 틈새를 매꾸는 부속품으로 전락하면서 15세기에 탄생한 모든 부위가 판금으로 이루어진 갑옷이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고대시대 수준의 괴철로를 사용해서 연철을 만들고 연철을 침탄해서 적은 양의 강철을 얻었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고로가,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고로에서 생산된 선철을 탈탄해서 연철이나 강철로 만드는 정련로가 서기 1200년경에 도입되거나 발명되며, 이후 수력 풀무질까지 발명하면서 갑옷의 재료인 연철과 강철의 생산성이 상당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기록상으로는 1410년에 처음으로 독립적인 한 벌의 판금 갑옷이 등장한다. 14세기말의 트랜지셔널 아머와 15세기의 판금 갑옷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독립된 한 벌의 갑옷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트랜지셔널 아머는 사슬 갑옷을 먼저 입고 판금 방어구를 덧대지만, 판금 갑옷은 철판으로 덮기 애매한 관절 부위 정도만 사슬 갑옷으로 만들어진 거셋(gusset)으로 보완하고 갑옷을 입는다. 이로써 착용이 더 간편해지고 무게도 가벼워졌으며 각 부위의 방어구가 더 잘 맞물리게 되어서 갑옷을 두 겹 입는 과도기보다 오히려 가볍고 튼튼해졌다.

패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트랜지셔널 아머는 시클러스(cyclas)나 주폰(jupon)과 같은 외투를 입었고 투구와 흉갑의 틈새를 보호하는 아븐테일(aventail)을 갑옷 위로 드러냈다. 특히 아븐테일은 14세기 말의 트랜지셔널 아머와 판금 갑옷을 구분하는 가장 쉽고 확고한 요소이다.

총기가 보편화된 근대에 이르러선 다른 부위는 단계적으로 퇴출돼가고 흉갑만 남아 기사의 후계라 볼 수 있는 기병과 같은 병과들(예: 쿼러시어)에게 한정적으로 쓰이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선 완전 일선에서 사라졌으나 대보병용 파쇄탄의 발명으로 보병을 보호하기 위해 보병이 흉갑을 다시 착용하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소재도 강철에서 탄소섬유로 바꾸면서 현대적인 방탄복으로 계승되었다.(상세한 부분은 쇠퇴 항목을 참조.)

유럽의 전신 판금 갑옷은 15세기에 완성되어 불과 100년 정도만 쓰인 갑옷이지만 철판으로 온몸을 빈틈없이 두른 기사의 위압감과 다른 문화권과의 완전히 차별화되는 형태 때문에 현대에는 중세 천 년을 책임진 사슬 갑옷보다 오히려 더 유명한 갑옷이 되었다. 이 위압적이고 방호력도 뛰어난데다 멋까지 갖춘 그 특징은 중세 기사도 판타지의 대표가 되도록 이끌었고,[1] 현재는 SF의 강화복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2. 양식[편집]



2.1. 공통 양식(International style)[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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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플레이트 아머/John_de_Wittlebury_1410.jpg
존 드 위틀베리(John de Wittlebury) 1410. 영국 마르홈(Marholm) 성모 마리아 성당

1420년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독자적인 양식이 나오기 이전의 판금 갑옷으로 방어력만큼은 후대의 양식에 비해 뒤지지 않지만 트랜지셔널 아머의 빈틈을 모조리 철판으로 막아놓은 모양새라서 관절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그레이트 배서닛(Great bascinet)의 목을 보호하는 고짓(gorget)을 착용하면 목이 거의 안 돌아갔는데 아븐테일(Aventail)을 쓰던 시절에는 배서닛 투구와 흉갑 사이의 틈새가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다.

중~근세 유럽의 갑주제작 기술은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뉘른베르크를 위시한 독일 남서부 지역에서 선도했기 대문에 많은 양식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탄생하였다.


2.2. 카스튼 브르스트 갑옷(Kasten-brust armour)[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nrad_Witz_Sabobai_And_Benaiah_%281435%29_fragment.jpg
위 그림은 뭔가를 마시기 위해 건틀릿을 잠시 벗어놓은 모습이다. 건틀릿까지 낀 건 여기에서 확인하자.

신성로마제국에서 쓰였던 초기 고딕 양식 갑옷으로, 영어 명칭인 box-shaped breast대로 각진 흉갑이 특징이다. 폴드(Fauld)가 대형화된 듯한 톤렛(Tonlet)이라고 하는 강철치마도 특징적이지만 15세기에는 유행하지 못하고 16세기 초에 반짝 유행하게 된다. 현대에 남은 유물이 단 한 벌밖에 없어서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다.


2.3. 고딕 양식(Gothic style)[편집]


파일:attachment/플레이트 아머/SigismundofTyrol.jpg
카스튼 브르스트 이후의 독일 갑옷으로 고딕답게 뾰족뾰족하며 신체 곡선에 딱 맞는 날씬한 형상과 플루팅(fluting) 기법으로 넣은 방사선으로 한껏 멋을 낸 갑옷이다. 갑옷 표면에 튀어나와 있는 방사선은 미적인 요소뿐 아니라 적의 공격을 미끄러트려서 방어력을 향상시키는 역할도 겸했다. 단품 제작이므로 가격이 밀라노 양식보다 비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있고 좌우 대칭에 몸에 꼭 맞아서 움직임이 편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사진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사바톤(sabaton)은 뿔렌느(poulaine) 신발을 흉내낸 기병용 방어구로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인 토캡(toe cap)은 떼어낼 수 있다.


2.4. 밀라노 양식(Milanese style)[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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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과 달리 대량생산하는 양산품이다. 전반적으로 둥글둥글한 인상을 주며 표면도 장식을 배제하여 밋밋하기 때문에 멋은 안나지만 생산성, 가동성, 방어력 삼박자를 갖춘 선진적인 설계였다. 고딕 양식과 달리 좌우가 비대칭으로 랜스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왼팔의 폴드런(어깨)와 쿠터(팔꿈치)를 대형화하고 리벳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폴드런에는 가드 브레이스(gard brace)라는 증가장갑도 추가할 수 있었는데 이 경우 폴드런 전면의 두께가 4mm에 달해서 랜스로도 뚫는 것이 불가능했다.[2] 훗날 영국에서 이탈리아 장인들을 데려가 갑옷을 만들지만 투구만 고딕 양식인 셀릿으로 교체되고 나머지는 차이가 없다.


2.5. 주스팅 갑옷(Jousting armour)[편집]




2.6. 맥시밀리언 갑옷(Maximilian armour)[편집]




2.7. 그리니치 갑옷(Greenwich armour)[편집]


1511년 헨리 8세가 영국 그리니치에 세운 왕립 알메인 갑주 공방(Royal Almain Armoury)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장인들을 고용해 만들었기에 독일식과 이탈리아식의 절충형이다. 16세기 말부터는 갑옷의 주 용도가 실제 전투보다는 토너먼트 쪽으로 무게가 많이 기울었고, 17세기에는 총기와의 경쟁으로 중기병 외에는 고전적 전신 갑주(풀 하네스)를 잘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 생산하는 그리니치 갑옷들은 토너먼트용 아니면 장식성이 강한 제품이 주로 생산되었고[3], 그 장식성에서 독일식과 이탈리아식과 퍽 차별되게 되었다.

동영상 자료는 영국 Glasgow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Tobias Capwell 박사가 진행하는 Metal Works: The Knight's Tale 을 시청해보자.



더 자세한 건 헨리 8세의 하마 전투용 갑옷, 헨리 8세의 강철치마 갑옷 문서 참조.


2.8. 군수용 갑옷(Munition armour)[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Savoyard_armour_IMG_3805.jpg
16세기 철판을 리벳으로 이어서 유연하게 만드는 알메인 리벳(almain rivet)으로 만들어진 갑옷이다. '독일식 리벳' 혹은 '독일식 갑옷'이라는 뜻이다. 1500년대 독일지역에서 유래한 양식이라서 붙은 명칭이다.[4] 단순히 리벳으로 박아서 수직방향으로만 가동되는 기존 제조법과 달리 수평으로도 철판이 미끄러지도록 만들기 때문에 특히 제작이 어려웠던 암 하네스(arm harness)도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다. 이름대로 군수품이기 때문에 품질보다 생산성과 가격에 중점을 둔 양산품으로 열처리는 고사하고 연철이나 연강으로 만들었고 풀 슈트가 아닌 쓰리 쿼터(3/4), 하프(1/2) 아머와 같은 형태였다. 소량의 인이 첨가된 합금을 쓰기도 했으나 이는 단순히 인 함량이 높은 철광석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격은 기존에 전신 판금 갑옷 대비 1/5에서 1/10 정도로 저렴해졌고 판매 또한 개인 단위가 아니라 국왕이나 용병대장이 대량 주문해서 병사들에게 판매하거나 나눠주는 방식이 되었다.

이런 싸구려 갑옷이라도 중앙집권화로 인해 기사와 같은 소수의 엘리트 군인 계층은 도태되었고, 16~17세기 갑옷 최대의 과제인 방탄은 총알의 재질인 납이 너무 물러서 강철이나 연철이나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총알을 막아낼 만큼 두꺼운 연철 갑옷이면 냉병기에도 충분한 방어력을 가졌으므로 싸구려라도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역시 싸구려다 보니, 개중에는 - 거의 방산비리 레벨의 - 조악품도 왕왕 있어서 실전에서 착용자를 엿먹이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5][6]

3. 구성 요소[편집]


파일:attachment/플레이트 아머/armordia.jpg
위의 그림을 기준으로 설명.

3.1. 머리[편집]



3.1.1. 바르부타(Barbuta)[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hiladelphia_Museum_of_Art_Barbute.jpg
그림에도 나와있는 면갑이 없는 개방형 투구로 셀릿의 한 형태로 볼 수도 있으며, 고대 그리스식 투구와 유사한 모양새다. 얼굴에는 T 또는 Y형으로 구멍이 나있어서 눈, 코, 입을 드러냈으며 구멍 주변은 끝단을 접어 올려서 투구에 맞고 미끄러진 날붙이가 얼굴을 긁지 않도록 배려했다. 표면에 리벳을 박아 놓은 것도 흔한데 역할은 그저 장식이고 이는 셀릿도 동일하다. 바르부타는 이 투구가 가장 흔히 쓰였던 이탈리아에서 불리는 말이고, 영어로는 바버트(Barbute)라고 부른다.


3.1.2. 샐릿(Sallet)[편집]


파일:external/infinitejest.wallacewiki.com/Sallet.jpg
이탈리아 지역에서 출현하여 전유럽에서 사용했으나 독일 지역에서 특히 유행한 투구로, 초기에는 배서닛을 대체하는 가벼운 개방형 투구였으나 15세기 중반 들어서 뒷부분이 꼬리처럼 길게 빠져서 뒷통수를 보호하고 면갑이 달린 것들이 나온다. 면갑(visor)은 인중 정도까지 내려와서 얼굴 전체를 덮지 않았고 가동식과 일체형 둘 다 존재했다. 또한 개방형 투구이지만 사진과 같이 입을 보호하는 비버(bevor)와 조합하면 폐쇄형 투구와 같이 얼굴 전체를 보호할 수 있다는 융통성 때문에 15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한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독일의 샐릿과 유사하지만 정수리 부분이 뾰족하고 표면 굴곡이 적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양식의 샐릿을 사용했다.


3.1.3. 아흐메(Armet)[편집]


파일:external/www.ageofarmour.com/armet.jpg
15세기의 폐쇄형 투구로 그레이트 배서닛보다 가볍고 목을 보호하는 고짓(gorget)이 신체 곡선에 맞춰서 만들어진 덕에 목의 움직임도 훨씬 자유로웠다. 폐쇄형 투구의 장점은 단연 높은 방어력으로, 아흐메는 투구 전체가 한덩어리로 단단히 결합될 뿐 아니라 어깨가 투구를 받치고 있으므로 충격에도 강하다. 그러나 15세기의 아흐메는 옆을 열어서 벗어야 하는데다 입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형태였고 개방형 투구보다 무겁기 때문에 중장병(Men-at-arms) 이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16세기에는 앞뒤로 열어서 벗고 입도 완전히 드러낼 수 있게 개량되고 면갑 고정에 경첩을 쓰지 않게 된다.


