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궁사건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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逼宮事件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북경정변의 발생
3.2. 자금성 내부의 분위기
3.3. 자금성 점거
3.4. 반응
3.5. 녹종린과 푸이의 만남
4. 여담
5. 매체에서
6. 참고문헌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24년 11월 5일,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장악한 펑위샹선통제와 청 황실의 일원들에 대한 예우를 폐지하고 이들을 자금성에서 퇴출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편집]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조정이 무너진 뒤에도, 선통제를 비롯한 구 황실은 기본적인 예우를 보장받았다. 황실은 청나라 소조정이란 명목상의 조정을 이끌고, 자금성에서의 생활을 유지하며, 황실 인사들은 기본적인 예우와 사유 재산을 보장받았다. 중간에 황실에게 주권을 돌려주자는 복벽운동(장훈복벽)이 실패했으나 이 때만 해도 청 황실 인사들은 큰 처벌을 받지 않고 기존의 예우를 계속 받을 수 있었다.

1924년 9월, 동북 지방을 지배하던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과 대총통 차오쿤을 중심으로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우페이푸직예군벌 간의 2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10월 24일,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육군검열사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고 북경을 장악했다. 11월 2일 차오쿤은 하야했고 우페이푸도 패배하여 강남으로 도주하면서 봉천군벌이 승리했다.

한편 난데없이 천하의 주인이 바뀌어 북경의 정세는 대단히 혼란스러웠고 청조가 다시 복고된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펑위샹은 오히려 선통제자금성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하고 11월 4일 섭정내각 회의에서 청실을 자금성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3. 전개[편집]



3.1. 북경정변의 발생[편집]


1924년 10월 17일, 선통제광서제의 황비인 단강태비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심에 빠져 있었다. 위독하던 단강태비는 10월 21일 사망했고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 바깥의 군벌들간의 내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23일, 아침 북부에서 병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지안문이 폐쇄되고 전화도 불통이 되었다. 겁에 질린 베이징의 부호들은 리츠 호텔을 비롯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외국인 지구로 피난하고 있었고 베이징을 점거한 펑위샹의 부대가 자금성 맞은편의 경산을 점령했다. 선통제를 알현한 레지널드 존스턴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묻자 선통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들은 허락도 없이 그곳으로 갔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뭘 하려는 건지 모르겠소. 그런데 소영은 그들에게 차와 음식을 보냈습니다. 손님으로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죠."


존스턴이 군대가 감사의 말을 표했냐고 묻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더 달라고 했습니다."


선통제와 존스턴은 퇴수산의 어경정에서 망원경으로 경산의 군인들을 관찰한 다음에 양심전에서 점심을 먹으며 베이징의 혼란스러운 소식에 대해 들었다. 대총통 차오쿤이 몰락하고 우페이푸가 패배하였다는 흉흉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자금성 내부에는 공포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단강태비의 장례식은 대폭 생략되어 간소하게 처리되었는데 경산을 점령한 손악의 군대는 자금성을 지키는 호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연일 도발하였다. 존스턴은 이들이 싸움을 개시할 구실을 찾는 것으로 보였다고 회고했다.


3.2. 자금성 내부의 분위기[편집]


11월 2일, 존스턴은 선통제, 선통제의 장인인 영공, 내무부 총관 정샤오쉬와 함께 회의를 열었다. 영공과 정샤오쉬는 펑위샹이 선통제를 겨냥한 또 다른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믿을만한 정보를 들었다면서 선통제를 공사관 구역으로 피신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통제와 존스턴도 동의했지만 자금성으로 통하는 모든 문은 손악의 군대에게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고 호군도 자금성 내부로 후퇴한 상태였다. 이에 선통제는 중요한 서류와 귀중품 꾸러미를 존스턴에게 맡겨 안전한 장소에 보관해달라고 부탁했고 존스턴은 이를 홍콩상하이은행에 맡겼다. 선통제는 또한 단강태비에게 조의를 표한 존스턴에게 단강태비의 유품 중 하나를 골라가라고 하면서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비전에 두면 전부 도둑맞을 게요. 사부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 태비를 추억하는 물건으로 간직하십시오."


