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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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대 통합막료회의 의장
林 敬三
하야시 게이조 | Keizō Hayashi


출생
1907년 1월 8일
이시카와현
사망
1991년 11월 12일
학력
도쿄대학 (법학 / 학사)
경력
돗토리현지사
내무성 지방국장
내사국 장관
궁내성 차장
궁내청 차장
일본주택공단 총재
일본적십자사 사장
수훈
훈1등 서보장
훈1등 욱일대수장
정3위
가족
아버지 하야시 야사키치, 어머니 하야시 데루코
군사 경력
복무
경찰예비대
1950년 ~ 1964년
최종 계급
경찰감 (경찰예비대)
최종 보직
통합막료회의 의장
주요 보직
경찰예비대 중앙본부장
경찰예비대 총감
보안청 제1막료장

1. 개요
2. 생애
3. 사생활
4. 경력
5. 여담
6. 자료 출처



1. 개요[편집]


일본의 육상자위관. 초대 경찰예비대 중앙본부장·총감, 보안대 제1막료장과 초대 통합막료회의의장을 지냈다. 일본군 경력이 없으며 내무부 출신으로 경찰예비대 시절부터 요직을 차지해 구 일본군 출신들과 대립했던 내무군벌의 수장이었다.[1]

내무군벌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이 아닌, 문민 관료에 의해 자위대가 통제되는 구조를 만들어 문민통제의 의미를 변질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주로 자위대의 위상 강화에 주목하는 쪽에서 나오는 의견으로, 일본의 관료제가 오랫동안 일본의 우경화를 제어하던 편임을 감안하면, 정치적 의도가 꽤 엿보이는 발언이기도 하다.[2] 아베 신조 내각에 들어서는 방위성 내부 부국의 문관들의 힘을 빼고, 제복조인 통합막료장 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실질적으로 문민통제를 하려면, 정권교체에 따라 계속 바뀔 수 있는 정치인 외에 제복군인 보다 상위에 있는 관료의 양성과 존재가 필수적이다.[3] 한국에서도 그게 양성이 안 되어서, 결국 군 조직을 장악할 수 있는 4성 장성 출신의 국방장관이 계속 올라오는데, 일본에선 그런 관료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는데 이제 그걸 축소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2. 생애[편집]


1907년 1월 8일, 이시카와현에서 일본 육군 중장 하야시 야사키치(林弥三吉)[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이시카와였지만 호적은 도쿄도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데루코였고 결혼 전 성은 이시카와였다.[5] 게이조의 누나 사쿠라코(1903년생)는 교토부지사를 지낸 안도 교시로(安藤狂四郎, 1893-1982)와 결혼하였다.[6] 그 외에 게이조에겐 여동생 시게코(1910년생)와 미사코(1918년생)가 있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8년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1932년에는 교토부, 1935년에는 가나가와현에서 근무하였다. 1941년부터는 내각에서 기획 관료로 근무하였다. 내각법제국과 내무부대신 비서관 등을 지내다가 일본의 패전을 맞았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 돗토리현지사로 임명되었다. 당시까지 돗토리현지사 중 역대 최연소였다. 그러나 내무성에서 일이 생겨 중도에 이임하였다. 이후 관료로 계속 근무하던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주일미군 사단들이 참전을 위해 이동하면서 홋카이도 등지에 안보 공백이 생기자 GHQ는 일본인으로 경찰예비대를 조직해 이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경찰예비대의 수장을 내무성의 경찰 관료 출신들로 배치하는 데 찬성하였다.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경찰예비대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GHQ의 정보국장인 찰스 윌러비[7] 소장은 이에 반대하였고, 일본군 육군참모본부에서 작전 장교로 근무했던 핫토리 다쿠시로[8]를 추천했다. 그러나 요시다가 핫토리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무산하였다. 정작 요시다의 군사 보좌관이었던 다쓰미 에이이치는 그에 대해 고려해 볼 만한 옵션이라고 보고를 올렸다.

요시다는 1950년 9월초에 하야시를 경찰예비대의 수장으로 추천하였다. 당시 천황인 히로히토가 이를 지지하였다. 히로히토는 하야시를 신뢰했고, 특히 내무성 시절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경찰예비대의 모병을 맡게 된 윌러비 소장은 하야시 임명에 반대했다. 이들은 전쟁 전의 장교들을 선호했고[9], 하야시를 밀어내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윌러비는 GHQ 내의 지지자가 별로 없었고, 정부 기능 분야를 맡은 코트니 휘트니[10] 소장과 경찰예비대의 교육훈련 책임을 맡은 위트필드 셰퍼드[11] 소장이 하야시를 지지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윌러비가 계속 임명을 방해하는 바람에 실제 임명은 한 달이나 늦춰졌고, 맥아더와 요시다가 개입한 뒤에야 해결되었다.