3.2. 몸통[편집]



3.2.1. 흉갑(cuiras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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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흉갑은 가슴을 보호하는 흉판(breastplate)와 배를 보호하는 플라카트(plackart)로 나눠서 만들고 이 둘을 벨트로 연결했고 리벳으로 연결하는 경우도 흔하다. 흉갑을 상하를 분리해서 만들었던 15세기에는 흉판을 빼고 플라카트만 갖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갈비뼈와 복장뼈가 있는 가슴과 달리 뼈가 없는 배가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플라카트가 위로 계속 확장돼서 가슴까지 덮기 시작하고 16세기 들어서는 분리하지 않는 통짜 흉갑이 일반화된다.

뒷판(back plate)은 그림에서는 따로 분류하지 않았으나 흉갑의 뒷판으로 앞판과 연결하는 경첩의 핀을 뽑아버리면 분리할 수 있고 분할 구입도 가능해서 지갑이 가벼운 병사는 뒷판을 구입하지 않았다. 앞판과 마찬가지로 15세기에는 상하를 분리해서 만들었다.


3.2.2. 랜스 걸이(lance rest)[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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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갑옷사에서 14세기 후반이 돼서야 뒤늦게 도입된 장치로 14세기에 등장한 헤비 랜스는 길이 4~5m 무게도 5kg에서 많게는 10kg까지 나가기 때문에 이를 보조하기 위해 흉갑에 붙어있다. 또한 몸통에 랜스를 보다 튼튼하게 고정해서 상대에게 온전히 충격을 전달하는 데도 도움을 주고 반발력으로 인한 부상도 예방했다.


3.2.3. 폴드(fauld)[편집]


흉갑 아래에 달려서 허리~골반까지 보호하는 부분으로 여러장의 철판을 관절식으로 연결해서 허리를 숙일 때 접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안장에 앉기 편하도록 앞보다 뒷쪽이 짧은 것이 많았고 이 때문에 엉덩이 방어가 불안해서 하마 전투 시 약점이 되었다.


3.2.4. 태싯(tasset)[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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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드 아래 달아서 허벅지를 보호하는 철판. 가죽벨트로 느슨하게 달기도 하고 리벳으로 박아버리기도 했다. 16세기 들어가면 폴드와 비슷하게 관절식으로 만들어서 폴드의 일부처럼 된다. 일부 기병용 갑옷은 상술했다시피 불안한 엉덩이를 고려해서 태싯을 뒷편에도 달 수 있도록 배려했다.


3.3. 팔[편집]



3.3.1. 폴드런(pauldron)[편집]


파일:external/www.ageofarmour.com/pauldrons1.jpg
15세기 들어서 나온 어깨 방어구로 14세기의 스파울더보다 대형화되어서 더 넓은 영역을 막아주며 판금 갑옷의 주요 약점 중 하나인 겨드랑이를 안쪽까지도 덮어서 보호해준다. 그러나 그만큼 무겁고 어깨 움직임을 방해하므로 15세기에도 여전히 스파울더에 베사규로 겨드랑이 앞쪽만 가려서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있었다. 하다못해 요즈음 리인액터들도 그렇다.


3.3.2. 스파울더(spaulder)와 베사규(besagew)[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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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덮는 관절형 철판이 스파울더, 거기에 달린 원반이 베사규이다. 14세기의 구성요소이지만 폴드런이 거추장스러워서 곧잘 쓰였다. 폴드런보다 작고 부실해서 겨드랑이 안쪽의 거셋이 훤히 드러나버리지만 정면에서만큼은 충분히 잘 막아줬고, 어차피 무적의 갑옷은 없기 때문에 폴드런 대신 스파울더와 베사규를 장비했다는 것은 어깨가 편해진 만큼 더 능동적인 방어로 모자란 방호력을 벌충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3.3.3. 쿠터(couter)[편집]


파일:external/farm7.staticflickr.com/5973145488_b52a7d15b4.jpg
팔꿈치를 보호하는 방어구로 14세기보다 더 커져서 팔꿈치 주변과 팔 오금에 대한 방어력이 향상되었다. 밀라노 양식은 좀 거추장스러울 만큼 철판이 안쪽까지 뻗어있는 데다 관절 틈새까지 꼼꼼하게 막아서 방어력은 높아도 불편했고 고딕 양식은 좀 더 간소하게 만들고 끈으로 묶어서 느슨하게 고정했기 때문에 움직임을 덜 방해했다.


3.3.4. 뱀브레이스의 상박, 하박 원통(upper, lower cannon of vambrace)[편집]


상박 원통을 레어브레이스(rerebrace), 하박 원통을 뱀브레이스(vambrace)라고 각각 따로 분류해서 부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뱀브레이스라는 말은 14세기 후반부터 팔 방어구 전체를 통틀어 부르는 용어이기도 하다. 반원 형태로 가공한 두 장의 철판을 경첩으로 맞붙여서 만들었으나 상박은 폴드런과 거셋에 의해 겨드랑이 주변이 보호되고 어깨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박에 비해 길이가 짧았고 바깥쪽만 가리는 경우도 많았다.


3.3.5. 건틀릿(gauntlet)[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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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의 모래시계형 건틀릿과 달리 손가락 보호도 해주는 일체형이며 밀라노 양식은 벙어리 장갑인 반면 고딕 양식은 다섯 손가락 다 움직인다. 15세기 기사들의 주무기는 창, 검, 둔기와 같은 냉병기라서 엄지손가락만 움직여도 지장이 없었으며 권총으로 무장한 16세기 이후부터 손가락을 다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가죽이나 리넨으로 만든 장갑을 끼고 덧씌우는 장비이기 때문에 손바닥은 평범한 장갑이다. 물론 가죽으로만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기에 사슬을 덧대어 방호력을 증가시킨 유물도 꽤 많다.


3.4. 다리[편집]



3.4.1. 퀴스(cuisse)[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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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와 별로 다를 것은 없으며 허벅지를 보호한다. 허벅지는 대동맥이 있는 중요한 부위이지만 아래에서 찔러올리지 않는 이상 공격 당할 일도 별로 없고 태싯이 있으므로 갑옷에서 가장 얇은 부위이다. 안쪽은 역시 안장에 앉을 때 방해되므로 완전히 덮지 않아서 하마 전투시 약점 중 하나였다.


3.4.2. 폴린(poleyn)[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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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보호하는 부위로 무릎을 굽혔을 때 틈이 드러나지 않도록 관절식으로 연결된 철판으로 무릎 주변을 폭넓게 덮었고 바깥쪽은 날개와 같이 철판을 연장시켜서 상하기 쉬운 무릎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그러나 안쪽은 말을 다리 조임으로 몰기 위해서 덮지 않았다.


3.4.3. 그리브(greave)[편집]


파일:external/www.steel-mastery.com/Greaves.jpg

정강이와 종아리를 방어하는 방어구. 팔과 같이 경첩으로 두 장의 철판을 연결해서 열고 닫을 수 있으며, 앞쪽만 떼어낸 데미 그리브(demi greave)도 있으나 주요 고객인 기병은 다리 방어가 중요하고 보병은 돈이 부족한 데다 행군시 방해되는 다리 방어구를 선호하지 않아서 14세기 이후로는 매우 드문 형태이다. 사슬로 만들어진 사바톤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사바톤이 그리브와 일체형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세 초기의 막시밀리안이나 이를 모방하는 양식은 그리브와 사바톤이 일체형이었다.


3.4.4. 사바톤(sabaton)[편집]



파일:external/farm7.staticflickr.com/5973145940_e9baef3085.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Wallace_CollectionDSCF7486.jpg

건틀릿과 마찬가지로 신발 위에 덧씌우기 때문에 발바닥은 평범한 신발이다. 밀라노 양식에는 사슬로 만들어진 것도 흔했고 사바톤에 박차를 고정하는 구멍의 유무가 기병/보병 갑옷을 구분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겸용으로 만들어서 박차를 고정하는 구멍이 있다. 마상전투에서는 다리의 높이가 보병이 때리기 딱 좋은 위치에 있어서 중요한 방어구인 반면 도보전투에서는 마르고 단단한 땅이 아니면 진흙이 달라붙어서 불편한 데다 어차피 발등은 거의 공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뿔렌느 신발을 흉내 낸 뾰족한 사바톤은 공격용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지만 카타프락토이와 달리 15세기 기병은 등자에 발을 걸치고 있으므로 순전히 장식이다. 16세기 들어 뿔렌느 유행이 끝나자 자연히 뾰족한 사바톤도 없어지고, 대신 튜더 양식의 유행에 따라 철 구두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둥글거나 납작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3.5. 기타[편집]



3.5.1. 사슬 거셋(mail gusset)[편집]


파일:external/home.messiah.edu/gussets.jpg
더 이상 사슬갑옷을 아래 껴입지 않게 되면서 겨드랑이, 오금, 엉덩이등 철판으로 덮기 애매한 부분에만 사진처럼 사슬로 만들어진 거셋을 달아서 틈새를 방어했다. 그러나 15세기의 극단적으로 뾰족한 롱소드에스터크, 런들 대거 등은 가차없이 거셋 표면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에 거셋이 덮는 부위는 판금 갑옷의 약점이 된다.


3.5.2. 아밍 더블렛(arming doublet)[편집]


판금 갑옷과 같이 입는 내갑의(內甲衣)로 위의 사진속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다. 기존 사슬갑옷과 달리 판금 갑옷은 충격에 잘 견디므로 갬버슨(gambeson)이나 주폰(jupon) 등에 비해 얇아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대로 말해, 갬버슨은 굳이 사슬 갑옷을 위에 입지 않더라도 그것 자체로 천 갑옷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두껍지만, 아밍 더블릿은 단독으로 갑옷 노릇을 할 정도는 아니다.

쿠터와 폴드런 등의 갑옷 파츠를 몸에 고정하기 위한 끈(arming point)이 달려있는 것도 있다. 아밍 포인트의 부착 여부는 해당 갑옷이 어느 부위에 아밍 포인트가 필요한가, 얼마나 아밍 포인트가 많이 필요한가의 갑옷 형식에 따른다. 그리고 몸에 밀착할 필요가 있는 판금 갑옷의 내의이기 때문에, 아밍 더블릿은 각자의 몸에 맞게 만들어야 했다. 대체로 이탈리아식 아밍 더블릿은 허벅지 길이까지 긴 편이었다.

더블릿은 중세 후기의 평범한 남성 상의지만, 재밌게도 아밍 더블릿 패션도 잠깐 존재한 적 있다. 아밍 더블릿을 입는다는 것은 판금 갑옷을 입는 계층(=기사)이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이 계층들은 갑옷을 입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밍 더블릿을 패션처럼 입고 다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원래는 언제든지 무장하러 달려갈 수 있는 대기 상태, 내지 잠깐 갑옷 벗고 쉬고 있다는 의미지만, 이게 기사와 귀족 사이에 일종의 패션처럼 유행하자 갑옷 입을 일이 없는 건달들조차도 거셋이나 아밍 포인트가 달린 아밍 더블릿을 입고 거들먹거린 적도 있다.


3.5.3. 방지턱(stop rib)[편집]


파일:external/www.ageofarmour.com/pauldron-1.jpg
주로 폴드런이나 흉갑에 붙여서 머리나 목을 향해 타고 올라오는 공격을 비껴낸다.


3.5.4. 방패(shield)[편집]


파일:attachment/5-TobyCapwell-MarcHamelShield-TOTP2012-LeslieChappellBritt.jpg
판금 갑옷은 방패 없이도 충분한 방어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15세기 방패의 입지는 좁다. 사진에 나와있는 타지(targe)는 토너먼트 방패로 유명한 형태로 방어구가 아닌 어깨나 가슴에 매달아서 표적판 역할을 담당했다. 무장 수준이 떨어지는 병사들도 폴암의 복합적인 기능과 타격력을 살리기 위해 방패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배경속에 잭체인과 같은 간이적인 암 하네스도 등장한다.


3.5.5. 코드피스(codpiece)[편집]


파일:external/forum.kingdomcomerpg.com/8b3441dc96fc5cd3.jpg
중세 유럽에서 남성용 의복에 유행하였던 낭심 가리개가 판금 갑옷 버전으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중세 문화였다면 아무리 남성의 성이라도 당당히 의복을 통해 드러내는 건 터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갑옷 평복 가리지 않는 코드피스 유행 자체가 16세기에 있었다. 당대의 문화와 맞물려서 남성의 섹스심벌을 강조한 디자인은 진짜 도입되었다는 건 아이러니한 점이다. 실질적으로는 낭심 보호대의 역할을 하는 코드피스(Codpiece)[7]를 강조해서 만든 게 그것. 위의 헨리 8세 갑옷에도 코드피스가 유독 크고 아름답게 달려있다. 이 코드피스는 근세에 갑옷뿐만 아니라 평복에 다는 것도 유행이었다. 헨리 8세의 초상화만 찾아도 평복에도 코드피스를 달고 고간 자랑을 하는 게 나온다.