이에 존스턴은 녹색 비취 반지 하나를 골랐다.

11월 3일에 이르자 상당수의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달아나거나 숨어버렸고 남은 사람들도 상복을 입고 분주히 돌아다니느라 자금성 안의 분위기는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11월 4일, 존스턴과 선통제는 황후가 기거하는 저수궁을 방문한 후 어화원에서 황제를 탈출시킬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정샤오쉬는 선통제를 변장시켜서 공사관 구역으로 피신시킬 계획을 꾸몄고 11월 5일에 자금성 밖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3.3. 자금성 점거[편집]


11월 5일 아침, 녹종린이 지휘하는 펑위샹의 부대가 자금성 안으로 쳐들어가서 신무문을 점거해서 봉쇄했다. 이들은 9시에 호군을 무장해제하고 해산시킨 다음 선통제의 초소까지 쳐들어왔다. 정부 측 대표로 녹종린, 장벽, 리스쩡이 나섰는데 장벽이 군경 몇명이 필요하겠느냐고 묻자 녹종린은 20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놀란 내무부대신 소영이 나타나자 녹종린은 국무원에서 통과된 수정청실우대조례, 즉 청황실 우대조건의 수정판이라는 문서를 내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청황제는 공화국과 그것을 구성하는 다섯 민족의 정신에 진심으로 공감을 표하고자 하며, 공화국의 여러 제도를 더 이상 위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만주 황실 우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제1조. 금일부터 선통 황제는 황제의 존호를 영구히 폐지한다. 이후에는 법률상 공화국 시민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를 향유하기로 한다.
제2조. 이 조건으로 수정한 이후부터 공화국 정부는청조 황실에 대해 50만 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베이징의 빈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공장 설립에 200만 달러를 지출한다. 만주 기인 출신의 빈민은 고용을 우선한다.
제3조. 청조 황실은 원 '우대 조건'의 제3조에 따라 금일 자금성을 떠나야 한다. 이후 자유롭게 주거를 선택할 수 있으나, 그들을 보호할 책임은 공화국 정부가 계속 지기로 한다.
제4조. 청조 황실의 종묘나 황릉에서 거행되어 온 재례는 영구히 유지하며, 공화국은 종묘와 황릉을 적절히 보호하기 위해 경비병을 파견하기로 한다.
제5조. 청조 황실의 사유재산은 황실에 귀속되며 황실이 전적으로 향유한다. 공화국 정부는 그 재산을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 단, 모든 공공 재산은 공화국 정부에게 귀속하기로 한다.
민국 13년 11월 5일, 녹종린, 경조윤[1], 왕지상, 장벽[2].

소영은 크게 놀라 리스쩡에게 "당신은 옛날 재상 이홍조의 아드님이 아니신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소?"라고 물었으나 리스쩡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소영은 다시 녹종린에게 "당신은 옛 재상 녹전림의 일가가 아니신가? 왜 우리를 이렇게 압박하는가?"라고 따졌다. 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녹:"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여기에 온 것이 국무원의 명령을 집행하러 온 것이며 민국을 위함과 동시에 청실을 위한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종용할 생각을 마시오."

소:"우리 대청이 입관 이후 도량이 넓게 정시를 하였고 백성에게 미안한 일을 한 적은 없소. 우대조건이 아직 있는데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가?"

