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가브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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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제네시스(밴드) 로고.png

토니 뱅크스
마이크 러더포드
필 콜린스

{{{#808080 {{{-2
[ 구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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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cography ]
1집
From Genesis to Revelation (1969.03.07)
2집
Trespass (1970.10.23)
3집
Nursery Cryme (1971.11.12)
4집
Foxtrot (1972.10.06)
5집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1973.10.17)
6집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11.18)
7집
A Trick of the Tail (1976.02.02)
8집
Wind & Wuthering (1976.11.17)
9집
...And Then There Were Three... (1978.03.24)
10집
Duke (1980.03.28)
11집
Abacab (1981.09.18)
12집
Genesis (1983.10.03)
13집
Invisible Touch (1986.06.06)
14집
We Can't Dance (1991.10.28)
15집
Calling All Stations (1997.02.09)




피터 가브리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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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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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4년
후보자격 연도
2010년, 2014년
후보선정 연도
2002년








역대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파일:MTV Video Music Awards_Logo.png
올해의 비디오상
제3회
(1986년)


제4회
(1987년)


제5회
(1988년)

Money for Nothing
다이어 스트레이츠

Sledgehammer
피터 가브리엘


Need You Tonight/Mediate
INXS

[1]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


본명
피터 브라이언 게이브리얼
Peter Brian Gabriel
출생
1950년 2월 13일 (74세)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서리 코범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사회운동가
소속
제네시스 (1967 – 1975, 탈퇴)
서명
파일:피터 가브리엘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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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질 무어 (1971 – 1987)
메브 플린 (2002 – )
자녀
슬하 2녀
장녀 안나 가브리엘 (1974 – )
차녀 멜라니 가브리엘 (1976 – )
신체
180cm
종교
불교, 성공회
장르
아트 록, 아트 팝, 팝 록
사용 악기
보컬
활동 기간
1967년 ~
레이블
앳코, 애틀랜틱 레코드, 게펜, 머큐리, 리얼 월드, 리퍼블릭, 카리스마, 버진 EMI, EMI, 유니버설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데뷔 전 ~ 제네시스
3.2. 솔로 활동
4. 음악성
5. 디스코그래피
5.1. 스튜디오 앨범
5.2. 라이브 앨범
5.3. 컴필레이션 앨범
5.4. 싱글
5.4.1. 빌보드 1위
5.4.2. 빌보드 3~10위
5.4.3. 빌보드 11~30위
6. 대표곡
7. 여담



1. 개요[편집]


파일:Peter Gabriel genesis.jpg
파일:Peter Gabriel 1986 so.png
제네시스 재적 시기의 모습
1986년 『So 투어』 당시의 모습
영국음악가.


2. 상세[편집]


제네시스의 전 멤버이자, 보컬과 작사를 맡은 리더로 유명하다. 정치, 역사, 사회적으로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시적인 가사를 작사했다. 독특한 무대 의상으로도 유명했다.

1975년 솔로 활동을 한 이후 더욱 큰 상업적인 성공을 얻었다. 프로그레시브에서 국한되지 않고 소울, 팝, 월드 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여 대중적으로, 평론적으로 모두 성공을 거뒀다. 오히려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그의 솔로 커리어가 제네시스보다 더 순위가 높을 정도. 솔로 활동으로 그래미 어워드에서 총 6번의 상을 수상하였으며, 솔로 자격으로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1] 되었다. 또한 현대적인 뮤직비디오의 선구자라고도 불린다.