4. 착용 순서[편집]


15세기 말 독일 고딕식 갑옷 기준이다. 원칙적으로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입고, 마지막은 투구를 쓴다.
기본적인 부품 등은 다른 양식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 위에서도 말한 아밍 더블렛(Arming Doublet), 번역하자면 무장용 웃옷을 입는다. 취약한 겨드랑이 등의 부분이 사슬로 덮여져 있고 가죽끈이 달려 있는 옷이며, 이게 없으면 갑옷을 입을 수 없다.
하반신에는 누벼 만든 바지를, 발에는 가죽 신발을 착용한다.

2. 쇠구두, 정강이가리개, 무릎가리개, 넓적다리가리개를 입는다. 말탈 때를 위해 넓적다리가리개는 뒤쪽을 가리지 않지만, 정강이가리개는 경우에 따라 아예 통으로 감싸고 고리로 채워 고정하기도 한다.
넓적다리가리개의 맨 윗부분은 끈으로 몸통가리개와 묶는다.
쇠구두는 마름쇠에 의한 피해 방지를 위해 바닥까지 쇠인 제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접지력 확보를 위해 발등만 덮는다.

3. 쇠그물 치마를 허리에 두른다. 강철치마가 실존하기는 했으나 이걸 입으면 앉는 게 불가능해지므로 말을 탈 때의 허리 방어는 쇠그물 치마를 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4. 등판을 올려서 맞춘다.

5. 가슴판을 착용한다. 등판과 허리끈으로 함께 묶고 어깨에서도 묶는다.

6. 어깨가리개, 팔꿈치가리개, 팔가리개, 겨드랑이가리개를 입는다.

7. 쇠장갑을 착용하고, 부무장을 허리에 찬다. 쇠장갑에는 무기를 쥘 수 있도록 가죽장갑이 달려 있으며, 부무장은 대표적으로 손도끼나 단검 등이 있다.

8. 턱가리개를 입는다. 턱가리개는 얼굴 아래쪽 반을 보호해준다.

9. 톱니바퀴 박차를 발에 채우고, 투구를 머리에 씌운다. 투구는 맞아도 충격을 흡수하도록 안감을 대고, 벗겨지지 않도록 턱끈이 달려 있다.

10. 주무장인 장검, 철퇴, 랜스 등으로 무장한다. 이제 말에 타고 전장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


5. 오해와 진실[편집]


창작물(특히 게임)에서의 비현실적인 제약과 근대의 편견이 겹친 결과.

사실 하나하나 제대로 놓고 뜯어보면 갑주 중에서도 이만한 갑주가 없으며, 갑옷의 최종진화형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이다. 괜히 갑주의 정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다. 전신 판금이 아니라면 흉갑과 투구 정도는 별 부담 없이 갖출 수 있고, 수영과 뜀박질, 레슬링[8]까지도 가능하면서 웬만한 냉병기를 완벽히 무력화시킨다.

5.1. 너무 비싸서 귀족들의 전유물이다?[편집]


이것은 사슬 갑옷과 판금 갑옷이 같은 시대의 갑옷이 아니라는 점과, 기술의 발전과 생산력 증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물론, 보다 훨씬 더 고급의 기술이 적용된 갑옷인 만큼 값이 싼 것은 절대 아니라서 전신 판금 갑옷은 맨앳암즈(men-at-arms)나 기사 정도만이 구입할 수 있었고 자유민이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인 건 사실이다.
출처 : 원문, 번역본
나이트 배너렛[9] 월급
일당 4실링
1316년
일반 기사 월급
일당 2실링
기사 종자 및 맨앤암스의 월급
일당 1실링
숙련된 목수
일당 3데나리우스
1351년
숙련된 석공
일당 4데나리우스
일반 인부의 월급
연 최대 2파운드
12세기
판금 갑옷 풀세트
13파운드 16실링 11데나리우스
1514년
이탈리아(밀라노식) 갑옷
8파운드 6실링 8데나리우스
1441년
기사 종자(squire)의 갑옷
5~6파운드 16실링 8데나리우스
사슬갑옷
5파운드
12세기
지휘관급 기사의 하루 일당이 4실링으로 25일을 일하면 사슬갑옷을 살수가 있었고, 65일을 밥도 안 먹고 굶으면 살 수 있었다. 참 쉽죠? 문제는 기사급은 무기나 식대 등 모든 비용을 자신이 대야 했기 때문에 절대 저 정도 돈으로는 구입할 수가 없었다. 일반 인부로 눈을 돌리면 더 빡세진다. 위의 표에서도 나오지만 일반 인부가 연봉이 정말 잘 받았을 때에도 2파운드에 불과했다. 전신 플레이트 갑옷을 사기 위해서는 무려 7년 가까이를 한푼도 안쓰고 굶어가며 모아야 전신 갑옷을 살 수가 있었다는 뜻이다. 도시의 자유민도 길드 소속의 숙련된 성공이 일당 4데나리우스를 받았는데 13파운드(3120 데나리우스)를 모으기 위해서는 780일, 그러니까 2년 하고도 2달을 한푼도 안 쓰고 모아야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갑옷, 방패, 창, 칼 등을 비롯한 각종 무기들도 모두 자기 돈으로 구입해야 했어요. 철제로된 갑옷은 모두 수제품으로, 여기에 호버크라고 불리는 보호장비 등을 갖추려면 요즘 돈으로 수천만 원 이상이 들었어요. 칼, 창 같은 공격용 무기들은 이와 별개로 추가 구입해야 했죠. 물론 많은 경우엔, 기사 개인뿐 아니라 가문에서 그 비용을 도와주긴 했지만 말이죠.

이범진 기자의 잉글리시 문화사 - 기사가 되는 데 필요한 사교육비는 얼마?


일단 기사의 체인메일의 가격은 25파운드(1억 2천만 원) 정도였고, 플레이트 갑옷 세트는 25-100파운드(1억 2천만- 5억 원)이고 전투마는 대략 25-100파운드(1억 2천만-5억 원)이었습니다.

이제, 여러 병과의 전쟁수당을 나열해 보자면,

베네렛 기사(기사대 대장 정도의 직위): 일당 20실링(500만원)

일반기사: 일당 10실링(250만 원)

견습기사: 일당 6-7실링(150만 원-170만 원)

중장보병 및 (석)궁병: 일당 4 실링(100만 원)

이렇게 군인들의 전쟁수당이 하루에 몇 백만 원씩으로 굉장히 많아 보이는 것 같지만, 이 경우에는 그들의 장비값이나 식량 등을 자비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처럼 많은 봉급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장비값은 위에 언급했다 시피 좋은 품질은 1억 원이 넘는 가격이었으니…

출처

그리고 판금 갑옷은 지속적으로 관리가 필요했는데 꾸준히 기름칠을 해줘야 했고 광을 내야 녹이 슬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서기전 관리를 해주는 종자를 거느려야 갑옷의 효과를 볼 수가 있었다. 거기에 갑옷만 입고 전쟁터에 나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무기, 식량도 직접 구매해야했고 필요에 따라서는 도 구매해야 했다. 따라서 전신 판금 갑옷을 갖추고 이를 관리해 나가며 전쟁터로 나간다는 건 웬만큼 재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은 유지가 힘들었고 유명한 용병단이나 귀족들이 아닌 이상 전신 플레이트 갑옷을 맞추는 일은 드물었다.

다만 전신 판금 갑옷이 아니라 수요가 많고 가공이 비교적 간단한 투구와 흉갑은 저렴한 편이었고 판금 갑옷 착용에 계급제한은 없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갖출 수가 있었다. 당시 병사의 대다수를 차지한 용병들은 비용 문제도 있고 살기 위해 투구와 흉갑만 갖추는 경우는 흔히 있었다.

그리고 판금 갑옷 가격은 과거의 사슬갑옷에 비해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 사슬갑옷은 고리를 일일이 꿰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의 양이나 기술력과는 별개로 압도적으로 높은 인건비가 들었지만[10] 판금 갑옷은 단조를 해야 하는 관계로 보다 고급의 인력과 기술이[11] 필요한 대신 부위 한 개 만드는 데 필요한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적었다. 중세 중후기 철 제련 기술의 발달로 철의 공급이 원활해지고, 대장장이들의 실력도 오르고, 마침 흑사병의 창궐로 사람 자체가 귀해졌다. 이러니 판금 갑옷 쪽이 훨씬 더 경제적이게 돼서 대세를 넘겨준 점도 판금의 보급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성이나 저택 수준의 가격을 자랑하는 갑옷은 보통 16세기 이후의 장식용 갑옷으로, 당시의 주름옷을 흉내내서 세로줄을 빼곡하게 잡은 독일의 맥시밀리언 아머나 화려한 자수를 도금으로 흉내낸 영국의 그리니치 아머(Greenwich armour)가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단순히 판금 갑옷이 귀족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은 오해다. 비싸고 유지비도 많이 나가니까 귀족들이 많이 입은 것으로 보여진 것일 뿐, 귀족급으로 돈을 번다면 계급에 상관없이 착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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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장인 혼자서 만들어 내는 갑옷으로 알려져 있으나 판금 갑옷은 현대 무기와 같이 공장제로 제작됐으며 그 제작 공정 또한 철사를 끊는 사람, 철판을 다듬는 사람, 쇠사슬을 엮는 사람 등등이 모두 따로 있을 만큼 세분화 됐었다. 가장 대표적인 제작사는 독일의 헬름슈미트(Helmschmied)[12] 가문과 이탈리아의 미살리아(missaglia) 가문 등으로 전 유럽에 체인점이 있을 정도.[13] 이들이 기술력을 자랑하는 방식은 똑같은 모양의 똑같은 칼들을 균일한 품질로 생산하여 전시해놓는 것이였는데 현대 기술을 사용해도 균일한 품질을 유지하는건 쉬운일이 아닌 것이기에 이를 사람 손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을 자랑하는 것이였다.

현대에 와서 전시용으로도 갑옷의 레플리카를 제작하기도 하는데, 아무리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라도 풀세트로 사려면 최소 몇 천만 원 이상 깨진다.


5.2. 두껍고 무거운 갑옷이다?[편집]


각종 판타지 작품에서 판금 갑옷은 두껍고 튼튼한 대신 무겁다고 설정하는 것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낭설에 불과. 판금 갑옷의 두께는 기존 갑옷과 비슷한 1.2~2mm 사이로 얇다[14]. 방어력의 비결은 두께가 아닌 구조강도를 높이는 설계와 열처리의 산물이다.

물론 100kg 단위의 상식밖의 무게가 아닐 뿐 어워트 오크셧의 a knight and His armor에 의하면 필드 아머(field armour)[15]의 무게는 평균 26 kg[16]으로 당연히 훈련도 안 받은 이고깽이 입고 다닐 물건은 못된다. 헌데 판타지에서 경갑으로 분류하는 찰갑, 사슬갑옷도 전신을 무장하면 20 kg은 기본이니 무거운 무게는 판금 갑옷만이 아니라 금속 갑옷의 공통적인 단점이다.[17][18] 판금 흉갑의 무게는 2.5~8 kg 내외로 면적당 무게는 현대 세라믹 방탄판이 들어간 방탄조끼와 비슷하며, 갑옷과 무기 이외의 짐을 시종이 들어주므로 전투에 심각한 지장을 줄 정도의 하중을 지탱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어깨에 거의 대부분의 하중이 걸리는 사슬갑옷[19]과 달리 각 부위에 고정하는 판금 갑옷은 하중이 전신으로 분산되어 마치 20~30 kg의 살이 찐 것과 같은 효과이므로 충분한 지구력과 근력이 있다면 오히려 기존의 갑옷보다 편했다. 특히나 직전에 쓰이던 트랜지셔널 아머는 사슬 갑옷 위에 강철판을 덕지덕지 덧입던 형태라 굉장히 무거웠고, 풀 플레이트 아머는 되려 이 때보다 더 가벼워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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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셔츠.[20]
15세기 고딕 양식 갑옷.[21]
심지어 기중기로 들어서 말에 올린다는 말도 있지만 역시 근거가 없다. 이런 루머의 근원은 19세기의 소설 등에서 이런 묘사가 나온 것을 사람들이 실제로 믿었기 때문. 안전 문제 때문에 목과 왼팔을 고정해 버린 데다 전투용 갑옷의 2배에 달하는 무게를 자랑한 기사주스트[22]용 갑옷마저도 종자의 도움을 받거나 계단 밟고 혼자서 말에 올랐다. 비슷한 예가 딱 하나 있긴 하다.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사고로 다리를 못 쓰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자 도구를 써서 말에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헨리 8세가 상당한 거구였던 데다, 늙어서는 살까지 쪘다는 걸 고려해야 할 것이다[23].

