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린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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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조선에선?
4. 사용 방식
5. 현황



1. 개요[편집]


[1]
Flintlock. 수발식(燧發式), 수석식(燧石式)이라고도 하며, 이 방식을 사용한 총기를 수발총(燧發銃), 수석총(燧石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火打ちからくり[2], ゲベール銃[3]라고 불렀다.

2. 상세[편집]


전장식 화기인 머스킷에 사용된 작동 메커니즘. 플린트(Flint)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흔히 대체역사 소설 등을 보면 수석식 소총 등으로 묘사되면서 비오는 날에도 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플린트락은 화승만 사용하지 않을 뿐 화약 접시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우천시에 사격이 불가능하다.[4] 애초에 부싯돌 자체도 현대에 쓰이는 파이어스틸이 아닌 이상 물에 젖으면 불꽃이 나오지 않는다. 우천시에도 사격이 가능해진 것은 퍼커션 캡(뇌관)의 등장 이후였으며, 그나마도 장전시 장약이 젖는 문제 때문에 우천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금속 탄피가 등장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매치락에서 플린트락으로 발전은 물보다는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싯돌의 마찰을 통해 점화약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방식이며 장치의 기본 개념 자체는 16세기 말엽에 발명되었다.[5] 그러나 부싯돌과 강력한 스프링이 사용된 탓에 가격과 생산에 한계가 있어 점진적으로 보급되었고 매치락휠락을 완전히 대체한 것은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이르러서이다.[6]

파일:external/www.sailorinsaddle.com/display_1135_AMERICAN_FLINTLOCK_TRADE_PISTOL_BY_KETLAND_CA_1780-1800_634158259541748750.jpg
파일:external/media-1.web.britannica.com/143929-004-73BB22EE.jpg

두 사진 중 왼쪽(모바일은 위쪽) 사진은 장전되지 않은 상태로, 해머에 부싯돌을 물려놓지 않았고 화약접시도 열려있다. 부싯돌을 물려 놓아야 화약에 불씨를 일으킬 수 있다. 보통 부싯돌만 끼우면 제대로 고정되지 않고 비뚤어지거나 이리저리 움직였으므로, 돌에 가죽이나 납을 감싸서 물려두었다. 또한 발사하기 위해서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화약접시를 닫아야 한다. 격발시 뚜껑의 면(frizzen) 때려 여는 동시에 불똥을 일으켜 점화한다.

특성상 화승이 필요 없으며 격발시 화약의 반응속도가 다소 향상되었다. 하지만 매치락보다는 낫다고 해도 플린트락 역시 우천시나 습기가 있는 환경에서는 불발탄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먼지가 많거나 습기찬 환경을 가진 조선, 청나라, 일본, 인도 등의 나라에서는 유럽으로부터 플린트락이 전래된 후에도 신뢰성 문제 때문에 매치락을 고집했던 사례가 있었을 정도. 이 문제는 퍼커션 캡의 등장 이후에나 해결된다.

그러나 서구 제국들은 습기로썬 최악의 환경인 정글과 해상에서도 무리없이 플린트락을 운용했으며, 해상전함들에 실린 화포들의 격발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7][8] 마찬가지로 동남아 국가들 또한 플린트락을 서구의 상관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입했고, 비록 실패했지만[9] 복제 및 자체 생산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 제국들도 열대습윤기후가 아닌 온난 습윤 기후에서는 뇌홍이 발명되기 전까진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제사례로 제1차 아편전쟁때 삼원리 사건에서 영국군이 플린트락을 들고 갔다가 하필 비가 오는 바람에 냉병기를 든 농민들한테 박살날 뻔했고, 뇌홍[10]이 도입되면서 동아시아권의 개인화기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

서구에서 건 플린트로 주로 사용하던 부싯돌은 석영이 풍부한 규질암 계열의 암석으로, 여러 국가가 나름의 부싯돌을 캐서 썼으나 영국제가 제일 성능이 좋다고 평가 받았으며 영국 서폭 브랜든 시의 부싯돌 가공 공장이 유명하다. 영국제는 양면으로 날을 내 놔서 한쪽 날이 닳으면 뒤집어 끼워 쓰기도 했다. 프러시아는 부싯돌이 없어 마노(agate)를 캐다 썼으나 성능은 떨어지는 편.

좋은 부싯돌은 가격이 제법 나갔기 때문에 병사들 중에 이걸 빼서 팔아먹는 놈들도 있었다. 어차피 혼란한 전투 중에 누가 불발돼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저질러진 행위. 물론 들키면 징벌을 받았고, 당대 하사관들은 지금 못지 않게 총기 검열을 빡세게 했다.