3. 생애[편집]



3.1. 데뷔 전 ~ 제네시스[편집]


1950년 5월 13일 잉글랜드 코범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립학교 재학 중 엄격한 학교 분위기에 반감을 가졌던 피터 가브리엘은 동창이었던 토니 뱅크스와 가든 월(Garden Wall)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당시 피터와 뱅크스보다 1년 후배였던 마이클 루더포드와 앤서니 필립스 또한 아넌(Anon)이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있었는데, 이 두 밴드는 나중에 제네시스라는 이름으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제네시스는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거나 축제 등을 전전하며 활동하다 1969년 정식으로 데뷔한다. 1975년까지 제네시스에 있었던 피터 가브리엘은 특유의 문학적인 가사나 독특한 무대의상으로 당시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Foxtrot,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등 제네시스가 발매한 대부분의 명반은 피터 가브리엘이 모두 작사했다. 거의 제네시스의 로저 워터스라고 불릴 정도. 물론 피터 가브리엘은 로저 워터스처럼 밴드내에서 독재자로 군림한 것은 아니다. 당장 핑크 플로이드가 가장 민주적이었던 시절이라고 하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 로저 워터스의 비중이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에서의 피터 가브리엘의 비중과 비슷하다(...). Broadway 앨범에서도 작곡 크레딧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곡은 멤버 전체의 이름이 적혀 있다.


3.2. 솔로 활동[편집]


상업적으로는 제네시스 시절보다 솔로 활동으로 더 크게 성공했다. 다만 필 콜린스처럼 엄청나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멤버들과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해 1975년 제네시스를 탈퇴하고 솔로로 데뷔했다. 피터 가브리엘의 첫 4장의 앨범은 딱히 정해진 이름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리스너들이나 평론지 등에서는 자동차, 스크레치 등 앨범 아트에 묘사되어있는 사물로 앨범을 부르기도 한다. 3번째 앨범의 수록곡인 Biko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메세지로 큰 인기를 끌었다. 초반 부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를 삽입하여 남아공 정부를 통렬히 비난했다.

솔로 활동을 할때 처음에는 아트,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추구했고 상업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한때 숙적이었던 필 콜린스No Jacket Required로 3,000만장에 가까운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2] 그래미 상을 휩쓰는 것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1986년 So 앨범에서는 팝 록, 소울, Funk, R&B를 추구하게 된다. 결과는 그야말로 대성공으로 전세계적으로 700만장이 팔리며 피터 가브리엘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고 평가도 올타임 명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공하였다.

또한 이 시기 전후하여[3] 월드뮤직에도 손을 댔는데, 이 부분에서는 평론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크게 성공했다. 폴 사이먼과 더불어[4] 최고의 월드 뮤직 뮤지션으로 불린다.

독일어도 조금 하는지 1980년대경에는 "Ein Deutsches Album"[5]이라고 자신의 노래를 독일어로 불러 엮은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매하는 기행을 저지른 적도 있다. 번역은 지인인 호르스트 쾨니히슈타인(Horst Königstein)이 해줬다고 한다. 잘 들으면 독일어 발음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며, 꽤 자연스럽다.

최근에는 로저 워터스, 엘비스 코스텔로와 함께 이스라엘 투어 보이콧에 동참했으며, 제러미 코빈을 지지하였다.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이기 때문에 사회 운동 참여에 매우 적극적이다.


4. 음악성[편집]


제네시스 재적 시기에는 프로그레시브 록 성향이었고 솔로 활동때에는 조금 더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다. 솔로 시절에는 아트 음악을 기반으로 팝 음악, Funk, 댄스 음악, 아프리카 민속 노래 등 다양한 장르들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음악성을 쌓아올렸다. 이 때문에 솔로 시절의 평가는 필 콜린스는 물론이고 제네시스 시절보다도 높다.

제네시스 시절과 솔로 시절의 음악성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So 앨범을 듣다보면 "이 사람이 브로드웨이 앨범 만든 사람과 동일인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고 필 콜린스처럼 평가가 극과 극인것은 아니고[6], 오히려 롤링 스톤 500대 명반에서 제네시스는 단 한장도 등재가 안되었는데 So는 200위권에 들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마이클 잭슨, 다이어 스트레이츠, A-ha 등과 함께 현대적인 뮤직비디오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아방가르드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특유의 기괴한 연출이 특징으로, 피터 가브리엘 스스로조차 "만약 뮤비가 없었다면 내가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피터 가브리엘의 뮤직비디오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나 Sledgehammer가 빌보드 최대 레드 오션이었던 1986년 쟁쟁한 곡들을 뚫고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것은 뮤직비디오의 힘이 컸다.