낙마하면 무게 때문에 죽는다는 말도 있으나, 달리는 말에서 맨몸이나 경무장하고 떨어져도 잘못 떨어지면 중상인 건 똑같고, 기사들끼리의 격렬한 충돌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거나 예상치 못하고 목이나 팔다리가 꺾이면서 떨어지면 모를까 그냥 떨어지는 정도로는 멀쩡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래의 영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애초에 말에서 떨어지는 것 자체로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다면 토너먼트 개최할 때마다 시체로 탑을 쌓았을 것이다. 판금 갑옷 입고 떨어져서 중상 입을 상황이면, 뭘 입으나 마찬가지다.




[vimeo(13634653)]

에 빠지면 위험해진다는 말은 일단 당연히 맞는 말이다. 20kg나 되는 강철을 몸에 두른 상태로 물에 빠졌는데 가라앉지 않을 리가 없다. 흔히 20kg만큼 살이 찌는 것과 같다는 반박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무게만을 생각한 것이므로 물에 빠졌을 때에 적용할 수는 없고, 살+지방으로 이루어진 군살과 강철은 밀도가 아주 크게 차이나기 때문에 같은 20kg라도 당연히 강철은 물에 가라앉는다. 하지만 물 속으로 쭈우욱 가라앉아 속수무책으로 익사할 수밖에 없는 수준은 아니고 입은 사람의 근력과 남아있는 체력에 따라서 헤엄쳐 나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갑옷의 무게로 무거워진 몸이 계속 가라앉기 때문에 맨몸에 비해 헤엄치기가 엄청나게 힘들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금방 뭍에 닿을 수 없다면 익사하겠지만. 같은 이유로 오늘날의 방탄복도 물에 빠졌을 때 빨리 벗고 수영할 수 있도록 퀵릴리즈 기능이 보통 들어간다. 다만 여기에서도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판금과 사슬은 무게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것은 딱히 판금만의 약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5.2.1. 입으면 둔해져서 넘어지면 끝이다?[편집]


판타지 창작물에서 나름대로 밸런스 패치 한다고 휘갈겨놓은 낭설과 철판을 두르면 둔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만들어낸 오해이다. 그러나 둔해지기는커녕 전력질주에 에어로빅, 구르기까지 가능하다. 물론 관절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지지만 두꺼운 점퍼나 코트 입으면 어색해지는 수준에 불과하다. 애초에 갑주를 입을만한 사람들은 신체 단련과 무술 수련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 판금 갑옷을 만드는 장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금속으로 만든 갑옷이 무겁다는 건 만드는 그들부터 잘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판금 갑옷의 각 파츠들을 착용자의 몸 각 부위대로 중량이 분산되는 구조로 설계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같은 무게라도 체감상으론 사슬갑옷보다도 훨씬 가볍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특히 중세 초, 중기의 갑옷인 호버크가 어깨에 갑옷의 무게가 집중되어 착용자를 빠르게 피로하게 만들고 실제 무게보다 착용자가 무겁다고 느끼게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판금 갑옷의 무게 분산 구조는 상당히 진보적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군용 군장들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아래의 영상들을 참조하면 볼 수 있는데, 밥 먹고 검술 훈련만 하는 진짜 기사도 아닌, 현대의 연구자 겸 리인액터들도 충분한 훈련만 하면 잘만 움직일 수 있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끊임없이 갑주를 입고 훈련을 반복해온 사람이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이 모든 사실들을 전부 차치하고서 이 판금 갑옷이라는 물건 자체가 애초에 대놓고 싸우라고 만든 전쟁병기다. 전쟁병기의 효과가 그렇게 나쁘고 불편하며 오히려 입고 나가면 방해가 되는데 왜 그런 고가에 거래되며 왜 이게 만드는 상업과 직인이 존재할까? 그야말로 낭설이자 정말로 실제를 모르는 단순한 망상이 이런 오해와 편견을 낳는 것,

심지어 이 편견은 2000년도 초반에는 아예 대한민국의 중학생 교과서에도 당당히 실려 있던 내용이었다. 기중기로 말에 태워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개소리가 무려 정규 교과목의 교과서에 버젓하게 실려 있었던 셈, 물론 지금은 당연히 이러한 말도 되지 않는 각주 서문들은 전부 교과서에서 잘려나갔다. 애초에 기중기로 들어서 말에 태운다면 그걸 입고 있는 사람이 제대로 버틸 수도 없거니와 그 사람에 갑옷의 무게까지 전부 부담하는 말에게 부과되는 중량은 말도 아니게 된다. 거기에 마갑까지 씌우고 장창 랜스를 든 채 고속으로 기마 돌격을 한다? 그야 말로 개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이 판금갑옷은 그야말로 당대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병장기로는 상대가 불가능한 당시 전쟁 과학기술의 극치이자 극한이었고 여기에 더해 미술품으로써의 가치도 그야말로 일품이었던 예술성과 실용성에 기술력까지 더해진 극치의 물건이었다. 당연히 이랬기 때문에 고가를 형성한게 당연하고 말이다. 칼, 창, 폴암으로는 뚫기가 어렵고 대형 망치를 들고 와야 겨우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는 것이 가능한데 이건 현대전으로 보자면 일반 소화기 따위로는 상대도 안되어서 대전차화기를 들고 와야지 상대를 할 수 있는 전차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이런 기사들의 돌입은 대부분 마상 랜스 차징으로 실질적 전술의 쓰임세 또한 현대전의 전차와 마찬가지로 적의 원거리 화력 공세를 막아내며 자신의 전선을 급속 전진 시키고 적의 전선은 와해하며 후방의 경무장한 아군을 원거리 사격에서 보호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이후 전장 자체에 돌입해서는 말에서 내려 저속 운행하며 적의 감시초소 등의 진지에 달려가 무력화 하는 등 그야말로 현대전에서의 전차 그 자체다.[24]


The armored combat, Daniel Jaquet


Half Swording

움직임이 느리다거나 가속되는 데 시간이 많이들고 방향을 전환하는 데에 특별한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해와 편견 내지는 일부 게임상의 설정이며, 전신을 무장하더라도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동영상이다. 맨몸으로 움직이더라도 속도가 붙으면 멈추는 데에 시간이 더 들거나 방향을 바꾸기 어려운 것은 똑같고, 무장을 하지 않는다면 무장을 한 것보다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심지어 15세기의 한 기사의 기록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말에 올라타기, 장거리 달리기, 장작패기, 벽타기 등등의 운동을 약 26kg짜리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채로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위의 영상에서 그걸 재현하고 있다.

마지막 예시로는 근세 초기, 1565년경의 기병용이자 마상창시합에서 사용되었던 갑옷을 들어볼 수 있다. 무게는 27.7kg 이며, 관절 안쪽까지 금속판이 보호를 하고있지만, 기동성에는 큰 지장이 없다.


이는 메트로폴리탄 미술 박물관의 영상에서도 증명해준다. 23:33부터 시청해보자.


판금 갑옷을 입고도 달리기, 구르기, 점프 등 다 할 수 있다.


개그성 영상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피트니스 짐에 가서 운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25]


에어로빅도 물론 가능하다. 전동건으로 연사하는 BB탄을 모조리 도탄시키는 건 덤.


5.2.2. 혼자 입고 벗을 수 없으며, 너무 더워서 탈진하기 십상이다?[편집]




판금 갑옷을 입고 벗는 절차가 다른 갑옷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까다롭기는 하다. 갑옷을 빨리 벗지 못해서 입은 채로 대소변을 본 후 나중에 시종이 닦아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26] 판금 갑옷은 기본적으로 벨트와 버클, 끈과 매듭의 연속일 뿐이라 충분한 시간(늦어도 10분)만 주어지면 혼자서도 입고 벗을 수 있다. 그리고 전신 판금 갑옷을 소유할 재력이 된다면 당연히 시종이나 종자를 거느릴 재력도 된다는 말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큰 어려움 없이 벗을 수 있다. 싸움에 져서 포로로 잡힐 경우에도 큰 문제는 아닌 것이, 포로의 몸값과 장비값은 따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일단 포로가 되기만 하면 조금 전까지 나를 쳐죽이려고 하던 적군들이 아주 친절하게 탈의를 도와줄 것이다. 물론 벗겨진 갑옷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는 별개의 영역이지만.

햇빛에 갑옷이 달아오르는 문제는 실제로 갑옷을 착용한 사람을 지치게 했는데, 이 문제는 갑옷 위에 외투를 둘러서 어느 정도 해결했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면서 유행한 서코트(surcoat)는 문장을 그리는 그림판이 아니라 사막의 뜨거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현지 기사들이 입은 것이 시초고,[27] 14세기에는 쥐퐁(jupon)과 단축형 서코트인 시클러스(cyclas)가 서코트를 대신했다. 판금 갑옷이 쓰인 15세기에는 외투를 입지 않는 surcoatless period(1420~1485)가 끼어있고 갑옷 자체를 장식해서 표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으나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에 다시 헐렁한 외투인 타바드(tabard)나 베이시스(bases)라는 치마를 입었는데 베이시스는 더블렛(doublet)이나 저킨(jerkin)의 밑자락으로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 판금 갑옷은 설계에 따라 철판과 신체 사이에 약간의 이격을 주어 약하게나마 통기성을 줄 수도 있어서, 덥고 습한 날씨에서도 아예 못 입을 물건은 아니었다. 스페인콩키스타도르들이 아메리카의 밀림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제 무기와 갑주의 공이 컸음을 기억하자.[28]

그렇다고 사슬갑옷의 통기성이 우월하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대체로 사슬갑옷을 입을 때에도 방어력을 보완하고 충격으로 끊어진 고리가 피부에 파고드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양털이나 솜을 넣어 누빈 내갑의(內甲衣)[29]를 입기 때문에, 중무장 상태에서 덥고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5.3. 쇠뇌에 쉽게 뚫린다?[편집]


판금 갑옷의 오해라고 하기보다는 갑옷 얘기에 항상 따라다니는 물타기에 가깝다. 실제 판금 갑옷은 투사무기에 약하기는 커녕 모든 갑옷중에서 가장 강해서 방탄을 고려하지 않은 15세기 갑옷조차 핸드캐논(handgonne)을 막아내고 후기의 두꺼워진 플레이트 흉갑은 활과 쇠뇌 따위는 물론이고 화승총의 총알까지 막아낼 수 있었을 정도다. 사실 흑색화약이 주력이던 19세기 말까지도 제대로 된 갑옷이면 흑색화약 45 롱콜트 같은 대구경 권총탄까지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기관총이 등장하고 무연화약이 나오면서 관통력이 급상승한 것이 문제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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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갑의 찌그러진 부분이 총알을 막아낸 흔적이다. 16~17세기 방탄 갑옷은 bulletproof라는 홈이 반드시 있었는데, 이 시대에는 품질 인증 기관도 기준도 없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을 직접 증명할 필요가 있었고 방탄 갑옷은 직접 총알(bullet)을 쏴서 방탄을 증명(proof)해서 '총알 자국=방탄'이라는 의미가 된다(단, 일부 자국은 일부러 화약을 적게 넣어서 위력을 낮춘 총을 사용하여 '사기'친 것들도 있다.).

실제로 152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방탄이 되는 판금 갑옷을 입은 덕분에 파비아 전투에서 여러 발의 총상을 입었지만 무사했으며, 1627년 라로셸 공성전 당시 세인트 마틴 대위도 방탄 갑옷을 입은 덕분에 무려 30회 이상이나 머스킷 총탄에 맞았어도 다치지 않았다!#


Vernile에서 실제 이탈리아제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장궁병 화살에도 아랑곳 않고 쓸어버린 적도 있고, 채널4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국을 만들어낸 무기들"(Weapons that made Britain) 시리즈 중의 실험 동영상(위)에서는 20m 앞에서도 직사로 쐈는데도 내부 찰흙에는 흔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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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직사로 근거리에서 맞았을 때나 이 정도지, 거리가 벌어지거나 입사각이 둔할 경우 제대로 박히지조차 못하고 매끈하고 경사진 표면에 미끄러져버린다.


