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알 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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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ssan Al Banna.jpg
이름
아랍어 : حسن البنا
영어 : Hassan Al Banna
1. 개요
2. 성향
3. 생애
3.1. 초기이력
3.2. 무슬림 형제단 창당
3.3. 과격화
3.4. 최후와 이후
4. 여담



1. 개요[편집]


하산 알 반나는 이집트의 이슬람 교육가이자 이맘으로 무슬림 형제단의 창립자로 잘 알려져있다. 1928년 그가 설립한 당시 초창기의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쉬운 종교로 개혁해야 한다는 좋은 취지로 시작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좋은 취지로 시작되었던 무슬림 형제단은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 설립 이후 1949년 암살당했다.


2. 성향[편집]


  • 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아랍 민족주의에도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공산주의가 당시 영국의 사실상 식민지 상태이던 이집트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순니파 샤피이파 법학파에 속해있었으나 라시드 리다(살라프파의 시조가 되는 사상가)의 영향으로 기존의 마드하브에 속한 보수 울라마들에게 비판적인 편이었다. 또한 레닌주의에서 전 세계 노동자와 농민들이 단결하여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한다는 개념을 이슬람주의에 도입하여 “모든 인류에게 현대식으로 이슬람을 전파하여 전세계가 이슬람화되도록 해야 한다”는 교리를 개창하고 가다듬었다.[1] 이런 주장은 당시에는 영국 식민지 상황에서 자존감이 저하되어 있던 무슬림들에게 적극성을 부여해주는 효과가 있었으나, 이집트 독립 이후에는 이슬람주의가 민주주의를 숙주로 삼아 신정 정권을 설립하는 전략을 세우는 배경이 되어 궁극적으로 이집트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 이슬람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쉬운 종교로 개혁한다는 취지는 특히 진보적인 대학생들의 지지를 받았고, 초창기 무슬림 형제단이 빠른 속도로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해당 취지는 사이드 쿠틉의 이슬람 근본주의 율법 강요나 사후 이란 이슬람 신정 공화국 같은 이슬람주의 집단에서 실사판 1984를 실현하여 무슬림들의 행복권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오용되었다. 물론 이는 하산 알 반나 본인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이후 사이드 쿠틉을 비롯한 무슬림 형제단 멤버들이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신정 민주주의 정치 이론을 수용한 것이 원인이었다.

  • 아랍인 답게 반서구주의가 있긴 했으나 서구 학문을 이슬람 세계에 도입하는 자체에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대신에 이집트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유럽을 모방하여 유럽식 극장과 캬바레 등이 유행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더 이상 이집트가 세속화되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는 당시 이집트 농민층의 보수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선배인 무함마드 압두에 비하면 보수적이긴 했으나 이후 무슬림 형제단의 아이돌로 떠오르는 사이드 쿠틉에 비하면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 서구식 교육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서구식 사고방식은 "유물론이 이슬람 전통적 사고 방식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며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3. 생애[편집]



3.1. 초기이력[편집]


1906년 10월 14일 카이로 근교 마흐무디야라는 소도시에서 마스지드 교사로 일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반나의 아버지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한 뿌리인 한발리파 이맘으로 청빈하면서도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성직자인 아버지 밑에서 반나도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한발리파 뿐만 아니라 수피즘에도 관심을 갖고 수피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하산 알 반나 본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근본주의적 경향을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듯, 소년이었던 시절에 목수 한 명이 그리스나 고대 이집트 조각상을 본따서 나체 목조 조각상을 만들어 배에 장식하자 이를 경찰에 신고하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써놓았다.(...)

반나는 이렇게 신앙심이 투철했지만 정치적으로도 매우 조숙했던 듯, 10대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13세에 와프드당이 1919년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해 일으킨 봉기(1919년 이집트 혁명)에 참가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집트인들은 영국이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이집트를 독립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을 져버리고, 독립 탄원을 요구한 와프트 대표단의 사드 자글룰을 추방하는 강수를 둔 것에 대한 반발로 벌어진 것이었다. 자글룰이 추방당하자 분노한 이집트인들은 무슬림과 콥트교도를 가지기 않고 반영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하산 알 반나는 당시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학생 중 한명이었다. 혁명은 성공하여 영국은 이집트의 독립을 승인하고, 이집트는 새 헌법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헌법에 의해 합법성을 보장받은 이집트 왕정은 영국에 매우 예속적이었다.