녹:"당신이 말하는 것은 청실의 입장이오. 그러나 대청이 입관한 후의 양주십일과 가정삼도는 백성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오.[3]

더욱이 장쉰복벽하여 민국을 전복시켰고 우대조건은 일찍부터 청실이 파괴하였소. 당시 전국 군민이 일치하여 요구하길 복벽의 괴수를 응징하도록 하였는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중요한 현안이오. 최근 섭정내각이 성립되어 각 방면에서 속속 복벽의 괴수를 응징하라고 요구하고 민의가 격분하여 직접 조치하면 청실에 불리한 행동이오. 현재 궁내외에는 이미 군경들이 가득하고 그 기세가 흉흉하고 손을 보려고 하고 있소. 만약 우리들이 잠시라도 지체하면 지금 난리가 날 것이오."


소영은 선통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어떻게든 상황을 돌려보려 했지만 녹종린이 "대포 쏘는 것을 20분만 미뤄라."라고 소리 치며 위협하자 결국 청실은 자금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선통제는 차분했지만 두 태비는 자금성을 떠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강력히 저항했다. 내무부총관을 비롯해 선통제의 심복들도 크게 분개했다. 하지만 총 앞에 저항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시종 한 사람과 한두명이 운반할 수 있는 개인물품을 동반하고 차에 타서 자금성을 떠났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병사가 한명씩 운전수 옆에 탔으며 자동차 바판 위에도 병사가 두명 탔다. 선통제는 순친왕부로 이동했고 펑위샹의 병사들이 순친왕부를 포위하고 선통제의 외출을 막으며 감시했다. 순친왕부에 도착한 선통제에게 녹종린이 물었다.

"이 이후부터 당신은 평민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황제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중화민국은 황제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고 있고 우리들은 황제를 대하는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선통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이미 수정한 우대조건을 받아들이기로 답변을 했으니 당연히 다시 황제가 될 수 없소. 한 사람의 평민이 되길 원하오."


그러나 녹종린이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들은 평민에 대해서 당연히 보호합니다."


한편 아침을 먹다 재도 패륵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존스턴은 크게 놀라 자금성에 전화를 했지만 이미 전화가 모두 끊긴 후였다. 10분 후에 패륵이 차를 타고 존스턴의 집을 방문하자 존스턴은 패륵과 같이 차를 타고 자금성으로 갔다. 하지만 병사들이 엄중히 감시하며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존스턴은 자신의 명함을 주며 자금성에 출입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고 병사가 상관에게 보고하러 간 사이에 패륵이 속삭였다.

"만약 저들이 그대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면, 나를 그대의 하인이라고 말해주시오."


하지만 병사들은 존스턴의 출입을 금지했고 존스턴은 차를 돌려 외국 공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먼저 외교단 단장인 네덜란드 공사 오우덴데이크를 찾아간 존스턴은 영국 공사 로널드 맥클리와 네덜란드 공사 오우덴데이크를 만나 자금성에 펑위샹의 군대가 침입한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이어 일본 공사 요시자와 켄키치도 돕겠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한편 황제, 황후, 태비들이 모두 살해되었으며 펑위샹이 만주 황족들을 모조리 색출해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청나라의 왕공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수십명의 청나라 왕공들이 공사관 구역으로 몰려가 도움을 청했고 비어있던 독일 공사관 경비대 건물이 임시 숙소가 되었다. 이후 오우덴데이크, 맥클리, 요시자와가 중화민국 외교부를 방문한 결과 선통제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사들의 질의에 신임 외교총장 왕정팅은 중국 내정에 관한 문제이니 외국 공사단이 개입할 권리가 없다고 답변했으나 공사들이 황제가 모욕과 학대를 받고 있지 않는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확인할 권리가 있다고 맞서며 만약 황제가 학대당한다면 강하게 항의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왕정팅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보증하며 중국의 여론이 청실의 축출을 요구했다고 해명했다.

오우덴데이크에게 선통제의 신변에 대한 소식을 들은 존스턴은 즉각 순친왕부로 가서 선통제를 만났다. 선통제는 침착했으며 순친왕은 어쩔 줄 몰라하며 "황상께서 놀라시지 않도록 말씀드려 주게."라는 말만 반복했다. 존스턴이 선통제에게 자신이 순친왕부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원하냐고 묻자 선통제는 처음에는 그렇게 해달라고 하다가 마음을 바꿔 외국 공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공사관 구역으로 가달라고 했다.