1950년 10월 9일에 하야시는 경찰예비대의 수장으로 지명되었다. 10월 23일에 정식으로 총대총감 지위에 올랐다. 총대본부가 구성되고, 160명의 경찰 출신 장교가 임명되었다. 전직 일본군 장교나 우파 인사들은 하야시 등 내무성 출신들을 가리켜 "내무군벌"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전직 일본군 장성들을 가리키는 쇼와 군벌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야시는 일본제국 시절의 군대의 정신교육이 문제가 있었다고 여겼고 경찰예비대에서 이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 "평화헌법"의 기치 아래, 새로운 군사집단은 더 이상 천황에게 충성하지 않게 되면서 그 충성의 대상을 새롭게 정립하려고 하였다. 1951년 3월에 하야시는 "본관이 심고자 하는 경찰예비대의 근본 정신은 애국심과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이다."[12]고 연설하였다.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조직이 신일본에서 적절한 역할을 한다면 그게 국민의 조직일 것이다. 이 조직이 세워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13]고도 말하였다. 하야시 게이조는 경찰예비대의 체질을 천황에 대한 충성에서 일반 국가의 군대에 가깝게 바꾸려고 하였다.[14]

1952년에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면서, 요시다 총리는 방위청을 설치하고 각각 흩어져 있던 육상병력(경찰예비대)과 해상병력(해상경비대)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이는 과거 제국 육군과 해군의 갈등을 고려하고, 양 군의 합동성 강화를 도모하고자 함이었는데 구 일본군 출신이 대거 있던 경비대에서는 이에 반발이 있었다. 육사와 해사를 따로 설치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결국 방위대학교[15]로 합쳐졌다. 사실 일본군과의 연계도 연계지만, 경찰예비대의 규모가 더 컸으므로 경찰예비대 중심으로 조직이 운영될까에 대한 그냥 사내 정치의 속성도 있었다. 경찰예비대의 마스무라 게이키치와 하야시 게이조가 주도하여 1952년 8월 1일에 통합이 이뤄졌다. 경찰예비대가 보안대로 개칭되자 제1막료장이 되었다.

1954년 7월 1일, 보안대는 오늘날의 이름인 자위대로 바뀌었다. 경찰예비대는 육상자위대로, 해상경비대는 해상자위대로 바뀌었다. 여기에 항공자위대도 출범하였다. 세 구성군을 조율할 1954년 통합막료회의가 생기자 초대 통막의장이 되어 1964년까지 10년 동안 재직했다. 육막장 후임은 쓰쓰이 다케오였다. 통막의장으로 재직하던 중에 주로 삼군의 조율과 해외 군사 교류에 주로 집중하였다. 통막의장은 한국의 합참의장이 90년대 초까지 명예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에 통합막료장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그 권한이 크지 않았다. 2000년대까지 통합막료회의는 자문기관이었고 합동작전에 제한적인 권한만을 가졌다. 1961년에서야 합동작전이 진행 중일 때는 통합막료회의에 지휘권이 있는 정도로 바뀌었다.

1954년에 미 군사고문단의 제럴드 히긴스 소장을 만나 자위대가 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인력을 미국에 가서 교육받도록 하였다. 또한 미 국방장관이었던 찰스 어윈 윌슨의 초청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자위대에 구축함이나 제트기를 도입할 수 있게 논의하였다. 1956년에는 미군과 자위대가 처음으로 전역(theater)급의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자유 진영의 동맹국 군사 외교에 집중하였다. 1937년에 일본군 혼마 마사하루 중장의 영국 방문 이후[16], 20년 만에 처음으로 1957년 5월에 일본의 최고위급 군사 인사인 하야시 게이조가 영국을 방문하였다. 이후에는 전후 군인 수장으론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였고 당시 서독 국방장관인 프란츠 요제프 스트라우스와 연방군 참모총장인 아돌프 휴징거 중장을 만났다. 1959년 11월에는 미 태평양 사령부에서 주최한 다국적 군사회담에 참여하여 중화민국군의 펑멍치 상장이나 필리핀군 마누엘 카발 중장과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에 소속된 군 수장 등을 만났다.

이후 10년의 임기 끝에 1964년에 퇴임하였다. 통막의장 후임은 스기에 이치조였다.

이후에는 일본주택공단 총재, 지치의대 이사, 일본 적십자사 이사 등을 지냈다. 1981년에는 스즈키 젠코 총리에 의해 행정부 개혁을 위한 위원회에 속하기도 하였다. 또한 1984년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위원회에 위원장으로[17][18] 참여했다.