1924년 반나의 가족은 카이로로 이주하였다. 이때 카이로 대학교의 전신인 다르 알울름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기관은 서양식 교육기관이었고,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의 진학을 반대했으나, 그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1차대전의 와중에서 맥없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서방식 제도의 우월성을 깨닫고 신식공부를 하려고 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지내게 된 반나는 고향의 수피들과 인연을 끊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권에서는 무함마드 압두라시드 리다이슬람 모더니즘 학자들이 창건한 알 마나르라는 잡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반나 역시 해당 잡지를 탐독하면서 학식을 쌓기 시작했다.


3.2. 무슬림 형제단 창당[편집]


대학을 졸업한 이후인 1927년 교사로 발령받아 이스마일리아로 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이곳은 수에즈 운하의 본부가 있는 곳이었다. 당시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관리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폐해를 여실히 보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운하 수입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가운데, 그 아래서 일하는 이집트인들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지의 많은 이집트인들은 정신적 위안을 갈망했고, 이때 그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설교로 이들을 끌어모으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이 바로 이슬람의 부흥이었다. 즉 샤리아의 완전한 부활이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수에즈 운하 회사에서 가혹한 노동을 하던 6명의 노동자가 그를 찾아왔고, 이들은 반나를 스승으로 삼아 종교모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무슬림 형제단의 기원이다. 그의 명망과 연설실력에 힘입어 형제단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당시 무슬림 형제단은 훗날의 과격성과는 달리 순수한 종교운동에 머물렀으며, 이 때문에 세속권력(파루크 왕가)의 견제를 받지 않고,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6명으로 시작한 형제단은 설립 10년이 지난 1930년대 후반에는 50만명의, 반나가 죽기 직전에는 200만명의 회원 (당시 이집트 총 인구가 2천만이었다) 을 가진 이집트의 전국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반나는 주로 개인적 도덕성과 신앙에 대해 설교를 했고, 정치 현안이나 이슬람 타교파와 교리차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 방식으로 급격한 세력 확장의 와중에서 야기될 수 있는 갈등을 피해갔다.

하산 알 반나는 샤리아를 실행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방법으로 개인의 수양이나 신앙을 중시했다. 즉 세속권력이나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지하드가 아니라 개인 내면의 비이슬람적 요소를 청산하는 것을 중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내면의 지하드가 무기를 통한 지하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반나는 이후 무슬림 형제단을 지도하는 쿠틉과는 달리 폭력적인 성향은 없었고 테러도 반대했다. 그리하여 무슬림 형제단은 당시만 해도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무슬림 형제단이 왕정에 맞서는 동맹자로 선택한 와프드(Wafd) 당은 세속주의,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당이었다.


3.3. 과격화[편집]


무슬림 형제단의 뱡항을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 하나 생겨났으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아랍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무슬림 형제단과 반나를 급격히 급진화시키게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에 이주하여 정착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1차대전 이후에는 영국이 적극 지원하여 정착촌은 더 커지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현지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충돌을 불렀고, 영국은 유대인의 편을 들면서 문제는 심각해졌다. 이 때문에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봉기했고, 5천여명이 사망했다. 대부분이 무슬림인 아랍인 동포들이 유대인과 영국 제국주의 세력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본 무슬림 형제단은 급격히 과격화되었다.

1940년대 나치 독일은 이런 무슬림 형제단에 접근하여 이집트 내의 반영운동을 사주했다. 인도의 독립 운동가 찬드라 보세가 일제와 손을 잡는 과오를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로 하산 알 반나 역시 나치를 옹호했다. 진영논리에 급급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아랍의 땅에서 추방하기 위해서는 나치와 손을 잡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민 알후세이니가 어디를 가든 그 길에는 환영 인사가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요, 인간의 기적이다. 젊은이들, 내각의 장관들, 부유한 자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이라크, 튀니지, 모로코, 트리폴리의 왕자들이 이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어떠한 일을 행할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 이 영웅은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시오니즘과 맞서 싸웠다. 히틀러는 사라졌지만 아민 알 후세이니는 그의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 하산 알 반나


1948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아랍 국가들과 제1차 중동전쟁을 벌였다. 이집트 왕국군도 여기 참전하였으나 많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참패했고, 많은 이집트인은 이 패전의 책임은 왕가에 있다고 보았다.

