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렐로 라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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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에게서 이름을 따온 미국 뉴욕주 뉴욕시의 공항에 대한 내용은 라과디아 공항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미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판사와 연방 하원의원, 뉴욕 시장 등을 역임했다. 뉴욕시를 지배했던 부패한 정치파벌들과 마피아들과 싸우는데 일생을 바쳐 널리 존경을 받았다. 미국의 대표적인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인 중 한 명이다[1] .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뉴욕 브롱크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출생 시의 이름은 피오렐로 엔리코 라과디아였다[2] . 이후 이탈리아식 이름인 엔리코라는 미들 네임을 나중에 영어식인 헨리로 고쳤다. 가족들이 애리조나주로 이주하면서 라과디아 본인도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미 육군에서 잠시 복무하기도 했다. 그 뒤에 잠시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서 살다가 미국 영사관의 직원이 되어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6년에 공화당 후보로 뉴욕 14구의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19년에 중도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고, 1922년부터는 뉴욕 20구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30년까지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3] .
2.2. 법조인 시절[편집]
하원의원 임기가 끝나고 라과디아는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는 데, 이게 뒷날 그를 유명하게 만든 그의 청렴함을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로, 한 할머니가 굶고 있는 손자들을 걱정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10달러의 벌금형이 선고된 일이 있었다.[4] 그런데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라과디아가 갑자기 "그리고 그 벌금은 제가 내겠습니다."라며 스스로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고는 나머지 법정에 있는 모든 경무관 검사 변호사 및 방청객들에게도 50센트의 벌금을 선고했다. 이때 그가 이런 기이한 선고에 대한 근거가 걸작이다. 미국 정부나 본인 또는 방청객들이 바로 할머니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여 할머니가 범죄에 내몰리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판사인 본인은 스스로의 책임과 미국 정부를 대신하여 10달러를, 나머지 해당 재판장에 있는 검사, 변호사, 경무관 및 방청객들은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의 대가로 50센트를 부과했다. 이 돈은 벌금 10달러를 제외하고 전액 할머니에게 기부되었다. 이때 할머니는 진심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와 더불어, 하원의원 시절과 법조인 시절의 청렴하고 공명 정대한 모습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라과디아는 1933년에 있었던 뉴욕 시장 선거에서 당선되게 된다.
2.3. 뉴욕시장[편집]
1933년에 뉴욕시장에 당선되어 시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였지만, 그 과정이 꽤나 가시밭길이었다. 당시 뉴욕은 마피아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고, 마피아들이 뇌물로 정치인과 경찰들을 구워삶아서 시 행정에 간섭하고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이를 타개하겠다는 결심을 한 라과디아는 취임 당일날에 취임식을 거부하고, 라디오 방송국에서 취임사를 읊었다. 이때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찰 조직을 개혁하여 부패 경찰들을 몰아내었고, 도박용 오락기를 몰수해 파괴하는 일을 벌였다. 그런데 이로 인해 라과디아는 큰 위기를 맞는다.
러키 루치아노
러키 루치아노라는 이름의 거물 마피아 두목[6] 이 그를 회유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에 루치아노는 라과디아와 자신이 같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걸 이용해 차기 시장 선거에서 재선될 수 있게 돕겠다며 자신의 도박 사업을 건드리지 말라고 회유하였으나, 라과디아는 이를 씹었다.
1939년에는 파시스트 프리츠 쿤이 이끄는 독일계 미국인 동맹을 조사하여 쿤의 탈세 사실을 찾아내고 그를 체포하여 징역을 성고하였다.
3. 말년과 사후[편집]
1945년에 시장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라과디아는 은퇴 후에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갑자기 발병한 췌장암으로 인해 1947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 불세출의 명판관이자 청렴결백한 정치인이었던 그를 기려 1994년에 동상을 세웠다.[11] 그리고 1972년에는 미국 정부에 의해 라과디아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고, 뉴욕의 퀸스에 있는 라과디아 공항은 라과디아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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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라과디아 이외에도 미국은 특유의 반공주의 성향때문에, 마르크스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는 진보 성향 인사들은 널리고 널렸다. 특히 라과디아와 동시대 인물인 유명한 급진 좌파 정치인인 휴이 롱은 대놓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기위해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을 선거전에서 했을 정도다.[2] 참고로 라과디아 집안은 이탈리아계 치고는 특이하게도 성공회를 믿어오던 집안이었다. 이탈리아계의 대다수가 가톨릭인 걸 생각하면 의외의 사실이었다.[3] 공화당에 들어갔다고는 해도, 라과디아는 우파가 아니었다. 외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4] 다른 사람들은 이에 크게 놀랐는데 사정이 너무나도 불쌍한 사례라 다들 선처를 선고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했기에 뒤에 나온 판결을 받아 들인거겠지만[5] 실제로 "찾아서 부숴라!(Search and Destroy!)"라는 슬로건을 이용함, 그런데 이게 훗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전술의 한 방법이었다.[6] 흔히 이 시기의 마피아를 얘기하면 흔히 알 카포네 얘기가 나오지만, 러키 루치아노는 그 알 카포네를 애송이로 만들 정도로 훨씬 위세가 컸던 인물이다. 이 인간이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개박살난 이탈리아 본토의 마피아의 영향력을 부활시킨 작자이다. 히틀러급의 대악당인 무솔리니가 유일하게 잘한 일인 게 마피아 척결인데,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이탈리아의 반파시즘 게릴라에게 체포되어 처형되고, 파시스트 잔존세력을 제거하기위해 마피아측과 협력하여 다시 영향력을 키웠다.[7] 죽인 새를 넣었다고도 한다.[8] 매춘법위반으로 징역 30-50년의 부정기형을 살게됐다. 그러나 결국 2차 세계대전때 항구에서 해군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의해 석방되고, 후에는 미국에서 추방된 뒤 이탈리아에서 자유롭게 살게되었다.[9] 이런 뛰어난 전임자의 후임 뉴욕시장인 윌리엄 오드와이어는 완전 마피아측 인사라서, 찰스 루치아노가 추방될 때 눈에 띄지않게 작은 소방선을 타고 루치아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10] 라과디아의 소속 당은 공화당이고 루즈벨트는 민주당이다. 이미 이 시기의 공화당은 보수 정당이 다 되었던 만큼 이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라과디아는 당적과는 관계없이 온건 진보 성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사례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도 있었다. 다만 천성 정치인인 라과디아와는 달리 아이젠하워는 평생 정치와는 연이 없다가 대통령이 된 경우라 좀 다르긴 하다.[11] 참고로 이때는 라과디아처럼 뉴욕시의 치안을 안정시킨 루돌프 줄리아니가 시장으로 재직할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