열처리도 하지 않은 갑옷에 100파운드급 장궁[30]으로 사격하는 모습이다. 나중에 가면 뚫리긴 뚫리는데, 관통이라기보다는 뚫린 구멍에 밀려들어간 경우다. 더군다나 뚫리기 전까지 사격한 횟수를 생각하면 그때쯤이면 이미 기사가 장궁병들 앞에 나타나 랜스로 찍어버리거나 말로 치어버렸을 타이밍이다. 갑옷이 활에 무력하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백년전쟁의 전투는 기수가 아니라 경무장한 말을 노려서 프랑스 기사를 무력화했고, 지형적 우위와 더불어 영국의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서 보병진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전과였다. 물론 프랑스군도 이걸 알고 있어서 기사들이 단독으로 적진에 노출되는 걸 피하려 했지만 군기가 빠져 있는 기사들이 말을 안 들었다. 실제로 백년전쟁 후기 잔 다르크에 의해 사기를 회복하고 기강을 바로잡은 프랑스 군대는 대포를 동원하고 대량의 장궁병을 앞세워서 언덕에 자리 잡고 수세로 일관하던 영국에게 공세를 강요했고, 이를 기사로 맞받아쳐서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역전승으로 끝난다.

물론 당시에도 장력이 최대 2000파운드에 달하는 공성 쇠뇌 등과 같은 공성병기에 정통으로 맞거나 보병 십수 명이나 다른 기사들이 달라 붙어서 할버드워해머 등으로 사정없이 두들겨패면 버틸 수가 없었지만, 굳이 판금이 아니어도 이런 공격을 당하고도 착용자가 멀쩡한 갑옷은 없다. 뒤집어 말하면 이 정도 수단을 동원해야 판금 갑옷을 파괴하고 착용자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고, 말타고 다니는 기사는 둔한 공성병기에 맞아주지 않고, 할버드나 워해머 같은 걸로 두들기려 해도 평생 전투기술을 단련해 온 인간흉기가 필사적으로 저항하기에 쉽게 맞아주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무기(특히 장거리 투사무기)의 발전으로 관통력이 높아지면서 판금 갑옷이 도태된 것 자체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갑옷의 도태이지, 딱히 판금 갑옷만 활과 쇠뇌에 잘 뚫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활과 쇠뇌의 발전 이후 먼저 도태된 다른 갑옷에 비해 판금 갑옷은 갑옷의 최종형으로써 마지막까지 버틴 갑옷임을 잊지 말자.[31] 판금 갑옷을 본격적으로 도태시킨 건 보병들 대다수가 머스킷 수준의 화기를 들게 된 패러다임 변화였다. 아무리 두꺼워도 대포를 정통으로 맞거나, 한두 발쯤이면 튕겨낼 총알을 수십명 이상으로 쏘는 일제사격으로 얻어맞으면 착용자가 죽는 건 뻔하기 때문.

이처럼 판금 갑옷은 활이나 쇠뇌에도 뚫리지 않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였다. 다만 시야 확보를 위해 면갑을 올리거나 치열한 전투 중 고정장치가 느슨해져 갑옷 틈새가 벌어졌을 때, 조준사격 혹은 눈먼화살에 노출된 부위가 맞아 죽는 경우도 있었고 설사 뚫리지 않고 계속 진격을 한다고 해도 무의식으로 날아오는 화살에 움츠러드는 인간의 방어본능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는 경우는 있었다.


5.4. 둔기에 약하다?[편집]


물론 당연하지만, 갑옷이 둔기에 약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거의 드물다. 기껏해야 검보다는 더 낫다는 식의 묘사가 대부분이다. 단지 이 서술에서는 판금 갑옷의 장점을 적기 위해 억지로 서술을 시도한다.

둔기에 맞으면 찌그러져서 압박으로 죽는다든가 유연한 갑옷은 충격을 흡수하지만 단단한 판금 갑옷은 멀쩡해도 충격파가 어찌어찌 작용해서 죽는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일단 둔기에 맞아도 판금 갑옷은 쉽게 찌그러지지 않고 충격파에 관한 얘기는 종 효과 문서 및 대전차오함마술 문서를 참고. 이것도 RPG 게임 등에서 밸런스 조절을 위해서 넣은 설정에 가깝다. 공격 종류를 베기, 찌르기, 타격 등으로 세분했는데, 갑옷 떡칠 캐릭터를 공략할 방법으로는 타격을 권장하는 식으로 말이다.


온전히 운동에너지를 흡수할 수는 없으니 충격에 의해 다칠 수는 있지만 양철 냄비도 아니고 둔기에 맞았다고 폭삭 찌그러져서 죽을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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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갑옷과 코트 오브 플레이트(coat of plates)[32]가 각각 랜스에 들이받혔을 때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 실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연한 갑옷은 충격을 흡수하기는커녕 그대로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갑옷이 뚫리지 않더라도 사슬갑옷은 움푹들어가면서 고리 몇개의 면적에 모든 충격이 집중되고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랜스에 찔린 철판 면적에 따라 분산될 것인데 어느 쪽이 덜 다칠 것인가는 자명하다. 괜히 사슬갑옷 아래에 솜을 두툼하게 채운 갑옷 입는 것 아니고 경번갑과 같은 양식이 등장한 것이 아니다.

둔기는 날붙이가 안 통하는 판금 갑옷에 그나마 통하는 무기[33][34]일 뿐이고, 날붙이로 상대가 가능한 그보다 연한 갑옷에는 당연히 더 잘 통한다. 갑옷이 유연할수록 갑옷 표면이 무기의 형상대로 변형되면서 충격 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둔기에 더 취약해진다. 그러므로 오히려 판금 갑옷은 이전의 다른 갑옷들보다 오히려 둔기에 더 강하다. 이 때문에 판금 갑옷을 잡기 위해 등장한 중세 말 둔기들에는 뾰족한 부분들이 있어 갑옷 틈새를 찍거나 찌르기 좋았고 아시아 여러 지역들에 존재하는 둥글둥글한 금속제 둔기는 거의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좋다. 다시 말해, 둔기가 판금에 통하는 만능 열쇠 노릇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적에게 그나마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운동 에너지를 내기 위해서 묵직한 둔기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이다. 물론, 둔기가 아니더라도 뾰족한 칼날로 취약 부위를 찌르는 파훼법도 나온 바 있다.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고 하프 소딩을 한다든가, 단검이나 에스토크로 쑤신다든가. 오히려 이런 방법들이 중기병들 사이에선 훨씬 더 보편적이었고 중세 말에 쓰인 뾰족한 둔기들마저도 거의 이런 방법으로 사용했다. 보병들이야 큼지막한 폴액스 폴해머나 빌훅, 할버드 같은 무기들로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지만 랜스를 들고다녀야 했던 중기병들에겐 사용할 수 있는 둔기 체급에 제한이 컸었고, 결국 취약점을 공격하는 게 아닌 이상 작은 둔기론 한계가 컸고, 둔하고 짧은 둔기로 적의 약점을 노려 때리고 찍을 바에는 더 길고 다루기 편한 롱소드나 에스톡이 더 선호 되었다.


pike and beak와 corseque polearm. 얕은 구멍을 내고 말았다. 내의를 생각하면 부위에 따라 경상에 그칠 수 있거나 아예 타격이 없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말타고 움직이는 기사가 저렇게 맞아줄 경우는 없겠지만, 원래 보병이 기병을 잡는 경우는 대개 정면대결보다는 방어진형 뒤에서 기회를 보다가 기동 실수로 충격력을 잃은 기병을 포착하면 뛰쳐나가서 다굴로 때려잡는 것이다.

유투브 실험들의 무기 방어구 품질의 정보는 주인이 아니라면 눈썰미가 필요하겠으나, 일단 뚫릴 놈은(당대의 양산품 정도에 해당할 품질.) 워해머에 부서지고 창이나 스파이크에 찔리거나 칼에 찔리고 베여(물론 베이진 않는다.) 찌그러지거나 도끼에 찍히거나 활이나 석궁에 쏘이는 등 무기 성능 과시용 제물이 된다(…).


6. 단점[편집]


물론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사다 류타가 집필한 "속 중세 유럽의 무술"에서는 판금 갑옷의 단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무게중심이 높아 밸런스가 나쁘기 때문에 쓰러지기 쉽고 메치기 기술에 취약하다.[35] 아무리 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일단 체중량이 20킬로는 올라가니 넘어 졌을 때의 충격량도 더해졌을 거고 몸이 무거워진 만큼 한번 크게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데 더 둔중해진다. 판금갑옷 기사를 상대하는 상대가 대부분 같은 판금기사 아니면 수적 우위에 있는 대형 무기를 소지한 적들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런 큰 빈틈은 아주 치명적이다. 그래서 동서양 공히 갑옷 입을만한 전사계급은 레슬링을 무술의 근본이라며 중시했다. 서양에선 말할 것도 없다.

  • 갑옷의 가장 큰 결점은 내부에 가득 차는 열기와 무게에서 오는 피로다. 인체는 생명활동을 하며 체열을 방출하고, 그 중에서 머리는 방열탑의 역할을 하여 가장 많은 열을 방출시키는데, 판금 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유럽식처럼 머리를 완전히 뒤덮는 타입의 투구를 쓰면 체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여름같이 무더운 기후에서는 외부의 열+빠져나가지 못한 내부의 열로 인해 빠르게 탈진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심지어 1461년의 타우턴 전투에서는 세차게 눈보라가 치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열중증으로 보이는 증상을 일으키고 사망한 기사가 여러 명 나왔다고 한다. 이건 비단 전신을 전부 철판으로 둘둘 만 판금 갑옷 뿐만 아니라 일단 투구라는 것을 쓴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방어구라는 개념의 근본 특성상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장 개인의 방어력보다 공격력에 더 치중한 현대의 군장도 머리 방호를 포기 할 수 는 없어서 방탄헬멧을 쓴다는 걸 생각해보자. 군필자라면 훈련시 이 방탄 헬멧으로 인한 불편성은 수백번도 더 깊게 경험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열피로가 적은 한랭기후라면 유리한가 하면 그것도 아닌게 추운 지역에서의 갑옷 사용은 더운 곳 보다 더 어렵다. 철판이기 때문에 냉기에 상당히 약할 수 밖에 없고 차가워진 금속에 손이 닿으면 달라 붙어버리기 때문에 위험하다. 물론 이미 완전히 입은 상태라면 보온 효과는 확실히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열이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이 문제였으니 안에 내의까지 입는 것 및 차가운 외풍의 대부분을 철판이 막아주는 건 확실하게 체온 유지에 도움은 되었다. 문제는 중세 유럽의 전장에서 이러한 경우가 적었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당연히 서로가 싸우기 쉬운 좋은 날을 고르기 마련이고 무엇보다도 극한지에서는 추위가 갑옷 운용의 최대 걸림돌이 아니라 추운곳에 자연스럽게 쌓이는 이라는 답도 안나오는 것 때문이다.

  • 투구가 시야, 호흡, 청각을 방해한다. 유럽의 투구는 구조와 방호 면에서는 매우 뛰어난 반면, 통기성이 좋지 않고 청각과 시각이 제한된다는 결점이 있다. 드 뷔에이유도 바이저를 내린 상태에서는 쉽게 숨이 찬다고 충고하였다. 시계도 마찬가지다. 좌우의 시계는 의외로 괜찮은 편이지만, 상하의 시계(특히 아래쪽)가 상당히 좁다. 그리고 의외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청각의 저하인데, 최악의 경우 명령이나 신호를 듣지 못하거나 상황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또 투구 탓에 목소리가 작아져서 대화가 곤란해진 다는 결점도 있다. 현대의 방독면을 써본 군필자라면 이걸 쉽게 알 수 있다. 방독면은 귀를 철판으로 가리지는 않지만 방독면에 세트로 붙은 방호천이 귀를 가리는 형태고 방독면을 쓴 탓에 의사 전달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방독면에는 음성배기 진동판이라는 것이 달려 있어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놓은 것이다. 덤으로 당연히 음식물을 섭취하거나 하는 것도 난해하다. 그래서 기사나 퀴레시어 기병대는 생각보다 느린 속도로 진형을 짜서 움직이기도 했고, 한번 시작한 돌격을 물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진형 깨진 상태로 일부만 뛰쳐나갔다가는 각개격파당하기에 선두 정예기사가 먼저 돌입하면 나머지는 그대로 따라갈 수 있게끔 삼각형이나 다이아몬드 진형으로, 가장 느린 말에 맞춰서 돌격해야 했다. 플레이트 아머의 무지막지한 방어력이 없었다면 터무니없이 위험한 전술이었을 것이다.

