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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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역사
ההיסטוריה של פלסטין ・ تاريخ فلسطي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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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smonean_kingdom.png

1. 개요
2. 역사
2.1. 하스몬 왕조의 성립
2.2. 요한 히르카노스 1세 치세의 전성기
2.5. 하스몬 왕조의 붕괴와 멸망
2.6. 마지막 부활 시도와 실패



1. 개요[편집]


백칠십년[1]

에 이스라엘은 이민족들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백성은 모든 문서와 계약서에 ‘유다인들의 총독(stratēgou)이며 지도자(hēgoumenou)인 시몬 대사제(archiereōs) 제일년’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2]

-마카베오기 상권 13장 41-42절[3]


온 백성은 시몬에게 이러한 결정에 따라 행동할 권리를 주는 데에 동의하였다. 시몬도 이를 받아들여 대사제(archierateuein)가 되고 유다인들과 사제들의 총독(stratēgos)과 영주(ethnarchēs)가 되어 온 백성의 영도자(prostatēsai)가 되기로 하였다.[4]

-마카베오기 상권 14장 46-47절[5]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79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왕조. 63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복속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독립국가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 시기 하스몬 왕조는 모압, 암몬, 에돔 등 무려 천 년 넘게 자기 나라가 있었던 민족들을 셋이나 복속했다. 그리고 모두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켜, 적어도 한두 세대 만에 그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버렸다.[6]


2. 역사[편집]



2.1. 하스몬 왕조의 성립[편집]


파일:Palestine_under_the_Maccabees_Smith_1915.jpg
기원전 168~135년 팔레스타인 지역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대

마카베오 전쟁에서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마카베오군의 지도자 시몬은 142년에 자신을 유대의 지도자이자 총사령관 겸 대사제장으로 칭하면서 독립 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마카베오는 유대에서 정통으로 여기던 사독 계열 사제 가문 태생이 아니었던 탓에 사독의 자손이 대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일반적 상식을 깨버린 데다가 왕이 대사제까지 겸임하면서 이 또한 유대교의 율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아[7] 하스몬 왕조에 대한 비판 세력이 존재했다.[8] 그러나 시몬은 이런 비판들을 묵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열중했다.

그러던 기원전 135년, 시몬은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예리코를 방문했다. 예리코에는 자신의 사위인 아부보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사령관으로 있었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장인을 대접하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갑자기 칼을 휘둘러 시몬을 살해했고 시몬의 아내와 두 아들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시몬의 남은 아들인 요한 히르카노스는 게셀의 군사령관으로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요한 히르카누스까지 죽이기 위해 가자라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미 소식을 듣고 요한은 피해있다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자들을 잡아 처형했다. 이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까지 물리치고 기원전 134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 가운데 유데아의 통치자 겸 대사제가 되었다.


2.2. 요한 히르카노스 1세 치세의 전성기[편집]


요한 히르카노스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목표는 전 세계를 정복해서 모든 사람을 유대교인으로 만드는 유대교 세계제국이었다.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대제국을 세우고 대제국의 종교를 유대교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에 따라 요한은 정력적으로 정복전쟁에 임했다. 왕위에 오르고 3년 동안 요한은 남쪽 에돔(이두매)를 공략해 과거 유대왕국의 남단 지역인 브엘세바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요한은 이두매인들을 죽이기보다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유대교로 개종하게 했다.[9]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하스몬 왕조는 어디까지나 셀레우코스 왕조가 자치권을 허락한 가문이었을 뿐, 종주권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있던 상황이었다. 안티오코스 7세는 하스몬 왕조에게 준 자치권을 거두고 다시 팔레스타인을 직접통치할 요량으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안티오코스 7세에게 맞설 힘이 없던 요한은 결국 돈의 힘으로 해결을 보기로 하고 다윗 왕의 능을 도굴해서(!) 은 3000달란트를 꺼내 안티오코스 7세에게 바치고 협상을 제안했다. 결국 양측에 합의가 성사되어 요한이 새로 정복한 이두매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유대의 자치권은 인정하기로 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요한은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다시 거침없이 정복전쟁에 나섰다. 유대의 접경지역을 평정한 다음 기원전 128년, 사마리아로 쳐들어가 복속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던 게리짐 산의 신전을 파괴했다. 이어 요르단 강 동편의 사해 북서부 지역과 이두매 남부지역까지 평정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시몬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요한의 치세에 하스몬 왕조는 대대적인 전성기를 누렸으나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갈등으로 왕조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율법주의자들인 하시딤들은 요한에게 대사제장직을 내놓고 율법에 맞는 대사제장을 세워야 함을 주장했다. 그런데 하시딤들이 하필이면 요한이 대사제장이 될 수 없는 근거로 제시한게 요한의 어머니가 안티오코스 4세 때 셀레우코스군에 끌려갔던 전적을 들어 율법상 이방인에게 더럽혀진 여인의 아들은 대사제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어머니를 욕하는 말에 요한은 격분하여 하시딤들을 모조리 내쳤고 하시딤 대신 기용된 자들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사두카이파들이었다. 이로 인해 왕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점차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2.3. 아리스토불로스 1세알렉산드로스 야나이,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치세[편집]


