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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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호은부와 백유환의 암살
3.2. 일본의 개입
3.3. 손영근과 일본군의 교전
3.4. 가중되는 일본의 압력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35년 5월, 화북 자치를 주장하던 친일파 언론인들이 톈진에서 암살당한 것과 일본군이 하북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항일 의용군인 손영근 부대를 공격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을 위협하여 하매 협정을 체결한다.


2. 배경[편집]


1933년 당고정전협정으로 동북사성에 대한 군사적인 지배를 사실상 인정받은 일본 제국은 장성 이남의 중국 영토에 탐을 내며 화북의 5개 성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켜 제2의 괴뢰국으로 삼으려는 화북분리공작에 한창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막대한 공작비를 들여 돤치루이, 쑨촨팡, 우페이푸, 스여우싼, 장징야오, 바이젠우 등 몰락 군벌들을 매수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친일 중국 언론인들에게 자금을 주어 중국 국민당을 화북에서 축추하여 화북에서 자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자치 운동을 선동하는 책동을 벌였다.


3. 전개[편집]



3.1. 호은부와 백유환의 암살[편집]


일본이 화북분리공작을 한창 책동하던 시기, 톈진에는 호은부와 백유환이란 친일 언론인이 있었다. 우선 호은부는 절강성 사람으로 1934년 12월 톈진에서 <국권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호은부는 국권보 창간과 더불어 스스로를 국권당 총재로 칭하고 만주국으로 건너가 화북자치운동을 선전하고 다녔으며 1935년 4월 29일, 돌아와 이름을 신죽군으로 바꾸고 북양호텔에서 투숙하며 계속 언론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유환은 호북성 사람으로 원래 혁명가였으나 국민혁명 이후 반장파에 가담하였다. 이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친일 성향이 되었고 1931년 톈진으로 귀국하여 일본 조계지에서 <운보>를 창간하였다. 국민정부가 운보를 폐간시키자 백유환은 신문 이름을 <진보>로 고치고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여 친일 언론활동을 하였다. 어느 시점부터인진 정확하지 않으나 만주국 중앙통신사 기자 직위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모두 일본군의 수당을 받고 일본군의 비위에 맞는 선전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5년 5월 2일 오후 23시, 북양 호텔에서 괴한이 침입하여 호은부에게 총탄을 발사했다. 호은부는 4발의 총알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손쓸수 없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상태라서 다음날 사망했다. 다섯시간 후인 5월 3일 새벽 4시, 일본 조계지 의덕리 22호에 있는 백유환의 자택에도 괴한이 침입하여 취침 중이던 백유환에게 세발의 총탄을 명중시켰다. 백유환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시신 검시 과정에서 그의 상의 주머니에서 미나미 지로 관동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으며 일본 여권과 일본 명함이 증거물로 수집되는 등 이들이 일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한편 톈진 총영사 가와고에 시게루는 5월 5일 107호 전문을 보내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암살된 것으로, 이번 범행에 뭔가 정치적 사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상상할 수 있다."라고 외무성에 보고했으며 5월 31일, 히로타 고키 외상에게 "범죄 지휘자는 상하이 보안처장 겸 남의사 중앙 총부 집행부장 양호이다. 양호는 4월 25일, 상하이에서 베이핑으로 와 베이핑의 중앙 헌병 제3단 단장, 남의사 화북구 총부 집행부장 장샤오셴 및 기타 사람들과 여러 연락 교섭을 진행한 후 5월 3일 다시 남하하였다. 이 일은 대체로 확실한 것이었다. 이 사이 양은 자신과 장의 부하 여러 명을 천진으로 오게 하여 범죄 혐의자와 더불어 고의로 서로 때리는 척 하도록 하였다(듣건데 양과 장 본인도 일찍이 톈진으로 왔다고 한다). 범죄 하수인과 협조자는 이미 대체로 목표가 있었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이 사건의 배후를 남의사로 지목했다.

이에 국민정부는 전국 중등 이상 학교장 및 학생대표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의한 자작극임을 주장하였다.

당시 우리 중국과 일본은 아무런 분쟁도 없었으나, 일본은 일본 조계 내의 신문사에서 백과 호가 '남의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여 이를 구실로 삼았다. '남의사'는 애초 일본인이 날조한 것으로 우리는 이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조계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조계, 그 조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 정부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후일 중앙군 철수, 당부 철폐라는 사태로 몰고 갔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이 대륙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계획해낸 음모였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국민정부는 지나주둔군 참모장 사카이 대좌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3.2. 일본의 개입[편집]


5월 7일, 베이핑 주재 일본 공사관 부무관 타카하시 탄 소좌는 하북성 정부의 진동승(陳東昇) 참의와 외교부 베이핑 주재 특파원 정석경(程錫庚)에게 개별적으로 회담하여 조계 내의 테러와 중국 정부의 관계에 대해 경고하였다. 또한 이날 오후 관동군 사령부 소속 산해관 특무기관장 기가 세이야 대좌가 하북성 주석 우학충과 회담하여 헌병 제3단을 구체적으로 들먹이며 같은 경고를 하였다.

5월 11일, 타카하시 소좌가 허잉친을 방문하여 호은부와 백유환의 죽음에 대해 항의했다.

"이번 일본 조계 내에서의 백,호 암살 사건에 대해 일본 측은 일본 조계의 치안을 문란케 한 상화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하룻밤에 두 사람이 암살된 것은 지극히 계획적인 일로, 국가단체나 유력단체의 소행이다. 하북성 정부나 톈진시 정부는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 조사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일본 측은 현재 증거를 수사 중에 있는데 실마리만 잡히면 그 책임자를 철저히 규명할 것이다."