부싯돌의 소모율은, 현대 사수들의 체험으로는 재가공하며 잘 아껴쓰면 백여발까지도 쓸 수 있으나, 야전에서는 20여발 내외로 보는 편이다. 브라운 베스 시절에는 탄포 20발 당 하나씩 보급했다.

한편 플린트락에도 세부적인 분류가 있는데, 19세기 영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라운 베스나 샤를르빌 등 일반적인 서유럽 머스킷의 작동 메커니즘은 파이어락(firelock)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 외에도 스냅핸스(snaphance)나 미퀼렛(Miquelet) 등 약간 다른 종류의 작동 방식이 존재했으나 일반적인 파이어락보다 복잡하고 고장이 잦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tilla_Style_Miquelet_Lock.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talian_Style_Miquelet_Lock%2C_AKA_Romanlock.jpg
미퀼렛의 격발장치 구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naphance_Lock%2C_External_View%2C_Fired.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naphaunce_sparking.gif
스냅핸스의 격발장치 구조.# 미퀼렛과 스냅핸스 모두 척 봐도 일반 플린트락보다 뭐 하나씩 더 붙어 복잡해 보이는 구조다.

19세기 초~중엽까지도 사용되다가 뇌홍을 활용하는 퍼커션 캡의 등장 이후 군대에서 퇴출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인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플린트락은 발명된 후 거의 100년 이상 큰 변화 없이 절찬리에 사용되어 온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소총인 제자일도 주로 플린트락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일 자체가 영국군이 버린 망가진 소총 부품을 베이스로 이런저런 부품을 끼워넣으며 급조한 총들이라 딱히 정해진 제원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더 원시적인 매치락 방식 제자일도 존재했다.


3. 조선에선?[편집]


조선은 여러 번 플린트락이 군에 도입,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이고 나선정벌 당시 신유장군이 들여오는 등, 여러 루트로 수입하고 간간히 사용되었으나 결국은 완벽히 제식화되지는 못하였다. 명확한 이유가 언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보다 복잡한 기계 장치에서부터 오는 기술적 어려움 및 가격상승이나 앞서 말한 불발률 의혹, 흑요석이나 황철석 같이 부싯돌로 쓰기 좋은 광석 부족, 그리고 전쟁과 교전이 없었기에 수요가 없었던 점이 복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부싯돌 격발 장치는 이후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서구 세력에 대한 강구책에서 다시 보이는데 일종의 기뢰인 수뢰포의 격발장치에서 동화모(뇌홍)가 없을 경우 사용하는 부수적 격발 장치로서 '화석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 뇌홍은 그 퍼커션 캡으로서 청나라로부터 수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개인화기에 대한 적용의 흔적은 없으며 서구는 금속제 탄피를 이용한 후장식 소총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기술적 진보의 의의는 시대상을 반영할 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플린트락(머스킷 소총) 방식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데[11] 이는 불발 문제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매치락을 고집할만큼 플린트락의 불발률이 큰 문제가 되었다면 모든 유럽 군대가 전부 플린트락으로 갈아타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이상으로 습한 영국은 그럼 어떻게 플린트락을 대규모로 운용했냐는 점 역시 큰 걸림돌이다. 열강들은 습도로는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정글 지대에서도 큰 무리 없이 머스킷을 운용했으며 심지어 태국의 시암왕국이나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등 동남아 제국들도 적극적으로 플린트락 머스킷을 수입해 전열보병의 주무장으로 운용했고 서양은 그 습한 해상함선들의 대포의 격발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플린트락 도입을 안 하는 이유로 거론되는 격발시 충격량이 플린트락이 더 커 명중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 역시 의문인 게 유럽 측은 18세기부터 민간에서 사냥용으로 라이플을 쓰기 시작했는데 머스킷과 동일한 격발방식인데도 명중율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영국 라이플 경보병 연대가 반도전쟁 당시 700여미터 떨어진 프랑스 장군을 저격할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경보병 연대는 기동성이 중요했기에 민간보다 훨씬 짧은 1미터짜리 베이커 라이플을 사용했음에도 이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니 진동문제는 무시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조선은 왜 플린트락을 도입하지 않았는가? 첫 번째 추측으로는 동아시아엔 플린트 같은 질 좋은 부싯돌이 없었다는 것이 있다. 한국에 널린 차돌로는 불꽃이 잘 일지 않으며, 황철석이나 마노 정도가 대등한 성능을 내는데 이것들은 조선 땅에선 준 보석급이라 구하기가 어렵다.

