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트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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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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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제15대 총리
조세프 필리프 피에르 이브 엘리오트 트뤼도
Rt Hon. Joseph Philippe Pierre Yves Elliott Trudeau


파일:피에르 트뤼도.jpg

출생
1919년 10월 18일
캐나다 자치령 퀘벡몬트리올 우트르몽 자치구
사망
2000년 9월 28일 (향년 80세)
퀘벡몬트리올
재임기간
제15대 총리
1968년 4월 20일 ~ 1979년 6월 4일 제1차
1980년 3월 3일 ~ 1984년 6월 30일 제2차
서명
파일:1920px-Pierre_Trudeau_Signature_2.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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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마가렛 싱클레어 (1971년 결혼 / 1984년 이혼)
자녀
쥐스탱 트뤼도[A] (1971~)
알렉산드르 트뤼도[A] (1973~)
미셸 트뤼도[A] (1975 ~ 1998)
사라 엘리자베스 코인 (1991~) [1] #
학력
몬트리올 대학교 (법학 / LL.B)
하버드 대학교 (정치경제학 / M.A.)
파리 정치대학
런던정치경제대학교 대학원
종교
가톨릭
신체
178cm[2]
최종당적

지역구
몽 루아얄[3]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이전의 삶
2.2. 총리로서
2.3. 퇴임과 말년
3. 선거 이력
4. 사생활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개인의 침실에 국가의 영역은 없다

There is no place for the state in the bedrooms of the nation. (영상, 37초부터)


캐나다의 15대 총리. 초선 임기는 1968년 4월 20일 ~ 1979년 6월 3일이며[1] 재선 임기는 1980년 3월 3일 ~ 1984년 6월 30일이다.[2] 서거 후 자식인 쥐스탱 트뤼도도 정치를 시작하여 캐나다 최초의 부자 총리가 되었다.

캐나다 리버럴 진영에서는 신화와 같은 존재이며, 근현대 캐나다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사적 비중을 지닌 정치인이다. 아들과 달리 피에르 트뤼도는 오늘날 보수진영에서도 대체로 호평받고 있다. 리버럴 진영에서는 '캐나다식 자유주의'[3](특히 젠더 문제에서)의 아버지로 평가하며, 보수진영에서는 트뤼도의 1992년 '캐나다 6개 계급론'[4] 연설을 오늘날 그의 영향력을 이용해 反PC 및 反퀘벡민족주의 논리로 삼기도 한다. 어찌됐든 현대 캐나다의 기조를 만든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임은 틀림없다.

트뤼도의 첫 임기는 유럽의 68운동으로부터 달성된 성취가 캐나다에서 자리잡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다른 캐나다의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트뤼도의 정책에서 상당수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오늘날 캐나다 국민들이 자부심으로 삼는 무상의료나 자유주의의 토대가 트뤼도에 의해 세워졌다.

2. 생애[편집]



2.1. 총리 이전의 삶[편집]


피에르 트뤼도는 1919년 10월 18일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 주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이고 그의 모친은 영국계(스코틀랜드계)와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혼혈이다. 그의 부친인 샤를 에밀 트뤼도는 몬트리올에서 유명한 사업가이자 변호사고, 그의 모친은 그레이스 엘리엇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Pierre Elliot Trudeau이다.

피에르 트뤼도는 로마 가톨릭예수회 소속 학교인 장 뒤 브레뵈프 학교(Collège Jean de Brébeuf)[5]에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고, 변호사자격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석사,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석사를 땄고[6], 파리 정치대학에서도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퀘벡으로 돌아와 몬트리올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퀘벡을 지배하던 가톨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으며(조용한 혁명), 광부들의 파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때 퀘벡 주 정부에 찍혀서 대학에서 짤리기도 했다.

1949년에는 연방정부 관료가 되어 추밀원 등에서 일했으며, 이 때는 현 신민주당의 전신인 협동연방당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사민주의 성향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다 1961년에 다시 몬트리올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면서 사민주의와 멀어졌고, 1965년에 캐나다 자유당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동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했다. 1967년에는 법무장관에 임명되었고, 1968년에는 피어슨 총리의 뒤를 이어 자유당 당수가 됨으로써 총리직을 승계했다.


2.2. 총리로서[편집]


2차 대전 이후 캐나다 사상 최장 기간 집권 총리로 군림했던 피에르 트뤼도는 대외적으로는 베트남전 참전 반대, 피델 카스트로쿠바와 관계 진전 같은 행보로 미국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국제적으로 미국과 붙어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온건한 캐나다란 이미지를 일구어 냈다.

다만 선거로 보면 약간 곡절이 있는 편으로 1972년 총선에서는 1기 집권기때 정책에 대한 평가가 썩 좋은것이 아닌데다가 선거캠페인도 실패하여 캐나다 진보보수당을 겨우 2석 차이로 이기기도 했고(109 VS 107) 197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절정을 달했기는 했지만 1979년 총선에서는 온타리오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득표율에서 앞서고도 선거에서 패배하는 웃지못할 일을 겪었다.[7] 물론 1980년 재선거에서 이기기는 했다.