3.4. 반응[편집]


청 황실에 굉장히 우호적인 레지널드 존스턴의 경우, 점잖은 공화주의자들까지도 선통제에게 내려진 처분에 대해 분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반응들을 인용한다.

정부가 멋대로 퇴위 협약을 취소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컸다. 그 영향은 우페이푸 원수를 등 뒤에서 찌른 행위보다도 더 컸다. (...) 정부의 행동이 옳다고 인정한 사람은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대사관과 자주 연락을 취하고 있던 중국 정치가들 그리고 쑨원 박사였다.

불명예스러운 행위의 단초를 연 것. (...) 이른바 중화민국의 파란만장한 역사 가운데 가장 불미스러운 한 장면.

중국 사이비 공화주의의 추태를 보임으로써 군주주의에 대한 동정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그 소리는 제정파의 음모가나 책략가가 주창해서 커진 게 아니라, 공화국의 권위를 세우기는커녕 지금까지 군벌 집단 간의 투쟁 밖에 낳지 못한 정치적 실험에 대한 반발로서 커졌기 때문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야생마를 길들일 때에는 재갈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로, 군주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탕사오이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만약 중국이 공화국과 청조 황제의 관계를 바꾸고 싶다면 공정하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 우대 조건에 동의한 것은 만주 황제가 퇴위함으로써 혁명 기간을 연장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인명을 구하고 우리에게 국가 재건에 전념할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다. 열렬한 혁명론자 왕징웨이는 청조 황실의 여러 권리를 가장 열심히 변호했다. (...) 우리의 개인적 견해가 어떠하든, 중국 국민의 대표로서 우리는 청조 황제와 엄숙한 협약을 체결한 것이며 새로운 협정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이 협약을 준수해야만 한다. (...) 그러나 펑위샹 장군은 중국 민족의 윤리적 토대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도덕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중국에게 정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 나라에 양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 당신은 이 신문을 통해 모든 외국인들에게 말해줄 수가 있다. 근래에 일어난 여러 사건은 정치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를 대표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추악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중국 국민의 윤리적 특질은 더 추악한 상황에 직면해서도, 늘 그랬듯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후스도 왕정팅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퇴위 협약은 상호 동의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으며, 핍궁사건은 중화민국의 가장 불미스러운 행위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며 반대를 표명했다. 돤치루이 역시 반대를 표명하며 펑위샹에게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다.

황궁을 폐쇄하고 만수산 등을 압박하여 이동했다는 말이 들립니다. 청조 황제의 퇴위는 스스로 퇴위한 것이지 전쟁의 결과가 아니오. 비록 만수산을 옮긴다는 조항이 있기는 하나 후에 상의할 문제고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될 것이오. 억지로 우대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점이 없다면 천하가 모두 믿도록 알리는 것이 어떻겠소? 바라건대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하시길 바라오.

하지만 펑위샹은 묵살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 우리가 베이징으로 돌아와 부끄럽게 생각할 일은 한것이 없소. 다만 푸이를 쫓아낸 것은 진실로 천하에 알리고 후세에 알리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소.

섭정내각은 이를 무시하고 청실선후위원회를 조직, 리스쩡을 위원장으로 삼고 왕징웨이, 차위안페이, 녹종린, 장벽, 범원렴, 유동규, 진원, 심겸사, 갈문준, 소영, 기령, 재윤, 보희, 나진옥 등 14인을 위원으로 삼아 유물 등록, 보관, 훼손 방지를 맡게 하였다.


3.5. 녹종린과 푸이의 만남[편집]


11월 8일 오후 3시, 녹종린과 경찰총감 장벽이 내무부대신 소영의 안내를 받아 푸이와 만났다. 녹종린이 먼저 물었다.