199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사생활[편집]


아내 시즈에는 1912년생이다. 장인 후타가미 효지(1878-1945)는 일본 추밀원에서 간사장으로 근무했다. 시즈에와의 사이에 아들 마사하루(1935년생)와 딸 미네코(1942년생)를 두었다. 마사하루는 도쿄대학 경제학과 졸업 후 스미모토금속공업주식회사에서 일했다.

하야시의 취미는 여행과 독서였으며, 여러 저술을 남겼다.

- 心のしおり(1960)
- 国際的に見た日本の防衛問題(1962)
- 地方自治の回顧と展望. 議会職員執務資料シリーズ(1976)


4. 경력[편집]


- 1929년(22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내무성 입성, 도야마현 배속
- 1945년 10월(38세): 돗토리현지사(관선)
- 1947년 2월(40세): 내무성 지방국장
- 1948년 1월 1일(40세): 내사국장관(3월에 조직 폐지)
- 1948년 8월 2일(41세): 궁내부 차장
- 1949년 6월 1일(42세): 궁내청 차장
- 1950년 10월 29일(43세): 경찰감에 임명, 경찰예비대 중앙본부장
- 1950년 12월 29일(43세): 경찰예비대 총대총감
- 1952년 8월 1일(45세): 보안청 제1막료장(현재의 육상막료장)
- 1954년 7월 1일(47세): 초대 통합막료회의의장
- 1964년 8월 14일(57세): 퇴직
- 1965년 8월 1일(58세): 일본주택공단 총재
- 1971년 3월 31일(64세): 퇴임
- 1977년 4월 1일(70세): 일본적십자사 이사
- 1977년 4월 29일(70세): 훈1등 서보장
- 1978년 4월 1일(71세): 일본적십자사 사장
- 1983년 7월(76세): 일본선행회 회장
- 1987년 3월 31일(80세): 일본적십자사 사장 퇴임
- 1987년 11월 3일(80세): 훈1등 욱일대수장
- 1991년 11월 12일(84세): 서거, 정3위[19]에 서훈


5. 여담[편집]


자위대의 초기 창설에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래서 하야시 게이조도 천황을 중심으로 했던 일본군과는 달리 자위대의 구심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50년 10월에 남긴 훈시에서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첫째로 새로운 일본에 새로 출생한 경찰 예비대는 그 근본 이념을 무엇에 두는가? 나는 이것을 애국심, 애민족심으로 하고 싶다. 알기 쉽게 말하면,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처자 이 사람들이 평화롭게 생활하고 성장해 나갈 것을, 동포로서 바라는 동포애의 정신을 요구하고 싶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제적으로 또 국내적으로 파란만장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의 평화와 질서의 유지 없이는 결코 그 위에 정치/경제/문화의 발전도 보이지 않고, 국가의 재건도 희망할 수 없다. 국민의 평화로운 삶, 올바른 질서의 유지야말로 국가 재건의 가장 중요한 기초라 해야 할 것이다. 출처


1983년 일본 적십자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방한하여, 김상협 국무총리[20]를 만났다. 영상역사관 자료

특이한 것이 자위대의 장성임에도 위키백과 영어판이 일본어판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6. 자료 출처[편집]