내부적으로도 68 혁명의 조류를 탄 사회적 자유화의 물꼬를 틀면서 현대 미국과 가장 큰 차이점인 각종 공공 복지 시스템 도입 뿐만 아니라, 본인의 고향이자 정치적 토양인 퀘벡의 문화적 독자성과 정체성은 장려하면서도 정치적으론 오히려 분리주의를 막았고, FLQ 같은 과격 분리주의 테러단체들을 진압하면서 캐나다란 국가적 틀 안에서 독자적 민족 정체성을 가진 퀘벡인이란 현대의 구도를 만들어낸, 근현대 캐나다의 정치적 정체성을 반쯤은 혈혈단신으로 일구어낸 업적을 남겼다.

한편 거의 영국에서 독립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캐나다를 명목상으로도 독립시켰다. 1982년에 캐나다 법(Canada Act)을 영국 의회와 캐나다 의회에서 통과시켜 명목상 영국 의회가 가지고 있는 캐나다 헌법 개정 승인 권한을 없앤 것.


2.3. 퇴임과 말년[편집]


1984년 총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진보보수당에 밀리는 결과가 나오자 6월에 총리 및 자유당 당수직에서 사퇴했다.[8]

퇴임 후에는 몬트리올로펌에 취업해 변호사로 활동했다. 정치활동은 다시 하지 않았지만 총리 시절처럼 퀘벡당이 주도하는 퀘벡 독립운동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힌 적은 있다.

2000년에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파킨슨병전립선암.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유해는 퀘벡 주 생레미(Saint-Rémi)의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5
캐나다 연방 선거
몽 로얄



28,064 (56.4%)
당선(1위)
초선
1968
37,402 (90.8%)
재선
1972
36,875 (80.6%)
3선
1974
32,166 (75.0%)
4선
1979
43,202 (85.2%)
5선
1980
33,821 (81.2%)
6선


4. 사생활[편집]


결혼을 굉장히 늦게 했음[9]에도 사생활이 특이했다. 재임 중 결혼, 재임 중 아이 3명, 재임 중 이혼, 거기에 혼외정사+사생아까지.[10] 피에르 트뤼도는 미국의 케네디 가문처럼 자신도 캐나다에 정치 가문 비슷한 것을 남기길 희망하여 지저분한 법정공방까지 불사하며 결국 세 아들의 양육권을 받아냈고, 이후 장남 쥐스탱 트뤼도는 잘 알려져 있듯 아버지처럼 캐나다 총리에 올라 최초의 캐나다 父子 총리 기록을 세우게 된다. 다만 쥐스탱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인 2008년에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지는 않았다.[11]

파일:external/d0e57a9001f96f60d2efcdebb281c55be6b4295a2a28f4746cd5bc4ffe71758f.jpg
부인 마가렛 트뤼도의 젊은 시절.

부인인 마가렛 트뤼도는 여배우 출신으로 당시 정치가였던 피에르 트뤼도와는 무려 나이가 29살차였는데, 이를 극복하고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가렛은 다시 재혼했으나 1999년 다시 이혼한다. 이혼 사유는 1998년 피에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들 중 셋째(미셸 트뤼도)가 사망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마가렛 트뤼도는 영국의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와 바람이 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5. 여담[편집]


아들 쥐스탱 트뤼도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고 캐나다 역사에 관심없는 외국인들은 '총리란 사람이 (좋게 보면) 참신하다 / (나쁘게 보면) 방정맞다'란 반응을 흔히 보이는데, 막상 캐나다인 본인이나 캐나다 현대사를 좀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상파에서 욕을 시원하게 한방 날린[12] 아버지에 비하면 말도 직설적이지도 않고, 하는 짓도 꿀잼 개그성 일화로 넘쳐나는 아버지에 비해 '깔끔한 엘리트 이미지 관리에 너무 의석적으로 치중해 있다' 라고 비판할 만큼, 피에르 트뤼도는 개인적으로도 캐나다 정치 문화에 남긴 자취가 크다.[13]

68혁명 이전 서구권 국가들도 그랬지만, 피에르 트뤼도 집권 시절만 하더라도 영어권은 스코틀랜드계의 장로회[14], 불어권은 가톨릭 교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캐나다 역시 딱히 자유주의적이라 할 건 없었다. 이런 캐나다 사회상을 현대의 익숙한 모습으로 바꿔 놓은 건 도덕적 엄숙주의가 강력한 사회에선 매장되기 딱 좋은 각종 사생활 추문에 휘둘리지 않고, 되려 '자기 개인 사생활은 사생활이며, 정치인이자 공인으로서 활동과는 별개'라고 당당하게 나오고, 정치인이 권위가 없다, 엄숙하지 못하다, 가볍게 행동한다는 비판을 아예 인간적인 친근함, 보는 재미란 플러스 요소로 바꾸어 정치적 자산으로 삼은 아버지 트뤼도 총리의 행적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

파일:le pere trudog.jpg
파일:le pere trudog2.jpg

여러모로 지지층에게나 비판자들에게나 오늘날 캐나다에 강한 족적을 남긴 15대 총리, 피에르 트뤼도의 각종 인간적 면모들이다. 현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 역시 아버지 피에르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다.