요한 히르카노스가 31년의 통치를 마치고 기원전 104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잔인한 데다가 유대교 전통보다는 헬레니즘을 더 좋아해서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후계자로 지명될 뻔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는가 하면(!) 동생 안티고누스는 모함인 줄 알면서도 죽였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생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로스는 불과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이 없어서 왕위는 그의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가장 먼저 감옥에 있던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를 석방시키고 14살 연하인 그와 결혼한다.[10] 그리고 그를 왕으로 세워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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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9년 하스몬 왕조의 최대 강역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갈릴래아와 요르단강 동편 중부등을 점령해 하스몬 왕조 최대판도를 개척했으며 이때에 이르러 하스몬 왕조의 왕들은 왕으로 칭하고 왕관을 쓰는 등 명실상부한 독립왕조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에게 축출되었던 하시딤들이 바리사이파[11][12]가 되어서 야나이에게도 대사제장을 내놓을 것을 주장했고 결국 초막절 제사때 바리사이파가 주동이 되어 제사를 지내러 대신전으로 올라가는 야나이에게 열매를 던지면서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열이 뻗친 야나이는 자신에게 반발한 바리사이파 6000명을 학살했다. 또한 어떤 때에는 바리사이파들이 개최한 연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800명을 기둥에 못박아 처형했으며 8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이 예루살렘에서 도피하여 유대광야로 나갔는데 이들이 나중에 엣세네파가 된다.

이렇게 율법을 무시하고 독재를 일삼아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은 야나이는 27년간 통치하다가 일사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뒤를 이어 다시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자가 되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야나이와는 달리 율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추방된 바리사이파들과 화해하고 그들을 중용했으며, 이후 사두카이파들이 추방되고 바리사이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2.4. 요한 히르카노스 2세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치세[편집]


9년간 알렉산드라가 통치하는 동안 알렉산드라는 여성이 대사제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남인 요한 히르카노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했고 나라는 그런 대로 잘 굴러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노쇠하면서 두 아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이틈을 놓치지 않고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아버지 야나이 시절 정권에 참여했던 사두카이파를 규합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히르카누스 2세는 바리사이파들을 규합하여 맞섰고 알렉산드라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내와 자식들을 붙잡아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었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행동하기가 어렵던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형인 히르카누스 2세와 협상을 벌였고 결국 힐카누스 2세는 대사제장직을 유지하고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유대의 왕이 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2.5. 하스몬 왕조의 붕괴와 멸망[편집]


그러나 이런 권력분점의 상황은 한 이두매인 때문에 파토가 나고 마는데 그는 다름아닌 안티파트로스였다. 이유인즉, 안티파트로스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가 왕이 되어버렸으니 안티파트로스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해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히르카누스 2세에게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3세에게 도움을 청해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부추겼고 아레타스 3세도 호응하여 나바테아군 5만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한편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부장인 스카우루스에게도 은 300달란트를 주고 도움을 청해 그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온 상황이었다. 아레타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병력을 철수해 돌아가버렸다.

이 일로 로마의 힘을 실감한 두 형제는 앞다투어 폼페이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쟁투를 벌였고 로마에게 아부하면서 두 형제의 정통성은 갈수록 추락해갔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두 형제를 중재하겠다면서 친절하게 팔레스타인 정복에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의 각 도시들을 점령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지만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황에서도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분쟁을 멈출 줄 몰랐다. 결국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1만 2천 명을 학살했다.

폼페이우스가 취한 조치는 사실상 하스몬 왕조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는 하스몬 왕조가 정복한 이두매, 사마리아,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등을 모두 독립시키고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유대와 예루살렘은 시리아 총독 휘하의 행정장관이 통치하게 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그의 가족들은 포로로 로마에 끌려갔으며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2.6. 마지막 부활 시도와 실패[편집]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 편에서 권력을 확대해나가다가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가 집권하게 되자 재빨리 카이사르 편에 섰고 카이사르에게 막대한 뇌물을 갖다바치고 이집트에서 곤경에 처한 카이사르에게 병력을 보내 그를 도움으로써 카이사르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에 이른다. 히르카누스 2세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설득해 카이사르에게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통치자로 삼아줄 것을 호소해 결국 안티파트로스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기에 이른다.