  •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판금 갑옷의 출현은 근접 공격 무기의 설계 역시 앞당기게 하였다. 이러한 갑주는 베기와 찌르기, 그리고 때리기에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이의 약점 부위는 취약점을 찌르기 위해 설계된 장대도끼(폴엑스), 미늘창, 그리고 끝이 가느다란 장검 등에 의해 공략될 수 있었다. 14세기의 판금 갑옷의 발명은 다양한 장병기(폴암)의 발전 역시 야기했는데, 이 무기들은 강한 충격을 전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힘을 좁은 면적으로 실으므로 판금갑의 안쪽에 어느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철퇴, 워해머, 그리고 망치 머리를 지닌 장대도끼들은 갑옷의 안쪽에 둔상을 일으킬 위력이 있었다.[36] 이런 냉병기들이 발달한 끝에, 아예 낙마시키거나 땅에 메쳐서 무력화시키고 빈틈을 쑤시는 전법, 나아가 냉병기를 넘어선 열병기까지 가세하게 된다. 총알도 화승총 몇 발이나 튕겨내지, 수십 정에서 백 정이 일제사격하는 시기가 되자 판금 갑옷은 흉갑, 투구만 남기고 경량화된다.

  • 굉장히 시끄럽다. 대중매체에서는 중장갑의 기사가 움직일 때 중후한 쇳소리가 나지만 실제 역사적인 두께의 판금 갑옷은 움직일 때마다 빈 음료수 캔을 부딪치는 것 같은 높고 가벼운 소리가 끊임없이 난다. 이전 시대의 사슬 갑옷도 움직일때 사슬이 짤각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사슬은 소리의 주체인 사슬 하나하나는 작아서 그렇게 시끄럽지 않은데 판금은 부품 하나 하나의 면적이 넓으므로 개별 음량이 매우 크다. 따라서 야습 등 은밀한 행동을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절대 착용할 수 없다. 물론 이것 또한 실질적인 판금 갑옷의 운용법과는 아주 달라서 큰 지장은 없다. 애초에 판금갑옷을 입는다는 행위 자체가 공격에 전면적으로 노출 될 것을 상정한 것이다. 은밀 암습 기동 등은 전면전을 상정한 전투원인 기사에게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넌센스고 이런 기사들이 비록 온갖 무술을 평생 익혀온 무술가이나 가장 큰 이점은 판금 갑옷을 입는, 즉 중갑병으로 기동할 수 있는 운용 전력이라는 점이 가장 크다. 현대전으로 다시 예를 들어보자. 누가 야간 기습을 하는데 주력 전차를 끌고 가겠는가? 기사는 기사로써의 전력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야습 암습의 경우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이 경우 경무장해 야습과 암습에 유리한 전사를 따로 선발하는 것이 당연히 이치에 맞으며 이게 갑옷의 단점이 된다고 보기엔 상당히 어렵다. 즉 애초에 개발 목적과 용도가 아예 다르다. 그런데 이걸 단점으로 꼽는건 보병과 현대전의 전차를 같은 의미로 보고 운용한다는 이야기랑 같은 이야기다.

7. 쇠퇴[편집]


냉병기를 상대로 가공할만한 방어력을 보여준 판금 갑옷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냉병기의 종말을 앞당기고 화기의 시대가 오는 단초를 제공했다. 갑옷의 방호력이 극에 달한 르네상스 시대는 온갖 백병전 무기가 난립하는 백병전의 황금기라고 불리지만 현실은 표현처럼 로맨틱하지 않아서 견고한 갑주가 치명상을 막아주는 탓에 백병전은 체력과 정신력 승부로 번지기 일수였다. 그래서 유럽은 14세기경에나 화약이 보급됐음에도 불구하고 화기 도입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핸드 캐논과 같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조악한 화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탄을 고려하지 않은 판금 갑옷도 핸드 캐논을 막을 수 있었고 화기를 이용한 전술도 미흡해서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유럽 전장에 화기가 중심으로 떠오르는 것은 1525년 파비아 전투 이후로 스페인 아르퀘버시어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완패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파이크와 총을 조합한 테르시오 방진은 중세식 기병 전술의 완벽한 카운터였고 스페인에서 개발된 최초의 총인 아퀘부스(arquebus)는 핸드 캐논과 달리 판금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비아 전투는 중세식 풀 슈트(full suit)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지 갑옷 자체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는 아니었기 때문에 범위를 줄이고 두께를 늘린 방탄 갑옷이 개발되면서 갑옷 수요는 여전했으며 16세기에는 총병보다 창병의 비중이 높고 기병 또한 권총과 같이 랜스를 여전히 사용했기 때문에 냉병기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라도 갑옷은 필요했다. 방탄 갑옷에 대응하여 아퀘부스보다 두 배 강력한 머스킷(musket)도 개발되었다곤 하지만 비싼 가격과 7kg을 넘는 무거운 무게 때문에 16세기에는 전체 화기의 1/10 가량만을 차지했고 화승총은 번거로운 화승 관리 때문에 분당 1발 사격이 고작이었으므로 갑옷은 충분히 제몫을 했다.

그래봤자 화승총, 머스킷을 위시한 화기가 더 나아지고, 더 일반적인 보급이 이루어짐에 따라, 전신갑주의 유용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고, 완전한 한벌의 갑옷은 마상창시합을 용도로 한정 생산되었다. 이쪽 방면에서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훌륭한 갑옷의 장식은 이 시기에 굉장히 증가하는 추세였다. 당시의 모든 기술을 동원하였고, 그리고 비용을 더 늘리게 되었다. 정교하게 장식이 된 판금 갑옷은 왕족과 부자들을 위한 것으로 생산되었다. 고도로 장식이 된 갑옷은 간혹 가두 행진을 위한 갑옷으로 불린다. 이런 갑옷은 종종 군사 활동에서 사용되었다고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37]

17세기에 들어서면 위그노 전쟁에서 창기병이 권총기병에게 완패당한 여파로 기병은 더이상 랜스를 사용하지 않았고 보병끼리도 파이크 밀치기(push of pike)로 체력을 낭비하기보다는 사격으로 끝장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창병은 줄어들고 총병의 비율이 계속 올라서 파비아 전투 당시 20%에 불과했던 것이 17세기초 50%를 넘어간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선형진도 선보였지만 네덜란드의 역량 부족과 미성숙한 전술인 탓에 테르시오에게 오히려 밀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형진이 테르시오 방진을 마침내 꺾은 로크루아 전투(1643년)에도 수석식총의 보급은 미진했고 머스킷 비율도 1/3가량이었으므로 갑옷은 여전히 유효했다[38].

그러나 선형진이 대세가 되면서 유럽의 전장은 더더욱 화력전으로 치닫고 17세기 후반 총병의 비율은 80%에 육박하게 된다. 여기에 박차를 가하듯이 수석식총과 17세기 중반 시험적으로 채용한 경량 머스킷도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아퀘부스를 도태시키고 발사속도 또한 기존 화승총 대비 2배 이상 향상된다. 갑옷도 꾸준히 두께를 늘리며 대응했지만 더 이상 화력 증가에 따라갈 수 없게 되자[39] 17세기 후반 갑옷은 공성전에 참호 파는 병사나 기병이 종종 입는 경우에 그친다.

18세기 마침내 창병마저 완전히 폐지되어 선형진이 완성되면서 갑옷은 주력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강력한 화기의 발달은 질 좋은 갑옷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갑옷을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장비로 만들었다. 증가한 화력과 그리고 화기의 유용성, 그리고 국가단위로 지원을 받는 보병들의 경우, 비용의 절감과 기동성의 향상을 위해 방어구 비착용을 선호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다리 방어구가 가죽장화로 대체되었다. 18세기의 초에는 오직 육군 원수와 지휘관들, 그리고 왕족만이 실용성보다는 계급의 상징으로 전쟁터에서 완전한 한벌의 판금 갑옷을 갖추었다. 이런 것은 18세기의 중반인 늦은 바로크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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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 판금 갑옷을 착용한 왕세자 시절 프리드리히 대왕

하지만, 이러한 전통역시 점차 사라져가게 된다. 이와 같이, 1739년의 '위대한 프레드릭'의 그림에서는 여전히 그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후기의 그림에서 그가 7년 전쟁(1760년)에서의 지휘관으로 있을 시기엔 갑옷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퀴레시어에게는 18세기 이후로도 흉갑이 지급되었으나 총탄보다는 냉병기를 방어[40]하는 것이 주목적이라 도로 두께가 얇아져서 방탄은 기껏해야 권총 정도가 한계였다. 게다가 몸통을 가려도 혈류량이 엄청나게 많아 치명적인 대퇴동맥이 지나가는 허벅지[41][42]는 무방비라서 관리하기만 귀찮은 흉갑을 챙기는 경우는 드물어서 명목상 지급에 불과했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갑옷이 주는 몇몇 이점들을[43] 바탕으로 프랑스의 흉갑기병들이 나폴레옹 전쟁동안 전과를 올리자[44] 타국에서도 명목상 지급인 흉갑을 실제로 지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다양한 국가에서 크고 작은 규모로 흉갑기병대를 창설하여 운용했다. 그러나 갑옷이란 그 자체 제작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지만 관리하는데도 많은 돈이 필요했고 점점 발달 되어가는 화기들 앞에서 많은 나라들이 갑옷의 가성비에 의문을 제시하기 시작했다.[45] 그럼에도 여전히 기병들이 활약할 여지가 있었던 제1차 세계 대전 초까지 프랑스와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은 흉갑기병을 전선에 투입했었다. 비단 기병대뿐 아니라 양차 대전에 참전한 보병이나 항공기 승무원 중 일부도 방탄 효과를 위해 퀴라스와 같은 흉갑에서 발전시킨 철제 방탄복을 입었으므로, 초기 방탄복의 역사는 판금 갑옷과 함께 하는 셈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합성섬유제 방탄복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금속판으로 만든 갑옷의 역사는 끝이 나지만, 소총탄 방호를 위해 넣는 방탄판 등 '단단한 판' 형태의 실전용 보호복은 아직까지도 최상급의 방호력을 제공하는 보호구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8. 대중 매체[편집]


  • 대부분의 서양 중세 풍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단골로 등장한다. 방어력은 가장 좋지만 피로도나 무게, 착용 제한 등이 심한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판금 갑옷이 아직 개발되기 전인 시기에도 판금 갑옷을 착용한 캐릭터를 내보내는 고증 오류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사실 이런 고증 오류는 엄청나게 유서가 깊다. 일례로 아서 왕 전설은 그 시대적 배경이 고대 시대에도 불구하고,[46] 중세 시대 전설로 착각당하는 바람에[47] 등장인물들이 판금 갑옷을 입고 나오는 창작물이 태반이다. 서양 기사 계열 인물은 시대 안 가리고 전부 판금 갑옷으로 통일하는 경향도 있다.[48]

