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신토 킨코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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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토 킨코세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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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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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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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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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17대, 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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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드리드
27대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주장
케사다
(?~1936)

하신토 킨코세스
(1936~1942)

사우토
(1942~1944)



스페인의 前 축구인


이름
하신토 킨코세스
Jacinto Quincoces
본명
하신토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킨코세스 이 로페스 데 알비나
Jacinto Francisco Fernández de Quincoces y López de Arbina
출생
1905년 7월 17일 /
스페인 바스크지방 바라칼도[1]
사망
1997년 5월 10일 (향년 91세) /
스페인 마드리드지방 마드리드주
국적
[[스페인|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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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81cm / 78kg
직업
축구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선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1923~1931)
레알 마드리드 CF (1931~1942)
감독
레알 사라고사 (1942~1943)
스페인 대표팀 (1945)
레알 마드리드 CF (1945~1946)
레알 마드리드 CF (1947~1948)
발렌시아 CF (1948~195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54~1955)
레알 사라고사 (1956~1958)
발렌시아 CF (1958~1959)
발렌시아 CF (1960 / 임시 감독)
국가대표
25경기 (스페인 / 1928~1936)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시절
2.2. 감독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4.3. 감독



1. 개요[편집]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라 로하 최초의 세계적인 수비수였다.


2. 생애[편집]



2.1. 선수 시절[편집]



2.1.1. 클럽[편집]


파일:external/2.bp.blogspot.com/Real+Madrid+Jacinto+Quincoces.jpg

하신토 킨코세스는 바스크의 바라칼도 출신이다. 그의 성인 무대 데뷔는 18살에 데포르티보 알라베스[2]에서 이루어졌다.[3]

알라베스에서 활약하던 킨코세스는 팀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바로 1929-30 시즌에 세군다 디비시온 1위로 알라베스를 라리가에 진출시킨 것. 그 활약으로 킨코세스는 1년 후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킨코세스 외에도 스페인 최고의 골키퍼 리카르도 사모라까지 RCD 에스파뇰도 있었기 때문에 단숨에 전력이 급강화되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3시즌에서 계속 2위를 하며 콩의 기운을 한껏 내뿜었다. 승점차도 꼭 1,2점차였다

이후 1936년, 킨코세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새로운 주장이 되었지만 스페인 내전이 터지는 바람에 라리가가 중단되었고, 내전으로 인해 선수를 대거 잃은 레알 마드리드는 50년대까지 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4]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레알 마드리드의 스쿼드에는 내전 이전과 비교하면 킨코세스를 포함해서 단 4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킨코세스는 3년간 분전했지만 30대 중반의 노장 수비수 혼자서 팀을 추스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킨코세스는 1942년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2.1.2. 국가대표팀[편집]


킨코세스의 국가대표팀 데뷔 무대는 암스테르담 올림픽이었다. 스페인은 당시 아마추어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 명단을 짰고 6위로 올림픽을 마쳤다.

골키퍼와 중앙수비수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흡을 맞춰가던 킨코세스와 사모라는 스페인 대표로 1934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지역예선에서는 포르투갈을 만나 2차전 합계 11:1로 떡실신시키고 이탈리아에 갔다. 세계 각지의 강호들 사이에서도 스페인의 전력은 돋보였다. 사모라와 킨코세스가 버티는 수비진도 그랬고, 이시드로 랑가라 등이 활약하던 공격진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비영연방 팀들 중에선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세계 최초로 깨뜨린 팀이기도 했다.

그들은 월드컵 첫 경기에서 브라질을 만났고, 브라질을 3:1로 가볍게 제압했다. 하지만, 다음 상대는 개최국 이탈리아였다. 1차전에서 스페인은 리카르도 사모라의 신들린 선방으로 비기는데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사모라는 부상으로 재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고 주장 완장도 킨코세스가 넘겨받은 채 이탈리아의 파상공세에 대비하였다. 결국, 킨코세스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메아차에게 얻어맞은 단 한 골로 인해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 경기의 승리와 대회 우승은 이탈리아에게 돌아갔지만, 이 경기 등에서 보여준 심판의 우유부단함과 이탈리아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는 많은 뒷이야기를 낳았고 이탈리아에게 패했지만 명승부를 보여준 세 팀의 명성은 더욱 올라갔다.


2.2. 감독[편집]


파일:45445979.jpg
선수에서 은퇴한 킨코세스는 바로 레알 사라고사의 감독이 되었다. 그 후에 킨코세스는 많은 팀에서 감독직을 맡았는데 발렌시아 CF에서 가장 오래 재직했고 코파 델 레이에서 3차례 우승했다.


2.3. 이후[편집]


킨코세스는 감독 자리에서 은퇴 후에 발렌시아와 바스크 선수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인 Valencian Pilota Federation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킨코세스는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Campeones, El camino del amor-사랑의 길, Tierra sedienta-목마른 길, Once pares de botas-11켤레의 신발 등 총 4편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다. Saeta rubia와 Ciento catorce goles-114개의 골에는 자기자신의 역할로 출연하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위치선정과 반사신경이 좋아서 길목차단과 커팅에 능한 수비수로 알려져 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4.2. 개인[편집]




4.3. 감독[편집]



[1] Barakaldo. 바스크 비스카이 지방의 도시로 쿠바의 도시 Baracaldo와는 다르다.[2] 현재도 라리가라리가 2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팀이다. 2005~06시즌에 잠시 라리가에 올라왔지만 한 시즌 만에 다시 강등당했다.[3] 일부 문서에서는 킨코세스의 알라베스 데뷔를 1920년으로 잡고 있으나 그렇게 가정하면 킨코세스의 나이가 15살이라는 문제와 함께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의 설립년도인 1921년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킨코세스의 데뷔는 192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4] 우승만 못하고 롤러코스터 순위를 탔으니 레알 마드리드 입장에서는 암흑기다. 그리고 킨코세스가 은퇴한 바로 다음 시즌인 1942-43시즌에는 14개 팀 중 10위라는 치욕을 맛보기도 한다. 여담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라 리가 최악의 성적은 1947-48 시즌의 11위였다. 당시에는 라 리가 전체 팀이 14개였고 13위와 14위가 강등을 당했으니 꼴찌 바로 위 수준이었다. 게다가 실제 강등을 당했던 13위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승점차는 불과 2점이었다. 즉, 아직 레알 마드리드는 세군다 디비전에 내려가본 적이 없다는 소리. 그리고 이 시즌은 킨코세스의 흑역사였다. 이 때 감독이 바로 킨코세스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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