이에 허잉친은 "백, 호의 피살 사건은 일본 조계 내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그 진상을 밝힐 방법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날 타카하시는 국민정부 외교부 주 베이핑 외교특파원인 정양경과 회견하며 "백, 호를 암살한 사건은 남의사, 헌병특무대 및 청홍 각 방과 모두 비밀 관계가 있어 기성부 당국은 단서를 알고 있으면서 사건 후 거짓으로들은 바가 없다하니 아마 엄격히 제지하지 않으면 세태를 확대시킬까 두렵다."라고 위협했다.

5월 16일, 타카하시는 다시 공개 담화를 발표하여 "지난번 톈진에서의 암살 사건은 장제스 정권이 일본에 대해 이중 정책을 하였다는 뚜렷한 증거이며, 또한 일본 조계의 경찰 행정을 유린하는 중대 사건이다. 이 사건의 진상은 현재 우리 외교 기구와 톈진 주둔군, 관동군, 베이핑 무관 등이 협력하여 조사 중에 있으므로 곧 수사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톈진 주둔군 참모장 사카이[1]가 돌아오면 곧 중대한 결의로써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마련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3.3. 손영근과 일본군의 교전[편집]


한편 열하성 준화현에서는 항일구국군 군장을 칭하는 손영근의 부대 3~5천명 가량의 병력이 주둔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손영근은 원래 열하사변이 발생한 직후인 1933년 3월, 자신의 고향인 흥륭현 황화리에서 농민들을 조직하여 반일 폭동을 일으켰던 인물이었다. 그는 <민중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1934년 2월, 중국 공산당 화동특위가 특위위원 왕평륙을 손영근 부대에 파견하여 그들의 항일 투쟁을 지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게 했다. 손영근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 민중군을 항일구국군으로 개편하여 자신을 군장으로 칭하고 산하에 2개 군단을 거느려 수천명의 부하를 지휘했다. 이들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100여 곳의 일본군 거점을 습격했으며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합쳐 1만 5천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이들을 수차례 토벌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준화현은 당고정전협정에 따라 비무장 지대로 설정되어 일본군도 국민혁명군도 진입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손영근은 이 점을 노리고 일부로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상태였다. 1935년 5월 초, 일본군이 다시 한번 손영근 토벌을 시도하자 손영근은 부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준화현 동북 일대에로 옮겼다. 이에 5월 5일 오후 3시, 열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준화현의 중국 보안대대에 알려 자신들이 손영근 부대를 토벌할 것이니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장성 25리 뒤로 철수하여 나문욕 일대의 방비를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요청했다. 보안대는 이를 수락하였으나 25리를 철수하면 준화성 전체를 일본군에게 내주는 격이라서 15리만 철수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나문욕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가 다시 삼도하로 옮겼는데 준화현 보안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5월 15일, 일본군과 국민정부가 방비 문제를 협의하던 사이 손영근 부대가 장성으로 들어가 준화현장 하효이에게 탄약을 보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효이는 이를 거절하고 보안대를 풀어 일본군과 함께 손영근을 공동토벌하였다. 이에 손영근은 더 버티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5월 20일 새벽, 다시 장성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이때 일본군 스기하라 혼성여단이 다시 손영근을 추격하면서 2시 반에 준화성 일대에서 중국군 보안대와 함께 손영근을 포위했다. 결국 5월 24일, 손영근을 비롯한 항일구국군은 포위망을 뚫는 데 실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3.4. 가중되는 일본의 압력[편집]


분명 국민정부는 손영근의 부대를 일절 돕지 않고 일본군에게 협조했지만 일본군은 느닷없이 준화현장 하효이가 손영근을 도와주었다고 주장하며 격렬히 항의, 5월 20일 주중 일본 대사관 무관 타카하시 탄(高橋坦) 소좌는 허잉친에게 관동군의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 1. 이번에 준화현장 등은 확실히 손영근 도적 집단을 비호한 사실이 있다. 과거 국경 부근의 중국 관리도 열하 지역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도적 집단을 비호한 적이 있는데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관동군은 그 책임을 추궁하는 바이다.

  • 2. 관동군은 수개월 동안 비록 열하 지역을 어지럽히는 손영근 도적 집단을 제거하였지만 그러나 중국 관 측의 비호 때문에 걸핏하면 중국 영토 내로 도망가 숨어버려 소멸시킬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준화 일대로 들어가 철저한 소멸을 기도한 것이다.

5월 21일, 화북 주둔군 고급참모 이시이(石井), 화북 주둔군 헌병대장 이케가미(池上) 등이 하북성 정부주석 우학충과 톈진 시장 장연악에게 면회를 신청하여 우학충에게 "네가 암살범이다!", "바보 자식!"이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장정악이 원흉이고 우학충은 그 하수인이요 추종자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관동군 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일본무관 가게사 사다아키는 국민정부에게 장정악과 우학충을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계속된 위협에 톈진 시당부의 위원이 전부 결석하고 장정악은 피신하였고 우학충도 경계를 강화하였다. 결국 우학충은 5월 25일에 7월 1일부터 하북성 정부를 바오딩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하고 자신도 6월 3일, 바오딩으로 이동하였다.


4. 결과[편집]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5월 29일, 타카하시와 사카이가 허잉친과 국민정부 행정원장 베이핑 정정회(政整會) 비서장 유가기에게 경고와 더불어 화북에서 국민정부의 영향력을 사실상 제거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가해왔다. 국민정부는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타협 끝에 하매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하매 협정의 체결 과정과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5. 참고문헌[편집]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 일본 근현대사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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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사카이 타카시 대좌는 참모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간 상황이었으며 5월 14일 시점에 다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