그의 가사 또한 폭넓은 지식에서 나오는 시적인 표현들로 인해 호평을 받고 있다.


5. 디스코그래피[편집]



5.1. 스튜디오 앨범[편집]


  • Peter Gabriel (1977)
  • Peter Gabriel (1978)
  • Peter Gabriel (1980)
  • Peter Gabriel (1982) [7]
  • So (1986)
  • Us (1992)
  • Up (2002)
  • Skratch My Back (2010)
  • New Blood (2011)
  • i/o (2023)

5.2. 라이브 앨범[편집]


  • Plays Live (1983)
  • Plays Live Highlights (1985)
  • Secret World Live (1994)
  • Live Blood (2012)
  • Back to Front: Live in London (2014)
  • Growing Up Live (2019)


5.3. 컴필레이션 앨범[편집]


  • Shaking the Tree: Sixteen Golden Greats (1990)
  • Revisited (1992)
  • Hit (2003)
  • Peter Gabriel (2007)
  • Rated PG (2019)
  • Flotsam and Jetsam (2019)


5.4. 싱글[편집]



5.4.1. 빌보드 1위[편집]




5.4.2. 빌보드 3~10위[편집]


  • Big Time (1986, 8위)


5.4.3. 빌보드 11~30위[편집]


  • In Your Eyes (1986, 26위)
  • Shock the Monkey (1982, 29위)


6. 대표곡[편집]




  • Solsbury Hill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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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

{{{#000,#fff 472위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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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7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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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가브리엘이 제네시스를 떠난 이후 발매한 첫 싱글이자, 피터 가브리엘을 상징하는 곡이다. 대중 음악에서 보기 힘든 7/4 박자로 구성된 아트 팝 곡이다. 피터 가브리엘은 이 곡을 그가 제네시스를 탈퇴한 이후 겪어야했던 고난들과, 그런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곡이라고 한 바 있다.[8] 시적인 가사와 색다르면서도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 때문에 평론가들에게서도 좋은 평을 얻었다.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에서도 2021년 개정판에서 이 곡이 472위에 선정되었다.


  • Here Comes the Flood (1977)


  • Games Without Frontiers (1980)


  • Biko (1980)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판하는 곡이다. 자세한 것은 Peter Gabriel III의 "Biko" 문단 참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민권 투사였던 반투 스티브 비코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된 곡으로, 서구권에 아파르트헤이트의 잔혹성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후일 스티브 비코의 전기영화에서 OST로 삽입되기도 하였다. 필 콜린스가 드럼 세션으로 참여하였다. 필 콜린스 역시 10년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는 곡을 발표하였다.[9]


  • Shock the Monkey (1982)



피터 가브리엘의 커리어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곡으로, 그의 유일한 빌보드 1위 곡이기도 하다. 곡은 레드 제플린의 Lemon song과 마찬가지로 남녀간 성관계를 은유한다. 사실 곡보다도 독특한 뮤직비디오가 더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 뮤직비디오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방영된 뮤직비디오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드만 스튜디오에서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스톱모션 기법으로 제작했다. 그래미 어워드의 1987년 올해의 노래상에도 노미네이트되었다가 떨어졌을정도로 평론적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 In Your Eyes (1986)


  • Big Times (1986)


  • Steam (1993)


  • Down to Earth (2008)
월 E의 마지막 크레딧 부분에 수록된 OST 곡이다. 월 E의 상업적인 성공에 힘입어 영화의 대미를 상징하는 이 곡 역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래미 어워드 영화 OST 부분에서 상을 탔다. 그가 작곡한 또다른 곡인 Define Dancing 역시 그래미 상에서 인스트루멘탈 부분 상을 수상하여, 그는 늘그막에 그래미 2관왕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두 곡은 토마스 뉴먼과 공동으로 작사/작곡하였다.