반나를 비롯한 이집트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이집트 왕가는 아랍 민족의 대의보다는 자신의 사직의 유지에만 급급해보였고, 이는 왕가가 알바니아계 투르크인 출신이라는 것을 이집트인에게 상기시켜 왕정에 대한 반감이 급격히 늘어났다. 왕가가 이스라엘의 아랍 영토 침탈에 무관심한 가운데 그나마 행동력 있는 조직이었던 무슬림 형제단은 이스라엘과 싸울 의용군을 모집했고, 그중 일부는 팔레스타인에 가서 이스라엘군과 싸우기도 했다.

무슬림 형제단이 순식간에 대병력의 의용군을 모집하는 것을 본 파루크왕은 대경질색했고, 그들이 정치세력화하면 왕가가 위태로워 질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다양한 형태로 무슬림 형제단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무슬림 형제단의 한 대학생은 불만을 품고 이스라엘에 대한 온건파였던 누크라시 총리를 암살했다.


3.4. 최후와 이후[편집]


사실 반나는 이런 테러행위를 규탄하고, 테러행위는 이슬람에 설 자리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파루크 왕은 무슬림 형제단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음모를 꾸몄다. 반나와 그 보좌관은 정부 고관과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고관은 나오지 않고 파루크가 보낸 자객이 총격을 가해 그를 살해했다. 향년 43세의 한창 나이였다.

반나에 이어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가 된 쿠틉은 오히려 훨씬 더 급진적, 극단적이었다. 쿠틉은 심지어 테러를 집권의 수단을 삼았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후에도 정교일치 체제의 수립을 위한 전술로 반나와 쿠틉의 두 노선을 왔다갔다 하는데 정권에 따라서 합법과 불법을 오갔다. 2013년에는 반나의 노선으로 무함마드 무르시가 선거에서 집권했지만, 군부 쿠데타로 무르시가 하야하고 불법조직이 되었다.

대체로 아랍권과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광범위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으며, 알카에다ISIL과 같은 순수테러집단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무슬림 형제단은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조직이고 수많은 당원을 보유한 만큼, 조직 전체가 테러단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안와르 사다트 암살이나 콥트 정교회 공격에서 보듯이 그 하부조직은 테러도 서슴지 않는다.


4. 여담[편집]


반나 사후에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해서 근본주의의 시조로 유명해지는 사이드 쿠틉과는 달리 반나는 특별히 테러행위나 폭력을 옹호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이슬람 무신론 성향 논객 이븐 와라크는 반나가 지하드가 개인 내면의 본능과의 싸움이라는 평화적인 해석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극단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나는 개인적으로는 전투적인 지하드 이론을 선호하였더라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다른 회원들이 지하드를 내면의 극기로 해석하는 것과 발맞추어 무슬림 교육 개혁 운동에 헌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나가 나치의 도움을 받은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무슬림 형제단은 냉전 시절에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중동지역에 공산주의 및 나세르가 주도하는 비동맹 확산을 저지하려는 CIA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반나의 사위인 사이드 라마단은 냉전시절 CIA의 지원을 받아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었는데, 문제는 사다트가 친소였던 나세르의 외교방침을 친미로 180도 바꾸면서 무슬림 형제단은 끈떨어진 신세가 되었다. 어쨌든 CIA가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키운 이슬람 근본주의는 냉전 이후 미국을 적대시 하면서 9.11 테러까지 불러왔고,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0년에 걸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지만, 전쟁 목표는 거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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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빠 성향이 있었다. 한때 이슬람권의 영토였던 유럽의 발칸 반도와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이슬람 선교를 통해 다시 이슬람 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령도 만들었다. 다만 이슬람권 국가가 이 영역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다. 상상속의 영역을 옛영토라고 주장하는 환빠보다는 조금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