1. 위키백과 일본어판 林敬三
2. 위키백과 일본어판 林弥三吉
3. 위키백과 일본어판 正三位
4. 위키백과 영어판 Keizō_Haya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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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 건군기광복군만주군, 일본군의 3대 파벌이 있었고 가장 세가 강한 건 만주군 출신이었다. 광복군 출신들이 대체로 영관급 이상의 40대 이상의 아저씨들이었고 다소 전술/전략 면에서 엉망이었던 중국에서 활동을 한 것에 비해 미군한테 발리긴 했지만 동아시아에서 가장 정예였던 일본군과 그 방계인 만주군 위관급 출신들이 한국전쟁 당시에 좋은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특히 만주군은 일본군에 비해 장교 등으로 조선인을 받아들이는데 관대했다.[2] 보수본류와 전통적인 관료층은 미일동맹을 기반으로 한 경제대국의 틀을 닦아 놓았다. 방위비를 GDP의 1% 이하로 제한하는 대신 국가의 역량을 경제에 집중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주춤하자 관료제를 일본이 겪는 문제의 원인으로 제기하면서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보수방류가 자민당의 주류로 자리잡는 데 기여하였다. 그래서 오부치 게이조가 재임 중 급사하여 급히 자리를 이은 모리 요시로가 보수방류였던 이래 오랫동안 자민당은 강경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가 아베 신조가 지병을 핑계(실제로는 지지율 급락과 각종 스캔들 때문)로 도망가고 스가 요시히데가 총재 연임을 포기하고 나서야 다시 보수본류 출신의 기시다 후미오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3] 미국도 근래에는 제임스 매티스로이드 오스틴 같은 4성급 장성들이 장관이 되면서 빛이 바래긴 했지만, under secretary 같은 제복군인보다 우위에 있는 민간 관료 계층이 존재한다.[4] 1876-1948.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1897년에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03년 육군대학을 나왔다.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군단급 부대 압록강군에서 근무했다. 1922년 소장 진급, 1927년 중장으로 진급했고 1932년에 전역했다.[5] 출처: 現代名士家系譜刊行会 1969, p. 48.[6] 안도 교시로의 재임기간은 1941년부터 43년으로 관선 시대였다. 교토 역대 부지사 소개 페이지. 이름이 狂四郎 미친 넷째 아들[7] Charles A. Willoughby. 1892-1972.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나 1914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장교 예비역의 형태로 1916년에 미군에 입대하였다. 맥아더는 윌러비를 "나의 애완 파시스트"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키백과 영어판 페이지[8] 服部卓四郎. 1901-1960. 핫토리는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1922년에 일본군에 입대하여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고 도조 히데키의 부관을 지냈다. 일본군에서 최종 계급은 대령이었다. CIA에 따르면 1952년에 일본 내에서 요시다 총리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관련되었다는 설도 있다. 요시다의 인사에 앙심을 품은 모양 위키백과 영어판 페이지[9] 실제로 한국에서 미군정은 군 경력자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장성급이 없고 거의 초급 장교 출신들이긴 했지만.[10] Courtney Whitney. 1897-1969.[11] Whitfield P. Shepard.[12] 영어판에 따르면 "The fundamental spirit of the NPR I firmly hold is patriotism and love of our race".[13] 영어판에 따르면 "Needless to say, if this organization is to play its rightful role in the new Japan, it must be ‘an organization of the people.’ This must be the fundamental principle upon which this defense force should be established"[14] 이는 구 일본군 출신들의 반감을 샀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1980년대부터 자위대가 재해 구조 활동과 적극적인 대민 홍보로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을 한 것을 감안하면 하야시의 구상이 거의 이어진 셈이다. 자위대 병력이 해외 파병을 할 때 천황이 환송 행사에 참여해 덕담을 하는 등 완전히 천황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보통 일반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군주가 맡는 역할 정도이며 천황은 군사 계급을 이제 받지도 않는다. 또한 자위대의 통수권자는 일본 총리이다.[15] 설립 당시에는 보안대학교였다.[16] 군사 외교도 아니었고, 조지 6세의 대관식 참석을 위한 것이었다. 1930년대 말이면 영국과 일본이 점차 군사 충돌을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17] 일본 관저에 해당 보고서가 있다. 총리관저 보고서 PDF 파일. 궁금한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이 보고서는 당장 참여 위원들의 의견이 갈려서 총리 관저에 어떻게 행동하라고 안건을 내지 못 하고 여러 의견을 수록했다. 대략 요약하자면, "①전몰자를 추도할 수 있는 시설이 있는 것은 당연하며, ②신토에 국가 지원을 금지하는 GHQ의 지령(이로 인해 야스쿠니 신사는 국가 소속에서 벗어나 민간 종교 시설이 되었다)은 일본의 주권 회복과 함께 소멸되었고, ③민간 종교 시설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정교분리를 위반할 정도로 보이지는 않으며, ④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가 국가를 위해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공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당연, ⑤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가 야스쿠니를 개인 자격으로 참배한다고 말해도 그 공적 위치를 고려하면 공적 참배다, ⑥야스쿠니를 공식적인 국가 기관에 속해 관리할 것이냐? 유족들이 그렇게 요구하는 곳도 있지만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어서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으니 결론 못 내겠고 만약 이 종교 시설을 국가에서 관리해서 공적으로 의무 참석해야 하면 총리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는 거 아니냐, 국가신토의 부활은 헌법에서 막으므로 그건 절대 안 된다 등등 여러 소리, ⑦대체 추도시설을 만드는 안건도 논의되었으나 이 모임에서 그걸 추진하라고 말할 권한까지는 없는 것 같으니 그냥 참고 의견으로 넣어만 두겠다. 결론: 이런 사항들을 배려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 정도이다.[18] 보고서에선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 1975년부터 일본 정부의 공식 추도 행사는 여기서 진행하였다고 나온다. 이 행사는 공식 행사로 총리와 대신들이 공무로 참석한다. 1964년에 한 번 야스쿠니에서 진행했는데 그때 문제가 있었는지 그 이후로는 하지 않았다.[19] 일본의 율령제 시절의 위계로, 한국으로 치면 정3품에 해당한다. 한국에선 이제 이걸 사용하지 않지만, 왕조가 남아 있는 일본에선 여전히 훈장의 개념의 하나로 사용한다. 정3위급은 국무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학계의 인물에게 주로 서훈한다.[20] 김 총리도 퇴임 후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