한편 로마에 끌려간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유대 통치자의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카이사르에게 나섰지만 이미 안티파트로스에게 구워삶아진 카이사르는 외면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두 아들중 장남 파사엘은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차남 헤로데갈릴래아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로마의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안티파트로스도 독살당하고 팔레스타인의 권좌를 놓고 파사엘과 헤로데가 분쟁을 벌였다. 헤로데는 신속하게 로마의 돌아가는 판국을 주시해 안토니우스에게 재빨리 붙어서 권력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스몬 왕조의 복권을 노렸다. 마침 반카이사르 파의 책동으로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일어나자 그는 사두카이파들을 규합하고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로 왕위에 올랐다. 히르카누스 2세는 다시는 대제사장-왕 직에 오르지 못하게 귀가 잘린 후 파르티아로 끌려갔고, 파사엘은 파르티아군에게 붙잡혀 죽었으나 헤로데는 겨우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는 자신을 왕으로 새긴 동전을 발행하는 등 왕권을 행사했으나 곧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헤로데를 구해줌으로써 안티고누스의 하스몬 왕조 부활 시도는 끝장나고 만다. 결국 기원전 37년, 안티고누스는 붙잡혀 처형되고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3. 역대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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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셀레우코스 왕조의 연도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 계산법은 BC 312년(혹은 BC 311년) 왕조 창시자 셀레우코스 1세가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가자에서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한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이 구절이 말하는 시몬의 즉위는 BC 142년 5월에 있었다.[2] ῎Ετους ἑβδομηκοστοῦ καὶ ἑκατοστοῦ ἤρθη ὁ ζυγὸς τῶν ἐθνῶν ἀπὸ τοῦ Ισραηλ, καὶ ἤρξατο ὁ λαὸς γράφειν ἐν ταῖς συγγραφαῖς καὶ συναλλάγμασιν ῎Ετους πρώτου ἐπὶ Σιμωνος ἀρχιερέως μεγάλου καὶ στρατηγοῦ καὶ ἡγουμένου Ιουδαίων.[3] 희랍어 원문: Septuaginta, edited by Alfred Rahlfs, Second Revised Edition, edited by Robert Hanhart, © 2006 Deutsche Bibelgesellschaft, Stuttgart. / 한국어 번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2005)[4] καὶ εὐδόκησεν πᾶς ὁ λαὸς θέσθαι Σιμωνι ποιῆσαι κατὰ τοὺς λόγους τούτους. καὶ ἐπεδέξατο Σιμων καὶ εὐδόκησεν ἀρχιερατεύειν καὶ εἶναι στρατηγὸς καὶ ἐθνάρχης τῶν Ιουδαίων καὶ ἱερέων καὶ τοῦ προστατῆσαι πάντων[5] 원문 및 번역 출처: 위와 동일[6] 신약 시대 사복음서에 이들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건 이들 모두가 유대민족에 흡수당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한국사로 치면 고려 왕조가 한 역할을 한 셈인데, 그 고려마저도 무려 삼백 여 년이나 걸린 대과업을 겨우 백 년도 안 되는 시기에 해치운 하스몬 왕조와 유대교의 동화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전에 모압 암몬 에돔도 유대와 함께 사이좋게, 역대 강대국 밑에 있는 피지배 민족으로서 같은 체제에서 사백 년 넘게 공존하긴 했지만.[7] 구약성서를 보면 왕과 사제는 엄격하게 임무를 구분했으며 왕이 사제가 할 일을 침해하려 하면 야훼의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례를 사무엘이 오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지내버린 사울 왕이나 대사제가 1년에 한 번밖에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를 향로를 들고 들어가려다가 야훼의 저주로 한센병자가 되어버린 우찌야 왕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8] 특히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은 나중에 에세네파의 기원이 되었다. 에세네파는 진정한 사독 계열 대사제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은 악의 소굴이라고 생각했고 사독 계열 대사제가 나오기는커녕 나중에 가면 대사제를 로마가 맘대로 임명하는 상황이 되자 아예 에세네파 신도들이 곧 거룩한 성전이요 대사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9] 이렇게 개종한 이두매인들 중에 나중에 나온 인물이 바로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아들인 헤롯 대왕이다.[10] 유태인들은 형사취수 풍습이 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약 100년 후인 신약 성경 시대에서 사두개인과 예수가 형사취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11] 예수와 관련된 일화만 보면 사두카이와 바리사이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 수 없는데, 그들이 당시 취했던 피상적인 몇가지 주장만으로 단순히 구분하자면 바리사이쪽은 유대민족의 정체성과 원리원칙에 보다 충실한 근본주의자, 사두카이는 헬레니즘 문화와 셀레우코스 세력에 비교적 우호적인 현실주의자 내지는 수정주의자에 해당했다.[12] 다만 신약성경을 보면 바리사이파는 영혼과 천사 및 부활을 믿는데, 사두카이파는 그런 것들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바리사이파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줄곧 비판하는 한편, 사두카이파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면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온다. 물론 누가복음 20장 27절 이후 내용처럼 직접 논박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사두카이파의 기반은 아예 비판할 가치가 있는 신학적 이론이 빈약한 세속주의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점을 감안할 수 있다. 예수와 바리사이 운동 가운데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얽힐 일도 많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성서를 보면 예수와 바리사이의 관계는 서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바리사이가 헤로데 안티파스에게서 예수를 피신시키는 등 단순히 원수지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또한 온건 바리사이파는 이후 상당수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