  • RPG 게임에서는 보통 도적, 로그, 암살자 직군은 못 입게 설정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판금 갑옷은 움직일 때 마다 깡통소리가 나서 기도비닉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여담으로 이러한 판금 갑옷 속성의 캐릭터에게 페티시가 있는 사람도 있다. 광택이 나는 몸매에 강인한 이미지에 반해 생긴 현상이다. 이러한 페티시를 느끼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가지 있으며, 남성 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서 이 페티시가 더 진화할 경우 단순히 판금 갑옷 자체에 페티시가 생겨 그 비싼 판금 갑옷을 수집하기도 한다. 비싼 물건인지라 대중매체에서는 갑부의 상징으로 자주 나오며, 부유층의 대저택 등지에 갑옷 레플리카가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작품에서 종종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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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캐릭터들이 판금 갑옷을 입고 마상 주스팅을 하는 게임 왈큐레 로만체 -소녀기사 이야기-. 모에 계열 작품이다보니 갑옷의 디자인 등 그렇게 현실성을 추구한 건 아니지만 판금 갑옷이 모에 계열 작품의 요소 중 하나로 들어간 예시로서는 흔하지 않아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엑스칼리버는 (고증과 별개로) 판금 갑옷의 향연이자 로망을 그대로 보여 준다. 둔기로 갑옷을 몇 번이나 내리쳐야 우그러뜨리고, 몸싸움이 섞인 검술을 펼치며 주요 방어 부위에 베기를 하면 갑옷이 찌그러질 뿐 잘 박히지 않고 그래서 면갑 틈이나 관절에 날을 찔러 넣는가 하면, 배우들은 의도된 '육중한 몸짓'으로 갑옷의 무게감을 전달한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상상하는 판금 갑옷 전투의 모든 요소를 다 갖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중세 RPG 게임 마운트 앤 블레이드에서도 등장한다. 이 게임은 중세 기사의 삶을 체험하는 컨셉이라서 말과 갑옷이 아주 중요하다. 판금 갑옷은 무거워서 불편도 수치가 올라가 좀 느려진다는 것과 무지막지하게 비싸다는 단점이 있긴하나, 중세 고증에 맞춰서 방어력의 효용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갑옷을 제대로 안 입은 징집병들과 싸우면 200대 1로 싸워도 이길 수 있다. 다만 아직 사슬 갑옷이 주력으로 쓰이던 13세기가 배경이다 보니 말이 판금이지 그냥 초기 트랜지셔널 아머에 가까운 물건이다.
  • 게임 겟앰프드에선 방어력 14에 원거리 공격을 무시하는 그야말로 최강 방어 액세서리다. 하지만 느려지는 게 단점.
  • 바이오하자드 4에서는 애슐리 그레이엄의 특전 의상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각종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고 일반 의상이었다면 항상 들쳐메고 문까지 끌고 가는 적들도 도리어 들지 못할 만큼 무겁다는 성능이 있다.
  • 중세고증에 미쳐서 날뛰는 게임인 킹덤컴 딜리버런스에도 지극히 당연하다시피 등장한다. 그리고 진짜 정말로 날붙이 약간 든 인간이 전신을 금속으로 둘둘 말고 있는 판금 전사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뼈져리게 느낄 수 있다. 초반이라 유저가 장비가 모자를 때 오픈 월드이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적 중무장 NPC들은 그야말로 악마의 괴물 그 자체로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어떻게 플레이를 하건 컨트롤을 하건 이기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 압도적인 강력함은 물론 내가 입었을 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에 장비가 좋아져서 방어구를 제대로 맞추면 아무것도 입지 않고 면갑인 강배송 따위를 대충 입은 야적 따위는 집단으로 덤벼서 다굴을 놓아도 가소로운 것을 느낄 수 있다.
  • 소울 시리즈는 디렉터인 미야자키의 취향에 따라 실제 양식을 멋지게 어레인지한 갑옷들이 많이 나온다. 디렉터가 다른 2편은 다른 시리즈에 비해 좀 더 판타지풍의 화려한 디자인이나 노출도가 많은 편이지만, 데몬즈 소울과 다크 소울 1, 3편은 좀 더 갑옷다운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1, 2편은 강인도라는 수치가 있어서[49], 갑옷의 튼튼함에 비례해 준 슈퍼아머 상태로 맞싸움 칼질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방패와 함께하면 툭하면 죽는 게임에서 생존율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다. 성능뿐만 아니라 룩 상으로도 아스토라 상급 기사같은 녀석의 갑옷 룩[50]도 고풍스럽고 멋지다. 몹을 잡으나 pvp를 하나 너도나도 갑옷 입고 구르고 튕겨내고 막고 찌르고 하는 게 일상인 게임이라서, 서양식 판금 갑옷 입고 데굴데굴 구르는 게 소울 시리즈를 상징하는 밈이 되어버렸다. 당장 위에 링크된 유튜브 영상들을 봐도, 소울 시리즈를 언급하는 댓글이 꼭 달린다.
  •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는 곤도르 수비병들의 제식 복장처럼 등장한다. 다만 왜 입은 건지 모를 만큼 쉽게 쓰러질 정도라 영화상에서 체감되는 방어력은 꽝이다. 무딘 글레이브로 배를 툭 맞고 쓰러지는 건 예사고 심지어는 오크의 조잡한 단궁에 흉갑이 뚫려 쓰러진다.[51] 피터 잭슨이 전체적으로 곤도르를 심하게 까내린 편인데 이런 연출도 그 중 하나다. 오히려 거적때기 걸치고 농기구 대충 들고 나온 호수마을 노약자들이 판금 갑옷 입은 곤도르 병사들보다 훨씬 잘 싸운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도 중세 판타지인만큼 당연히 나오는데 부유한 웨스터랜드리치 지방은 일반 병사들까지 판금 갑옷과 트랜지셔널 아머로 무장시킨다. 그리고 익사를 비교적 덜 두려워하는 강철 군도에서는[52] 해전에서도 판금 갑옷을 입고 다녀 선상 전투에서 타 군대를 압도할 수 있다고 한다.

  • 더 위쳐 시리즈의 게임에 나타난 군사들의 갑주는 닐프가드 제국과 북부의 왕국들 모두 대체로 판금 갑옷이 주력이다. 다만 풀 플레이트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장교나 상급 병종들이 입고 하급 병사들은 강베송(Gambeson) 위에 약간의 파츠들만 두르는 정도이다.

  • 만화, 드라마, 영화, 게임에서는 판금 갑옷의 두께가 1cm에서 심하면 10cm 이상으로 나오고 갑옷 전체 크기도 착용자보다 서너 배 크게 나오는데 대중매체의 과장이다. 이러면 정말로 혼자 못 입고 넘어지면 끝이다. 실존한 판금 갑옷 두께는 대략 2mm~7mm 사이다. 그 이상은 착용자의 움직임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피로를 쉽게 유발시키기에 착용자가 빨리 지치도록 만든다.

  • 판금 갑옷류는 그 모습 자체가 다른 갑옷들 보다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라 예부터 갑옷의 마스코트로 대중의 인식에 박힌 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한 갈래인 서브컬처에서도 주로 나오는 게 당연하다. 판타지 갑옷을 디자인할 때 작은 사슬들이 잘게 이어진 패턴뿐인 사슬갑옷은 다양한 디자인의 갑주를 창작할 때 제약이 있는 데다 멋 자체가 별로라서 인기가 적은 반면에 판금 갑옷은 다양한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다 보니 여러 가지 멋스러운 갑주가 나오기도 쉬워 디자인을 도안할 때 그 바탕으로 애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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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그림처럼 가슴을 도드라지게 해서 컵이 달린 갑옷들은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 흉갑이나 로리카 무스쿨라타의 여성형인 셈인데, 실용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53] 그래도 엄연히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갑옷인 만큼 상대적으로 들어간 부분에 둔기를 제외한 냉병기에 타격을 맞아도 쉽게 찌그러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상식적인 묘사를 중요시하는 팬들에게는 이렇게 갑옷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갑옷은 환영받지 못한다. 좀 멀쩡해 보이는 갑옷을 입히더라도 가슴과 허리 등 인체의 몸매를 강조하는 디자인을 갖추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게 흉갑에 유방 모양대로 둥근 것 두 짝이 붙는 디자인을 들 수 있다.

다만 갑옷은 고대나 중세나 외형적인 면, 멋도 중요하게 여겨졌으므로 창작물에서처럼 남자 전사만큼 강한 여자 전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계라면 그러한 디자인이 나왔을 가능성, 즉 개연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그리스-로마 시절의 갑옷은 방어 효과엔 하등 쓸모없는 상체의 복근이나 유두를 상세히 묘사한 것도 있었기 때문. 물론 실제 역사에서 여전사들이 있던 건 매우 특수한 경우였기에, 여성의 신체적 특징이 반영된 갑옷 디자인이 문화로 정착된 예는 없었다. 그래도 현실에서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위에서 말했던 고간에 성기형태의 돌출물을 세운 코드피스의 사례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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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사 같은 인물들의 판금 갑옷은 전신이 포함되지 않고 착용자의 일부 부위는 방어구가 생략된 걸 넘어 맨살까지 드러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상반신은 일반적인 풀 플레이트 아머[54]에 하반신은 다리쪽 방어구인 퀴스·폴린·그리브·사바톤으로 구성된 사이하이 부츠를 신고 그 사이인 고간 부분은 현대의 여성 팬티에 가까운 판금팬티만을 착용한다. 즉 바지나 방어구없이 둔부음부만 가리는 모양샌데 판타지 방어구중 노출 지향을 극으로 삼은 비키니 아머의 하의를 풀 플레이트 아머에 도입한 디자인이다. 신발에 해당하는 사바톤도 뒷굽이 높은 하이힐인 경우가 있다.

사실 전투에 나가면서 허벅지를 노출한 사례는 실제로도 있는데 근세 란츠크네히트 용병들이 종종 그랬다. 상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구에 란츠크네히트 특유의 화려한 복장을 입으면 굉장히 더웠기 때문에 공격을 잘 받지 않는 허벅지를 노출해서 더위를 식혔다.[55] 위의 하반신을 절반 노출한 디자인도 굳이 실용성을 찾으면 전신을 헐벗은 비키니 아머와 달리 상반신은 제대로 옷과 방어구를 갖춰 보호하면서도 잘 노리지 않는 하체 부위(일반적인 창검 대결에서는 상대의 하체를 노리면 무기를 든 상체에 역습당하기 쉽기 때문에 하체는 잘 노리지 않는다.)는 사타구니와 엉덩이처럼 정말 노출하기 곤란한 부위만 가리는 최소한의 선에서 방호를 포기하고 중량을 경량화해 체력 부담을 줄이고 체열 발산을 용이하게 한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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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캐가 입고 나오면 노출이 없는 평범한 형태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성평등정치적 올바름이 이슈가 되는 나라나 커뮤니티 등에서는 차별적인 성적 대상화를 문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여캐가 입고 나와도 노출이나 여체를 본딴 가슴 형태와 곡선형이 많이 들어간 갑옷이 아닌 남성 캐릭터와 동일한 형태의 갑주를 입고 나오는 걸 나름의 매력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또한 얼굴을 가리고 나서 남성적인 갑옷을 하고 있다가 여자임이 밝혀지는 반전을 노리는 경우도 있다.[56]

