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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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한국은행 총재
하영기
河永基 | Ha Young-gi


출생
1925년 11월 19일
경상남도 마산부
사망
2022년 4월 15일 (향년 96세)
서울특별시
학력
마산중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 수료)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경력
한국은행 이사
한국은행 부총재
제일은행 행장
산업은행 총재
제일생명 사장
1. 개요
2. 상세
3. 가족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금융인. 최초의 공채 출신 한국은행 총재.


2. 상세[편집]


1925년 경상남도 마산부 출생. 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문과) 제20회로 입학했다.1945년[1] 예과 수료 후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했으나 해방과 연이은 국대안 파동으로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상과대학 경제학과가 아닌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으로 소속을 옮겨 1948년[2] 졸업(문리대 제2회)하였다[3] 출처

대학 졸업과 함께 조선은행(現 한국은행) 공채 1기 수석으로 입행하였다. 이후 잠시 재무부 장관 비서관으로 파견간 것을 제외하면 한은 조사부에서 주로 커리어를 쌓았다. 1970년 한국은행 이사, 1974년 한국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그는, 1979년 제일은행장으로 발탁되어 잠시 상업금융 분야에 발을 들이기도 하였으나, 1980년 산업은행 총재로 부임하여 다시 정책금융 분야로 복귀하였다. 이윽고 1982년에는 한국은행 총재에 선임되어 공채 출신, 해방 이후의 국내 대학 출신으로는 최초라는 기록을 세웠다.

총재 재임 시에는 사진에서 보이듯 거구와 성격상 보스 기질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총재 재임 시절에는 고질적인 현안이었던 한국은행과 은행감독원 간 분리 문제를 두고 재무부와 갈등을 빚었으며, 잇따른 금융 관련 사고도 발생하였다. 이윽고 1983년 사의를 표명하였고, 정치학과 후배이지만 재무부 경제관료 출신인 최창락 산업은행 총재에게 한은 총재직을 인계하였다.

퇴임 후에는 제일생명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국군정보사령부 부지 매입 사기 사건에 명의가 도용되어 구설수를 사기도 했다.링크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개입을 부른 외환위기 당시 국회가 금융감독기구 통합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려 하자 다른 전직 한은 총재들과 기자회견을 열고 “한은의 독립성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반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22년 4월 15일, 향년 96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3. 가족[편집]


부인이 출납과 행원 출신으로 사내결혼을 했다. 참고로 조선은행 출신인 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 역시 사내결혼이다. 해체된 조양상선의 박남규 회장과는 사돈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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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 수업연한 단축에 관한 임시조치에 따라 1941년(예과18회), 1942년(예과19회) 입학생은 각 6개월씩 단축된 2년 6개월, 1943년 입학한 예과20회는 2년제로 1년이 단축되었다.[2] 오늘날 6-3-3-4의 미국식 학제와 달리 일제시대에는 6-5-3-3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에도 국립서울대학교에는 경성제대 예과를 비롯해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구제전문학교 등을 마친 사람들을 위하여 3년제 구제 학부 과정을 한동안 존속시켰다. 예과 수료생인 하영기는 이 3년제 구제 학부 과정으로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것이다.[3] 동기로 채문식 전 국회의장, 박준규 전 국회의장 등이 있다.