몬트리올의 국제공항인 몬트리올 피에르 엘리오트 트뤼도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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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탱 트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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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간에 보수 성향이자 캐나다 16대 총리인 조 클라크가 집권했으나 감세 등 신자유주의 정책의 드라이브를 걸려고 해서 1년을 못 채우고 다시 트뤼도에게 정권을 내줘야 했다.[2] 캐나다 총리는 미국의 대통령과 달리 임기 후 다른 사람이 총리직을 맡은 이후 다시 총리가 돼도 같은 '-대'로 구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미국에서 22대, 24대 대통령이지만 트뤼도는 15대, 17대 총리가 아닌 그냥 15대 총리로 기록한다.[3] 캐나다 자유당이 표방하는 자유주의를 의미한다. 중도자유주의 ~ 사회자유주의에 속한다.[4] 트뤼도는 1992년 연설에서, 당시 국민투표에 부쳐졌던 Charlottetown Accord 개헌안이 '퀘벡인', '원주민', '영어권 내 불어화자' 등 특정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렇지 않은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수준까지 부당한 이득을 갖게 만든다고 주장하며, 이 개헌안을 불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파는 이 연설을,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적 올바름이 21세기에 들어와 큰 화두로 오르기 전에 이미 이것의 문제점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한다. 결국 Charlottetown Accord는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5] 여기서 Collège는 고등학교라는 의미이다. 이 학교는 프랑스어로 수업하는 학교 중에서는 명문이다.[6] 여담으로 이 시기의 지도교수가 영국 노동당의 이론가 해롤드 라스키였다.[7] 딱 40년 뒤인 2019년 총선에서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져, 이번에는 보수당이 득표율 1위를 달성했지만 온타리오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자유당 내각이 살아남는다. 1979 총선의 리버스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2019 총선에서 살아남은 총리는 쥐스탱 트뤼도. 아버지를 끌어내린 단순다수제 선거법 덕에 정권연장에 성공한 아들[8] 실제로 9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총 의석 282석 중 40석밖에 못 건지는 대패를 기록한다.[9] 정치 시작한지 한참 지나서 의원뿐만 아니라 총리까지 되고 나서 50대에 했다.[10]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는 한때 결혼을 고려할 정도로 진지하게 교제한 사이이긴 했다. 게다가 혼외정사와 사생아는 총리 재임 말기 약 한 달을 남겨두고 알려졌다.[11] 다만 아버지의 지역구 Mount Royal과 아들의 지역구 Papineau 모두 몬트리올 소속이고, 두 지역구가 서로 경계를 접하기는 한다.[12] fuddle duddle 사건이라고 하는데, 70년대 캐나다 국회에서 트뤼도가 싸우고 있는 상대편 정치인들 상대로 '좆까' (fuck off)라고 말했다가 이걸 언론에서 호되게 추궁을 하자 내가 fuck이라 말했는지, (아무 의미도 없는, 한국말로 치면 걍 앵알앵알 수준의 뭔가 말하는 것 자체를 묘사하는 의성어인) fuddle duddle이라 말했는지 여러분이 알 게 뭐냐고 반박했던 사건이다. 후일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단순한 fuddle duddle은 아니었다 생각한다"며 쌍욕을 인정했다.[13] 쥐스탱 트뤼도도 나중에 국회에서 스티븐 하퍼 내각의 상대 당 각료에게 piece of shit이라고 해서 대국민 사과를 한 이력은 있다. 피는 못속인다?[14] 물론 인구는 잉글랜드계가 더 많지만 미국이나 호주나 다른 영어권 자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이 그렇듯이 주류 집단으로서 조상의 정체성에 딱히 집착할 이유가 약했던 잉글랜드계 캐나다인들은 빠르게 잉글랜드 정체성을 잊으며 '영어권 백인 캐나다인'으로서 정체성에 동화되었던 반면 스코틀랜드계는 그보다 이민 이전 정체성을 더 강하게 유지했다. 신학적으로도 정체성이 애매모호한 성공회에 비해 스코틀랜드계의 장로회는 강경 칼뱅주의에 기반한 확실한 노선과 정체성이 있었다. 종교적으로도 20세기 내내 단일 기독교 교파 중에선 가톨릭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론 성공회가 아니라 각종 주류 개신교 교단들의 연합체이자 그 중 칼뱅주의 장로회가 큰 영향력을 발휘한 캐나다 연합교회가 두번째로 주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