"부 선생께서는 정부에서 수정한 청실 우대조건에 대해 어떤 의견이십니까?"


푸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본인은 황제 존호의 취소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고 유쾌하게 생각하오. 왜냐하면 저는 궁정의 그러한 부자유한 생활에 일찍부터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소. 오늘부터 본인은 중화민국의 자유로운 평민이 될 수 있으며 저는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자 녹종린이 다시 물었다.

녹:"부 선생께서는 장래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푸:"개인의 장래에 관하여 지금 어떤 계획이 없소. 본인은 다만 북경의 어느 한곳에 거주하고 옛날처럼 독서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래에 정부에서 허가를 해주신다면 본인은 해외에 유학하여 공부를 할 생각입니다."

녹:"부 선생이 한 이야기들은 좋습니다. 거주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정부에서 반드시 좋은 곳을 골라 안배할 것입니다."


이어 장벽이 말했다.

장:"부 선생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들은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당신이 신속하게 해결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옥새에 관한 문제인데 부 선생은 이미 황제의 존호를 취소한다는 데 동의하셨기에 당시에 그 옥새를 보관한다면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마땅히 황실의 사유재산을 전부 내놓으시고 장래 정부가 자세한 조사를 거친 후에 만약 당신에게 돌려주어야 겠다고 판단되면 정부는 다시 당신께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푸:"본인은 옥새 같은 것은 가져오지 않았소. 만약 있다면 갖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반드시 그것을 넘겨주겠소. 황실의 사유재산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내무부에서 관리해 왔기 때문에 나는 잘 모르오. 소영이 지금 이 자리에 있으니 그를 불러 황실의 사유재산을 내놓도록 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장벽은 몹시 불쾌해하며 따졌다.

"황실 사유재산은 이미 부 선생께서 전부 내놓겠다고 대답을 해놓고 왜 대대로 내려오는 옥새는 넘겨주려고 하지 않소?"


당황한 순친왕이 청나라 황실은 각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새 옥새를 깎아서 썼지 대대로 내려오는 옥새는 없다고 해명했지만 장벽은 더욱 강경하게 전국옥새를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황족들은 전국옥새는 청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에 이미 잃어버려서 자신들은 본 적이 없다고 한참 해명했고 그제서야 녹종린과 장벽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황족들은 통곡하며 반드시 펑위샹과 녹종린을 비수로 죽여 한을 풀겠다고 울부짖었고 선통제가 비수를 뺏고 달랬다고 한다.

선통제는 정샤오쉬, 진보침과 함께 11월 29일, 동교민항의 일본 공사관으로 도주했고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아 1925년 2월 25일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떠났다.


4. 여담[편집]


장쭤린과 돤치루이는 핍궁사건을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청실 우대조건을 되살리려 딱히 노력하지도 않았고 정작 청실 우대조건을 부활시킨 것은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통해 베이징을 점령한 장제스였다. 하지만 푸이는 황릉 도굴 사건 때문에 국민당에 치를 떨게 되어 장제스의 제의를 거부하고 일본에 붙어 만주국의 괴뢰황제가 된다.


5. 매체에서[편집]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묘사되는데 실제 역사와는 상당히 다르게 나온다. 우선 단강태비의 사망이나 북경정변의 발생 등은 전혀 다뤄지지 않고 레지날드 존스턴이 심판을 보는 가운데 선통제가 황후와 테니스를 치다가 펑위샹의 부하들이 몰려와 만주족 쥐새끼는 자금성에서 나가라고 위협해서 쫓겨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적인 각색인듯.


6. 참고문헌[편집]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자금성의 황혼, 레지널드 존스턴, 돌배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마지막 황제의 비사, 아이신기오로 푸제 등 지음, 지영사.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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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이징 시장.[2] 베이징 경찰총감.[3] 청나라가 중원에 쳐들어와서 양주와 가정에서 각각 10일과 3일 동안, 청나라 군대에 저항하는 한족 백성들 수십만 명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