두 번째는 조선의 기술 및 공업력이 유럽보다 뒤떨어졌던 것도 양산에 걸림돌이 되었다. 조총에도 용두를 화약접시에 꼽는 스프링이 들어가니 플린트락도 못 만들 거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조총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황동 스프링으로써 불씨가 살아있는 화승을 갖다대기만 하면 되니 복원력만 있으면 되었지만 플린트락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부싯돌이 장착된 공이치기가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접시 덮개를 개방함과 동시에 불까지 붙여야 하는 이중기능을 할 수 있는 강한 동력을 제공해야 했으므로 강한 탄성력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시계태엽과 유사한 재질의 스프링강을 써야했다. 당시 조선은 무게추를 이용한 자명종은 어찌어찌 만들어냈지만 태엽이 필요한 회중시계는 끝끝내 못 만든 것을 생각하면 기본자재 생산부터가 난관이었으며, 동아시아의 스프링 생산 문제는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청나라도 마찬가지라 스프링을 고래수염으로 대체해야했다.[12]

이는 1860년대 조선의 과학력이 기록된 의기집설에 태엽을 만들줄 모른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개항으로부터 거의 30여년 전의 시기임에도 이정도 재료공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보다 과거에 이런 기구를 대량양산할 기술이 있기 힘들다. 더욱이 플린트락은 고장력 스프링만 필요한게 아니라 공이치기가 함부로 움직여 사고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 등 여러가지 장치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을 요구했다. 서구의 문물을 일찍히 접한 동남아에선 플린트락의 성능을 인정하고 대량으로 사용했지만 기술력 부족으로 국산화에 실패하고 유럽 상인에게서 대량으로 구입해 사용한 것만 보아도 플린트락의 생산이 당시 수준에선 결코 쉽지가 않았단 걸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아시아가 서양식[13]전열보병 대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플린트락은 타들어가는 화승이 없어 지휘관의 사격 명령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고, 대형의 간격을 좁히기 좋았다. 반면 일제사격, 밀집대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화승총 대신 플린트락을 도입할 이유가 크지 않았다. 실제로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군의 전열보병 대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4. 사용 방식[편집]



사격 방법은 대체로 화승총과 유사하나, 화승을 다룰 필요가 없어져서 보다 단순화되었다.[14]

  • 요즘 총에서 해머(공이치기)라고 부르는 부분을 콕(cock)이라고 칭하는데, 여기에 부싯돌이 단단히 물려있다. 콕을 뒤로 당겨서 장전하는 것을 풀콕이라고 하며 현대 화기의 해머 코킹도 이 용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 코킹 후 방아쇠를 당기면 콕이 앞의 프리즌(frizzen)을 때리는데, 프리즌은 화약접시의 뚜껑 겸 부싯돌과 부딪혀 불똥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 프리즌이 얻어맞은 충격으로 튕겨서 열리면서 - 거기서 생긴 불똥이 화약접시 상의 점화 화약에 불이 붙고 - 그 폭발이 화약접시 옆의 약실로 향하는 작은 구멍으로 전달되어 약실을 점화한다.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하여 영국군 일부 연대를 주축으로 보급된 탭 로딩은 분당 3발, 최대 4발 사격을 가능케 하여 발사속도를 획기적으로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힘들게 꼬질대로 꾹꾹 쑤셔넣는 것이 아니라 총 자체를 바닥에 툭툭 쳐서 중력에 의해 화약과 총알이 가지런히 정렬되도록 하는 방식.

다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서양에서 흑색화약은 가루상태가 아니라 '코닝'이라는 공정을 거쳐 알갱이 형태로 유통됐기 때문이며 이 방식에서 쓰는 머스킷탄은 딱 맞는 탄이 아니라 약간 헐렁하다(딱 맞는 탄을 쓰면 정확도는 오르지만 최악의 경우 망치로 꼬질대를 때려가면서 장전해야 한다). 아래 동영상(2:35)을 보면 샤프 소령과 리인액터들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bite, pour, spit, tap, aim의 5단계가 있다고 한다.

  • Bite: 탄환과 화약이 함께 든 종이 봉투를 입으로 뜯는다. 이 때 탄환이 입속으로 들어간다.[15]

  • Pour: 종이 봉투 안의 화약을 약접과 총구에 주입한다. 약접에 화약을 넣고 닫는 것이 먼저다.