[1] 현대인이나 당시 사람들이나 전신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보고 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보다 압도적인 멋을 느꼈다.[2] 이 정도 두께면 현대 권총탄도 막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일부에 지급된 SN-42 방탄복의 두께가 2mm으로, MP40에서 발사된 9×19mm 파라벨럼을 약 100m에서 막는다. (단, 이러한 방탄복은 원래부터 파편과 권총탄을 막도록 고안하고 만들어진 물건이며, 경도와 소재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3] 총기가 보편화돼서 일반병들이 방탄 흉갑 정도만 쓸 때도 지휘관들은 약간이나마 호신 효과를 내고 또한 지휘관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섬세한 장식을 가한 풀 하네스를 입는 일이 많았다.[4] 독일지역(당시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의 상업도시들은 밀라노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상업도시들과 더불어 판금 갑옷의 전성시대에 유럽 전 지역에 갑옷을 수출하던 대표적인 갑옷 생산지였다. 나아가 '알메인 리벳' 양식의 갑옷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16세기 동안에는 아예 '리벳(rivet)'이라는 단어가 갑옷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기도 했다.[5] 일례로 오늘날 전해오는 16세기 이후의 갑옷들 중에는 한 구석에 총알에 맞아 움푹 패인 자국이 남은 경우가 꽤 많은데 그 대부분은 전투에서 생긴 탄흔보다는 갑옷 제작업자가 납품할 때 방탄력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사격을 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의 'Bullet Proof'인 것. 그런데 그렇게 '머스킷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하던 갑옷의 샘플을 현대에 검사해보니 사용된 재질이나 두께로는 머스킷은커녕 피스톨도 막아낼까 싶은 샘플이 종종 있었다는 것. 때문에 납품업자가 시험사격에 말도 안 되게 적은 양의 화약을 사용해 엉터리 시험을 한 '방산비리의 증거'가 아닐까 추론한다고. 때문인지 17세기의 기록 중에는 오스만과의 전투 중에 오스만군의 화살에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투구가 뚫어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6] 물론 '관통자'의 재질과 형상은 관통력에 적잖은 차이를 만들기 때문에, 같은 재질과 두께의 갑주라면 둥근 납탄보다는 철로 만든 날카로운 화살촉 쪽이 관통에 훨씬 적은 운동에너지를 필요로 하기는 한다. 그리고 연철 등 무른 재질은 그 면에 좀 더 취약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탄환의 운동 에너지량으로는 현대의 소총과 별 다를바 없는) '머스킷탄 방탄 보증'이라며 판매한 갑옷이 합성궁 화살 정도에 뚫어진다면 그건 방산비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7] 옛 영어로 'cod'가 문자 그대로 음낭을 뜻한다. 이 명칭도 직역하면 불알 가리개다.[8] 오늘날처럼 도장을 차려놓고 수련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당시 기사, 보병 등의 전사들은 관절기나 그래플링도 중요하게 여겼다.[9] 지휘관급 기사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역사)항목 참조.[10] 철사 몇 개만 주조한 뒤 막대기에 감고 일정 간격으로 자르면 금방 고리들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다. 문제는 이 고리들을 일일이 꿰는 것.[11] 단조할 때 흔히 생각하는 망치질부터가 아무렇게나 두들기는 게 아니다. 왜냐면 내부에 응력이 한곳에 집중되는 것을 막고 완성시에 크랙을 유발하는 공기가 남아있지 않고 잘 빠져나가도록 해서 결함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일정한 힘과 속도로 골고루 알맞게 두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직접 쇠를 두드려 만든다고 광고하는 대장간에서 조차 기계를 사용해 두드릴 정도.[12] '투구(Helm) 대장장이(Schmidt)'이라는 뜻. 직업을 성씨로 삼는 독일 평민들의 성명법에 충실하였다.[13] 이 두 가문의 갑옷이 어쌔신 크리드 2의 장비 아이템으로 등장하였다.[14] 볼록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중간중간 좀 더 두꺼운 철판을 덧대거나, 충격을 흡수해야 하는 부분은 특별히 2mm 이상의 철판으로 만들긴 하지만, 평균적인 두께는 0.7~1.2mm 정도에 불과하다. 결국 문제는 전체적인 구조 설계나 철강의 질이지, 견고하게 만드려고 무조건 철판을 두껍게 만드는 게 아니다.[15] 판금 갑옷의 하부 개념으로 기병용 갑옷은 필드 아머(field armour)와 보병용 갑옷은 풋 컴뱃 아머(foot combat armour)다. 이 두 가지 분류는 그저 사타구니 부분의 갑옷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로 기병용인 필드 아머는 안장에 걸리지 않도록 없거나 사슬로 덮고 보병용인 풋 컴뱃 아머는 있다.[16] 전신을 같은 두께로 제작하기 보다는 투구와 흉갑이 1.2~2.0 mm 가량으로 가장 두껍고, 팔과 다리를 보호하는 부품을 0.8~1.2 mm 정도로 비교적으로 얇게 제작하는 식으로 무게를 조절했다. 정면이냐 후면이냐에 따라서도 두께를 다르게 했고, 주로 정면이 두꺼운 편이었다. 그러니 1.5 mm의 두께로 제작해도 30 kg이 넘는다는 것은 이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실전용 갑주보다 더 두꺼운 마상창 시합용 갑주도 30 kg 미만이다. 14세기 말~15세기 초의 것을 기준으로 투구는 4 kg, 흉갑은 골반의 일부를 포함해 정면을 보호하는 것이 2.54 kg, 팔은 각각 1.7 kg, 손은 각각 0.68 kg, 다리는 대퇴부와 정강이 부분을 포함해서 한짝에 5.56 kg, 발이 각각 0.397 kg 가량이다. 같은 시기에서도 무게는 제각기마다 다양하다.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양식은 어깨에 증가장갑판을 장착하여 두께가 더 두껍기도 한데, 이를 모두 포함해도 23 kg의 중량을 지니는 것도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Knyght Errant 의 영상을 참조.[17] KBS 사극 정도전 촬영시 사용한 ABS 플라스틱제 경번갑도 10 kg이나 나갔으며, 과거 사극 용의 눈물 촬영당시 만든 경번갑무려 80 kg이나 나갔다. 당시 이성계 역을 맡은 김무생 선생은 노인네 죽일 일 있냐고 화를 냈다는 후문이 있다.[18] 일본 갑옷인 마루도요로이(丸胴鎧)도 완전히 착용하면 무게가 거의 30kg에 달할 만큼 무겁다. 그래서 14세기 고려를 침입한 왜구 대장인 패가대만호(覇家臺萬戶)가 큰 쇠투구를 쓰고 손발까지 모두 갑옷으로 덮을 만큼 중무장을 한 채로 말을 타고 달리다가 진흙탕에 말이 들어가자 갑옷의 무게 때문에 말이 허우적거리다가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죽은 일이 있었다.#[19] 사슬갑옷 위에 벨트를 착용하는 것은 무기를 패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어깨에 몰리는 하중의 일부를 복부에 덜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20]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9.75kg 나간다.#[21]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투구를 제외한 무게 20.53kg에 거셋 3.629kg이다.#[22] 기병이 랜스를 들고 돌격하는 대회. 모의전투이자 유희였다.[23] 게다가 헨리 8세는 고기 같은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을 마구 먹는 폭식을 즐겼기 때문에 말년에는 체중이 무려 100kg을 넘을 만큼 비만해졌다. 또한 다리에 종양까지 나서 혼자서 걸어다니기도 힘들었고, 그래서 시종들은 헨리 8세를 기중기에 실어서 옮겨야 했다.[24] 엄밀히 말하면 기사들의 전술 쪽이 원조다.[25] 비슷하게 완전무장한 상태로, 스키타는 영상도 있다.[26] 물론 전투 중에는 진짜로 입은 채로 볼일 본 후 나중에 처리한다. 전투 중에 엉덩이 까고 앉아있을 수는 없으니까.[27] 요때까지만 해도 주력은 체인메일이었다.[28] 물론 비싼 단가 때문에 대부분의 병력이 투구와 흉갑 정도만 방어구를 둘러야 했다. 결국 하반신이 무방비인 것을 간파한 아즈텍군이 다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해 다수의 스페인 병력이 전사하는 피해를 겪기도 하였다. 또 더위 문제는 끝내 해결하지 못해 후반에는 원주민들의 면 갑옷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29] 쉽게 말해서 방상내피와 비슷한 물건.[30] 대한민국 국궁이 70~90파운드 가량[31] 현대 방탄복의 주류가 방탄 플레이트임을 생각하면 재질만 철에서 세라믹으로 바뀌었을 뿐 흉갑의 개념은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살아있는 셈이다.[32]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두정갑과 같이 조끼에 리벳으로 여러장의 큼직한 철판을 고정해서 만든 갑옷으로 14세기에 가장 보편적인 흉갑이었다.[33] 갑옷이 둔기를 막아내더라도 충격까지 완전히 막지는 못하기 때문이다.[34] 괜히 롱소드로 판금 갑옷 상대할 때 칼날 잡고 손잡이로 후드려 패는 게 아니다.[35] 실제로 용병 대장이었던 피에트로 몬테는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상태에선 싸우는 도중 뒷걸음치는 것을 지양해야한다고 기술하기도 했다.[36] 물론 전술했다시피 이런 무기들로도 판금 갑옷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37] 뭐 그래도 완전히 실전용 갑주론 쇠퇴했다고 보기도 뭐한 게 야전용 갑옷(Field Armour)역시 이러한, 혹은 이에 준하는 장식이 있던 것으로 보아,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것들이라고 반드시 가두 행진이나 마상창시합만을 위한 갑옷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프랑스의 앙리 2세를 위한 1555년의 강철 판금 갑옷은 그을림(Blueing), 은도금(Silvering), 금도금(Gilding) 등으로 세심하게 장식된 것이었다.[38] 17세기 독일의 중장기병이 입었던 갑옷. 기사가 탄 말도 마갑을 입었고, 다만 16세기에 보이던 말을 완전히 뒤덮은 마갑보다는 대폭 경량화된 차림이다.#[39] 머스킷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선형진의 총알세례에는 버틸 수가 없었다.[40] 권총 짤짤이로는 선형진에 상대가 안되기 때문에 18세기의 기병은 냉병기를 이용한 기동전으로 교리가 바뀌었고, 이런 환경에는 조금만 흔들려도 빗나가는 총이 무용지물이라 방탄은 별로 필요 없었다.[41] 창작물에서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니 치명상이 아니라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 굵은 동맥이 손상되면 대량 출혈이 발생하며, 응급처치조차 쉽지 않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에서도 이 동맥이 끊어진 병사를 살리기 위해 골반까지 말려올라간 혈관을 끄집어내고 난리를 쳤지만 결국 출혈 과다로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오발 사고로 대퇴부에 총상을 입은 환자가 과다출혈로 응급처치 중에 죽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42] 다만 창작물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소드 아트 온라인 얼터너티브: 건 게일 온라인에서는 주인공인 코히루이마키 카렌이 작은 체구를 이용해 대퇴동맥을 나이프로 노리는 무빙을 보이고, 작중 게임 GGO에서도 대퇴부 공격이 치명상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천원돌파 그렌라간카미나는 밑에서 올라오는 공격에 대퇴부를 공격 당해 그렌의 콕핏 안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한다.[43] 흔히 나폴레옹 시대에 흉갑이 지급된 이유가 단순히 심리적인 목적이라고만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날붙이 끼리의 싸움인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흉갑이 의미있는 방호력을 보장했고 머스켓이나 포병의 캐니스터탄 역시 근거리 직사가 아닌 일정 사거리 밖에서 날아오는 것들은 흉갑이 충분히 방호력을 제공하였다. 만약 흉갑이 아무런 방호에 도움이 안되고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짝이라면 러시아 침공 이후 패퇴하던 프랑스군이 유기한 흉갑을 러시아가 주워다가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44] 프랑스의 경우 흉갑기병대를 대기병 요격용으로 쏠쏠히 써먹었다. 또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자주 출격했는데 상대 전열에 돌격하는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병이 출격하면 상대 보병들은 사각 방진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선형진에 비해 화력이 약해져서 보병끼리의 전투에 곤란을 겪게된다.[45] 사실 이 시기 쯤 되면 경기병 중기병의 구분도 희미해져서 기병 자체가 사실상 용기병으로 일원화된다.[46] 정확히는 고대와 중세의 중간 지점, 5세기 로만 브리튼 이후 시대다.[47] 사실 본격적으로 이 전설이 유행한 게 중세 시대인 이유가 크다. 이 때문에 중세 시대의 예술품에서 판금 갑옷을 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48] 그 일례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에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랜슬롯이 나오는데, 입고 있는 갑옷이 실제 나온 갑옷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영락없는 중세 후기의 판금 갑옷이다.[49] 3편에도 없는 건 아닌데 공격 동작 중 일정구간에만 적용된다.[50] 풀 플레이트는 아니고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의 트랜지셔널 아머의 양식과 동유럽, 러시아 양식의 경번갑 스타일이 퓨전된 트랜지셔널 아머라고 볼 수 있다. 풀 플레이트도 템을 잘 찾으면 나오는 편.[51] 100 파운드가 넘어가는 잉글랜드 롱보우에 송곳촉 화살을 걸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쏴도 판금 흉갑을 못 뚫는 게 현실이다.[52] 얘들은 물에 빠져 죽으면 자신들이 믿는 익사한 신의 곁으로 간다고 믿는다. 익사를 명예로운 죽음으로 여길 정도.[53] 판금 갑옷이 발달한 중세 시대 판금 갑옷은 그냥 철판만 입고 끝나는 게 아니라, 가죽과 사슬갑옷 등 몇 겹을 추가로 입는다. 당연히 몇 겹의 방어용 옷을 껴입는 만큼 몸의 굴곡이 절대로 저렇게 나올 수가 없으니 저런 몸에 착 달라붙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미 철기시대 전에 이미 도태되었다. 물론 코드피스처럼 장식용으로 가슴을 도드라지게 하는 형상 자체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저렇게 바디슈트마냥 착 달라붙는 형상이 현실적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54] 보통 흉갑 아래에 달리는 폴드나 태싯은 생략, 간략화되는 경우가 많다. 흉갑도 현실보단 살짝 짧아 배꼽티처럼 배꼽이 살짝 노출되며 대부분 상술한 가슴컵이 묘사된 디자인이다.[55] 파일:9032.jpg[56] 절묘하게도 현대 군사에서도 이와 대응하는 연출을 노릴 수 있는 복장이 있는데, 바로 폭발물 처리반에서 사용하는 전신 방탄복인 'EOD 슈트'이다. 이쪽은 폭발물을 다루고자 부득이하게 노출되어야만 하는 손가락을 제외하면 말그대로 온몸을 꽁꽁 싸매는 구조인데다 특유의 방호력를 위해 조직이 두툼한 탓에 겉보기에는 착용자의 성별을 알아보기가 힘들며, 게다가 폭발물 처리반 소속 여군은 현실에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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