7. 여담[편집]


  • 젊었을 때에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으나 현재는 슬프게도 필 콜린스와 마찬가지로 탈모가 왔다. 2000년대부터는 특유의 뾰족한 염소 수염을 기르고 다닌다.

  • 결혼은 총 2번 하였다. 첫번째 부인은 필립 무어 남작의 딸로 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결혼하였는데 부인이 피터 가브리엘의 4집 앨범을 프로듀스한 데이빗 로드와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무대 위와는 딴판으로 내성적인 피터의 성격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첫번째 부인과 2명의 딸을 두었다.

  • 어릴때에는 성공회를 믿었으나, 커가면서 불교에 심취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가 기독교 신자이자 불교 신자라고 말한다. "난 편할때는 불교 신자, 어려울때는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

  • 로저 워터스, 데이비드 길모어와 마찬가지로 제러미 코빈을 지지한 강성한 좌파 성향이다.[10] 브렉시트에서도 EU 잔류를 지지했다. 정치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11] 로저 워터스가 팔레스타인, 칠레 등 제3세계 진보 운동에 관심을 가진다면, 피터 가브리엘은 보다 더 현실적인 영국의 현안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총선에서도 지원 유세를 나갈 정도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다. 또한 제러미 코빈이 정말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부터 그와 함께 시민운동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강성한 좌파 성향이지만 이례적으로 마거릿 대처에 반대하는 의미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을 지지했지만, 그가 이라크 전쟁에 참전을 결정하자 블레어를 맹비난하며 노동당의 지지를 철회했다. 물론 2010년 총선을 앞두고 데이비드 캐머런을 막기 위해 노동당과 녹색당을 지지하였다.실제 결과에서는 졌지만

  • 그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은 아니지만,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몇 안되는 인사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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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 2번 헌액되었다. 필 콜린스나 다른 멤버들보다도 더 먼저 헌액되었다.[2] 이 시기 필 콜린스와 사이가 안좋았던 피터 가브리엘은 필 콜린스와 그럭저럭 화해를 하며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영향도 어느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 정확히는 Peter Gabriel III에서 월드 뮤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4] 재미있는건 피터 가브리엘이 Biko를 발매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 폴 사이먼이 남아공 음악에 푹 빠져 남아공에 방문까지 하였던 일로 아파르트헤이트 동조자냐며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5] 그야말로 "독일 음반"이라는 뜻이다. "아인 도이체스 알붐" 정도로 발음.[6] 필 콜린스는 평론가 평을 박하게 받은 가수로 유명하다. No Jacket Required와 같은 대중적으로 엄청나게 성공한 음반조차 유력지들의 명반 리스트에서 이름을 찾기 힘들다.[7] 1-4집은 앨범명을 붙이기 싫어해서 이름이 없다. 주로 알파벳 숫자를 붙이거나 앨범 아트를 따서 부른다.[8] 가사 내에서 제네시스 멤버들과의 불화, 상업적 성공과 음악성 사이에서의 갈등 등이 은근슬쩍 드러나는 편이다.[9] 강성 좌파 성향인 피터 가브리엘과 강성 우파 성향인 필 콜린스가 아파르트헤이트 문제에서 한 목소리를 낸 점이 하나의 시사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10] 반대로 그의 숙적이자 라이벌인 필 콜린스는 강성 보수당 지지자이다.[11] 영문 위키에 따로 정치 성향에 대한 탭이 있을 정도다.[12] 북아일랜드는 영국이나 아일랜드 양국 모두에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왠만한 셀럽들은 모두 언급을 피한다. 폴 매카트니존 레논은 공개적으로 북아일랜드 독립을 지지했지만 이 두명은 아일랜드계 출신이고, 특히 폴 매카트니의 고조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감자 기근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피터 가브리엘과는 다른 케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