  • Spit: 입속의 탄환을 총구에 뱉어 넣는다.

  • Tap: 총구를 위로 향하게 하여 개머리판을 땅에 두어 번 두들긴다. 이 절차가 꼬질대로 쑤시는 절차를 갈음한다.

  • Aim: 조준한다.


다만 해당 동영상의 댓글을 보면 이 과정에서 spit은 불필요하며 안전상의 문제를 일으키므로[16]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다음의 영상에서는 해당 과정을 생략하고 사격한다.

아예 통째로 탄포를 집어넣는 방법도 있는데, 사실 위의 5단계 방식보다 우수한 방법이다.[17] 몸에 좋을 리가 없는 납탄이 입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도 탄이 종이 탄포와 함께 총구로 들어가기 때문에 총신에 더 밀착하게 된다. 원래 탄환의 구경이 총신의 구경보다 작으므로 헐거워서 명중률 저하의 원인이 되지만 이 경우 탄포가 그 빈틈을 메워 명중률을 높여주는 것이다. 보통 이렇게 하면 탭 로딩이 불가능할 정도로 뻑뻑해져서 꼬질대로 쑤셔줘야 하지만 마침 탄포는 기름종이라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므로[18] 탭 로딩도 여전히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스핏 동작을 위해 총구를 입가로 가져다 대는 잔동작도 하나 생략함으로써 장전 시간을 소소하게 단축할 수 있다. 즉, 연사속도와 명중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셈이다. 동영상의 사수는 그리 빠르지 않은 동작으로도 대략 14초에 한 발을 쏘는데 1분당 4발이라는 놀라운 연사속도로 35야드(32m) 거리의 작은 표적을 모두 맞혔다.

다만 당대 플린트락 머스킷을 쓰던 군인들이 바보라서 탭 로딩을 애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최초로 쏠 때야 총열에 탄매가 끼지 않아 탭 로딩을 쓰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전투 중에 탭 로딩을 하면 탄이 총열 중간에 걸려 약실까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온전히 화약 폭발의 힘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19] 이러면 탄의 속도가 떨어져 사거리는 물론 살상력도 급감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군대에서는 이러한 탭 로딩을 꼼수로 봐서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5. 현황[편집]


당연히 현대에서는 수집가나 리인액트먼트에서나 쓸거같지만 의외로 현대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는곳이 있으니 다름아닌 총기천국 미국이다. 미국 총기법은 전장식 화기를 총기로 분류하지 않아 거래가 매우 자유롭다. 미국의 펜실베니아에서는 다른주에서 사냥시즌이 다 끝난후에 시작되는 흑색화약 한정 사냥시즌이 있어서 전국의 사냥매니아들과 현지인들이 꾸준히 사용하고있고 수석총과 부품들도 판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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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총은 강선이 있는 강선 머스킷, 즉 라이플이다.[2] 수석식 작동방식을 뜻하며 총 뿐만이 아닌 라이터로도 만들었다.[3] 주로 수입산 제품을 뜻하며 플린트락 뿐만이 아닌 이후의 퍼커션캡 소총도 포함된다. "게베어"가 일본으로 들어오며 발음이 변한 것이다.[4] 화약접시 부분에 비가 직접적으로 들이치지 않도록 하는 작은 덮개를 다는 식으로 어느 정도 임시조치는 여러 번 시도되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했다. 다만 거추장스러운 불붙은 화승을 신경쓸 필요는 덜어서, 코트를 머리 위로 둘러써 비가 들어오지 않게 해 발사를 한다거나 하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불이 꺼지지 않게 신경써야 하는 화승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5] 사실 동양에서도 명나라 말엽 자생화총과 격전총등으로 불리는 플린트락을 발명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명나라는 망하였고 뒤를 이은 청나라는 새로운 화기의 도입과 개량에 관심이 없었다.[6] 다만 조선이나 청, 일본 등은 예외로, 이쪽 국가들은 서양과 교류도 없는 편이고 기후나 자원 문제상 굳이 플린트락을 채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19세기 말엽까지 매치락 방식만 고집했다.[7] 어차피 정글은 인구밀도가 극히 낮았으므로 적군의 수가 적어서 한번 불발되어도 바로 다시 격발하면 그만이었다. 상술된 조선, 청나라, 일본, 인도는 습도도 높으면서 가상적국들의 인구수가 많았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유럽측 역시 시대의 한계상 식민지 개척에 수만킬로 떨어진 본국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는 불가능이었으므로 병력규모가 원주민들과 별반차이 없거나 더 적은 소수였으며 사방이 수목으로 우거져 교전거리가 극히 짧은 전장환경상 철기는커녕 돌창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이라도 현지 지형 및 지리를 잘 안다는 홈어드벤티지를 적극 이용한 초근접전으로 충분한 저항을 할 수 있었기에 초탄발사가 매우 중요했다. 플린트락이 화승총보다 습기에 약했다면 소수의 유럽인들이 거점을 세우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청제국, 일본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국가간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정체되었다고 보는 게 맞고 그 예시로 토호국간 전쟁이 빈발했던 인도 아대륙에선 브라운베스, 샤를르빌 머스킷 같은 유럽산 총기를 다량 수입해 사용했다. 애초에 자국의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비싼 돈 주고 질떨어지는 무기를 사는 나라는 없다.[8] 당시 유럽 국가들의 식민개척은 지금으로 따지면 화성탐사 및 기지설치와 비슷한 난이도와 막대한 비용을 수반한 행위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자연히 용병을 무한정 고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종교,문화가 다른 현지인들을 무작정 고용했다간 세포이 항쟁처럼 분쟁이 발생할 위험 역시 높아지기 때문에 본국병력 이상으로 인원을 늘릴 수도 없었다. 플린트락의 보급은 화승의 불을 항상 신경써야 해서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매치락의 단점을 극복하고 환경이 고온다습한 편이었던 주요 거점들을 이전처럼 현지세력에게 뺏고 빼앗기고 하는 거 없이 완전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9] 실패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다만 동남아도 불발 확률이 높았던게 현실이고, 부싯돌을 구하기가 다른 아시아 지역보다도 더 힘든 지역이었다. 동남아는 불피우는 방법부터 마찰식 점화법이 대세였다.[10] 뇌홍의 주 원료는 수은이다.[11] 다만 성호사설이나 국조보감에서는 이런 수석식을 발사속도가 더 빠르다고 좋게 평가했다.[12] 일본은 플린트락과 작동 방식이 완전히 같은 수석식 휴대용 라이터 유뮬이 있어 스프링 생산이 가능했을 수 있다.[13] 서양은 고대부터 팔랑크스, 레기온 등의 밀집대형을 선호했으며 밀집하기 힘든 화승총을 가지고도 테르시오 밀집 대형을 사용했다.[14] 접시에 화약을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에 총구로 나머지 화약을 총알과 함께 담고서, 꼬질대로 잘 다져넣어서 장전시키는 것까진 동일하다. 여기서 화승을 쓸 필요가 없으니 화승을 격발장치에 물리는 것하고, 화승이 화약에 닿아서 점화가 될 수 있게 사격 직전에 화약 접시를 열어야 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15] 세포이 항쟁의 발단으로 꼽히는 사건이 이 종이 봉투에 동물성 기름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힌두교인들은 입으로 소기름이 발라진 종이를, 무슬림들은 돼지기름이 발라진 종이를 뜯어야 했으니 터부를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다만 식물성 기름은 총기 소재에 사용시 오히려 뻑뻑해지는 특성 탓에 동물성 기름을 사용한 이유도 있다. 기름, 물소기름, 야크기름, 기름 등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맞다. (물소고기와 야크고기는 힌두교에서도 소고기와는 다르게 여겨져 금기시되지 않는다.)[16] 입 안에서 납탄을 굴리다가 실수로 삼켜버릴 위험이 있다. 중금속인 납덩어리를 삼키면 건강에 좋을 리가 없다.[17] 현대의 기준으로는 소진탄피와 원리가 유사하며, 주로 전차포탄에 활용된다. 물론 이 방법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총열에 종이를 통째로 넣기 때문에 사격 후 총신 내에 연소 잔재물이 spit 과정이 포함된 위의 방법보다 더 많이 남게 되고 이는 불발이나 작동 불량의 주된 원인이 된다. 후대에 종이 단피를 쓰던 드라이제나 샤스포 소총, 소진탄피 기술이 초기 단계였던 M551 셰리든의 건런처가 지녔던 단점과 일맥 상통하는 문제점.[18] 위 영상에선 아예 집어넣으니 하고 들어가선 꼬질대로 쑤실 필요 없이 가볍게 탁탁하고 털어주더니 바로 쏜다.[19] 위에서도 언급하듯 탄이 총열 지름보다 작게 만들어진 것도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는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화약의 품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5~6발만 쏴도 총열의 청소가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탄매 문제는 나중에 무연화약이 등장하고 나서야 다소 해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